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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참풍수지리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907kys
< B.C. >
194년-고구려, 진대법 실시
3세기초-공손씨, 대방군 설치
209년-고구려, 국내성에 도읍
260년-백제(고이왕), 16관등과 공복 제정
313년-고구려, 낙랑.대방군 격파
371년-백제,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살해, 백제, 한성에 천도
372년-고구려, 불교 전래, 태학 설치
382년-신라 내물왕, 전진에 사신 파견
384년-백제, 불교 전래
405년-백제, 일본에 한학 전함
427년-고구려 장수왕, 평양성 천도
433년-신라, 백제 군사동맹 성립
475년-백제, 웅진성(옹주)에 천도
502년-신라, 우경 실시
520년-신라, 율령반포, 백관의 공복을 제정
527년-신라, 불교를 정식종교로 공인
536년-신라, 연호 사용
538년-백제, 사비성 천도
545년-신라, 국사편찬
552년-백제, 일본에 불교 전래함
586년-고구려, 장안성에 천도
612년-고구려, 살수대첩
624년-고구려, 당으로부터 도쿄 전래
645년-고구려, 안시성 싸움 승리
647년-신라, 첨성대 건립
660년-백제 멸망
668년-고구려 멸망
676년-신라 김유신 장군, 삼국통일(三國統一)
682년-국학을 세움
685년-9주 5소경 설치
698년-대조영, 진국 건국. 발해의 등장
722년-신라, 정전 지급
751년-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움
788년-독서삼품과 설치
828년-장보고, 청해진 설치
834년-백관의 복색제도를 공포
888년-신라, 삼대목 편찬
900년-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년-왕건, 고려 건국
926년-발해, 거란에 멸망. 유민, 고려 투항
935년-신라 경순왕, 고려에 항복. 신라 멸망
936년-고려, 후백제를 멸하고 통일 성취
956년-노비안검법 실시
958년-과거제도 설치
976년-전시과 실시
982년-중앙관제 정비
992년-국자감 설치
996년-철전(건원중보)주조
1009년-강조의 정변
1019년-귀주대첩
1076년-관제개혁, 전시과 개정
1102년-해동통보 주조
1107년-윤관, 여진 정벌
1123년-이자겸, 정권 장악(~26년)
1135년-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45년-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년-무신정변
1179년-경대승, 도방 정치
1196년-최충헌, 정권 탈취(~1258년)
1198년-만적의 난
1219년-몽골과 통교(국교=수교)
1231년-몽골의 제1차 침입
1232년-강화 천도
1234년-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간행
1236년-고려대장경 새김(~1251년)
1270년-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對몽골 항쟁
1274년-여, 원의 제1차 일본 정벌
정도전(鄭道傳)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 유학자, 혁명가로서 본관 봉화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 정치와 이에 기생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성리학(신유학) 이념에 기초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 조선왕조 건국 · 성립 관련 중핵 · 핵심공헌 하였다.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1342년 10월 6일 출생했고 지난날 한때 1347년에서 1348년까지 그 자신의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다.
고려 시대 시절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됐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혁명공신 그는 조선왕조 이념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 놨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마찰
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후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과정,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후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시절
이방원 휘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 - 백이정 - 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이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시대 복권됐다.
생애 초반출생과 가계
삼봉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주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여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유년기
이색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 곳은 영주와 양주 삼각산이다. 정도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 뒤 성균관에서 대사성이자 성균박사 이색을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학과 소년기
포은 정몽주와는 이색의 같은 문하이자 학문적 친구이고 동지였다가 조선 왕조 개국 여부의 의견 차이로 인해 갈라져 그와 정적이 된다.
유년기 그는 가학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학문을 배우고, 개경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면서 그는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 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대사성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보,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당시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는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백성이 불교에 귀의함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경영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자체 기약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정몽주에게서 유교 경전들과 성리학과 시들을 배우고 영향을 받았으며,또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을 이야기했고 여기에 대해 정몽주는 깊이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조선 건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359년-홍건적의 침입(~1361년)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기공민왕 시대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1363년-문익점, 원에서 목화씨 들여옴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 관련 순탄하지 않았다.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우 씨가 1366년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 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성균관 경내
1367년 성균관을 중영하고 그해 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1370년 그는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며 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의 무모한 전횡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등용되었다. 1374년(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 당시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관직 생활과 권문세족과의 갈등친원파, 권문세족과의 갈등
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다.
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북원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는데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다.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복흥 등이 원나라와의 이중 통교를 주장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 등 권신의 노여움을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귀양길에 곤장까지 맞을 뻔하였는데 때마침 일어난 석기의 난 때문에 경황이 없어 장형은 당하지 않았다.
1376년-최영, 왜구 정벌
1377년-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무기 제조(화통도감 설치), 직지심경 인쇄
석방과 교육 활동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유랑하며 지냈다.
그 후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짓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다.
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 시기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성계와의 만남(1383년)
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
개혁 정치와 정변 기도이성계와 역성혁명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蒼茫歲月一株松 /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生長靑山幾萬重 /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好在他年相見否 /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人間俯仰便陳蹤 /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 —정도전,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양국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승습(承襲)과 공민왕의 시호를 받아 귀국하였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좨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1388년 음력 6월)
1388년 음력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전국적인 토지 몰수와 균등 재분배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우왕의 장인인 최영,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같은 해, 우왕을 내쫓고, 이색의 주장으로 창왕을 세웠고,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를 제거하였다.
1388년-이성계 위화도 회군 및 실질권력 장악
1389년-박위 쓰시마섬 정벌, 고려34대 공양왕 즉위
정변과 공양왕 추대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와 정득후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폐가입진이라는 명분을 구실로 공양왕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으며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나 이에 대해 조선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은 이를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았고 현대 학계에서도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
이성계, 조준 등과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헌으로 그는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 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경연지사(經延知事)에 올랐다. 그 해 1390년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명 태조에게 밀고하는 윤이 이초 사건이 발생하자,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곧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과전법의 제정
우창비왕설
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했고, 정도전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 후,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 등을 신우와 신창(우왕과 창왕을 말한다)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그들을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유배당하였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그는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유배되자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상소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해 4월 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서,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됐다. 그 후 6월 10일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1392년-공양왕 폐위 및 고려왕조 멸망, 이방원 정몽주 제거 및 태조 이성계 조선왕조 건국선포 07.17일자=양력08.05일자 &개성 수창궁 초대 군왕 즉위/ 07.18일자 태조 이성계 명나라 사신 파견 및 신왕조 교체사실 통보 / 07.19일자 신왕조 교체사실 승인요청 사신 잇따라 파견 신왕조 사신 접견 명태조 주원장 한반도 정권교체, 이성계 군왕즉위 인정 및 국호개정 관련 빠른 시일내에 알려 달라반응 “배신 (陪臣 ) 조임 (趙琳 )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삼가 예부 (禮部 )의 자문 (咨文 )을 가지고 왔는데 , 그 자문에 ,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 이번 고려에서 과연 능히 천도 (天道 )에 순응하고 인심에 합하여 , 동이 (東夷 )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 (?端 )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 사절 (使節 )이 왕래하게 될 것이니 , 실로 그 나라의 복이다 .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 명나라의 승인에 기뻐한 이성계는 문무백관들 도당 모아놓고 국호 개정을 의논하게 하였고 도당내 왕조의 국호로 조선 (朝鮮 )과 화령 (和寧 )을 추천했다 . 한반도내 신 왕조측에서는 단군조선 관련 문화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도였는데 반하여, 대륙내 명나라 측에서는 기자조선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 관련 쾌히 동의했고 즉 논어에 등장하는 은(殷) 나라의 현인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 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 하였다는(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단 의미므로 명 태조 주원장 기준상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임을 인식 한듯했다. / 08.13일자 태조 이성계 신천도 공식선포 및 건국 · 혁명1등공신-정도전 & 국사 = 왕사-무학도사 동행 개성 => 신도읍지 및 적임 천도지 물색목적 · 목표 출발
역성혁명과 조선왕조 건국조선왕조 건국(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신 왕조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인사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조선의 첫번째 임금인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라일의 중요한 부분을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신 왕조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 및 성안 52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국정 방안 수립과 병권 장악
이후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고, 개국공신 1등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로 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관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7월 20일 도평의사사사 겸 상서사사(尙瑞司事)가 되었다. 7월 28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된 뒤 봉화군(奉化君)에 봉군되었다.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초기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 계룡산에 대한 반대 상소가 올라가자 정도전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여 태조는 새로운 길지를 선정하게 하였다.
1392년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승인 받아왔다. 12월에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 1392년 11월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1393년(태조 2년) 7월 다시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토벌, 회유하고 되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되돌아온 뒤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1393년 9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0월 관습도감판사(慣習都監判事)를 거쳐 1394년(태조 3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 도총제사가 되어 지방의 병권까지 장악하였다.
체제와 관제의 정비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그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일 것을 계획하였으며, 경세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나라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주장,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주 · 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지목했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미신이라 여겨지는 불교와 노자교(老子敎), 무속 등을 압도하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는데,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를 쓰거나 승료들과 교류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유교를 전파하고자 조선 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1393년-단군조선 관련 문화와 전통 · 정신 을 계승한다는 목적 및 의도 기반하여 국호관련'조선 (朝鮮 )'이라 결정 / 태조 이성계 건국 · 혁명1등공신-정도전 & 국사=왕사-무학도사 일행 개성=> 신도읍지 및 적임 천도지 물색과정 진행기간[1단계 물색지: 충남 계룡산 신도안 對 한양-한강 이북] => [2단계 물색지: 무악=신촌 對 북악]
1394년-고려34대 공양왕 승하, 09월 무렵 [3단계 물색지: 인왕 對 북악]태조 이성계 일행 한양-한강 이북지역 도달
무학대사 : (풍수를 따져봤을 때) 서산(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을 좌청룡으로 하고,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궁궐을 동쪽을 향하도록 짓는다면 북악산 용맥으로 연결되는 좌청룡과 남산으로 연결되는 우백호가 조화를 이뤄 왕조는 태평천하를 얻은 것으로 한 마리 커다란 용과 호랑이가 궁궐을 양 옆에서 지켜 보호하는 형태일 것입니다.
무학대사가 간곡주장 · 호소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論 => 유방(酉方)을 등지고 묘방(卯方)을 향한 좌향. 서좌동면西坐東面=서좌동향西坐東向즉 집터 따위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있는 것을 가리켜 의미하고 일컫는다.
주산(主山)인 인왕산(仁王山; 338m)관련 후덕하고 수려하여, 정치수완 순탄· 출중급-훌륭한 후덕현군들 대부분에,
左靑龍 &右白虎인 북악산=표고342m과 남산=표고270m로 좌우 높이 & 균형 일치 · 동향 바라봐 북악산-殺伐殺氣 對
관악산-强熱火氣모두 막아내고 피하며 右白虎비하여 左靑龍좀더 강하고 높아 장손 흥왕형국이다.
▼ < 하늘에서 바라본 무학대사의 인왕산-주산론=>仁王山-主山論 >
정도전 : 그 무슨 궤변이오! 옛날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고 정치를 하여 천하를 다스렸소!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
“제왕이 남쪽을 바라봐야지, 어찌 동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중국의 모든 역대 황제들이 궁을 남향으로 지은 데는 이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도전이 밀어붙이고 극력 주장했던 임좌병향(壬坐丙向)論 =>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좌향.
제왕남면帝王南面=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즉 북서방향을 등지고 남동방향을 바라보는 방향 가리켜 의미하고 일컫는다.
남산=표고270m이 높은반면, 낙산=표고125m이 매우 낮고 허한만큼 최고군왕 - 군주 항상 불안하며, 左靑龍, 右白虎인 낙산=표고125m과 인왕산=표고338m의 높이가 불균형하여 항상 불신· 불안정된 정국 & 형국이다.
사진 그대로 등지고 있는 북악산-殺伐殺氣악영향 정면받고 남향 바라봐 관악산-强熱火氣관련 정면 노출상태에다 左靑龍비하여 右白虎한결 강하고 높아 차손 흥왕형국이다.
▼ < 하늘에서 바라본 정도전의 북악산-주산론=>北岳山=白岳山 -主山論 , 낙산이 매우 낮음 >
說明 : 조선왕조 개국·건국초기 군주 및 측근세들은 북좌남면=제왕남향 원칙화했다. 조선대표 법궁 경복궁,그리고 창덕궁을 보면 쉬운 납득· 이해된다. 그 무렵· 시절,명나라 사대주의 빠져있어 사실상 제후국임을 천명한 이성계는 중국 주나라 주공 저술[주례고공기]기반하여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야 궁궐을 남향(南向)으로 배치할 수 있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도전의 명분에 힘이 실렸습니다. 당시 실권자 · 건국1등공신였던 정도전 혁명세력들은 신왕조 궁궐방향 관련 서쪽으로 둘 수 없단 이유에서였고 정도전을 위시한 중국식-유교세력들 견해 및 주장 관련 무게 실리고 힘을 얻음으로서 조선왕조 정궁-경복궁 관련 북악산 세력권 아래 놓이고 들어서며 앉혀지게 됐습니다. 무학대사의 말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는다면 궁궐은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도전도 자신 앞날 관련 몰랐기 때문인지 그로부터 4년 후 1398년 08월 26일 심야 새벽2시대 수송방(現在종로구청 부근)에 살고 있었던 정도전은 중학천 계곡에서 시(詩 )한 수 읊으며 술이나 한잔 하자는 혁명동지 남은 전갈을 받고 송현(松峴-現在한국일보 부근)에 있는 남은 애첩 누각에서 남은, 박이, 장지화 등과 함께 한잔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 일파에게 참살되고 말았다. 각기병 &복창 합병증세 앓았던 정도전은 이방원 면전대고"예전 태조 즉위년 정안군께서 이미 나를 살린만큼 지금도 또 다시 살려 주시오."그믐달 가까워오는 칠흑 같은 밤. 이방원 앞에 무릎 꿇은 정도전 위와 같이 애원했다. 예전이라 말하는 것은 지난1392년 태조 이성계 조선 초대 즉위년 정도전이 정몽주 세력한테 죽을 위기에 처했을 당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4월 26일자 정몽주를 정리-제거함으로서 살아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했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을 처음 계획, 설계하여 이성계 중심 조선 건국을 가능케 한 반면 자신 아버지 이성계를 군신으로 대하지 않고 동지 및 정치 라이벌로 생각하는 정도전. 이복동생 방석을 옹립하여 후대를 도모하려는 정도전. '사병혁파'라는 미명 내세워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던 정도전. 이방원에게는 살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이방원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흐르는 듯하더니 이어"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 그리도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느냐?"일축하며 즉시 목을 치라는 추상같은 명령 내렸다. 따라서 정몽주와 정도전 경우 '조선건국 &신천도=兩大國事' 사이에 두고 6년 4개월 간격으로 이방원 의해 제거된 것이다. 평상시 정도전은 한(漢) 고조(高祖)가 장량(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장량이 고조를 통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장량에 비유하며 자신을 치켜세움으로서 겸손하지 못한 그의 성격이 주변으로부터 질시와 시기를 야기·초래했으며 이성계와의 관계를 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혁명동지로 인식했다는 것이 그의 최대 부덕이었다. 이러한 그도 정몽주 일파로부터 처형위기 직면시 이방원이 구해줬고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은만큼 결국 정도전의 목숨은 이방원의 수중 있었던 셈이다. 또한 정도전 본인이 그토록 두렵다고 설파한 골육상쟁이 현실로 나타났다. 정도전이 죽던 날 세자 방석이 이복형 이방원에 의하여 주살됐고 조선왕조 역사상 제1차 왕자의 난(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이라고 일컫는다. 1392년 7월 건국 당시 조선 군대는 일체화 결집되어 있지 못했고 각 절제사들이 시위패를 거느리는 형태로 이뤄져 있었으며 원래 시위패는 공민왕 시절 궁궐을 지켜 , 국방을 안정 시키기 위해 마련된 조직인데 , 조선 건국 무렵에는 그 시위패들을 절제사들이 사병처럼 활용하고 있어 당시 절제사들은 국가의 명령 없이도 시위패를 지휘할 수 있었 기 때문에 사병이나 마찬가지라 이런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세력은 정안군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과 건국공신 세력들이었다 .역사 가정법 없다해도 "제왕남면帝王南面 =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임좌병향(壬坐丙向)論者" 정도전 관련 태조 이성계 조선건국· 초대즉위 후 개성 다음가는 신왕조 적절-천도지 물색전 시점 이방원 세력 의한 제거되지 않고1392년 08월 중순/말~1398년 08월 26일까지 무렵 6년간 늦춰진 사실 좀더 구체표현 한다면 이방원측 정도전 심중[부친 이성계 향한 군신관계 비하여 건국1등공신 신분 내세워 동지· 라이벌 생각· 인식하고 이복동생 방석 왕위옹립 및 후대 도모하며 사병혁파 &병권 집중화운동 목적상 이방원 수족 잘라냄=사실 정도전,남은세력들은 조선건국 초기부터 요동정벌계획 세우고 있었고 이를 위해 병권을 집중 시키고 있었다. ※정도전 세력 병권 집중화 운동은 이렇듯 이방원을 포함한 여러 왕자들과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유력한 신하들에게 깊고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기에 사병이 혁파되고 병권 오직 삼군부 귀속 된되면 혹 자신들이 일시 제거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며 결국 1398 년 8 월 중순무렵 이성계 명령 의한 왕자들의 시위패가 폐지 되었다 .다만 세자의 친형 방번이 거느린 시위패만 유지 시켰고 더군다나 방번의 군대만이 유지되고 있었기에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과 사병 세력은 병권 집중화에 주력하고 있던 정도전 세력들 제거기회를 엿보게 되었다]대하여 한결 민첩-신속감지· 파악했거나 조선건국 이후8월 중순~말(=조선건국 후 ~ 신천도지 물색 전)시점내 만일 잠재화근 가능성 대비목적 정도전 정리·제거 못해내어 조선왕조 태평천하 유일무이-호시기 놓침으로 불행 및 비극역사 연속전락 · 타락현실 진정의미상 대단히 아깝고도 아쉬운'늦춰진 놓쳐버린6년'세월 아닐 수 없는데다1392년내 4월 정몽주 제거와 7월 조선건국 선포 후 7~8월중 제왕남향 & 북좌남면-임좌병향론자 정도전 제거 실현됐어야 했다. 그야말로 1392년 7월 조선왕조 건국 이후 2년 6개월채 안 되는 기간내 1394년 시점발 한 사람의 깊고 크나큰 조선왕조 정궁 배후· 주산 관련 판단착오식 결정 비롯한 전반 불행·비극역사 이어 내려온 것으로서 성씨별 표현하면 왕조 태평천하 제안자 왕사 죽산 박씨 - 박자초 = 무학 견해 대하여 왕조 건국 · 혁명실세 친명사대주의 정책 기반/입각자 봉화 정씨 - 정도전 극력반대 의해 초대 군주 전주 이씨 - 이성계 궁극결정 의한 불행역사 씨앗 심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백성들을 위한 재상정치를 꿈꾸며 가슴에 품고 있던 웅지를 다 펼치지 못하고 죽은 정도전 시신은 오늘날까지 찾을 방법 없고 묘소 자체도 없다. 경기도 평택 위치 봉화정씨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집성촌 정도전 묘역 존재반면 실제 시신이 묻혀져 있지 않은 實質공묘空墓=허묘虛墓불과하다. 후대 비슷사례로는 대한제국 시대 안중근 열사 · 일제강점 시대 유관순 열사등을 들 수 있다. 인왕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국사=왕사'계월헌'무학대사(本名:박자초) 유좌묘향(酉坐卯向)기반화 제안 비하여<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제안자 건국 · 혁명1등공신-'삼봉'정도전 임좌병향(壬坐丙向)論 궁극수용 / 09월 27일(음력 08월 24일)도평의사사 상신(上申)따라 한양-한강이북 지역 수도 결정/11.26일자 개성출발~ 11.29일자 한양 도착 및 공식천도 단행 되어짐.
한양 천도(1394년 11월 29일)
경복궁 근정전
한성부 지도
1392년 8월 13일 무렵부터 태조는 수도를 옮길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년 태조의 명에 따라 정도전은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였고, 태조는 한양을 신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한양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本名 : 박자초 1327년 ~ 1405년]는 지금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 반면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라 王都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의 각 궁궐과 전각, 문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 사회에 걸맞은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 했으며,
그 해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정도전이 경복궁을 설계할 때 근정전(勤政殿)이라 지은 것이다. 또한 한성의 사대문과 사소문의 첫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18년간 궁중에서 연주됐다.
조선 건국(1392년) 이후 정권 투쟁
세자 책봉 문제
조선왕조 건국 후 시기되는 태조실록 태조 1년(1392년) 8월 20일 기록을 보면 조선의 첫 세자책봉 당시 기록이 나오는데 그런 이성계의 의중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立幼孼芳碩爲王世子(입유얼방석위왕세자)> 어린 서자 방석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初功臣裵克廉 趙浚 鄭道傳請建世子(초공신배극렴 조준 정도전청건세자)
欲以年以功爲請 上重康氏意在芳藩(욕이년이공위청 상중강씨의재방번)
芳藩狂率無狀 功臣等難之 私相謂曰(방번광솔무상 공신등난지 사상위왈)
"若必欲立康氏出 季子差可"(약필욕립강씨출 계자차가)> 건국 초기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의 공신은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장자와 공적에 따라 정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러나) 임금(上)은 부인 강씨의 뜻이 방번에게 있는 것을 중히 여겼으나, 방번이 사납고 경솔하며 공적(狀)이 없어 공신 등이 곤란해 했다. 그들은 사사로이 서로 말하기를"만약 반드시 강씨 소생의 아들을 세우고자 한다면 막내(季子)가 조금(差) 낫겠다"고 했다.
及是 上問誰可爲世子者(급시 상문수가위세자자) 未有以立長立功切言者(미유이립장립공절언자) 克廉曰 "季子爲可" 上遂決意立之(극렴왈 "계자위가" 상수결의입지)> 이 때에 임금이
"누가 세자가 될 수 있는가?"라 묻자 장자를 세워야 한다든지, 공적에 따라 세워야 한다고 단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임금이 뜻을
정하고 그를 세자로 세웠다. 그런데 이 사건이 후일 피비린내 나는 제1차 왕자의 발생원인이 되어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과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진 계기가 되기도 하구요.
조선왕조 건국 전 이성계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후일 신의왕후로 불린 한씨와 신덕왕후로 불린 강씨입니다. 고려말 귀족들에겐 향처(鄕妻)와 경처(京妻)가 있었던가 봅니다.
향처란 지방 부임지에서 부인을 삼은 여자를 말하고, 경처란 수도에서 부인을 삼은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성계도 두 부인 중 나중에 얻은 어린 경처 강씨를 좀 더 아끼고 존중했던 모양입니다.
태조실록에서 첫 부인 한씨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데 강씨에 대해선 "강씨를 왕비로 세우고 현비라 했다(立康氏爲顯妃)"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태조실록은 후대 태종 때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태조실록의 기록으로만 보면 이성계는 후처인 강씨의 눈치를 많이 본듯하여 초기에 강씨 소생 두 아들 가운데 맏이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는데
공신들이 방번은 사람됨이 사납고 경박해서 안된다고 반대를 하자 고민 끝에 막내 아들인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고 있습니다. 첫 부인인 한씨 소생의 다섯 아들, 그러니까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은 애시당초
세자책봉 마음이 없었기에 이 것 후일 피비린내 나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원인이 됐습니다.
적장자(嫡長子) 위주의 왕위 계승은 유학을 근본으로 삼는 왕조의 기본 원칙입니다. 이걸 지키지 않았기에 방원으로서도 명분이 있었던 셈이지요. 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인 방번과 방석을
모두 죽이고 난 뒤,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동복 형인 방간까지 죽입니다. 그러자 이성계의 아들 구운데 남은 사람이 첫째인 방우, 둘째인 방과, 셋째 방의 그리고 다섯째인 방원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첫째인 방우는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하자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갔고, 셋째인 방의는 병약하여 권력욕심이 없었다 하고, 둘째인 방과가 정종으로 왕위를 잠시 계승했다가 결국 태종 방원에게 양위를 하게 됩니다.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련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가운데 다섯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제일 컸던 영향상 이 일로 격분했다.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 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 관련 대부분 분노하였다. 이 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世子侍講院貳師)의 한 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11월 29일[西坐東向 =酉坐卯向 < 帝王南向 = 壬坐丙向]. 그야말로 조선왕조 건국일[=1392년 7월 17일]시기로부터 2년 4개월 12일째 ,
그리고 천도 공식선포 · 논의 및 신천도지 물색개시[1392년 8월 13일]시기로부터 2년 3개월 16일째 접어든 경과 무렵 일이었다.
1395년-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임좌병향(壬坐丙向)論 의하여 대략10개월간 걸친 전국 사찰의 승려들과 1만 5천여 백성들을 적극동원된 국가공사 끝09월말~10월초순 무렵 한양부 -> '한성부' 개칭 · 경복궁 준공 및 조선왕조 실질정궁 경복궁 완공
첫째로,서울은 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에서 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을 관장하고, 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을 관장하는데,조선왕조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장자보다는 지손=차남 · 삼남들이 한결·훨씬 잘 되었으며 여인(원경황후 & 명성황후etc)들과 외척(민씨일가etc)의 발호가 드세었다. 또 동쪽이 허(虛) 하다보니 동쪽에 있는 외적(일본-무장왜구)의 침략 및 침입 관련 약했다
둘째로, 황천방(黃泉方)이라고 하는 건방(乾方) 즉,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인 자하문 고개가 푹 꺼져있어 황천풍(荒天風)을 받아 험한 일을 많이 당하고, 서북쪽(중국-무장오랑캐)에 있는 적들 군사침입 관련 속수무책이었다.
셋째로, 좌향(坐向)이다.궁궐의 좌향을 남향으로 하느냐 동향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유학자인 정도전과 승려 무학대사는 의견을 달리 했는데 왕은 남향을 하여야 한다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서울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다. 만약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 으로 동향을 하였다면 자왕향(自旺向)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길한 방향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인왕산 대신 북악산(북현무)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우백호인 인왕산(높이 330m)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높이 110m)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동쪽 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만 옹성을 쌓고 허약한 좌청룡의 지기를 돋우기 위해 산맥 모양의 之자를 넣어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다.
다른 한 가지는 경복궁이 살기 내뿜는 북악산을 등지며 남면(南面)하고 있어 관악산의 화기(火氣)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 같이 끝 봉우리가 불꽃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 풍수지리학 차원火山으로 관악산은 오행상 불=火해당되어 그 불기운 관련 궁궐을 누름으로서 화재가 빈번발생 할 것이라고 예언됐다. 이런 불의 기운 악영향 궁궐내 불이 날 것 예방목적 광화문 좌우양쪽 해태상을 세웠다.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 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태조는 그의 상소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395년 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 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다.
한성부의 도시 정비
천도가 확정, 단행될 무렵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94년부터 2년간 그(=鄭道傳)는 한성부의 도시 정리를 추진했다.
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 측량을 하게 했으며, 총책임자는 정도전이 되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 백악산 꼭대기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한성부 시내를 돌아 백악에 이르는 성곽은 총길이 5만 9천 5백 자, 그 중 토성이 4만 3백여 자, 석성이 1만 9천 2백 자, 높이 40자 2치로 정도전은 이 수치를 정확히 계산, 파악했으며, 공사 기간은 여름과 겨울로 농번기를 피해
2기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1396년-한양 천도완료 및 4월 한성부 행정구역 설정 · 9월 각 도성 및 문루들 완성, 정도전 요동정벌 목적'사병혁파'골자 병권 집중화운동 전념·주력
1397년-태조 재위기
1398년-이방원 휘하 병사들 동원 정도전·남은 반대세력 제거 세자 방석· 이방번을 살해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일어남, 건국· 개국혁명1등실세= 임좌병향(壬坐丙向)=제왕남면帝王南面=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論者정도전 숙청 · 척살됨, 태조 이성계 경복궁 퇴위, 2대 군왕 정종 사상 최초 한양 경복궁 즉위
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바로 그는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방원 중심 정변 및 鄭道傳최후
1398년(태조 7) 10월, 그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였다.
10월 6일 정도전은 송현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가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이끌고 남은 첩의 집으로 향한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씌워 정도전을 살해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승자에 입장에서 이방원이 비열한 인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의 최후를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정도전은 신원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흘러오면서 무덤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가묘를 만들어 제사지내고 있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시 사리원이며 부인 최씨의 묘는 양재역 상초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또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곳에는 오래된 무덤 몇 기가 있었는데 그 중 정도전의 무덤으로 보이는 무덤을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꾼들이 여러 번 도굴한 탓에 유물이 적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질이 우수한 백자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목관에서 머리만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몸통이 없는걸로 보아 애초에 머리만 묻힌 무덤으로 보였다.[23] 무덤의 규모는 조선개국 1등공신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초라했지만 부장품의 질, 남아있는 인골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참수당한 정도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굴꾼들이 가져갔는지 지석이 있을 자리에 지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결정적인 증거인 지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배하고 찾아다녔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정황상 유골이 자신들의 조상일 가능성은 높아도 물증이 없었지만 문중에서는 일단 정도전이 아니라고 해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의 조상이라면서 삼봉사 뒤편에 일단 가매장했다. 언젠가 정도전의 것으로 확정이 되면 정식으로 매장하려는 듯. 그래서 삼봉의 가묘는 양재동 위치한 것 아닌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에 있는데 산대마을은 정도전의 후손인 봉화 정씨 집성촌이다.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와 정도전 기념관도 이 곳에 있다.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그의 가묘가 있다.
반발했던 조준은 태종때 중용이 되었고, 한편 정몽주는 태종 때 가서 권근의 요구와 하륜의 지지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20]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 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의도만으로 정도전이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 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 서인 성리학자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22]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23]
1865년(고종 2년) 9월 대비 조씨의 건의로 다시 공신 칭호를 돌려받았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24] 고종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과 제도와 법령 마련, 체제 정비 등의 치적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4월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24]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추대되었고, 그의 묘소가 실전되어 1872년(고종 8년) 왕명에 의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25] 1872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다. 1873년(고종 10) 남인 인사들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복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고종은 정도전 복권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이 조선왕조건국에 끼친 공로를 추앙하여 복권을 한 것으로, 기존의 조선왕조에서 복권이 된 사람들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계유정난때 희생된 사람들과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 남이의 옥사에 희생된 남이, 기묘사화 때 희생된 기묘명헌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함으로써 다시 그에 대한 폄하가 시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3년 11월, 2007년 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 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26]정도전의 신권정치(臣權政治, 재상중심의 정치)가 독일식 총리제, 영국식 수상제, 스위스식 집정부제와 같은 정권들을 통하여 경제개혁, 토지개혁으로 이어졌듯이 토지공동체와 같은 정책으로 땅의 제 역할이 회복될 수 있는 정도전의 정전제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국판 토지 뉴딜(New Deal)정책이었다는 평가다.
정도전의 묘가 경기도 과천현 10리 동쪽에 있다는 전설과 소문을 근거로 과천 일대의 야산을 탐사한 결과 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과 함께 많은 양의 고급 조선백가 함께 발견되었다. 정도전 사당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권신들과 감정적 대립 역시 심했고, 그가 우왕 대 복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른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 둘 현실과 타협했지만 혼자 끝까지 버틸 정도로 고집도 질겼던 모양.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부로를 훈시하던 오만함이, 유배된 부락의 천인들과의 정서적 교류,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이후 백성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사고관 자리잡게 된다.
다만 주변사람과 충돌하고 과격하며 타협을 모르는 면모는 이후로도 여전했으며, 한번 가진 은원은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철저히 갚는 면모도 있었다. 삼국지의 법정과 유사한 점이 많은데 전반적으로 프로 어그로꾼 성질이 매우 다분한 인물이었다.정도전은 집권 기간 동안 과격한 행보를 보였다. 모든 대신들을 총괄하고 국정을 이끄는 위치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필요한 법이다. 바로 그 과격함, 선천적인 타협을 모르는 기질, 이상주의적인 사상이 정도전을 역성혁명과 개혁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적을 만들지 않고 무탈히 정국을 꾸려나가는 것에는 타협할 때는 타협하고, 굽힐 때는 굽히는 능란한 정치가의 모습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1399년-정종 집권기
1400년-태종 이방원 &회안군 이방간 간 개경내 무력충돌 발생 및 수적우세 방원 승리종결 제2차 왕자의 난, 방간(芳幹)의 난 또는 박포(朴苞)의 난 일어남. 박포 사형 및 회안군 유배됨.
2대 군왕 정종 경복궁 퇴위, 개성 수창궁 3대 군왕 태종 즉위
1401년-태종 집권기
1402년-호폐법의 실시, 신문고 제도 실시
1403년-태종 집권기
1404년-태종 집권기
1405년-태종 집권기
1406년-태종 집권기
1407년-태종 집권기
1408년-태조 이성계 창덕궁 광연루 별전 승하, 후일 세종 충녕군 책봉
1409년-태종 집권기
1410년-태종 집권기
1411년-태종 재위기
1412년-후일 세종 충녕군 충녕대군 진봉
1413년-조선 8도의 지방행정조직 완성
1414년-태종 재위기
1415년-태종 재위기
1416년-태종 재위기
1417년-태종 재위기
1418년-장남 양녕대군 폐세자 결정 및 삼남 충녕대군 왕세자 책봉 , 3대 군왕 태종 퇴위(~1422년까지 대리청정), 4대 군왕 세종 즉위
1419년-2대 군왕 정종 승하
1420년-집현전 설치 유망인재 &학문진흥, 경자자 주조 활판인쇄 기술 발전
1421년-세종 후일 5대 군왕 문종 왕세자 책봉 결정, 왕세자 문종 책봉 결정 무렵 ~ 1450년 군왕 즉위시까지 부친 세종 정치보필
1422년-3대 군왕 태종 연화방 창경궁 승하
1423년-세종 집권기
1424년-세종 집권기
1425년-세종 집권기
1426년-한양 대화재 발생경시서(京市署)북쪽 행랑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인가1630호, 남부350호, 동부190호 전소
1427년-박연 경기도 남양생산 옥제 국산편경제작
1428년-세종 집권기
1429년-주종소 설치 편종 법식대로 제작, 정초 농사직설 편찬, 군사인석척군 폐지, 석척희 금지
1430년-농사직설 반포, 공노비 출산휴가법 제정, 편배 금지,
1431년-세종 집권기
1432년-세종 집권기
1433년-4군 설치
1434년-갑인자주조 활판인쇄기술 발전
1435년-세종 집권기
1436년-병진자 주조 활판인쇄 기술 발전
1437년-6진 설치, 세종 장영실 · 이천 등에게 지시 앙부일구 &자격루
1438년-세종 집권기
1439년-세종 집권기
1440년-세종 집권기
1441년-왕세자 문종 승휘 권씨 세자빈 혼인, 세자빈 권씨=현덕왕후는 단종을 출산 하루째 산욕 = 산후병 사망
1442년-왕세자 문종'이향' 부친 세종 와병 · 국정수행불능 전락 의한 세종 승하=1450년까지 대략8년 대리청정 기간내 국사 = 국정운영 수행
1443년-훈민정음 창제
1444년-5남 광평대군 별세
1445년-7남 평원대군 별세, <용비어천가>편찬
1446년-훈민정음 對民반포, 왕비 소헌왕후 별세
1447년-<용비어천가>발간
1448년-6대 군왕 단종 왕세자 책봉
1449년-왕세자 문종 대리청정기
1450년-4대 군왕 세종 퇴위,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승하, 5대 군왕 문종 즉위,
1451년-문종 집권기
1452년-문종 수양대군 관습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임명, 5대 군왕 문종 퇴위 및 승하, 6대 군왕 단종 즉위,
1453년-수양대군 중심 최측근 세력 의한 '계유정난' 일어남, 안평대군 강화도 유배,
1454년-단종 자신'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1등관'서훈
1455년-6대 군왕 단종 퇴위 , 7대 군왕 세조 즉위, 세조 후일[경국대전]제작 개시 및 착수특명(~1484년 12월)
1456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57년-6대 군왕 단종 서인(노산군)강봉· 강원도 영월 청령포 사약 의한 사망=사사, [경국대전]제작 과정
1458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59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0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1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2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3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4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5년 -[경국대전]제작 과정
1466년-직전법 실시, [경국대전]제작 과정
1467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8년-7대 군왕 세조 퇴위 및 승하, 8대 군왕 예종 즉위, [경국대전]제작 과정
1469년-8대 군왕 예종 승하=급사, 9대 군왕 성종 즉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0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1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2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3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4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5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6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7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8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9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0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1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2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3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4년-『을사대전(乙巳大典)』='영세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경국대전]완성
1485년-『을사대전(乙巳大典)』=[경국대전]전면시행
1486년-인문지리서<동국여지승람>간행
1487년-성종 집권기
1488년-성종 집권기
1489년-성종 집권기
1490년-성종 집권기
1491년-성종 집권기
1492년-성종 집권기
1493년-성종 집권기
1494년-성종 집권기
1495년-10대 군왕 연산군 즉위, 9대 군왕 성종 승하,
1496년-연산군 집권기
1497년-연산군 집권기
1498년-연산군, 무오사화 일으킴
1499년-연산군 집권기
1500년-연산군 집권기
1501년-연산군 집권기
1502년-연산군 집권기
1503년-연산군 집권기
1504년-연산군, 갑자사화 일으킴=훈구파 한명회 & 한치형 & 정창손 & 심회 부관참시
1505년-연산군 재위기
1506년-박원종 중심'중종반정'일어남, 10대 군왕 연산군 강제폐위 · 교동도 유배됨, 연산군 승하, 11대 군왕 중종 즉위
1507년-중종 집권기
1508년-중종 집권기
1509년-중종 집권기
1510년-삼포왜란 일어남, 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1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2년-임신약조, 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3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4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5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6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7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삼포왜란 대책상[축성사]=>[비변사]개칭·설치
1518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9년-조광조 중심'기묘사화'일어남, 조광조 실각 · 사약등 진보 사림파 세력 대규모 귀양-유배사태, 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0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1년-관상감 판관 송사련 &평민 정상 무고사건 '신사무옥' 일어남, 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2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3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4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5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6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7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남곤 사망, 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1528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1529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1530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관찬지리서<신증동국여지승람>간행·편찬
1531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중중 김안로 동지경연사·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춘추관사·성균관사·이조판서·자의금부사·도총부 도총관 임명. 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2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3년-중종 서장자 복성군 사사시킴, 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4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5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6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7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8년-중종 집권기
1539년-중종 집권기
1540년-중종 집권기
1541년-중종 집권기
1542년-중종 집권기
1543년-중종 집권기
1544년-11대 군왕 중종퇴위 · 승하, 12대 군왕 인종 즉위,
1545년-12대 군왕 인종 승하'급격독살설'추정 · 자동퇴위, 13대 군왕 명종 즉위, 대윤일파 숙청 을사사화
1546년-명종 집권기
1547년-'을사사화'뒤처리격 양재역 벽서 사건
1548년-명종 집권기
1549년-명종 집권기
1550년-직진법 폐지
1551년-명종 집권기
1552년-명종 집권기
1553년-화재 의해 경복궁내 근정전외 편전 · 침전 상당구역 소실
1554년-명종 재위기
1555년-유권해석서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반포, 을묘왜변, 을묘왜변 계기[비변사]상설기구 · 독립관청
1556년-명종 집권기
1557년-명종 집권기
1558년-명종 집권기
1559년-임꺽정의 난(~1592년)
1560년-임꺽정의 난
1561년-임꺽정의 난
1562년-임꺽정의 난 (海西大賊 林巨正)토벌됨
1563년-왕세자 순회세자 죽음
1564년-명종 재위기
1565년-문정황후 사망
1566년-명종 집권기
1567년-13대 군왕 명종 급격승하 · 자동퇴위, 14대 군왕 선조 즉위
1568년-선조 집권기
1569년-선조 집권기
1570년-선조 집권기
1571년-선조 집권기
1572년-선조 집권기
1573년-선조 집권기
1574년-선조 집권기
1575년-선조 집권기
1576년-선조 집권기
1577년-선조 집권기
1578년-선조 집권기
1579년-선조 집권기
1580년-선조 집권기
1581년-선조 집권기
1582년-선조 집권기
1583년-선조 함경북도 경원부'니탕개의 난'신립 파견 격퇴함, 율곡 이이<시무육조(時務六條)>상소/제안
1584년-선조 집권기
1585년-선조 집권기
1586년-선조 집권기
1587년-선조 집권기
1588년-선조 집권기
1589년-정여립의 난'기축옥사'
1590년-선조 재위기
1591년-일본측 제안 [정명가도]요구 거부표명함
1592년-일본 일방침략 및 [征 明 假 道]요구 거부 의한 임진왜란 일어남(~1598년), 이순신 장군 사천해전 &한산도 대첩, 진주목사 김시민 진주대첩
1593년-권율 장군 행주대첩
1594년-왜란 전란기
1595년-왜란 전란기
1596년-왜란 전란기, 종실 출신 이몽학의 난
1597년-정유재란 일어남, 원균 장군 칠천량 해전 대참패, 조선수군 제해권 상실 및 정유재란 확전사태, 이순신 장군 명량대첩
1598년-노량해전 및 이순신 장군 전사, 7년전란 임진왜란 종전
1599년-선조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노토 정벌 의견15개항으로 정리·보고 관련 극찬 & 전폭지지 천명
1600년-선조 집권기
1601년-선조 집권기
1602년-선조 집권기
1603년-선조 집권기
1604년-선조 집권기
1605년-여진족 의해 동관진 함락당함
1606년-선조 집권기
1607년-선조 6남 서장자'연쇄살인 범죄자'순화왕자 요절 및 사후'순화군'복권
1608년-14대 군왕 선조 승하 · 자동퇴위, 15대 군왕 광해군 즉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건의'경기선혜법'경기도내 사상 최초 대동법 실시
1609년-일본과 전문13조 송사조약=기유조약 체결, 광해군 영창대군 & 김제남 동반'역모죄'동복형=선조 서정자'범죄자'임해군 진도 유배·사사시킴
1610년-허준<동의보감>마무리 · 완성
1611년-창덕궁 중건사업 완성
1612년-봉산옥사'김직재의 옥'사건 일어남
1613년-대북파 중심'계축옥사'칠서지옥(七 庶 之 獄 )일어남, 광해군<동의보감>간행
1614년-광해군 집권기
1615년-광해군 집권기
1616년-광해군 집권기
1617년-광해군 집권기
1618년-광해군 집권기
1619년-광해군 집권기
1620년-선조 5남 서자'범죄자'정원군 사망,
1621년-광해군 집권기
1622년-광해군 집권기
1623년-'인조반정'일어남 광해군 강제폐위, 능양군16대 군왕 인조 즉위, 인조 부친 정원군'원종'시호 추존함
1624년-이괄의 난
1625년-인조 집권기
1626년-인조 집권기
1627년-청나라前身후금군간 전란(정묘호란)일어남,
1628년-인조 집권기
1629년-인조 집권기
1630년-인조 집권기
1631년-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등을 들여옴
1632년-인조 집권기
1633년-인조 집권기
1634년-인조 집권기
1635년-인조 집권기
1636년-청나라군 간 전란(병자호람)일어남
1637년-인조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 향한'삼배구고두례(三 拜 九 敲 頭 禮 )=3배 9고두례=1차례 절 할 때마다 3차례 머리를 땅바닥부딪힘'굴욕겪음
1638년-인조 집권기
1639년-인조 집권기
1640년-인조 집권기
1641년-15대 군왕 광해군 승하, 인조 집권기
1642년-인조 집권기
1643년-인조 집권기
1644년-인조 집권기
1645년-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과학, 가톨릭교 동서양 서적 들여옴
1646년-인조 집권기
1647년-인조 집권기
1648년-인조 집권기
1649년-16대 군왕 인조 승하 · 퇴위, 17대 군왕 효종 즉위,
1650년-효종 집권기
1651년-김육 주도 충청도 지역 대동법 실시 상소·제안
1652년-효종 집권기
1653년-효종 집권기
1654년-변급 지휘관 임명 · 조총군사100여명, 초관 &통역들을 포함150여명 부대 결성 파병 및 1차 나선 정벌참여(1644년 청나라 건국10년째 사태)
1655년-효종 집권기
1656년-효종 집권기
1657년-전라북도 김제 군수 최유지 수력작동 혼천의 제작
1658년-혜산진첨사 신류(申瀏)장수휘하 조총군 200명 · 초관 기고수등 60여명 동행 흑룡강 &송화강 합류지점 2차 나선 정벌참여, 김육 주도 전라도 연해지역 대동법 실시
1659년-호서지방에 대동법 시행, 17대 군왕 효종'종기악화'침치료 의한 과다출혈 승하 및 퇴위, 기해년 1차 예송논쟁, 18대 군왕 현종 즉위
1660년-현종 집권기
1661년-현종 집권기
1662년-현종 집권기
1663년-현종 집권기
1664년-현종 집권기
1665년-현종 집권기
1666년-현종 집권기
1667년-현종 집권기
1668년-현종 집권기
1669년-이민철 & 송이영 수력작동 개조형 각각 신형 혼천의 제작, 최초 자명종 제작
1670년-경술 대기근 사태
1671년-신해 대기근 사태
1672년-현종 집권기
1673년-현종 집권기
1674년-18대 군왕 현종 퇴위 · 승하, 효종'부인' 현종'모친'인선왕후 별세, 갑인년 2차 예송논쟁, 19대 군왕 숙종 즉위
1675년-숙종 집권기
1676년-숙종 지권기
1677년-숙종 집권기
1678년-숙종 집권기
1679년-숙종 집권기
1680년-경신환국 사건, 남인일파 대규모 정치실각 사태'경신대출척'사태
1681년-윤증 · 송시열 상호간 비방 &험담 회니시비 사건, 단종 '노산대군(魯山大君)'격상
1682년-숙종 집권기
1683년-숙종 집권기
1684년-숙종 집권기
1685년-숙종 집권기
1686년-숙종 집권기
1687년-숙종 집권기
1688년-숙종 집권기
1689년-기사환국 사건, 송시열 중심 서인 대규모 정치실각 사태
1690년-숙종 집권기
1691년-숙종 집권기
1692년-숙종 집권기
1693년-숙종 집권기
1694년-갑술환국 사건, 남인 대규모 정치실각 및 완벽일소 사태
1695년-숙종 집권기
1696년-숙종 집권기
1697년-숙종 집권기
1698년-숙종 집권기
1699년-전국 인구수 577만 2300명 집계=계유년(1693년)비교시 141만 6274명 감소
1700년-숙종 집권기
1701년-신사의 옥'무고의 옥'사태
1702년-숙종 집권기
1703년-숙종 집권기
1704년-숙종 집권기
1705년-숙종 집권기
1706년-숙종 집권기
1707년-숙종 집권기
1708년-경상도 & 황해도 지역등 전국적 대동법 확대시행
1709년-숙종 집권기
1710년-숙종 집권기
1711년-숙종 집권기
1712년-백두산 정계비 세움 · 조선-청나라 양국 국경을 명문화
1713년-숙종 집권기
1714년-숙종 집권기
1715년-숙종 집권기
1716년-노론 송시열 · 소론 윤증 관계상 1681년 있었던 회니시비 관련 숙종'처분=판정'사건
1717년-숙종 집권기
1718년-숙종 집권기
1719년-숙종 집권기
1720년-19대 군왕 숙종 경희궁 융복전 승하 · 퇴위, 20대 군왕 경종 즉위
1721년-신축년 환국사건=신축환국=신임사화=신임옥사
1722년-임인년 환국사건=칼 &독약 &폐출 방법 관련'삼수의 옥 · 삼급수'사태-임인옥=신임사화=신임옥사
1723년-경종 집권기
1724년-20대 군왕 경종 승하 · 자동퇴위, 21대 군왕 영조 즉위, 신임옥사 연루자 숙청
1725년-탕평책 실시, 을사처분 단행 및 노론 세력 재등용
1726년-영조 집권기
1727년-정미년 환국단행, 노론 강경파세력 축출
1728년-이인좌의 난
1729년-영조 집권기, 기유처분 단행 노·소론내 온건론자 두루 등용 초기 탕평책 기초 마련
1730년-영조 집권기
1731년-영조 집권기
1732년-영조 집권기
1733년-영조 집권기
1734년-영조 집권기
1735년-영조 집권기
1736년-영조 집권기
1737년-영조 집권기
1738년-영조 집권기
1739년-영조 집권기
1740년-영조 집권기
1741년-영조 집권기
1742년-영조 집권기
1743년-영조 집권기
1744년-영조 집권기
1745년-영조 집권기
1746년-영조 집권기
1747년-영조 집권기
1748년-영조 집권기
1749년-영조 집권기
1750년-균역청 설치 · 균역법 제정
1751년-균역법 공포 및 시행/실시
1752년-균역법의 시행세칙 〈균역청사목〉반포
1753년-영조 집권기
1754년-영조 집권기
1755년-전남 나주 괘사'을해옥사 · 윤지의 난'사건
1756년-영조 집권기
1757년-영조 집권기
1758년-영조 집권기
1759년-영조 집권기
1760년-영조 집권기
1761년-영조 집권기
1762년-영조, 사도세자 서인폐위 후 임오화변'사도세자 처형'사건 일으킴
1763년-쓰사마發 고구마 전래
1764년-영조 집권기
1765년-쓰시마發 절영도 & 동래 고구마 재배 재배법 연구
1766년-고구마 종자 연구바탕[감저보]간행 및 절영도 최초 재배 고구마 전국보급
1767년-영조 집권기
1768년-영조 집권기
1769년-영조 집권기
1770년-홍봉한'다량천거'사유 의해 십 수년간 관직에서 실각됨, [동국문헌비고]간행·편찬
1771년-창덕궁 진선문 신문고 제도 부활
1772년-영조 집권기
1773년-영조 집권기
1774년-영조 집권기
1775년-영조 지속식 건강악화 의한 세손 정조'대리청정'위임시도 및 정조 반대파'홍인한'반대 극복 · 왕세자 정조 향한 임명권 & 군사권 인계, 왕세자 정조'대리청정'개시
1776년-21대 군왕 영조 경희궁 집경당 폐렴승하 · 자동퇴위, 22대 군왕 정조 즉위, 규장각 개편 및 기구화
1777년-정조 집권기
1778년-정조 집권기
1779년-정조 집권기
1780년-정조 집권기
1781년-정조 집권기
1782년-이유백 & 이택징 & 권홍징 등 모반사건
1783년-정조 집권기
1784년-이승훈의 가톨릭 전도, 정조 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명령
1785년-통합법전[대전통편]편찬, 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기간, 신형 금위체제 목적 국왕호위 전담부대[장용위]창설,
1786년-훈련대장 구선복 &구이겸 & 구명겸 등 무장일파 의한 문양해 내통하 상계군 이담 옹립계획 발각사건 및 이담 자결, 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기간, 금난전권 부여
1787년-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기간
1788년-외교문서집[동문휘고]편찬
1789년-정조 집권기
1790년-정조 집권기
1791년-대규모 천주교 박해'신해박해=신해진산 사건'일어남, 금난전권 폐지
1792년-정조 집권기
1793년-정조[금등문서]공개 · 부친 사도세자 본격 추숭작업 &활동, [장용위]확대·개편[장용영]설치
1794년-정조 집권기
1795년-정조 화성 행차 · 노론벽파 적극기용 개시
1796년-수원화성 건설·축조 , 후일 대한민국 사적 제3호 지정
1797년-정조 집권기
1798년-정조 집권기
1799년-정조 집권기
1800년-22대 군왕 정조 급사 · 자동퇴위, 23대 군왕 순조 즉위
1801년-대규모 천주교 박해'신유박해'일어남, 순조 집권기
1802년-순원왕후 본격 왕비간택, 순원왕후 부친 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대략60년간 세도정치)
1803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경복궁내 인정전 화재소실
1804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화재소실 인정전 복구
1805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06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07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08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09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10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11년-홍경래의 난(~1812년), 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12년-홍경래의 진압됨, 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13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4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5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6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7년-정약용『경세유표(經世遺表)』펴냄 및 이후 저작·집필활동 부진 의한 궁극 미완성
1818년-정약용 48권 16책 구성 필사본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술·편찬
1819년-정약용 『흠흠신서(欽欽新書)』저술·편찬
1820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1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2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3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4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5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6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7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8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29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30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 장악기
1831년-가톨릭 조선교구 설치
1832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사망.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 중심 안동김씨 실권 세도정치 개막
1833년-창덕궁 대조전 포함 궁궐 전체 화재전소
1834년-23대 군왕 순조 승하 · 퇴위, 24대 군왕 헌종 즉위,
1835년-헌종 집권기
1836년-정약용 사망, 남응중 사도세자 서출 정조 이복동생 은언군 손자 회평군 욍위옹립 시도적발
1837년-헌종 집권기
1838년-헌종 집권기
1839년-대규모 천주교 박해'기해박해'일어남
1840년-헌종 집권기
1841년-헌종 집권기
1842년-헌종 집권기
1843년-헌종 집권기
1844년-민진용 &이원덕 사도세자 서출 정조 이복동생 은언군 손자 회평군 욍위옹립 시도적발
1845년-헌종 집권기
1846년-대규모 천주교'병오박해'일어남, 한국 최초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847년-헌종 집권기
1848년-정조 · 순조 · 익종(순조 왕세자)3대 걸친 치적 수록 4권 4책 역사서[삼조보감]간행·편찬
1849년-24대 군왕 헌종 승하 · 퇴위, 25대 군왕 철종 즉위
1850년-철종 집권기
1851년-철종 집권기
1852년-철종 본격 · 실질 친정개시
1853년-철종 집권기
1854년-철종 집권기
1855년-철종 집권기
1856년-철종 집권기
1857년-철종 집권기
1858년-철종 집권기
1859년-철종 집권기
1860년-최제우 동학 창시
1861년-김정호, 대동여지도 제작
1862년-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임술년 농민봉기=진주민란 일어남
1863년-25대 군왕 철종 승하 · 자동퇴위, 26대 군왕 고종 즉위 · 흥선 대원군 집권(섭정),
1864년-흥선대원군 혹세무민 죄명 동학창시자 최제우 체포 · 처형
1865년-[비변사]잔여 기능업무=>[삼군부 / 의정부]분산 및 이관
1866년-대규모 천주교 박해'병인박해'천주교 신자8,000명 &프랑스인 신부9명 순교자 발생, '병인박해'사건 의한'병인양요'일어남,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7년-고종 재위 & 대원군 섭정기
1868년-고종 재위 & 대원군 섭정기
1869년-고종 재위 & 대원군 섭정기
1870년-고종 재위 & 대원군 섭정기
1871년-제너럴셔먼호 사건 의한'신미양요'일어남
1872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3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4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5년-운요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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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개항기 · 대한제국 역대 연대표>>
1876년-조선 대일본 수호조약(강화도 불평등 조약)체결
1877년-고종 집권기
1878년-고종 집권기
1879년-고종 집권기
1880년-고종 집권기
1881년-신사유림단 및 영선사 파견
1882년-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미국 & 영국 &독일 등과 통상조약 체결
1883년-한성순보 발간. 태극기 사용
1884년-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1885년-거문도 사건, 광혜원 설치
1886년-육영공원, 이화학당 설립
1887년-고종 집권기
1888년-고종 집권기
1889년-황해도 방곡령 실시
1890년-함경도 방곡령 실시
1891년-고종 집권기
1892년-고종 집권기
1893년-고종 집권기
1894년-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갑오경장'(~1896년 까지)
1895년-일본인 무장군경 ·낭인패 56명 경복궁궐내 무단침입 왕후 시해사건, 을미의병 일어남, 유길준 서유견문 지음
1896년-고종의 아관파천. <<독립신문>>발간, 독립협의회 설립
1897년-고종, 대한제국 선포 및 대한제국 초대황제 즉위, 피살 왕후 => 황후 추봉 정식시호<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추서됨, 경인선 기공
1898년-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1899년-경인선 최초 개통
1900년-만국우편연합 가입
1901년-고종 집권기
1902년-고종 집권기
1903년-YMCA 발족
1904년-대한시설강령, 대한제국 & 일본 의정서 체결, 경부선 준공, 일본군 경성부·덕수궁 점령, 제1차 한일협약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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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국권피탈 · 상실 · 일제강점기 역대 연대표>>
1905년-일본 강압 의한 대한제국군 감축, 을사늑약 강압 체결 및 대한제국 외교권 일방피탈· 통감부 설치 &통감 , 경의선 개통, 대한제국 화폐정리 및 일본화폐 예속사업(~1909년), 동학교주 손병희
동학=>'천도교'개칭창시
1906년-일본 한성에 조선통감부 설치, 이토 히로부미 조선 초대 통감 취임
1907년-고종,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 3인 비밀리 파견. 고종황제 강제퇴위, 27대 군왕=대한제국2대 황제 순종 즉위, 정미7조약=제3차 한일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해산,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설립
1908년-조선통감부 항일 · 의병활동 탄압목적 경성감옥 신설 및 개소
1909년-나철 대종교 重光, 일본 청나라와 간도를 안봉선과 교환. 의병, 서울 진공 작전, 대한제국 사법권 및 통감·입감사무 위임 기유각서 체결, 안중근 북만주 하얼빈역사 이토 히로부미 사살,
소네 아라스케 조선2대 통감 취임
1910년-소네 아라스케 조선2대 통감 퇴임,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3대 통감 취임, 대한제국 자주국권 피탈=경술국치/대한제국 & 일본열도 국가체제합병 실시됨,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퇴임 및 조선 초대 총독 취임
※비극성 2차례 왕자의 난 즉 양대-骨肉相爭(골육상쟁)좀더 나아가 骨 肉 相 殘(골육상잔)살육전-극단파국 사태에다 태종 슬하 차자-충녕대군 의해 밀려난 적 장자-양녕대군 왕위 폐위까지 부정전례 본뜬 수양대군 중심측근세력들 의한 계 유정난까지 더해져 '장자 왕위계승 · 후덕정치-토착화'비하여 한양-한강이북 신천도 이후 1910년 08월 국권피탈 즉 망국시점까지 27명 군왕등극 반면 서울은 우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좌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상 좌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 관장, 우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 관장, 조선왕조 전체역사를 통해 분석시 장자 비하여 지손=차남·삼남들이 한결 잘 됐으며 장손 즉위자7명 그쳐 전체26%불과했단 사실.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왕조 역사 도합27명 임금 중 단 7명만 적장자 출신 군왕였다. 그 중에서도 단종과 숙종은 그 아버지까지 적장자 출신만큼, 정통성으로 따져보면 조선왕조 양대축 대열이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는 물론 왕조자체 건국 인물만큼 적장자 관련 논할 필요가 없고 조선왕조 초기 역대 군왕 적장자 출신은 3명 불과했고 중~후반기 적장자4명까지 포함, 적장자 출신 군왕들 재위기간 도합20년 채 되지 않았었고 반강압=반강제식-퇴위 및 폐위, 질병 · 건강악화나 약화 의한 단명·병약· 요절 혹은 폭군행태재위자 대부분였단 사실이다
<조선왕조 암울 · 참담급 적장자 승계역사>
조선왕조 적장자 출신 군왕 | ||||||
제5대 | 제6대 | 제10대 | 제12대 | 제18대 | 제19대 | 제27대 |
문종 | 단종 | 연산군 | 인종 | 현종 | 숙종 | 순종 |
세종+소헌왕후 | 문종+현덕왕후 | 성종+제헌왕후 | 중종+장경왕후 | 효종+인선왕후 | 현종+명성왕후 | 고종+명성황후 |
전주이씨 조선왕조 518년간 대대로 실질통치 하여온 27명 조선왕조 시절 역대 군주들이 이룩해 놓은 자산이 무엇이었던가?
도로를 닦아 놓았는가? 철로를 건설하여 놓았는가? 기업들이 생겨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놓았는가? 한글 단어장 1장 마련해 놓았는가?
역대 27명 조선 왕들은 길을 넓게 닦아 놓는다면 오랑캐가 침입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있었던 길도 없앴다. 선조는 임진왜란 난중기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만 했다.
이 27명의 왕들은 조선왕실 휘하 백성, 노예들의 골만 빼먹었다.
조선역대 왕들이 518년 간 쌓아올린 재산은 초가집, 도로 없는 도읍지, 대변 · 소변으로 수 놓은 小路, 민둥산, 미신, 거짓과 중상비방 · 모략등 음모들를 일삼는 미개인들이 공존하는 가두리 땅[朝鮮八道]에 불과했다.
급기야 고종과 민 왕후일족은 부정부패로 왕조전체를 거덜냈고, 이권이 되는 것은 외국 마구잡이로 내다 팔았으며, 결국 왕과 왕족, 고관대작, 지방유지들은 일제로부터 한 평생 호의호식 할 수 있는 거금의 경제적 혜택과 높은 작위 / 직책을 받고 묵묵부답으로 묵종 · 일관하며<銃彈 한 차례 못 쏘고> 국권 · 국토전체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