* 본 글은 '와수 어린이' 신문 제15호(2005.10.31)에 실린 김영복 님의 원고 내용이며 동의를 얻어 게제합니다.
나의 이력서
19회 김영복
나는 61년도에 철원군 서면 와수리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의 번지는 잊혀졌지만 허름한 나무를 얹어놓은 판을 넘어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기역자 집이란 걸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극장 앞에는 헌병 초소가 있고 작은 도랑(실개천)이 있어 작은 다리로 뜀박질하여 간신히 뛰어넘기를 하였으며 때로는 한 키가 넘는 고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헌병초소가 아닌 파출소로 바뀌어 있고, 그 옛날 문화 극장자리엔 상가 건물이 작게 들어서 있다.
내 위로는 형이 둘 있고 누이가 한 분 있다. 큰형이 김영주이고 작은 형이 김영선(오래 전에 사망)이며 누이 김옥성은 나보다 4년 위이다. 별로 부유하지 못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막내여서 그나마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 왔다. 얼마 후 와수6리 출장소 뒤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곳은 새마을 사업으로 새로 지은 집에 마당이 넓어서 좋았다. 집안 형편이 좋아져 소를 기르는 외양간도 생겼다. 중학교가 옆이라 선생님들이 그 동네엔 많이 살고 계셨고, 이웃 간에 정도 많아 좋았다.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 이어서 밤에는 호야불이나 초롱불을 밝혀야 했다. 얼마 후 한 집 두 집 전기란 희한한 도깨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밤마다 등화관제? 하며 전기를 아껴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밤이면 저만큼 오성 산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대남 방송 대북 방송에 귀가 아플 정도로 서로 싸우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는 새마을 사업이 한창 불붙어 있던 때라 어머니와 아버지는 개울가에서 자갈채취를 하셨다. 어렵고 힘들게 자갈을 채취하면 수거해 가면서 주는 배급(밀가루)으로 우리들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 때면 고구마 이삭. 감자 이삭줍기에 큰 마대 자루를 하나 가득 채우고 낑낑거리며 우리는 돌아 왔다. 영주 형은 동네 동일이 형이랑 단짝으로 벽돌을 찍었고, 영선이 형은 삼거리에 있는 실비옥에서 일을 했다.(목욕탕입구)
얼마 후 누이는 서울로 취직한다고 떠나면서 우리 식구는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팔리었고 동네 마을회관인가? 하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바로 옆에는 논에 물을 퍼 올리는 웅덩이가 있었으며 앞에는 옥수수 밭이 있었다. 바로 옆에는 출장소와 교회가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집의 몰락으로 국민 학교를 어렵게 나오고, 엄마의 간곡한? 요청으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난 중학교에 입학한 날로 밴드부를 지원했고 3년 내내 밴드부 생활을 했다. 공납금 때문에 담임인 장00 선생님에게 모진 매를 맞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금도 그 선생님 이름은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3년 내내 담임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 선생님 또한 나 때문에 지겨운 날들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세상 물정이라곤 알 수 없었고, 그저 동네 동생들이랑 칼싸움에 총싸움 병정놀이에 하루하루가 재미있던 때였다. 난 국교시절에 공차기를 좋아했고,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키는 작아도 골키퍼에 재능이 있었으나 라이벌인 홍광민이 때문에(키) 떨어 졌다. 그러나 학교 체육 시간이나 축구 시합 때는 서로 나를 원했고, 난 날렵한 몸으로 공을 받아 냈다. 미술에는 내가 일인자? 였다. 라이벌인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이 아련하다. 그림 그리기에서 나를 앞서는 친구나 후배는 없었다. 사생화와 정물화, 판화까지도……. 하지만 나는 화가가 꿈이 아니었다. 만화가의 요청도 거절을 했고, 그냥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새롭게 밀려온다. 어릴 적 국민학교는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극장에 단체 관람을 하였다. 극장구경을 갈 때면 너무도 기대에 찼었고 흥분이 되었다. 번개 아톰 영화에 흥분하고 마치 내가 정의에 사자인양 들떴다. 돌아가는 스크린에 흥미가 있고 요상한 마술을 부리는 기계가 신기해 살며시 2층 영사실을 기웃거리다 험악한 영사실 형님? 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어찌어찌 하다가 몰래 극장에 입장하여 떳떳한 척? 하며 영화를 보고 의기양양 나오며 킬킬거리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동네에 목욕탕은 한 곳. 그것도 남, 녀 탕의 구분이 없어 돌아가면서 목욕을 하던 곳. 장작불 지펴서 물을 데우고 충분히 물을 쓰지도 못하고 나와야만 했던 목욕탕. 어쩌다 엄마나 누나를 따라서 목욕탕을 가면 (아마 1년에 1번 갔을 꺼다) 무엇이 그리도 수줍은지 뒤돌아 쭈그리고 앉아 슬며시 씻고 나왔지요? 지금에 우리 어린 친구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여름날에는 앞 개울가에서 발가벗고 수영을 하였으며, 앞 용산 자락 저 멀리까지 나가 싱아를 꺾어 먹고 아카시아 꽃을 따먹었다. 숙제로 퇴비를 한지개?씩 들쳐 메고 콧노래 부르던 어릴 적 친우들과 동생들이 그립다. 나랑 무던히도 싸우던 두옥이, 창옥이 형제 네는 동네에서 군인가족으로 제일 잘사는 집이었다. 다른 집에는 없는 라디오가 있어 밤이면 라디오 드라마 들으려 아양~을 떨어가며 모이시던 아주머니들과 우리들이다.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그 위세는 더욱 거세지고, 그 유명한 드라마 「여로」 때문에 동네 아줌마들과 우리는 항상 두옥이네 눈치를 봐야 했었다. 이그~ 그 드라마가 뭐기에……. 그 위세에 두옥이(나랑 동창)와 동생 창옥이는 동네 동생들을 무던히도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두 형제를 붙들어 동네 연탄공장 앞 시궁창에 엎어놓았다. 나는 두옥이 엄마에게서 욕을 감내해야 했다.(우리 엄마랑도 싸웠다) 그 뒤엔 세상이 편안했다. 내가 대장이고 내 말이면 동생들은 아주 대담무쌍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대장이 좋은가 보다~~~~~~~~ 지금도 그 동생들이 보고 싶다. 지만이와 영환이는 연락은 닿지만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 그렇게 난 동네 골목대장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코 흘리며 다녔어도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같이 뛰어 놀던 시절을 회상하면 가슴 저 밑에서는 용암 같은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너무도 찢어지게 가난했고 어려웠던 어린 그 시절. 그렇기에 그때는 이웃 간에 정이 많았나 보다. 칼국수 한 젓가락에 희로애락을 나눴던 시절이다. 때문에 고향에 저녁노을이 오늘도 사무치는가 보다.
행복한 생활을 하는 우리 와수초등학교 후배들도 초등학교 시절에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학교, 우리 고장, 우리나라를 빛내는 자랑스러운 큰 일꾼이 되길 바라며 「나의 이력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