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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解慕漱)는 그의 선조가 고리국(고離國) 사람으로 47대 고열가 단군 57년 (BC 239)에 웅심산(熊心山 : 현재의 舒蘭)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현재의 농안)을 점거해 북부여를 세우니 고열가 단군이 BC238 년에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현재의 하르빈)로 들어갔다.
#2. 이에 진조선은 5가(五加)가 6년 동안 공치하다가 해모수가 번조선(番朝鮮)의 왕인 기비(箕丕)와 결탁하여 BC 232년에 진조선 (眞朝鮮)을 멸망시켰다.
#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 "고구려 비기에 보면 900년에 미치지 못하여 80대장(당의 이적의 나이)이 있어 이를 멸한다"고 하였는데 이때(AD 668)에서 900년을 거꾸로 계산하면 BC 232년이 되는데 이 해는 북부여가 진조선을 멸망시킨 해이다.
#4.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를 합하여 고구려의 건국년대로 보았다. 고주몽(高朱蒙)이, 해모수 → 고진(해모수의 둘째아들) → 고모수(고진의 손자) → 고주몽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가졌으며 동부여에서 탈출, 졸본부여로 와 부마가 되어 그 통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창건하였기 때문이다.
#1. 고리국은 서요하 상류(현재의 임동, 임서지역)에 있던 나라로 색리(索離), 탁리(탁離), 고리(藁離)등으로 불리었다.
#2. 동호(東胡)란 흉노와 번조선 사이에 있던 나라로 번조선의 북쪽에 있었기에 북호(北胡)라고 불리워졌다.
#3. 단군세기에 보면 "BC 350년에 북호가 조공을 하고 번조선과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공격했고, BC 298년에 조공을 했으며, BC 248년에 북막이 와서 같이 연나라를치자고 하나 거절하자 원망하고 조공을 하지 않았으며, BC 229년에는 북부여를 공격해 왔다".
#4. 이러한 북호(또는 동호)는 BC 206년에 흉노(匈奴)에 멸망당한 이후 그 활동이 나타나지 않고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상곡(上谷)의 동쪽을 차지하여 예맥조선 (번조선)과 접하게 된다.<주:BC 195년에 한에서 흉노로 망명한 노관을 동호노왕 (東胡盧王)에 봉한 것을 보면 북부여가 고리국지방을 회복한 BC 115년까지 흉노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이들의 활동 무대를 보면 동일한 지역이고 동일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고리국=북호=동호가 된다. #6. 북부여가 위만조선과의 대치상태에서 고진(高辰)을 고리군왕(藁離郡王)에 봉한 것을 보면 북부여가 위만조선의 북쪽인 서요하 상류지역을 다시 회복한 것 같다.
#7. 고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에 봉해진 것을 보면 고리란 원시 고구려족으로 고려(고구려)라는 명칭이 여기서 나왔으며 고대에는 고이(高夷)라고 불렀고, 대수(大水 : 압록강)에 살던 대수맥(고구려)에 대해 소수(小水:서요하 상류의 지류)에 살던 소수맥이 바로 고리국이다.
#8. 또 이들을 고구려와 분리해 구려(句麗)라고도 불렀는데 BC 107년에 요하 서쪽 (서)옥저 지역에 설치되었던 현도군이 이맥(夷貊) (졸본부여)의 공격을 받아 구려(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구려가 바로 고리국이 있던 곳이다.
#9.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고리=동호=북호=구려=고이=원시고구려이다.
#1. BC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을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이 그를 저격하나 실패한 후 BC 209년에 진숭의 난이 일어나 혼란해지자 연(燕), 제(薺), 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번조선(番朝鮮)으로 망명해 와 이들을 상하운장(上下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군을 파견해 감독하게 하였다.
#2. 이 당시 진(秦)나라는 전국시대의 연(燕), 조(趙),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을 단시간에 연결, 보수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는데 그 동쪽 끝은 산해관 부근의 갈석산(碣石山)으로 진시황과 호해(진의 2대황제)가 다녀갔으며 이곳을 요동(遼東)으로 표기하고 있다.
#3. 이때 진나라는 장성밖에 요동외요(遼東外邀)를 설치, 이곳과 번조선 사이에는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었다. 즉 상하운장은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와 육율하(六율河) 사이로 지금도 그곳에는 황지(荒地:유중 부근)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당시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중전소동하이다.
#4. BC 206년 진(秦)을 멸망시킨 항우는 전국에 16명의 왕을 봉했다. 그 중에 한광을 요동왕(遼東王:도읍은 무종), 장다를 연왕 <燕王 : 도읍을 계(계)>에 봉했는데 후에 장다가 한광을 멸하고 한(漢)나라가 BC 202년에 장다를 멸하여 중국을 통일한 후에 노관(盧관)을 연왕(燕王)에 봉했다.
#5. 이로써 한나라는 요동고새(遼東故塞:산해관)로 경계를 삼았다. 이 당시의 패수는 난하이다.
#6. BC 195년에 한의 연왕인 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그의 부인인 위만(衛滿)이 새(塞:산해관)→패수<浿水:진나라 당시의 패수였던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상하운장 <중전소동사하와 육율하(六율河) 사이>→왕검성<번조선의 수도인 광녕(廣寧)부근>으로 이동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그를 중국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아둔 상하운장에 봉하였다.
#7. 이들의 세력이 비대해 짐에 위협을 느낀 최숭(崔崇)은 이 해 겨울에 낙랑(樂郞)으로부터 재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막조선(莫朝鮮)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현재의 평양(平壤)>에 이르러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
#8. 이 당시 이곳에는 진조선이 BC 238년에 망한 이후 막조선이 쇠약해져 그 일부는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고 잔류세력은 낙랑국에 흡수된 것 같다.
#9. 북부여 제 2세 모수리 원년(BC 194)에는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번조선(番朝鮮)을 멸망시키자 그 왕 기준(箕準)은 바다로 달아나고 상장(上將)인 탁(卓)이 그 무리들을 이끌고 중마한(中馬韓)을 세웠으며 변한, 진한 역시 각각 그 무리로써 100리에 봉함을 받고 도읍을 정하였는데 모두 마한의 명령을 들었으며 세세로 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10. 한편 동사년표(東史年表)에는 기준이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파하고 금마군(익산)에 도읍을 정한 후 죽자 그 아들인 탁(卓)이 BC 193년에 마한의 시조인 무강왕(武康王)이 되었다고 한다.
#11. 이것을 보면 번조선이 위만에게 멸망당한 후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동, 마한을 세우고 만주와 요동에서 이동해 온 진한(진조선의 유민), 변한(번조선의 유민)을 다스린 것으로 볼 수 있다.
#1.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漢)의 요동태수를 꾀어 재물과 군사를 얻어 그의 동쪽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쳐서 얻어 그 땅이 수천리가 되었다.
#2. 이에 대비해 북부여(北夫餘)에서는 BC 193년에 평양(현재의 해성)<주:신채호, 조선상고사>에 성책을 쌓았고 BC 192년에는 해성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여 왕제인 고진(해모수의 둘째아들)으로 지키게 하였으며 BC128년에는 남려성(南閭城)에서 위만 조선을 파하고 BC 120년에는 우거(위만의 손자)를 치다가 불리해져 서압록(西鴨錄:현재의 요하)을 지키고 성책을 세워 방비했다.
#3. BC 118년 침략해 와 아군이 대패하여 해성(海城) 이북 50리 땅을 뺏았겼으며 BC 117년에는 해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석달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였고 BC 115년에는 정예 5천으로 해성을 격파한 후 추격해 살수(薩水)에 이르러 구려하(九黎河)의 동쪽이 모두 항복해 왔다.
#4. BC 114년에는 좌원(坐原:태자하의 상류)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려(南閭)에 군대를 배치해 방비하였다.
#5. 이들의 전투지역을 보면 해성(海城)을 중심으로 한 서압록(현재의 요하)과 구려하(현재의 서요하 상류의 신개하로 추정됨), 살 수(?), 남려성(?)등으로 서요하와 요하의 중하류가 위만과 북부여의 경계선이였음을 알 수 있다.
#6. 초기에는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동쪽에 있는 진번과 임둔을 차지해 요하까지 진출하고 다시 해성 부근을 점령하나 BC 115년에 북부여가 해성을 다시 찾고 서요하 상류지역을 점령해 고진(고주몽의 아버지)을 고리군왕(고離郡王)에 봉했다.
#7. 위략에 "위만조선이 망하기 전에 역계경이 2천호를 이끌고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당시 진국은 진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이며 이들이 망명한 사실이 BC 115년 북부여가 위만조선(우거)에게 대승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 같다.
#8. 이와 아울러 살수와 남려성에 대하여 고찰해 보면 중국의 사서에서는 "예맥군장 남려(南閭)가 BC 128년에 한(漢)나라로 투항하므로 창해군(滄海郡)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그 지역은 천친부근이라고 한다.
#9. 그러나 당시 한나라는 만리장성 안쪽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위만조선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천진(天津) 부근에 예맥국(남려)<주:水經注의 濁章水조에 淸潭水가 濊水이고, 章武縣이 옛날의 濊邑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BC 3-7세기에 이곳에 濊族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李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 敎保文庫, 1984. 9)>이 있을 수 있으며 BC 128년 북부여가 남려성(南閭城)에서 위만조선을 격파한 것을 보면 예맥군장 남려는 위만조선과 북부여 사이에 있다가 북부여로 투항한 것이다.
#10. 부여는 선세 이래로 망한 적이 없다. 부여인 중에는 스스로 부여로 망명하였다고 하는데 남려가 내속하였으므로 부여의 예 (夫餘之濊)라 하며 예성(濊城)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보면 남려는 위만조선에서 한(漢)으로 투항한 것이 아니라 북부여로 투항한 것으로 북부여 BC 115년에 살수까지 우거를 격파하고 다음 해에 남려성(南閭城)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을 보면 이들이 요하의 서쪽에 위만조선과 북부여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11. 이러한 예맥군장 남려는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후 다시 동쪽에 있던 진번, 임둔을 쳐서 현재의 요하(서압록)에 이르렀던 것을 보면 그 지역이 서로 같은 지역으로 위만에게 최후로 복속되었고 북부여와 연접해 있던 이 지역의 저항이 가장 완강했을 것이다. 즉 우거 당시 역계강이 동쪽에 있는 진국(북부여)로 투항한 것도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1. BC 108년에 한(漢)의 무제(武帝)는 우거(위만의 손자)를 쳐서 멸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고자 많은 군사로 사방으로 침입해 왔다. 이 당시 한의 육군은 요동(遼東:산해관)에서 출발하였고 해군은 제(齊:산동반도)로부터 북쪽으로 발해(渤海)를 건너 공격해 왔다.
#2. 여기에 참전한 한의 장수들 중에 순체, 공손수, 위산은 사형당하였고 섭하는 전사하였으며 양복은 폐서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중에는 한 명도 후(侯)에 봉해진자가 없고 우거도 망하였으니 양쪽이 다 패한 전쟁인 것이다.
#3.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우거의 압제하에 있었던 번조선의 유민들로 위만조선의 북쪽에 있던 고리국(고離國)에 근거를 둔 동명(東明 : 고두막)이 한이 우거를 멸하자 의병을 일으켜 그 유민을모아 한의 세력을 격퇴시킨 것이다.
#4. 위만조선이 멸망당할 때 한나라로 투항한 자들은 후(侯)로 봉해졌다. 그 지역은 연(燕:하북성), 제(齊:산동성)에 있었고, 그들 중 평주후(平州侯:협), 온양후(溫陽侯:최), 추저후(萩저侯:음)등은 죽은 후에 후사가 없어 없어졌으며 획정후(획淸侯:삼)는 BC 99년에 조선의 망노를 감추어 주었다가 감옥에 갇혀 죽었고 기후(幾侯:장)는 BC105년 조선과 모반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5. 현 사학계에서는 위만조선이 망한 후에도 이들과 내통한 조선이 엄존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은 동명 고두막한이 BC 108년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를 말한다. 왜냐하면 당시 졸본부여는 한나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6A. 동명과 주몽은 별개의 인물
#1.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의 세력을 축출한 동명(東明) 고두막은 현재의 요하를 건너 졸본(卒本:환인지역)에 BC 108년에 졸본부여를 건국한 후 BC 86년 북부여(北夫餘)를 멸망시켰다.
#2. 현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자를 동명(東明)으로 보고 있다. 그는 주몽(朱蒙), 추몽(鄒蒙), 추모(鄒牟), 중해(衆解), 도모(都慕), 등으로 불리고 있어 동명과는 별개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3. 또 동명이 빛나는 왕업을 열었고 주몽(朱蒙)이 그 여파를 계승하였다.([해동역사])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北夫餘)를 계승하여 흥하였고 졸본주에 도읍하여 졸본부여라 하였으니 고구려의 시조이다.([삼국유사])
#4. 고구려는 동명으로부터 나왔는데 동명은 고리왕(고離王)의 아들이다.([양서])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부여는 고리에서 나왔는데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고리(고離)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 역시 남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이르렀다.([만주원류고])
#5. 삼국유사 동부여조에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解夫婁:북부여 마지막왕의 동생)가 동쪽으로 옮긴 이유를 동명이 장차 흥할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6B. 동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6. 동명 고두막(高豆莫)이 졸본부여를 세운 후 BC 87년에 북부여를 위협, 고우루(高于婁 :4대)가 근심으로 병사하고 그 동생인 해부루가 섰으나 그 다음해에 북부여는 졸본부여에게 항복하였다. #7. 이에 해부루는 국상인 아난불의 건의에 따라 통하(通河)의 물가인 가섭원(迦葉原 : 현재 의란 부근)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우고 그 유민을 모았다.
#8. 이러한 동부여를 훈춘(훈春)으로 보고 있는데 고구려가 AD 22년에 동부여를 멸망시키자 그 한 부류가 훈춘지역으로 달아나 그 곳에 갈사국(曷思國)을 세운 사실을 보면 훈춘에 동부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9. 동부여에서 BC 79년 유화는 주몽을 낳았다.그는 고모수(弗離支)의 아들로, 고모수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의 손자이다.
#10.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BC 59년 엄리대수(淹利大水:송화강)를 건너 졸본부여에 이르러 그 마지막 왕(高無胥)의 딸 서노와 결혼한 후 BC 58년에 그 대통을 이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6C. 졸본부여와 한(漢)의 경계
#11. BC 108년 한의 세력을 격퇴하면서 건립된 졸본부여는 BC 106년 5천의 군사로 한과 싸워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 (西安平)에 이르렀다. 이곳이 옛고리국(고離國)의 땅이었다. #12. BC 87년 장수를 보내 배천(裵川)에서 한(漢)을 파하고 그 수장을 사로잡았고, BC 86년 서압록(西鴨錄)에서 한나라와 여려차례 싸워 이겼으며, BC 59년에 한나라와 요좌(遼佐:요하의 왼쪽)에서 여러번 싸워 승리하였다.
#13. 여기서 보면 이들의 전투지역이 구려하(서요하 상류의 新開河), 서압록(요하의 중하류), 요하(현재의 대능하)로 초기 한나라 세력은 서요하 상류지역(임동 부근)과 현재의 요하까지 팽창되었으나 BC 106년에는 서요하 상류지역을, BC 59년에는 대능하와 요하 사이를 상실하여 대능하(당시의 요하)에서 졸본부여와 대치하게 되었다.
#14. BC 82년 한이 진번과 임둔군을 파하고 낙랑, 현도군에 통함시킨 후 현도군을 구려(句麗:성요하의 상류)의 서북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주:우북평에 속한 土根縣 부근에 현도군의 上殷台縣이 설치된 적이 있다> BC 86년 서압록 전투에서 한이 패하여 대능하까지 후퇴함으로 대능하와 요하 사이에 있던 임둔, 진번, 현도, 낙랑의 일부를 상실하게 되자 이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것.
#15. BC 75년에는 대능하 서쪽의 요동군 지역에 임시적으로 현도성(玄도城)<주:城이란 郡이 아니라 임시적으로 설치된 [지점]을 나타낸다.(곽창권, 한국고대사 탐색,일선기획, 1987. 12)>을 설치하게 되었다.
고구려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부여 해모수왕조를 장악한 동명성왕 고두막왕집단을 동부여에서 망명한 고추모집단이 다시 장악하여 해모수왕조로 이었다...그래서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을 강한 것이다...고추모가 부여국호를 고구려선조의 나라인 고리로 바꾼 것이다. 이 때 불만을 가진 부여집단이 고구려에 대적하며 백제를 세우고, 몽골초원으로 이주하여 훗날 징기즈칸을 낳는다. 유럽으로 서진한 부여집단은 불가리를 낳은다...광개토태왕비문에는 추모왕 고추모가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아들인 고진으로부터 나왔다고 명시하면서 광개토태왕은 해모수로부터 14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동북공정.식민사관론자들이 위서로 매도하는 [환단고기]기록내용이 정확히 광개토태왕비문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정통사서임이 입증된다.
백제
고구려 온조집단의 십제를 통합한 부여의 구태집단.....국호 남부여(성왕)
백제 역시 부여왕 구태(고이왕)집단과 요서 비류왕 집단이 백제왕조를 장악하면서
왕족조를 온조왕족과 잇는 짜집기를 했다고 보면 된다...
국가의 연대도 높이고 국가통합차원에서...해상강국 대백제는
마한을 통합한 부여집단이 마한의 해양세력을 기반으로
건설한 것이다....고이왕은 4국 중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을 실현하였고, 요서 비류왕집단은
근초고왕 시기에 마한과 가야와 신라와 열도를
장악하여 남3한의 상국을 자처한다..백제왕이
남한의 진왕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해를 건너 비류왕집단의 본거지였던
요서를 공략하여 진평현을 설치하고
단군3한국 중 번한국 영역에 속한
중국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신라
신라란 국호는 순장을 금지하고 농경을 장려한 흉노인 지증왕 때 정한 것이다..신라는 새누리란 뜻으로 현재 새누리당의 당명이 바로 신라당이다....지역감정조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당명인 것이다...가장 국민통합적 당명은 대한당이라든지 한국당이라든지 대한코리아당같은 당명이어야 한다.... 신라는 복합세력으로 구성된 나라다...진한유민+부여유민(박혁거세/초대왕)+왜유민(석탈해왕)*김알지흉노유민+모용선비의 흉노용병집단 .....부여황족 박혁거세 나라는 사로다...박혁거세왕조를 무너뜨리고 신라왕조를 세운 집단이 흉노집단인 것이다....화랑제도를 만든 흉노인 진흥왕 때 부여인 박혁거세와 혈통을 짜집기한 왕족보가 만들어 졌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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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라 주인 국민들에게 권력을 달라고 하는 공약[空約] 이것이 없다면 권력을 달라고 할 명분 자체가 없는데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인 공약을 걸고 이런 나를 믿고 권력을 다라고 하는 이 시실이 너무도 뻔뻔한것 아닙니까? 왜 선거에서 표를 찍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임한다고 하는 뜻을 말합니다. 때문에 믿음이 가는 신뢰가 보장되어야 합당합니다.
각종 계약에서 도장을 찍는것들은 다 법적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 것도 아니고 국민들 자신의 삶을 위임하는데 어찌 당선만 되면 안지켜도 그만인 이런 공약을 게속 쓰라고 이렇게 방치해야 합니까? 이제 이 부분 각자 자신들 삶을 위해 생각좀 해봐 주십시오
그릇이 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들지 못하면 꿈에 불과히지 않을까요?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풀어야할 숙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민들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 부분은 공약입니다. 공약으로 마음을 움직이고 이 힘으로 지금의 정당정치 노선을 바꾸고 인존 상생정치노선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뜻을 모아 주십시오. 벌써 7년의 문을 열었습니다. 날만세면 변하는 사실 앞에서 모래성과 같은 지금 이래로는 우리 스스로 안에서 무너져 외세 침약을 부르고 말것입니다. 역대 역사 나라가 망한 근거는 안에서 망하고 박에서 외세 침약을 받으며 망한곳이 공통점입니다. 누구나 이점 잘
생각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