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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 모두 백 퍼센트 예비 병자들이요 병자 후보자들입니다!
오늘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동시에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언젠가 파리 기차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루르드로 간 적이 있습니다. 열차에 오르니 한량이 여러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배정받은 칸으로 들어가니 2층 침대에 4명이 함께 누워 자게 되어 있었습니다.
좁디좁은 공간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자야된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갑갑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잠들면 탱크가 울고 갈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고니, 민폐가 될까봐, 도저히 잠을 잘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 루르드로 들어갔습니다.
막 안개가 걷히고 청량한 아침 햇살이 눈부신 루르드 성지로 들어서는 순간,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이 어찌 그리 맑아지는지, 그리고 성지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성모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환대가 온몸으로 느껴져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미 루르드에는 저를 포함한 수많은 환자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말끔히 치유되도록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일으켜세워주신 성모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신도 여기저기 몸이 성치 않은 분이시니, 병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십니다. 메시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병자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의 최고 증인은 그분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만나신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주지 않습니까?”
“팬데믹 시대,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집중 치료실에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세상과 단절된 채로 외롭게 맞이하고 있는 환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보건 의료 종사자 여러분, 여러분이 병자들 곁에서 사랑과 힘을 다하여 실천하는 봉사는 직업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명이 됩니다.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는 여러분의 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신 손길의 표징이 됩니다.”
“가톨릭 보건 의료 기관은 지속적으로 보호받고 존속되어야 하는 값진 보화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 교회가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곁에 있음을, 병자들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도 교회가 늘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자 방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하시는 초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병자와 연로한 이들이 집에서 머물며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치유자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모든 병자와 그 가정을 맡겨드립니다. 그들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의미와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기를 빕니다.”
나는 아직 젊고 쌩쌩하니 병과는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세월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느새 우리 역시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며 고생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병자 후보자가 100퍼센트 확실합니다.
주변의 병자들이 오늘 겪고 있는 사무친 고통과 외로움을 나 몰라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병자들은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할 각별한 존재, 수난당하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교회가 얼마나 세속에 물들었는지 알아보는 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세속의 법과 인간적인 욕망에 물들지 않고, 본래의 사명인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남을 수 있을지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마르코 복음 7,1-13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하느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핑계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마르코 7,6-7)
예수님께서는 신앙이 외적인 형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계명은 오직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을 코르반이라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통으로 무시하는 지도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영화 ‘대부’는 인간이 자신이 타락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망가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마이클은 코를레오네 가문이 하는 마피아 사업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군에서 명예롭게 복무하고 돌아온 젊은이로, 아버지인 돈 비토 코를레오네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폭력과 범죄를 통해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쟁 조직의 공격을 받고 중태에 빠지자, 마이클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호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이유로, 경쟁 조직의 두목과 부패한 경찰서를 살해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복수였지만, 이 살인은 그를 범죄 조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마이클은 이탈리아로 도피해 한동안 평화로운 삶을 꿈꾸지만, 자신이 저지른 폭력이 결국 자신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는 도피한 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아폴로니아와 결혼하지만, 적들의 복수로 인해 그녀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사건은 그를 더욱 냉혹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랑과 가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단순한 힘과 통제에 집착하는 인물로 변해갑니다.
결국 마이클은 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부가 됩니다. 그는 점점 더 권력에 집착하며, 가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마저 의심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형 프레도를 배신자로 의심하고 결국 제거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마이클이 자신의 형제마저 용서할 수 없는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이제 그는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클은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조직을 확장하고 가문의 안전을 지켰지만, 정작 자신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상실뿐입니다. 그의 아내 케이는 그를 떠났고,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한때 가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한다고 믿었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식하면서도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모습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우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불평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단식하는 그날에 제 일을 찾아다니며 일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구나… 너희가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나눠 주고, 집 없는 가련한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에 네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 (이사야 58,3-9)
19세기 프랑스의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부유층과 결탁하며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던 교회를 바라보며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쳐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 교회가 세속의 법에 물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이웃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황금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서 빛나야 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늘어날수록 나는 세상 법에 오염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립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나 자신은 병들어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로 둘러싸인 교회는 절대 오염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들이 줄어든다면 그 교회는 분명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 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교회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이 법들은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란돌프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삼촌은 베네딕토회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이었고, 성인의 부모는 그가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교회에 들어가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삼촌의 자리인 수도원 원장 자리를 이어 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세속적인 영광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신 청빈한 삶과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입회하려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완전히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부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을 성에 가두기도 하고, 매춘부를 고용해서 성인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세속을 벗어난 학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충족시켜 주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돈, 권력, 즐거움, 영광…. 성인은 이런 우상이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셨고 또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우상보다 주님만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성인의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따집니다. 왜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사실 조상들의 전통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조상들의 전통이 결코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이사 29,13)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조상들의 전통에 충실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마음이 중요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따르지도 않으면서, 아니 그 뜻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조상들의 전통만 지키면 그만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지키는 조상들의 전통은 하나의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자기를 변화시킬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나의 우상은 무엇일까요? 주님보다 첫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모습들이 행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은 금이다. 당신의 시간을 어디에 쓰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라(벤자민 프랭클린).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처음에는 우리도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었다네.
하지만
세상의 명예를 좇다가
명예가 좋아하는 얼굴이 되었고
세상의 돈을 좇다가
돈이 좋아하는 얼굴이 되었으며
세상의 권세를 좇다가
권세가 좋아하는 얼굴이 되었네.
우리가
사랑을 좇으면
다시금
사랑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원리원칙과 규정을 중시하고 가르치면서
삶으로는 주님을 위해 살지 않는
나를 반성해야 합니다.
외적인 형식을 중시하면서
그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는
나를 반성해야 합니다.
입술로는 기도를 하고
손으로는 묵주를 돌리고 있지만
속으로는 부정적인 감정들로 가득 차
미움과 시기질투의 감정에 휘둘리는
나를 반성해야 합니다.
전례의 정신은 망각하고 형식만을 따지며
주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는
나를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도
하느님의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람의 전통을 우선시하며
상처 주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는
나를 반성해야 합니다.
아직도 바리사이와 율사의 기질을 가지고
성당에서 봉사하면서
나는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죄인을 용서하소서.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20―2,4ㄱ
20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땅 위 하늘 궁창 아래를 날아다녀라.”
2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2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제 종류대로,
곧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들짐승을 제 종류대로, 집짐승을 제 종류대로,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제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4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