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하고 외로운 땅에서, 더구나 본토에서 쫓겨온 사람들끼리 신음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평화롭게 살았으면 오죽 좋았을까. 무늬만 종교개혁이었던 영국 국교회의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의례에 저항하며, 자유로운 신앙을 외치던 분리파·독립파 개혁신앙인이었는데…. 1692년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세일럼(Salem)에서 있었던 ‘마녀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안타까움이 크다. ‘마녀’라 하여 여자들만 마녀로 몰린 사건은 아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려 140명이 기소되었다. 그중 열아홉 명이 마녀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한 사람은 재판을 거부하다가 성난 군중에게 압사당했고, 다섯 명은 판결을 기다리며 투옥되어 있던 중에 옥사했다. 그중엔 영아도 포함되어 있었다.(양정호 “1962년 세일럼 마녀재판을 통해서 본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종교문화” 『젠더와 문화』 8권 2호(2015), 18쪽 참조). 돌이켜 이 사건을 분석하는 학자들은 정착기 집단 갈등이 일으킨 비극이라고 입을 모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비극의 발단은 이랬다. 세일럼이 건설되던 초창기부터 주요한 공동체 구성원이었던 푸트남(Putnam) 가족의 소녀들이 자기들을 도와주던 서인도 출신의 하녀 ‘티투바(Tibuba)’를 마녀로 고발하면서부터였다. 경건하고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소녀들은 이국적인 점성술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티투바의 ‘마술’이 신기했고, 그녀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점쳐 달라고 졸랐다. 청소년기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어떤 지점에서는 절박함도 있었을 거다. 그들의 부모조차 낯선 땅에서 불안하고 척박한 정착 과정을 거치고 있었으니, 이런 환경이 아니더라도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들의 마음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그런데 앤 푸트남(Ann Putnam)을 비롯하여 티투바에게 점을 보았던 소녀들이 이후 히스테리적인 발작을 일으켰다. 작은 천 조각이 하나 사라져도 티투바가 마술에 쓰려고 가져갔다며 의심했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면 안 될 일(이교도적 미신행위)을 했다고 생각한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꾹꾹 눌러놓았던 절제되고 억압된 감정에 대한 폭발이었을까? 원인이 무엇이었든,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이 넘는 소녀들은 신들린 듯 광기에 사로잡혔고, 티투바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을 ‘마녀’ 혹은 ‘악령에 사로잡혀 흑마술을 부리는 자’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신들린 사람들은 어떤 다른 아이들, 하인 혹은 성인 여성이 할 수 없었던 일들, 즉 그들의 목사들에게 명령을 하고,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증언했으며, 설교에 대하여 비평하였다.(Laurel T. Ulich, Good Wives: Image and Reality in the Lives of Women in Northern New England, 1650~1750, 224/ 사라 에번스 『자유를 위한 탄생』 67쪽에서 재인용)
도대체 ‘사탄에게 사로잡히는 것’과 ‘신적 계시를 받는 것’은 무엇으로 구별되는 것일까? 불과 반세기 전, 평신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으며 신과 소통하는 내적 친밀함은 신앙인의 능력이라고 주장한 앤 허친슨을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요 ‘정통에서 벗어난 신자’로 규정하고 내쫓았던 이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는 겨우 십대를 통과하고 있는 소녀들의 기원 모를 신들림에 권위를 부여하다니. 푸트남 가의 소녀들(과 그녀의 친구들)은 아버지 집안의 세력을 업고 많은 이들을 ‘마술을 부리는 자들’로 고발했다. 그 소녀 군단 중에는 마녀재판이 있기 직전 세일럼에 부임하여 푸트남 가를 비롯한 초기 정착 가문들과 사이가 좋았던 목사 사무엘 패리스(Samuel Parris)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패리스 목사는 이 마녀재판이 시작되기 이전(1692년 3월 27일), 이미 이를 부추기는 설교를 한 바 있다. 요한복음 6장에 대한 강해 설교였다. 교회 안에 마귀들이 많다는 주장과 이들을 분별하여 교회의 성인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마녀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9월의 설교에서는 ‘용, 사탄에게 선동된 사람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양정호, 18쪽 참조)
목사의 설교는 소녀들에게 정상적으로는 가질 수 없었던 ‘신적 권위’를 부여한 셈이다. 소녀들은 ‘마녀의 목록’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소녀들이 마녀로 지목한 이름들 가운데는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일럼을 떠난 사람의 이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할까!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흥분했다. 정말 신적 계시로구나.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녀의 목록’에 속한 이름들은 모두가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소녀들의 부모님에게 여러모로 대적하거나 위협이 되는 사람들! 소녀들의 부모는 모두 세일럼 초기 정착민들이거나 그들의 비호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소녀들이 지목한 ‘마녀의 목록’에 그녀들의 일가친척은 하나도 없었다.
70세를 넘은 나이에도 용감하게, 이전 정착지를 떠나 새롭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세일럼에 도착한 너스(Nurse) 부인은, 새로 들어온 이면서도 자기주장이 뚜렷하다는 이유로 소녀들의 부모 대화에 ‘부정적 이름’으로 빈번히 등장했다. 그녀는 마녀로 지목당했음에도 끝까지 부인하다 죽임을 당했는데, 너스 가문이 정착 과정에서 푸트남 가와 토지 문제로 분쟁이 있었다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거다. 또한 새로 부임한 사무엘 목사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예배 공동체를 ‘공교회’라고 선언한 기득권 신자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불참한다는 이유에서 몇몇 이웃들을 비난했다. 그 이름들도 여지없이 소녀들의 목록에 등장하여 ‘마녀’로 고발당했다. 하지만 가톨릭이나 국교회도 아니고 어찌 한마을에 하나의 공교회만이 존재할까? 그런 규율과 형식주의가 싫어 고국을 떠났던 청교도들이, 이제 같은 이유로 이웃을 정죄하게 된 거였다. 이런 까닭에, 소녀들이 ‘마녀’라고 고발한 사람들은 반드시 여자일 필요가 없었고, 그 목록에는 바로 직전까지 세일럼에서 교회 사역을 인도했던 조지 바로우(George Barrow)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교수형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곳에 없기를 기도하자’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정확하게 주기도문을 암송했다.(양정호, 26쪽)
그런데 유럽에서 일었던 마녀사냥이 마녀 승인과 화형으로의 수순으로 진행되었다면, 세일럼의 마녀재판은 그 전개가 조금 별났다. 끝까지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저항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 중, 곧바로 자신이 ‘마녀’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위에 복종할 것을 맹세한 이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소위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아! 초기 정착 가정들이 기득권을 지키고자 소녀들의 불안한 히스테리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사회정치적 적을 쳐낸 사건이었구나. 그 과정에서 꼬리를 내리고 복종을 맹세한 사람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던 거구나. 어린 시절 멋모르고 어른들의 농간에 조정당하여 가장 많은 마녀를 지목했던 앤 푸트남은 1706년, 자신의 잘못을 공개사과했다.
1692년에 우리 아버지의 집안에 내려졌던 슬프고도 비천한 섭리에 대해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때 나는 어린아이였고 그러한 신의 섭리에 의해 나는 여러 사람들을 가혹한 범죄자로 고발하는 도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빼앗겼으며 지금 나는 그들이 무죄한 사람들이었음을 믿게 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들과 올바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슬픈 시기에 나를 기만한 사탄의 엄청난 미혹이었습니다.(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온라인 문서 자료 “Salem Witch Trials Documentary Archive and Transcription Project”를 양정호, 20쪽에서 재인용)
불과 10여 년 전에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증언을 했던, 같은 교회 문 앞에서 자신이 ‘사탄의 농간에 놀아난 것’이라고 고백했던 앤 푸트남에게 ‘사탄’은 누구였을까? 용서를 구하는 소녀들(이제 더는 소녀가 아닌 여인들)은 가해자였을까, 피해자였을까? 물론 이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대립적 범주로 묶어 판단하고 결론을 내릴 만큼 간단하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하지만, 겨우 십대를 넘기고 있었던 사춘기 소녀들은 매일 밤 거실에 모여 앉은 부모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웃에 대한 저주와 비방과 신앙적 경멸의 언어들로 인해 ‘고통받았고,’ 성장한 뒤에는 자신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에 ‘고통받았다.’ 이 슬픈 사건에 대한 연구 논문을 쓴 양정호는 소녀들이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온 ‘마녀들’을 지목한 것이 “어른들의 폭력적인 대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양정호, 21쪽). 매우 동의가 되는 분석이다. 오늘은 어떠한가? 17세기, 근대가 시작되던 계몽과 자유의 시절에 있었던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마녀재판이 행여 21세기에도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어른들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대화로 인해 여전히 소녀들이(그리고 소년들이) 고통받으며 적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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