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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 본문 : 창세기 46장 28-30절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전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악한 일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슬픔까지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슬픔이 크면 클수록 기쁨도 큽니다. 야곱의 인생이 그랬습니다.
생명처럼 사랑했던 요셉을 잃었습니다. ‘아버지,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형들에게 심부름 갔던 아들이 악한 짐승에게 찢겨죽었습니다.(37:33) 요셉의 죽음 앞에 야곱은 수도 없이 자책했을 것입니다. ‘내가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판 형들이,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죽은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요셉의 죽음은 실재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인생에 요셉의 죽음보다 더 슬픈 일은 없었습니다.
야곱은 수많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난 아픔. 에서를 피해 사랑하는 부모님과 정든 고향을 떠나 도망갔던 일.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당한 고통. 가나안 헤브론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었던 일.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리브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것도 야곱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죽음도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합한 것보다 요셉을 잃은 것이 더 큰 슬픔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오래도록 애통한 적이 없었습니다.(37:34)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두 눈으로 요셉을 보고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목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29절에는 ‘얼마 동안’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원어의 뜻은 ‘반복하여’ 또는 ‘계속하여’입니다. 그래서 일본어성경은 ‘泣き続けた’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계속 울었습니다.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기쁨의 눈물입니다. 울고 또 울고 계속해서 우는 기쁨의 눈물입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요셉을 만난 야곱은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죽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이 말은 ‘이제 죽더라도 기쁘게 죽을 수 있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야곱은 죽음이 주는 슬픔까지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큰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야곱, 죽음이 주는 슬픔까지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큰 기쁨을 누리고 있는 야곱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크면 클수록 기쁨도 클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야곱과 같은 슬픔 속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야곱의 기쁨이, 이 시간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위해 야곱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베냐민을 내려놓으십시오.
요셉을 잃어버린 야곱에게 있어 막내 베냐민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사기 위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낼 때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서 애굽까지 가고 오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만에 하나 길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집을 떠난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는데, 행여 베냐민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베냐민만큼은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베냐민은 꼭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요셉을 잃어버린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었던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산 것이 아니라 베냐민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자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냐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야곱을 몰아가십니다. 2년 동안의 기근으로 자신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것입니다.
43장 14절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야곱은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드디어 베냐민을 내려놓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신 것을 몰랐습니까? 알지요.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가축을 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사백 명을 이끌고 오는 에서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에 집착하느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베냐민을 사랑하느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베냐민만 바라보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새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 하나 맡길 수 없는 허수아비 같은 하나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백 명을 이끌고 오는 에서를 향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걸어가던 야곱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갔습니까? 어떻게 아들 하나 하나님께 맡길 수 없는 믿음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야곱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실망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지켜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실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했으니 이제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소망하겠습니까? 베냐민입니다. 요셉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잃어버리고 베냐민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야곱처럼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주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의 간절한 소원을 외면하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의 눈물의 기도를 거절하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하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천하고 부끄러운 자리까지 낮추십니까?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말입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왜 이것이 자아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라고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의롭고 이런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불의합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이러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숨겨진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무섭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이런 자아를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은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내려놓을 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아이들이 고집 부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를 주었습니다. 과자를 받은 아이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과자봉지가 잘 뜯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뜯을 수가 없습니다. 빨리 과자를 먹고 싶은데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니 나중에는 짜증을 냅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빠가 손을 내밀면서 아이에게 말합니다. ‘아빠가 뜯어줄게.’ 그런데 아이가 아빠의 손을 뿌리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과자봉지를 뜯으려고 난리를 칩니다. 그래도 찢어지지 않으면 울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아빠가 다시 손을 내밀며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뜯어줄게.’ 그런데도 끝까지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힘으로 하면 됩니다. 아이의 과자봉지를 뺏어서 뜯어주면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빠는 그대로 지켜봅니다. 만약 그때 과자봉지를 뜯어주면 아이가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빠 말 들었으면 되는데 제가 고집을 피웠네요. 잘못했습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난리를 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아빠가 끼어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 성질 하는 아이는 아빠가 뜯어준 과자봉지를 내던지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의 모습이 꼭 우리의 모습 같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을 냅니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는 하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당신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절대로 맡기지 않습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내가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도 안 되니 혈기를 부립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계십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비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허락 없이 우리의 마음을 도둑질합니다.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허락 없이는 우리의 마음을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원은 억지로 주실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말입니다.
이년의 기근을 겪으면서 야곱은 자신의 한계를 보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베냐민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기근이 오년 동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붙잡고 살았던 베냐민도 죽게 됩니다.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내려놓습니다. 요셉을 잃은 슬픔이 있지만 베냐민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자아를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만납니다. 그래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2. 순종하십시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야곱은 결코 요셉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급히 오시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마리아가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11:32) 이렇게 말하면서 마리아가 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울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향해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
우리도 마리아처럼 나사로를 잃은 슬픔 때문에 울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전능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돌을 옮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었는데 끝났는데 더 이상 소망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기뻐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통해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순종할 때 죽은 나사로가 살아가고, 순종할 때 우리의 슬픔은 기쁨이 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거면 처음부터 나사로가 죽지 않도록 지켜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모든 상황과 모든 사건을 통해, 슬프고 아픈 일을 통해, 심지어는 악한 일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을 통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11:45)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셔서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 70명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슬픔을 기쁨으로 만드시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왜 나에게 이런 슬픔이 찾아왔느냐고 불평하지 마시고, 이 일을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니다. 그러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3.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십시오.
야곱은 어떻게 요셉을 만났습니까? 야곱은 어떻게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까?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는 믿음의 조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부끄러움이 있어도, 어떤 고통이 있어도 야곱은 이 사명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믿음의 아버지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죽는 슬픔 속에서도 묵묵히 믿음의 아버지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것처럼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 그리고 유다. 모두 악하고 부끄러운 인생이었습니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합니다. 능력 있고 없고가 중요합니다.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건강도 외모도 학력도 중요합니다. 집안배경과 자라난 환경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지킬 때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이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있으면 감사하지만, 없다고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크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것들이 없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디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것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좌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소유와 건강과 외모와 학력과 집안을 자랑하고 의지한다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가 늘 고백하는 것처럼 모든 것 주님이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자신의 가정과 아들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악한 일들이 일어나도,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어 오랫동안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능력입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충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 어느 선교사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니 이룬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교현장은 마치 여리고성과 같았습니다. 현지인은 아낙 자손과 같았습니다.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 작고 초라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선교지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고 선교사님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눈으로 보면 가정이 선교지입니다. 학교가 직장이 선교지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일본 땅은 정말 선교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용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 가정에서도 일어납니다. 학교와 직장에서, 일본 땅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믿음 하나 지키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의 자리, 믿음의 아내 믿음의 남편의 자리, 교회 안에서 맡겨진 사명의 자리, 때로는 너무 힘들고 무거워서 도망가고 싶습니다. 야곱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믿음의 조상으로 살아가는 사명, 믿음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사명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이 분명한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이 분명한데 어떻게 도망갈 수가 있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그 은혜를 아는데 어떻게 도망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힘들고 무거워도 하나님이 불러주신 사명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사명의 자리가 생명의 자리라는 것을 알기에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자리를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바꿔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잘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묵묵히 주님 바라보고 주님이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지킨 것뿐인데, 이 하나를 보시고 우리에게 과분한 축복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을 떠난지 햇수로 17년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셨으면 83세입니다. 몸이 안 좋으셔서 수술과 오랜 병원생활을 하셨지만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이야 작아도 매월 어머니에게 용돈을 보내드리고 있는데 그때는 그럴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아들노릇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도 남아있는 슬픔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미 한 줌의 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천국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 그때에 나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모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역사를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까지 품고 갈 슬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우리의 모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 기쁨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슬픔과 비교할 수가 없는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죽는 그 날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소망 때문에, 현재의 슬픔도 넉넉히 이겨나간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슬픔은 있지만 기쁨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래의 기쁨이 현재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어떤 슬픈 일을 만나도 항상 기뻐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야곱처럼 베냐민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 말고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자아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무덤의 돌을 옮겨놓는 순종의 사람이 되십시오. 아무리 연약하고 부끄럽고 슬퍼도 사명의 자리, 믿음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죽지 않고 사는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능히 역사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통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