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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재균의 세상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장재균
Ⅱ. 6·25 당시의 생활 상황 | [2006-06-21 ] |
Ⅱ. 6·25 당시의 생활 상황 1. 본인은 6·25가 터지기 약 10여 일 前 上京했는데 그것은 朝鮮商船주식회사 목포지구 해운하청업자로서 수송이 끝난 운임을 수령하러 당시 이 회사 목포출장소장인 韓道源씨(일제下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현재 白凡 先生 기념사업회 이사로 있음)와 같이 上京하게 되었음. 그런데 운임을 미처 받지 못한 채 6·25가 터지고 공산군이 침입, 점령下의 서울에 있게 되었음. 당시 본인은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 중이었음. 2. 솔직히 말해 본인은 6·25 당시까지 공산주의에 흥미나 관심은 전혀 없었지만, 자신을 적극적인 반공투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으며, 그저 사업에나 열중하고 있었음. 그러나 일단 서울에 공산군이 침입하자 자기도 깨닫지 못하게 공산군이 싫어져서 자신의 마음가짐을 비로소 확실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생생한 기억이 있음. 본인의 반공의식을 확실하게 만든 계기는, 하루는 여관을 나와 부근 성당 마당에 산책을 나갔더니 갑자기 북괴군 병사 3명이 한 청년을 끌고 오며 옆에 그들의 동료 좌익분자들 10명이 같이 몰려왔음. 그러더니 주위에 있는 약 20∼30명에게 이 청년의 죄상을 설명하고 그 처벌을 묻자 공산분자들이 『총살이오!』 하고 끌고 가는 광경을 보았음. 이미 인민재판 이야기는 많이 듣고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의 이름 아래 저지르는 잔학상도 들었지만 실제 눈으로 목격하니 그 충격은 컸으며, 이는 결코 우리와 상통할 수 없다는 것을 1000여 권의 반공서적을 읽은 것보다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음. 지금도 그 끌려가던 청년의 겁에 질리고 넋이 빠진 모습이 생생할 정도로 인상이 컸음. 나의 판단으로는 많은 한국인이 6·25를 겪어 공산주의의 실태를 체험함으로써 오늘과 같은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지만 한국 반공의식의 최대 앙양자는 金日成과 공산군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됨. 아무튼, 2차대전 후 일단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온 것은 우리나라뿐인데 이 점에 있어 우리는 그나마의 행운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으로 언제나 생각하고 있음(이상의 6·25 관계는 본인이 일본에서 출판한 「獨裁와 나의 鬪爭」 속에 나의 해방 후의 사상편력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음). 3. 괴뢰군이 서울에 침입한 후 본인은 당시 民主國民黨의 열성당원이며 본인의 처남인 車元軾(차원식)의 장인 裵仁植(배인식)씨의 신문로 집으로 가서 이불을 쓰고 유엔군의 방송을 들으며, 또한 앞서 말한 朝鮮商船 목포출장소장인 韓道源(한도원)씨, 그리고 충남 장항서 해운업을 하는 趙長遠(조장원)씨 등과 만나 정보교환을 하곤 했음. 7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 유엔방송에서 『대전 쪽의 금강 전투에서는 반드시 북괴군을 쳐부술 것이니 서울 시민은 기대하고 용기를 가져라』는 말을 들었음. 한편 당시는 식료품 사정이 어려워 돈 없는 본인들로서는 더 이상 서울서 버틸 수도 없는데다 본인 같은 청년은 언제 의용군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형편에 있는지라 앞서 말한 韓道源, 趙長遠씨 부부, 처남 車元軾 등과 협의해 걸어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금강 전투서 유엔군이 이길 테니 공산군이 목포까지는 도저히 내려가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충남 온양에서 서해안을 타고 내려가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음. 4. 7월20일경 우리 일행 6∼7명은 서울을 출발하여 앞서 말한 코스를 밟아 내려가다 충남 보령군의 趙長遠씨 본가에서 2∼3일 묵고 다시 걸어서 군산까지 이르렀더니 이미 공산군은 목포까지 침입한 것이 판명되었음. 본인은 그 때 목포에서의 본인의 활동과 교제관계로 보아 목포로 가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으며, 그 점은 車元軾씨도 그의 우익활동에 비추어 마찬가지였음. 그러나 이 와중에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고, 더욱이 내려가는 것은 소지한 住民證(주민증)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올라가는 것은 그들이 발행한 여행증명 없이는 불가능함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증명된 이상 어쨌든 죽든 살든 목포에 가고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다시 걸어 8월10일경 목포에 도착했음. 5. 목포에 도착하여 본인의 회사 사무실 앞에 이르니 모친이 의자를 놓고 길거리에 앉아 있는데 흡사 미라같이 야위고 혈기 없는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음. 본인을 보자 질겁을 하시면서 『빨리 숨어라』고 재촉하며, 목포에 괴뢰군이 들어오자 본인 집은 몰수되고 심지어 숟가락까지 가져갔으며 가족은 집으로부터 추방되어 아내는 일본군이 팠던 방공호 속에서 둘째아들 弘業이를 낳았다는 것이며, 본인의 친동생인 大義는 이미 공산군에 의해서 체포되고 본인이 왔는지 매일같이 공산군이 찾는다는 것이었음. 본인은 급히 모친과 같이 처가 숨어 있는 집을 찾아보고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朴東連(박동련)이라는 선장 집에 숨었던 바 2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6. 정치보위부에서는 본인의 海軍 文官 신분을 지적하면서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고 묻기에 『그런 일 없다』고 했더니 몇 대 치면서 『이 새끼가 아직도 반성 못했다』고 하며 유치장에 처넣었음. 그 후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자가 와서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협박했으며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갔음. 7.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죄수번호 202호) 약 1개월 간 극도의 영양실조와 굶주림에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는데 9월28일 갑자기 문을 열면서 『모두 밖으로 나오라』 해서 감방 복도에 나갔더니 두 사람씩 한 수갑에 채웠는데 나와 같이 묶인 사람은 韓日洙(한일수)씨로서 지금도 목포에 거주하고 있음. 인민군 간수를 따라 형무소 입구 쪽에 있는 강당에 들어갔는데 본인 등은 강당 입구에서 먼 안쪽에 앉게 되었음. 조금 후에 시내의 내무서에 있는 죄인들도 데리고 와서 그들은 입구 쪽에 자리잡게 되었음. 그 후 간수들은 입구 쪽, 즉 내무서에서 온 사람들을 몇 명씩 끌고 나갔는데 후일에 안 바로는 한 트럭씩 채워 싣고 나가 총살했던 것임. 이렇게 되자 강당 안은 울부짖는 자, 살려달라 애원하는 자들로 아비규환이 되었는데 간수들은 계속 총 개머리판으로 울고 외치는 사람들을 시끄럽다고 때리는 것이었음. 그렇게 해서 저녁 무렵이 되자 갑자기 괴뢰군이 서로 당황해서 부르면서 나가더니 행방을 감추게 되고 지방 출신의 간수들만 남게 되었음. 간수들은 미처 못 죽인 우익인사 약 80명(총 220명 가량 중)을 인도해서 다시 감방에 처넣었음. 그리고 그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괴뢰군 병사들이 지시한 대로 감방에 방화해서 죽이지 못하고 혹은 도망가고 혹은 망설이던 중 본인 등 몇 명이 주도가 되어 감방 문을 부수고 탈옥시켜 밖으로 빠져 나왔음. 8. 한편 본인의 목포 도착 前에 이미 체포된 본인의 친동생 大義는 같은 형무소 감방에 7명이 같이 있었는데, 먼저 불린 4명은 죽고 나머지 3명은 살아남았는 데 그 속에 끼어 살았음. 본인의 장인 車寶輪씨는 사형집행 현장까지 끌려가서 괴뢰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세워놓고 총을 쏘아 기절해서 넘어졌는데 총은 맞지 않았음. 그러자 檢屍하는 괴뢰군이 와서 『이 새끼가 아직도 안 죽었다』면서 또 두 발을 쏘았으나 그것도 귓가를 스칠 뿐 맞지 않고 사형장에서 살아서 돌아온 유일한 생환자가 되었음. 또 본인의 막내 동생 大賢(해군 소령 제대)은 당시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휴식 중 친구와 같이 언덕을 굴러 떨어져서 탈출, 집에 돌아왔음. 이와 같이 집안의 3형제와 장인, 합계 4인이 모두 기적적인 생환을 했다 해서 6·25 이후 목포지방에서는 命 긴 집안이라 화제가 된 바 있음. 9. 9월28일 생환 후 본인은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해운업에 종사했는데 6·25동란 중 한 척은 부두에서 폭격으로 유실되고, 한 척은 군경이 타고 나갔다 무사히 돌아왔으며 한 척은 목포부두에 있어서 다시 수리해 사용하였음. 한편 당시 목포 근방은 군경의 진주가 더디고, 특히 도서와 해안지방에는 공비가 그대로 출몰하여 양민을 마구 학살하는 실정이었음. 해군 목포경비소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해상방위대 전남지역본부를 만들게 되고, 그 대장에는 부산에 피난갔다 온 우익지도자 吳裁均(오재균)씨, 그리고 부대장에는 본인이 임명되어 본인 소유 기타 선박들을 취합하여 공비 토벌, 군경 수송, 收復도서의 경비, 정보수집 등 軍의 보조 지원역할을 했음. 본인도 직접 승선하여 출동 수행했는데, 이 해상방위대는 陸軍 방위군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海上 방위군이 되었을 것이며 본인은 해군방위대장에 임명될 것으로 通告받은 바 있음. 그 당시 이러한 근무에 관계하던 해군 목포경비소 작전과장이 文○字(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편집자 注) 중위인데 지금은 해병준장으로 예편하여 서울 거주 중임. 10. 한편 본인은 1945년 10월경 목포에서 유일한 일간지인 木浦日報를 당시의 계엄사령관인 해군 목포경비소 사령관의 승낙 아래 인수하여 시설을 보수하여 발간했는데 본인의 同社 社主 재직 기간은 약 1년 간이었음. 11. 본인은 1951년 초부터 회사를 새로이 창립하여 木浦商船주식회사라 하고 일본서 정부가 구입한 선박 3척을 은행융자로 사서 해운업을 확장시켰음. 한편 금융조합연합회와의 곡물 및 비료 등 수송을 직접 계약하게 되자 1952년부터 회사를 부산으로 옮기고 상호를 興國海運주식회사라 하며, 회장에는 당시 海南 출신 국회의원(2대) 尹泳善(윤영선)씨가 앉고 본인은 사장이었는데 사실상 본인 개인회사였음. 본인은 부산서 당시의 農工銀行 본점에서 1억환을 융자해서 사업을 확장했으나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함. 결국 1954년경부터 당시 흥국해운의 군산출장소장인 ○成烈씨(원본불량으로 확인 불가-편집자 注)에게 회사를 인계하고 본인은 해운업에서 손을 뗌. 앞 장에서 소개한 자료는 金大中씨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3일 뒤(1980년 5월20일)에 작성한 자필 진술서 중 광복 후 좌우 대결 시대와 6·25 전쟁중에 그가 겪었다고 주장한 내용들이었다. 金大中씨가 22~27세 청년기에 직면했던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는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큰 자국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연구하는 것은 곧 오늘의 金大中 대통령을 이해하는 길이 된다. 1980년 11월26일 金大中 피고인은 대법원에 상고 이유보충서를 제출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金云式과 張鹵島 사이에서 출생 필자는 우선 「해방 이후의 본인의 사상과 정치적 경력」 부분을 검토하고자 한다. 金大中씨가 자필 진술서를 1980년 5월20일, 5월25일에 써내자 관례에 따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나흘 뒤 그 진술서를 토대로 하여 제1회 피의자 신문을 한다. 이 신문 조서 중 일부를 소개한다. 피의자 신문조서 (1980년 5월 29일) 피의자 金大中. 위의 사람에 대한 내란선동 및 계엄포고위반 피의사건에 관하여 서기 1980년 5월29일 합동수사본부에서 軍 사법경찰관 육군 준위 粱一根은 軍사법경찰관 육군준위 張炳和를 참여하게 하고 피의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문: 피의자의 성명 연령 원적 본적 주거 직업 주민등록 번호를 말하시오. 답: 성명은 金大中, 연령은 55歲(1925년 12월3일생), 원적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대리 231, 본적은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 주거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1, 직업은 무직, 주민등록 번호는 251203-XXXXXXX입니다. 문: 피의자는 형사처분이나 선고유예, 기소유예 등 처분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답: 본인은 1946년 10월1일 舊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활동중 목포경찰서 남교동파출소 습격사건 관련혐의로 목포 경찰서에 입건되어 10여 일간 조사를 받고 훈계방면된 사실이 있고, 1967년과 1971년에 실시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시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어 1975년 12월13일 서울 형사지법에서 금고 1년, 벌금 5만원의 선고유예처분을 받고 항소하여 현재 서울고등법원에 재판 계속중에 있고,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선언사건을 주동하여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건되어 1977년 3월23일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78년 12월27일 형집행 정지로 출소하였고 1980년 2월29일 복권된 사실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훈장이나 記章 연금 등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본인은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문: 피의자의 출생 성장과정을 말하시오. 답: 저는 1924년 1월7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97에서 당시 농업에 종사하던 亡父 金云式과 亡母 張鹵島(장노도)의 4남 3녀 중 2남으로 출생하여 성장하며 하의국민학교 4년에 재학중이던 1936년경 목포로 全가족이 이주하여 1939년 3월 목포 북교국민학교, 1944년 3월 목포상업학교를 각각 졸업하였습니다. 문: 피의자의 학경력을 말하시오. 답: 저의 학력으로는 1939년 3월 목포 북교국민학교 졸업, 1944년 2월 목포상업학교 5년 졸업, 1967년 2월 경희대학교 산업대학원 연구과정 수료, 1969년 2월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경제정책)을 수료하였으며, 경력사항으로는 1944년 5월 全南汽船(株) 사원, 1947년 2월 목포해운공사 자영, 1950년 10월 목포일보사 사장, 1950년 11월 해상방위대 전남 지구대 副대장, 1951년 3월 목포상선(주) 사장, 1951년 10월 대한해운조합 이사, 1952년 7월 흥국해운(주) 사장, 1955년 4월 동양웅변학원 원장, 대한웅변협회 부회장, 1957년 2월 신세계誌 주간, 1960년 10월 민주당 대변인, 1961년 5월 제5代 국회의원 당선, 1963년 7월 민주당 대변인, 1963년 11월 제6代 국회의원 당선, 1964년 1월 국회 재경위원, 1965년 6월 민중당 대변인, 1966년 9월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 1967년 6월 제7代 국회의원 당선, 1967년 12월 국회 건설위원,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1971년 4월 제7代 대통령 선거 낙선, 1971년 5월 제8代 국회의원 당선, 1972년 10월 유신으로 의원직 상실,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 1979년 3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회복을 위한 정치활동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