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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장자莊子, 2001 스페이스 어 오디세이(스탠리 큐브릭감독/1968년도 작품)
조길성
한 달포쯤 되었을까. 새벽 다섯 시를 넘긴 시간에 시인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나 장자莊子 이제 마무리한다.” 새벽 산책 중 불쑥 전해오는 이야기에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인가를 몇 시간동안 나누었으나 그저 멍해있었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종일토록 머릿속이 진공상태였다. 정신에도 무중력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구나 싶었다.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외 4편으로 등단한 시인이 장자를 붙들고 살아 온 날들을 헤아려보니 올해로 꽉 찬 사십년이다. 우연일까 우연이라 해도 참으로 기가 막힌 세월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도 사십이면 불혹인데 여기서 시인과 장자는 각자의 길을 가려한다. 장자를 떠나 진정한 소요유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결별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장자와의 대화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일까 오리무중의 상태가 한참 계속되었다.
시인이 「장자」로 등단한 것을 알면서도 이십여 년 동안 그저 고전취미려니 하고 깊이 생각해 보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의 시집『성에꽃 눈부처/창작과 비평』이 출간되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1998년 1월이었다. 시집에는「금」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다.
금
손이 공검 사과한테로 간다 가서 다른 살이 된 햇살 흙 물이
농부의 땀과 하나로 쥐인다 그 시절에 손은 눈부신 손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눈부신 뜻을 모른다 그이 손이
공검 사과를 잡는 것을 본다 얼마나 큰 뼈가 바늘만한 작은 뼈들이
되어 상상할 수 없는 구멍들 속으로 들어왔는지 이것은 하나일 뿐
부인의 눈부신 손은 국토도 모른다
<*표시 아래 생략>
시집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시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다른 시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금」이 화제에 올랐다. 처음 시집을 펼쳐 읽으면서 「금」에 이르러 말 할 수 없는 무엇을 느낀 적이 있었던 터였다. 이거 뭐지? 우리 시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세계를 접하면서 당혹감과 함께 어렴풋이 밀려오는 감동이 있었다. 이런저런 시에 대한 느낌들이 오가고 내 차례가 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나름대로 무어라 주절댄 것 같은데 시인이 눈을 반짝이더니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뒤로도 「금」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이 시를 품게 한 씨앗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시집 제목은 왜 『성에꽃 눈부처』이며 부처는 또 어디에서 오신 걸까. 젊은 시절 출가했었다는 이야기를 드문드문 듣고 있었기에 혹 「금」이 윤회라는 뿌리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한동안 이전에 나온 시인의 모든 시집을 이 잡듯 뒤져보았으나 석연찮은 앙금 비슷한 것만 남았다. 그러던 중에 산문집『은빛 물고기』를 읽으며 장시『리틀보이』에서 왜 서시로「에스키모의 시」를 선택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땐 장시 『붕새』를 비롯해서 장자연작을 읽기 전이었으니 오리무중이긴 마찬가지였다.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멀리 남쪽으로 그녀는 떠났네
민족들의 남쪽, 우리들의 남쪽으로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멀리 동쪽으로 그녀는 떠났네
민족들의 동쪽, 우리들의 동쪽으로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멀리 북쪽으로 그녀는 떠났네
민족들의 북쪽, 우리들의 북쪽으로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나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멀리 서쪽으로 그녀는 떠났네
민족들의 서쪽, 우리들의 서쪽으로
집으로 오라, 집으로 오라.
이 「서시」는 마리아 쿨름 제단에 새겨진 괴테의“언어는 거룩한 침묵의 바탕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애 소개된 「에스키모의 시」이다. 이 시에는 거대한 우울이 있다. 그것은 이중의 두려움을 지닌 인간의 우울이다.
「에스키모의 시」전문
시인은 어느 자리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늘 조용하다. 술을 마셔도 웬만해서는 취하지 않는 주당이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요즘은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 얼마 전에는 아무 이유 없이 이 세상 바닥이 꺼져 사라지고 만상이 몸으로부터 분리해 나가는 듯 한 체험을 하며 쓰러졌다. 병원에서 검사란 검사는 모두 해 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참 이상한 체험을 들려주었다. 어쩌면 「에스키모의 시」를 소개하는 산문에 실마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 시에는 거대한 우울이 있다. 그것은 이중의 두려움을 지닌 인간의 우울이다.’ 언젠가 김영산시인이 내게 해준“고형렬시인이 ’시인은 죽어봐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내게도 ’시인은 날마다 죽는 사람‘이라 했다. 거대한 이중의 두려움을 가진 인간의 깊은 우물을 지닌 시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게도 얕지만 비슷한 우물이 있어 느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착각이었을까.
어느 날 둘이서 대취한 새벽이었다. 그리 살갑게 대하던 시인이 무슨 말 끝에 정색을 하며 “네가 내 속에 들어와 본 것 같지, 어림없어 까불지 마 임마”하는 것이었다. 온갖 험한 사람들을 겪어 본 나이지만 그렇게 나지막이 그러나 지독하기가 그토록 그지없는 욕은 처음 들어 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그 지독함이 어디서 오는지 뿌리가 궁금해졌다. 깊은 무엇이 통하는 느낌이 들면서 오히려 시인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고향, 구멍〔규(竅)〕
저 구멍들이 나의 몸의 구멍이 아닐까. 저 구멍들에서 내가 온 게 아닐까. 그 속에서만 나는 위로가 되고 치유되고 잠들 수 있을까. 그 구멍 안엔 무엇이 있는가. 왜 구멍이 있는가. 언제나 존재는 다치기 때문인가. 구멍은 무엇을 육체로 옷 입고 있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은 욕망을 다 채울 없는, 그 구멍이 있는 중규(衆竅, 지상에 있는 모든 중생과 사물들의 구멍)의 개물個物인가.
구멍에 들어가 소리를 들어본다면 내가 꼭 사람일 근거와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얼마든지 다른 무엇일 수 있지 않을까. 소리였을까. 귀로 들을 수 없는 천뢰, 기로 들어야 하는 천뢰를 듣는 요요함이 없다면 이 세계는 무통無通의 절벽.
그러니 나는 그저 바람이길 바란다. 바람이길 바라는 나는 저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인간이 예뻐질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을 떠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곁에 따라가고 싶다. 요요한 바람소리를 듣는 무궁한 상아喪我여 네 안에 무엇이 있을까.
<중략>
태양과 바람과 지구의 자연과 인간, 그리고 방황소요, 적막황홀 이 모든 것이 바로 망각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소요와 제물은 물화物化 속에 있다. 물物은 자아를 잊는 ‘나’이다. 상아 속에 존속의 자아가 물화된 대상들의 바깥. 언어와 마음으로도 소통될 수 없는 세계.
즉 유정무정의 만물이 상아한 자아들의 방황. 어찌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려 하는가. ‘나’를 찾지 말고 ‘나’를 잊어라.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인아人我이다.
놀라운 사실이다. 만물의 침묵 속에 나는 있다. 나는 만물 속의 한 개개箇箇이다. 나는 장자의 그 독獨으로서 바람소리를 들으면 요요가 되고 슬퍼진다. 고향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의 그 구멍에서만 바람소리는 나오고 우리도 그 소리를 배워 그렇게 우는 존재들이다.
『시인 고형렬의 장자<제물론> 바람을 사유한다/희래출판사』 중에서 P44~45 부분
이 글을 통해서 나는 시집『성에 꽃 눈부처』의 시 「금」을 선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시인은 나중에 자신이 집필하게 될 네 권의 장자에 대한 책들에 관통하는 깨달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악을 품고 동해를 향하던 그 마음이 가출로 이어졌으리라 그 방황과 절망이 언젠가는 시인을 “길은 커다란 곡선을 그린다. 결국 내가 출발했던 설악 입구에 나는 도착하게 되지 않을까. 나의 데뷔작 「장자」에서 표현한 ‘두 번째 노란 꽃잎’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고형렬 문학앨범 『등대와 뿔』에서〕 ‘두 번째 노란 꽃잎’이 피어있는 곳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 않을까. 같은 책에서 시인은 말한다.
설악은 위대한 정신의 병풍이다. 준봉과 바위, 나무와 물과 새, 짐승, 눈과 어둠, 바람들
이 살고 있다. 아직도 그곳엔 혼령들이 있다. 나는 설악이 없는 동해를 생각할 수 없다. 첨 예한 대립으로 마주 대한다. 만경창파의 동해와 만학천봉의 설악이다. 그곳이 나의 ‘서울’ 이다.
눈은 그 산에서 생겨 나의 온 나라에 흩날렸다. 그러면 생각하지 말라 해도 나라를 걱정 하게 되고 모든 마을과 도시, 사물과 삶을 살피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시詩일 것이다. 나는 감히 속초의 시인들과 함께 그런 엄청난 시를 쓰고 싶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 그래 서 시인은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다루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 에 대해. 또 너무 우울했던 것에 대해. 자신만을 성찰하는 눈에 대해. 그래서 시를 썼지 다 른 것을 위해 시를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중략>
속초를 떠나고 서울을 또 떠나서 이 지평砥平에서 사십 년 만에 다시 읽는 장자의 「제 물론」에서 그것을 비피무아非彼無我라고 했다. 그렇다. 그대가 아니면 나는 없다. 그날엔 그가 나의 이름으로 그 산을 넘었지만 오늘은 다른 그의 이름으로 그 산을 넘고 있다. 작 은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결국은 저 푸른 창해에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서 파닥이며 그 바다의 가슴 물결에 댄 채 소스라치게 놀라 스며들면서 사라지는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형렬문학앨범『등대와 뿔』중에서
글머리에서, 얼마 전 새벽통화에서 시인이“나 장자莊子 이제 마무리한다.”라고 표현했으나 사실은 “나 이제 장자 끝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끝냈다.’와 ‘마무리한다.’는 큰 차이가 있으나 ‘마무리한다.’라 쓴 것은 끝은 시작과 암수 한 몸이기에 그리 쓴 것이다.
‘나 장자 끝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8년도에 개봉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어 오디세이>가 떠올랐다.
영화는 수십만 년 전 초기인류가 어느 날 직사각형 검은 기둥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첫 장면은 암흑에서 시작되는데 문명의 암흑일 수도 있고 우주의 대부분을 이루는 암흑물질을 암시할 수도 있지만 우주의 본질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인류는 서로 떼를 지어 영역 싸움을 하다가 검은 기둥을 동물의 뼈로 두들기며 무기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한 초기인류가 무기로 사용하던 짐승의 뼈를 공중으로 던지는데 다음 장면에서 뼈가 우주정거장으로 변화하는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다. 수십만 년이 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장면은 달의 뒤편에서 전해 오는 이상한 전파를 탐지한 과학자들이 우주선을 달의 뒤편으로 보내는 장면이다. 거기서 두 번째 검은 기둥을 만나게 된다. 검은 기둥은 목성을 가리키는데 우주인들은 어떤 신비한 차원의 통로를 따라 목성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인조인간 할이 반란을 일으켜 대원들을 죽이게 된다.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인조인간 할을 제거하게 된다. 도착한 목성에서 주인공은 늙어가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세 번째 검은 기둥을 만나게 되면서 주인공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투명한 원형 안에서 태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태아가 푸른 별 지구를 바라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대사도 별로 없고 끝없는 침묵으로 가득한 영화이다.
검은 기둥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암시도 없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검은 기둥은 인류문명에 대한 처음과 끝인, 그리고 영원히 풀 수 없는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 자체가 아닐까.
영화에서는 거론하지 않았으나 감독이 사석에서 한 이야기인데 초기인류가 던진 뼈가 우주정거장이 되는데 사실은 우주핵공격기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본질인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하여튼 닭발 대신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감독의 의도를 전체맥락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장자의 곤이 붕새가 되는 과정은 엄청난 도약이며 무지막지한 비약으로 읽힌다. 여기서 던진 뼈가 우주정거장이 되는 장면과 겹친다. 시인이 책 『장자의 하늘 시인의 하늘』에서 “이 지구가 평화가 아니라 불화의 세계라면 어쩜 이 붕새는 영조靈鳥가 아니라 흉조凶鳥일지 모른다.”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무궁자無窮者의 꿈은 해체이며 혼돈이다. 이 지상의 아름다운 무궁자는 사라졌다. 비만오고 바람만 불 뿐이다. 하늘의 궁륭은 캄캄하고 별만 빛날 뿐이다. 아무도 인간과 지구에 말을 걸지 않는다. 무궁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언어이며 이름이다.”
영화에서 인조인간 할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조건 목성에 도착해야한다는 프로그램이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인공지능이 인간본성이나 인간의 근본특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다. 시인의 장시집『리틀 보이』에서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이름이다. 감독의 우주정거장이 우주핵공격기지를 의도했었던 것과 통한다. 우연일까.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이 문장은 성립하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므로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그러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증명할 길이 없지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에르덴조 사원에서 에르덴조 사원을 생각하거나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하려다가 생각을 못하고 놓친다
시「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부분
영화 <2001 스페이스 어 오디세이> 끝 장면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만나는 주인공이 또 한편으로 태아가 되는 모습은 인류가 수십만 년 문명을 축적한 끝에 마주치는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장자를 끝낸 시인이 다시 마주한 것은 어떤 얼굴일까 위에서 이야기된 “길은 커다란 곡선을 그린다. 결국 내가 출발했던 설악 입구에 나는 도착하게 되지 않을까. 나의 데뷔작 「장자」에서 표현한 ‘두 번째 노란 꽃잎’이 있는 곳.”일까. “만경창파의 동해와 만학천봉의 설악이다. 그곳이 나의 ‘서울’”일까. “그날엔 그가 나의 이름으로 그 산을 넘었지만 오늘은 다른 그의 이름으로 그 산을 넘고 있다. 작은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그러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증명할 길이 없지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있다.’와 ‘없다.’는 ‘시작’과‘끝’이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시인이 말한 ‘끝냈다’를 깊이 고민만 했을 뿐 잘 모르겠다. 이렇게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내 글이 부끄러울 뿐이다. ‘아무도 인간과 지구에 말을 걸지 않는’ 길 위에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