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사^천사/나이팅 게일>
[등불을 든 여인]
* 출생=1820년. 5월.12일,
이탈리아 피렌체
* 사망=1910년 8월 13일,
영국 런던
* 국적= 영국
*출처 : 다음백과/해설-나이팅게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5월 12일, 부모가 잠시 동안 살았던 플로렌스 지방에서
아버지-
윌리엄 에드워드 나이팅게일과
어머니- 프란시스 스미스 사이에 둘째딸로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더비셔·햄프셔·런던 등지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에게서 직접 교육받았는데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역사·철학·수학 등을 배웠으며 일생 동안 여러 나라 말로 된 많은 책을 읽었다.
사회생활에 별로 만족을 못 느끼다가 1837년 2월 7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게 어떤 사명을 일러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 사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9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병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겠다는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위의 권유로 의회 보고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3년 뒤에는 영향력 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중위생과 공중병원에 관한 전문가로 간주될 정도가 되었다.
1846년에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나이팅게일에게 독일 카이저스베르트에 있는 간호사 교육기관인 프로테스탄트 봉사원회의 연감을 보내주었다.
4년 뒤 나이팅게일은
그 기관에 들어가서 간호사 교육 과정을 완전히 끝마치고,
1853년 런던에 있는 귀부인 환자들을 돌보는 기관의 간호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나이팅게일이 근무하면서 바꾸거나 새로 도입한 것들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그녀는 좀더 넓은 활동무대를 원했다.
1854년 3월 크림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해 9월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크리미아에 상륙하였다. 전쟁중에 병에 걸리거나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가 출판되자 영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들은 프랑스 자선수녀처럼 간호사로 봉사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즉시 3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3일 안에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떠날 것을 자원하였다. 한편 나이팅게일은 오래된 친구이자 그 당시 전쟁장관으로 있던 시드니 허버트(뒤에 허버트 경이 됨)로부터 좀더 큰 간호파견대를 차출하라는 공식적인 교섭을 받고 있었다.
터키 스쿠타리에 있는 야전병원의 간호 책임을 맡기로 하고, 1854년 10월 21일 간호파견대를 이끌고 영국을 출발하여 11월 5일 야전병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쓸 만한 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들이 묵는 숙소에는 쥐와 벼룩이 들끓었고, 한 사람이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이라고는 약 0.57ℓ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이 가지고 온 식량을 사용해야 했으며, 의사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병동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도착한 바로 그날 있었던 인키르만 전투 이후 야전병원은 부상병들로 붐볐다.
각종 의료기구와 옷, 침대 등 모든 것이 부족하였으며,
복도에는 부상병들이 오물이 흘러 넘치는 속에 짚을 깔고 누워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도움을 요청받았는데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200개의 청소용 솔을 요구하였고, 그 다음에는 환자의 더러운 옷들을 병원 밖에서 세탁하도록 하였다.
각종 보급품은 곧 바닥이 났으나 나이팅게일은 가지고 있던 3만 파운드로 필요한 것들을 병원 밖에서 구입하였다. 해가 바뀔 때까지 물자공급을 혼자서 도맡다시피 했다. 병원을 운영하는 일과 수없이 많은 편지, 그리고 엄청난 양의 공적·사적 보고서 작성, 말을 듣지 않는 간호사 등이 끝없이 나이팅게일을 괴롭혔다. 어떤 간호사는 지나친 음주나 부도덕성 때문에 영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병동에서 보냈으며 나이팅게일이 일일이 직접 돌보지 않은 환자는 거의 없었다. 저녁 8시 이후에는 나이팅게일 자신 외에는 어떤 여자도 병동 출입을 못하게 하였으며, 야간 간호는 회복기에 있는 부상병인 임시 위생병이 맡았다. 그러면서도 매일 밤 나이팅게일은 직접 회진을 돌면서 환자들을 돌봐주고 조언도 해주었는데, 병사들은 나이팅게일을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불렀다.
1855년 5월부터는 환자를 간호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영국군 병사들의 복지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당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직접 간호사들을 이끌고 크림으로 갔으나, 발라클라바에 도착하자마자 크림 출혈열(出血熱)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그러자 평소 나이팅게일을 시기하던 영국군 야전병원 간호감독은 그녀는 스쿠타리만 관할해야 하며 크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1856년 3월 16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이팅게일은 정식 명령에 의해 영국군 야전병원 간호총감독으로 임명되어 그 지위가 확실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환자가 야전병원을 떠나자 나이팅게일도 곧 영국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국민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나이팅게일은 공식적인 귀국선을 이용하지도 않고 모든 공식적인 환영회도 거부하였다. 귀국하자마자 나이팅게일은 인기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미지를 깨고 영국군의 보건과 생활환경 및 식사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이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으나 곧 어려움에 부딪혔는데 당국자들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계획을 아량있게 검토하였으나 일을 추진할 만큼의 열의는 없었다. 1856년 10월 나이팅게일은 빅토리아 여왕과 그 부군 및 허버트의 후임인 팬뮤어 경 등과 오랫동안 면담을 나누었으며,
그 뒤 여왕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군대보건에 관한 왕립위원회의 설립을 팬뮤어로부터 약속받았다. 1857년 5월, 마침내 군대보건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군진의학과 병원행정의 전분야에 관한 많은 양의 자료를 제출하였으며 수많은 믿을 만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뒤에 이 자료들을 모아 개인적으로 〈영국군의 보건과 능률 및 병원관리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점에 관한 보고 Notes on Matters Affecting the Health, Efficiency and Hospital Administration of the British Army〉(1858)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위원회의 활동 덕분에 1857년에 군의학교(軍醫學校)가 세워졌다. 같은 해 인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나이팅게일의 관심은 인도에 파견된 영국군의 보건에 쏠렸는데, 1859년에는 이 문제를 위한 새로운 왕립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뒤 1868년에 인도 총독부 산하에 최고 권위의 위생국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다른 새로운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1860년에는 크림에서의 그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기부한 나이팅게일 기금 4만 5,000파운드를 가지고 성 토마스 병원에 세계 최초로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세웠다.
또한 극빈자 진료소에서 일하는 조산원과 간호사들을 교육시키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극빈자 구호소의 개혁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857년부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병든 몸으로 주로 런던에서 살았다. 이 기간중에도 나이팅게일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서신왕래가 엄청났으며, 해마다 침상에 누워서 신분이 높은 사람에서 미천한 사람까지 수많은 방문객을 맞았다. 나이팅게일과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록 나이팅게일은 인도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도의 모든 것에 대해 정통하였으며, 역대 인도 총독은 부임하기 전에 그녀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나이팅게일은 영향력있는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었다. 시드니 허버트가 임종에 처하여 그들의 일을 더이상 지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이팅게일은 매우 매정한 편지를 보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진짜 병을 앓았던 것 같지는 않으며 그녀의 증상은 아마도 신경성이거나 의도적인 것 같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나이팅게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1901년에는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 하였다. 1907년 영국 국왕은 나이팅게일에게 여자에게는 최초로 메리트 훈장을 수여했다. 1910년 런던에서 죽었으며 국장(國葬)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을 사양하고 나이팅게일의 희망에 따라 6명의 영국군 하사관에 의해 햄프셔 주 이스트웰로우에 있는 시골 교회 묘지의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 사평35" 퍼온글입니다.
(다음백과에서)
* 하늘이 낳고, 그가 하고자 했던
모든일을 이루었으니' 천사로다'
사람은 모름지기/일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노력에 따라
길을찾게 될것이라' 작은일이라도
용기내어 마땅히" 실행해야겠다.
유지경성(有志竟成)-그말입니다.
^진인사대천명/도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