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항해’, ‘난파’
오뒷세이아는 말할 것도 없이 철학자-시인인 헤시오도스와 루크레티우스부터 인생은 거친 바다에서의 난파 그리고 단단한 대지 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구경꾼이라는 맞짝의 패러다임으로 조망되어 왔다. 그것이 인간의 삶에 대한 서구사유의 근본 패러다임 중 하나가 되었으며, 어느덧 근 3천여 년에 이르는 사유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바다에서의 항해라는 실천praxis 그리고 관조theoria, 즉 이론이라는 맞짝, 궁극적으로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로 표상되게 된 철학의 이상의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과 관련된다.
달랑 2장의 사진으로만 남기를 원했으며, 심지어 강의 시간 전후뿐만 아니라 강의 도중에도 질문조차 거절한 은둔의 고수가 들려주는 서구사유의 새로운 속살들.
서양근대의 ‘정당성’이란 기독교의 ‘이단’인 영지주의의 도전에 대한 서양 중세의 대응 실패를 재‘수리’하기 위한 시도에서 유래한다는 ‘과격한’ 주장으로 20세기 후반의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니클라스 루만의 격찬을 받은
‘별종 중의 별종’인 철학자!
하이데거의 자장磁場에도, 마르크스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권역에도, 벤야민의 아우라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독창적이고 풍성한 사유를 길어 올린 ‘절대적 독자’!
자기보존, 자기주장,
신화의 변주, 근대의 자기-정당화, 세계의 독해 가능성 등
저자가 생산해낸 이질적이고 독보적인 사유의 프리즘은 푸코의 고고학이나 데리다의 차연과는 완연히 다른 사유의 길을 연다. 가령 쿤에 따르면 근대는 ‘패러다임 전환’에 의해 중세와 단절한 채 일거에 등장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근대는 ‘자기’가 ‘자기’를 ‘정당화’해야 하는 특이한 역사적 시대이다. 그리고 과거의 우상을 혁파하고 근대의 ‘신기관’을 창조한 베이컨에 밤에는 주술과 마술에 매달렸듯이 근대 또한 많은 측면에서 고대의 영지주의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신화’를 변주하고 있을 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하늘 아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새롭게 조명하는 경이의 철학자가 여기 있다.’
헤스오도스와 루크레티우스부터 괴테와 니체까지, 인생과 철학 또는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틀인 실천/이론의 장대한 고고학!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알려진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풍파’ 한 번 겪지 않고 일종의 ‘모범적 삶’을 산 사람이 외려 왜 저런 한탄을 하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거꾸로 무수한 난파와 고난과 역경을 견디며 항해를 계속하는 오뒷세우스는 모든 것이 ‘우물쭈물’하는 이타카로 향하지만, 단테에 따르면, 고향에 머물며 ‘우물쭈물’하지 못하고 다시 ‘미지의 것’을 찾아 항해에 나선다.
삶의 은유인 항해를 둘러싼 이러한 사유의 패러다임, 즉 미지의 것-항해-난파-구경꾼-재항해의 순환은 이미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들과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해부터 인간과 인간의 삶을 해명하기 위한 기본 모티브로 등장하기 시작해 ‘궁극의 겁쟁이’ 괴테를 거쳐 사유의 ‘모험가’ 니체에 이르기까지 몇 천 년에 이르는 사유의 계보학을 갖고 있다. 저자는 철학이나 신학 등의 거대한 사유 체계를 기준으로 서구 사상사나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얼핏 사소하지만 인간의 삶을 가장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은유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읽어낸다.
가령 저자의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서구 지성사를 가장 크게 가르는 단절은 파스칼의 ‘우리는 이미 승선했다’이며, 그것 이상 가는 구분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21세기 또한 파스칼 이후 시대의 연장일 뿐이다(가령 포스트모던은 물론 모던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파스칼 이전에 우리는 거친 바다에서 난파당하는 배를 단단한 육지에서 관조할theoria 수 있었으나 이제 배에 승선한 이상 이론과 실천의 분리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우리가 승선한 배는 계속 난파할 운명이므로 철학 또한 그에 맞게 변주되며, 이제는 선박의 수리술과 항해술이 모든 이론을 대신하게 되는데, 그것이 과학과 기술이다(즉 과학과 기술에서는 ‘관조’는 일절 찾아볼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응용, 즉 실천이다). 하지만 이 배는 21세기의 배라고 하지만 단지 과거로부터 떠내려온 것으로 기워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나 삶에 더 이상 ‘새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시대인 21세기에 뜬금없이 ‘과학철학’이 아니라 인문학이 시대의 교양으로 호출되는 희귀한 장면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철학자’나 ‘사상가’로 접해온 어떤 사람과도 다른 아이디어와 발상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시대’와 ‘역사’ 그리고 ‘철학’이라는 일종의 거대 담론을 탈구축하고 해체한다. 그것은 데리다의 차연 개념과도 다르고 또 푸코의 지식-권력의 고고학과 다른 새로운 사유의 경지를 열어주며, 우리의 삶과 세계를 새롭게 사유할 것을 유혹하고 있다.
청춘이 ‘벼락거지들’이 되는 등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난파되어 가고, 우리의 미래는 주식과 부동산이라는 미지의 바다에 투기, 투사되며 ‘구경’은 증오와 혐오로 물들고 있는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는 어떤 ‘이론’이 필요할까?
평생을 거의 은둔하며 달랑 2장의 사진만으로 남길 바라며 야밤에 친한 친구들과 나누는 전화 말고는 세상의 거의 모든 책을 읽어 책=세계를 구축하려고 한 ‘기이한’ 사상가. 하이데거의 자장磁場에도 또 마르크스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권역에도 또 벤야민의 아우라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독창적이고 풍성한 사유를 길어 올린 ‘절대적 독자’! 일찍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을 위한 철학보다는 영지주의 등 ‘세계를 위한 철학’을 중심으로(저자가 보기에 고대철학의 중심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이 아니라 회의주의, 퓌론주의, 데모크리토스 등이다) 서구사유의 새로운 고고학을 시도한 저자 입장대로 철학자들끼리 이루어지는 개념사보다는 ‘우주와 삶’, ‘원자라는 물질과 영혼이라는 초월 세계’가 본래적 의미의 ‘철학’에 가깝다(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위의 개념들이 거의 사라지거나 인간 중심화되는데, ‘천체’, 즉 우주 연구와 관련해 소크라테스는 계속 입장을 번복한다. 그리고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지나치게 악마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너 자신을 알라’는 준험한 준칙이나 플라톤의 ‘이데아’보다는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패러다임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우리 삶의 진상에 더 가깝지 않은가? 물론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철학 또한 나름의 가치를 갖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단단한 대지’ 위에서 저 먼 바다에서 벌어지는 난파를 보면서 내리는 처방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바다의 난파에 대해 ‘너 자신을 알라’는 조언은 요령부득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인지 이후 철학은 현실과는 무관해 보이는데, 이후 철학자=왕을 아무리 구상해보아도 인류 역사에 ‘성인군자’가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것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저 먼 난바다에서 고난당하는 타인을 단단한 대지 위에서 바라보는 구경꾼이라는 본서의 모티브는 오늘날의 인터넷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즉 인터넷이라는 대양의 저 먼 어딘가를 ‘항해하는navigate’ 정체모를 타자의 희로애락을 모바일폰이나 컴퓨터화면이라는, 멀리 떨어진 동시에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는 네티즌이 그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현대문화에 대한 성찰적 비판서로 본서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특히 가령 한국에서는 ‘먹방’ 등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며 인터액티브 미디어를 대변하게 된 유튜브는 이제 전통 미디어를 상징했던 TV, 즉 ‘바보상자’와는 전혀 다른 경지의 시각문화를 대변하게 되었다. 아마 ‘난파선’/‘구경꾼’이라는 저자의 패러다임은 21세기의 그러한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과 관련해서도 여느 이론 못지않게 적실성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우리가 ‘유튜브’라는 배에 ‘이미 승선했음’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