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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1년 3월 12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27-32)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to repentance but sinners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우리의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고 전한다. 사랑과 자선의 행위가 빛이고, 어둠을 대낮으로 바꾸는 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필요가 없지만,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느 분이 대답하시기를, “너 행복하냐?”라고 하셨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세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돈이나 모으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지를 예수님께서 물어보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하셨을 것이라는 그 질문은 사실은 이런 묵상을 한 바로 그 사람에게 던지신 물음이기도 합니다. ☆☆☆
세리 ‘레위’는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오’입니다. 그는 제자가 된 뒤에 이름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세리 레위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 ‘마태오’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마태오’의 말뜻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가끔씩 우리도 자신에게 ‘나는 진정 행복한가?’ 하고 정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잠시 느끼는 만족을 행복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은 사실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그 안에 이미 언젠가는 그 기쁨을 잃어버릴 ‘허망한 미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을 가지고 우리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하는 행동, 하고 있는 일, 추구하는 이상이 ‘영원한 것’에 가 닿아 있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젠가는 허망한 슬픔으로 바뀌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신 이유도, 레위의 그 삶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그늘을 안고 살면서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새로운 삶은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레위는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멸시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이들도 색안경을 끼고 봤습니다. 그러기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집니다.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어울리러’ 오셨음을 천명하십니다. 그들에게 ‘천상 기운’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부르심에 선뜻 나섭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따라갑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세리였지만, 안정된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포기한 것입니다. 그만큼 레위는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풉니다. 레위의 예의입니다.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 당신’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도 예수님의 일행을 위해 내놓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세리 레위’의 모습은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의 부족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일을 맡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언제라도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치유의 시작 -김성웅신부-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Raison d'e tre(존재이유) -김찬선신부- 육의 사람은 누구이고 영의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의 참모습 -전삼용신부-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웬만한 여자라면 저를 다 좋아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실제로 여자들이 저를 다 좋아하는지 알았습니다. 누나들까지 저를 좋아하여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야, 내가 조금만 어렸어도 너랑 결혼하는 건데!” “내가 뭐가 좋은데요?” “신앙심 있지, 성격 좋지, 잘 생겼지, 머리 좋지, 착하지...” 사실 진심 반 농담 반으로 하는 말들이겠지만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왕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손을 내밀면 여자들이 다 좋아해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일등 신랑감이라 자만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내 자신에 대한 불만이 늘어났습니다. 사실 저는 키가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제가 좋아한 자매는 키가 저보다 컸습니다. 키가 작은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그 사람과 함께 걷다보니 “키가 좀 컸으면”하고 생각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다보니 내 자신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지 못하여 자꾸 작아짐을 느꼈던 것입니다. 역시 ‘그대 앞에만 서면 난 왜 작아지는가~?’ 하는 노랫말처럼 사랑은 ‘작아짐’인가봅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성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모든 법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아직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사랑하게 되었다면 자신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깨끗한 천사들도 그 분 앞에선 얼굴과 몸을 가리는 정도인데, 누가 그 분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심기가 불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 같은 거룩한 사람들은 인정해주지 않으시며 누가 봐도 죄인들과는 잘 어울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죄인이라 느끼는 사람들이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부족한 죄인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느끼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하고 다니건 크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인 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회개시킬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보다는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향하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결혼 전에 담배를 태우셔서 길에 침을 뱉는 버릇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사귀실 때도 아무 생각 없이 길에 침을 뱉으셨나봅니다. 어머니는 그것이 보기 좋지 않으니 고치라고 한 마디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다시는 길에 침을 뱉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주 짓는 죄를 죄로 인식도 못하고 인식하더라도 잘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은 그리스도를 참된 연인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 사람의 참모습은 아닙니다.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나중에 죽어서 내 자신을 온전히 보게 되었는데, 그 때 내 자신이 지금 생각했던 내 자신과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내 자신을 온전히 보게 될 때는 사랑하는 분 앞에서 뿐입니다. 사랑하기 전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사랑하면 단점으로 드러나게 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바로 고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이 바로 이 작업을 하는 기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당하신 고통에 조금이라도 참여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짓는 죄들이 주님을 얼마나 아프게 해 드리는지 더 잘 깨닫게 되고 더 빠르게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역심(逆心) 저에게는 역심(逆心) 같은 것이 있습니다.
죄인들이 모인 곳 -최의영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태오는 자신의 직업과 일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자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총살 대 앞에 죽든지, 아니면 저기 검은 문을 지나가든지 하나를 택하라.”
그리고 총사령관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었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난 후에 총사령관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느 쪽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는가?”
사형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검은 문을 열면 어떤 일이 생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더 끔찍한 운명이 기다릴지 모르니 차라리 사형을 선택하겠습니다.”
드디어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지고 발포가 되어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사령관의 직속부하가 묻습니다.
“사령관님! 저 문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사령관은 아주 짧게 대답했습니다.
“자유”
만약 이 병사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지막 가능성의 문까지 들어섰더라면 ‘자유’라는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검은 문’이 더 끔찍한 운명으로 이끌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즉,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의 문으로 인도해주십니다. 따라서 이제 그 구원의 문 앞에서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지요. 단순히 지금의 어려움을 보고서, 또한 앞으로의 나의 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지내는 이 사순시기는 회개와 속죄의 시기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제 주님 앞으로 겸손 되게 나아가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인이 아니라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의 따뜻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들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꾸어주는 주님의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바로 이때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하신 말씀이 우리 곁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인물입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대부분의 환자들이
첫 번째로 겪게 되는 단계는 현실의 부정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환자들은 부정의 태도로부터 두 번째 단계 곧 분노의 단계로 이전하지만,
불행히도 상당수의 환자들은 이 두 번째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그 밖에 환자들이 밟아가는 단계들은 조건을 붙이며
교섭하는 단계, 좌절의 단계, 마지막으로 진지한 수용의 단계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당신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병든 이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자기가 앓고 있는 영적인 병에 대한
심각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특별히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용기를 내어 자신을 성찰하고 성찰한 것을
그분께 고백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적인 회복과 쇄신의 보루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누구이고 거룩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 대해 일반론적으로 얘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육의 사람은 이 세상의 욕망을 섬깁니다.
영의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갈망합니다.
육의 사람은 선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여 위선적입니다.
영의 사람은 선을 하느님 것으로 돌려드리고 솔직합니다.
육의 사람은 권력을 즐깁니다.
영의 사람은 봉사를 기뻐합니다.
육의 사람은 인위적이고 음모에 능합니다.
영의 사람은 순리적이고 화합에 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을 가를 수 있지만
오늘 복음에 비추어 얘기한다면
육의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남을 이용한다면
영의 사람은 타인의 필요에 자기를 내어줍니다.
어제는 피정중인 수녀님들을 면담해주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실천할 때 종종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다른 사람을 씻어주는 고백성사를 주다 내가 씻기는 체험을 하고,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다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깨달음이란 더러운 것에 대한 네 가지 태도입니다.
손수 치우는 사람.
덮어버리는 사람.
피해버리는 사람.
더럽다고 화를 내는 사람.
잘못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화를 내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내고 비난하기 싫어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선과 덕으로 잘못을 덮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겸손과 사랑으로 잘못을 고쳐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의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지만
영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같이 아파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그리고 마침내 그를 위해 뭔가를 합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고
그래서 병자는 의사의 "Raison d'e tre(존재이유)"이지만
세속적인 의사는 환자들에게서 명성과 이익을 얻으려 하고
영혼의 의사는 환자들이 영육으로 건강하도록 애를 씁니다.
“만일 밤에 불이 꺼지면 어떻게 되지요?”
등대지기는 웃으면서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잠시 동안이라도 불빛이 희미하거나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앞을 지나가는 배들에게는 큰 위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러한 위험을 잘 아는 등대지기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준비해놓았고, 그래서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이지요.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우리의 등대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당신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또한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고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약속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차별하지도 않으십니다. 등대의 불빛이 멋지고 훌륭한 배만을 비추지 않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우리들을 안내해주십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몇 년 전, 자전거 여행 중에 시골의 어느 여관에서 묵을 일이 생겼습니다. 너무나 늦은 시간이었고 또 몸이 너무 피곤해서 눈에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갔지요. 시골이었기에 시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주인아저씨에게 방 열쇠를 받고는 그 방으로 갔습니다. 방문을 여니 저녁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아주 컴컴한 방이었습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불도 켜 있지 않았지요. 그런데 스위치를 ‘탁’하고 켜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깨끗했고, 최신식 시설로 꾸며져 있는 것입니다.
방 불을 켜는 스위치를 켜는 순간 환한 멋진 방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의 불도 얼른 그 스위치를 켜야 하지 않을까요? 절망과 슬픔과 고통 등으로 인해 어두컴컴한 내 마음. 그러나 스위치를 켤 때, 주님의 빛이 어두컴컴한 내 마음을 몰아내고 환한 희망의 마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편이 되시겠다고 약속한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한 희망의 스위치를 켜는 것. 이것만 하면 모든 것은 완전히 해결됩니다. 그 스위치는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습니다.
나보다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우정, 이러한 우정은 어떠한 어려움도 뚫고 나아간다.(무어)
-김찬선신부-
청개구리 심보라는 것은 아니고요.
아주 교만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를 헐값에 팔아넘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신문에서 어떤 영화에 대해 좋게 평하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아도
그까지 것 보러 나같이 귀한 사람이 행차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무엇이 유행이어도 애써 또는 실제로 무관심합니다.
나는 그런 것에 따라 가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제가 아는 봉화 댁이 봉화가 무대인 ‘워낭소리’라는
영화를 보러 서울에 오셔서 같이 보자고 표를 사놓는 바람에
적선하는 마음으로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봐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 영화는 聖事적인 영화였습니다.
逆心 때문에 안 봤으면 손해 볼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교만하기는 하지만 좋은 면의 역심도 제게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한다면 다른 사람 아무도 찾아보지 않아도
나는 찾아가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만하기는 하지만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끔 이런 역심이 필요합니다.
하는 짓이 고약하지만,
죄를 지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내가 더 필요하다는 사랑의 역심 말입니다.
예전에 가끔 신문에 나오는 얘기,
어느 아가씨가 옥중 죄수와 결혼했다는 얘기가 있지요.
그 죄수는 그녀가 사귀던 사람이 아니라
그의 기구한 인생 사연을 신문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고 알게 된 사람일 뿐입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필요하다면 스스로 찾아가 결혼합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지요.
영화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 본 영화 같은데,
부자 집 도련님이 가난 때문에 몸을 파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결혼한다는 영화를 보고는
너무 감동하여 저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사님을 가르치는 청원장 때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똑 같이 가르치는데도
어떤 형제는 말을 잘 듣지만
어떤 형제는 너무 제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밉기도 하고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자기 손해지!’ 하고
아예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어느 날도
그런 마음으로 잠든 그 형제의 방을 보고 있는데
마음속에서 오늘 복음 말씀이 조금 변형되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만 해도 척척 잘하면 스승이 필요 없지!’
‘스승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스승의 존재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가장 말썽꾸러기가 스승의 "Raison d'e tre(존재이유)"이지요.
병자에게 의사가 가장 필요하고
공부 못하는 사람에게 스승이 가장 필요합니다.
사랑의 역심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북한 선교를 위해 일하는 저는 이런 이유로
북한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역설하고 다닙니다.
회개할 줄 모르기에 북한 지도자들을 위해 더 기도해야 한다고.
이런 북한 지도자 밑에서 고생하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북한 복음화를 위해 더 기도해야 한다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 하러 기도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왜 퍼 주냐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 역설적 사랑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더 기도해야 하고
더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인해 평소에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반성과 걱정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용기’와 ‘결단’이 부족하여 매일의 삶이
똑같았던 그가 최근에 자주 들었던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마태오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마태오는 새로운 부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가진 것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며 기쁘게 사는 마태오에게, 그처럼 살지 못했던 바리사이들과
가진 자들이 딴죽을 걸어옵니다. ‘너는 항상 죄인이며 나쁜 놈이다’ 하면서요.
지금 우리 역시 마태오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데, 공동체 내에서 온갖 부정의 말들이 난무합니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우리 교회 공동체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를 채워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분 안에서 말입니다.
잔치에 찬물 끼얹는 사람
- 이인옥-
레위는 “나를 따라라.”는 부르심에 즉시 길을 나섰다. 새로운 레위가 탄생한 것이다. 레위가 큰 잔치를 베풀어 모두들 흥겨워하고 있는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린다. 모두가 기뻐하는 잔치에 와서 흠을 잡고 있다면 분명 건강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병든 줄 모르기에 정작 천하 명의 예수님을 보고도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못한다.
일전에 책이 출간되었다고 주위 분들이 잔치를 해주었다. 많은 하객들이 바쁜 일정에도 와주셨는데 타교구에서 오신 분들도 많았고, 연미복까지 챙겨 입고 멋지게 축가를 불러주신 신부님도 계셨다. 또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준 전문음악인을 비롯해서 온몸을 망가뜨리는 코믹한 공연까지, 모든 순서를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지혜를 모아준 지인들 덕분에 그야말로 ‘모두의 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남 잘 되는 일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은 어디나 있는 법. 초대에 응하지 않고 뒤에서 흠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시기와 질투, 경쟁심이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은 분명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모두가 잔치에 가 있는데 혼자만 장례식에 가 있는 형국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우리. 우리를 병들게 하는 마음의 독소에서도 선뜻 일어서야 할 것이다.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신 주님께 우리의 병든 마음을 말씀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웃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이웃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느낄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
-박철현신부-
유다인들이 오랜 유배 생활에서 돌아옵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부푼 꿈을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고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지도자들은 부패했으며, 여기저기서 우상들을 섬기며 문란한 삶이 당시의 모습입니다. 그곳에는 선택된 신앙인의 모습이란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어라.”(이사 58, 11) 목을 축일 수 없는 더러운 물이 아니라, 그저 흉내만 내는 물이 아니라, 잠시 흘렀다가 말라버리는 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끔찍이 생각하며 주님의 날을 “기쁨”이라 여깁니다. 주님의 날은 “존귀한 날”이기에 그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그리고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으리라.”(이사 58, 13-14) 참된 신앙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내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나의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찾아야 하고 나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는 샘터입니다. 주님의 물이, 생명의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입니다. 나는 삶 안에서 이 물을 끊임없이 뿜어내야 하며, 풍부한 정원이 되어 많은 이를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지 맙시다.
용서하는 마음 -이정호신부-
따라 나서는 제자들
“술꾼이요 먹보이며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님” -- 서정웅 신부 - 여러분은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어떤 느낌(생각)을 받았습니까? 부모가 사랑으로 자식을 낳고 고생하고 공들여 자식들을 키워 놓았는데, 어느 날 “나는 죄인이요, 나는 죄인이요.” 하고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아마 절망감이나 좌절감, 슬픔, 비애를 느낄 것입니다. 저는 ‘죄인’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잘 쓰지 않습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의(로마서 3.9-20) “모두가 죄인이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라는 말씀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라는 말씀은 의인과 죄인 모두를 부르러 오셨지만 특히 죄인들(삶 안에서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한계를 느끼는 자)을 부르러 오셨다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죄를 없이 하시려고 죄 없으신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속죄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에페 2.1)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용서와 하느님의 은총이 내립니다.”(골로 2.13)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지를 배우고 싶을 때는 기도를 잘 하는 신자나 사제에게 가거나, 영성(피정) 지도자를 불러 강의를 듣습니다. 성서를 배우고 싶을 때는 성서학자에게 가 도움을 청하거나 배웁니다. 생활하는 일상 속에서 죄가 되는 지 아닌지 분별하기 위해서 혹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사제를 찾아 면담을 하거나 고해성사를 청합니다. 이렇게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신앙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신앙에 대해 전문가가 되면 하느님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실까?” 하고 말입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는 실제 하느님과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라면 청할 수도 있고, 이야기를 나누려면 나눌 수도 있으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사랑의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할 줄도 압니다. 때로는 선행에 힘쓰고 때로는 다른 이를 용서하고 이해할 줄도 압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마음이 완전히 편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내가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로야 늘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고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눈을 마주하며 살겠다고 말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맙니다. 두려운 것이죠. 하느님과 눈이 마주쳤다가 혹시나 내가 미처 뉘우치지 않은 죄라도 들춰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고, 혹시나 내가 마음속에 숨겨 놓고 있는 죄라도 들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는 하느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며 얼토당토 않는 명령을 내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여 하느님과 눈을 맞춘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께서는 내게 바라는 것이 없을 리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신앙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들에게서 기도에 대해 배우고, 성서에 대해 배우고, 죄에 대해 배웁니다. 주님과 눈을 마주치고 앉아 있기 보다는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있죠. 그러다 어느 날 어쩌다 혹은 용기를 내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그때 주님은 “너는 세리다. 남의 돈을 갈취하고 상처 주는 죽일 놈이다.” 라고 말씀하시라 생각했는데, 주님께서는 어떤 꾸지람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네가 착취한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하는 요구도 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다만 우리를 바라보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많은 것을 하기보다 마음을 들어 잠시 주님과 눈을 맞추고 앉아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픈 사람들은 의사를 찾습니다. 아프기 때문이죠. 어디가 아픈 지 찾아다니고, 어떻게 아픈 곳을 치료할지 방법을 찾아다니며 의사(전문가)가 되려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앉아 있어 보는 것도 좋은 신앙이 아닐까 합니다. 그때는 자신이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될테니까요.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먼저 가만히 주님의 눈을 드려다 보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나를 따라라.” 이수철신부- 주님을 잃어버려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히 보존하며,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중 1-3절까지 말씀입니다. 일 년 영적농사(靈的農事)의 성패(成敗)가 사순시기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일 초심의 순수한 열정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해야할 사순시기입니다. 자주 말씀드리다시피 밖으로는 ‘언제나 그 자리’의 산(山) 같은 정주(定住)의 삶을, 안으로는 언제나 하느님 향해 흐르는 맑은 강(江) 같은 내적여정(內的旅程)의 삶을 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삶의 방향을 잃고 안주와 타성에 젖어 살던 세리 레위,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안주의 삶에서 벌떡 일어나 주님을 따라 내적여정에 오르는 사순시기여야 합니다. 방황하거나 안주하다 보면 저절로 죄인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 있어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삶은 더욱 단순해지고 순수해지고 진실해집니다.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는 것,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우리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우리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됩니다. 오늘도 당신의 진리 안에 걷게 하십니다. 아멘.
죄인을 부르시는 분 -김훈일 신부- 친분이 있는 의사 한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병원에 오면 감기에 걸린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양승국신부-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다급한 나머지 최후의 수단으로 본당이나 수도원으로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상습적인 분들, 지능적인 분들도 계시기에 잘 봐야 합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하루에도 몇 번씩 겪어봐서 그런지 관상만 봐도 딱 알아차립니다. 그분들, 대체로 이렇게 운을 떼십니다. “이제 다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차비가 없습니다. 한번만 도와주시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당장 오늘 하루 잘 곳이 없어서 그런데 찜질방가게 돈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지방에서 올라왔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그래도 양반입니다. 방이라도 하나 얻게 큰 걸로 ‘한 장’만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좋은 시설로 소개를 해드리渼鳴?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모른 채 하고 묵주기도를 드리는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외칩니다. “당신들 말이야 많이 긁어모았으면 나같이 어려운 사람에게 내놓을 줄 알아야지? 당신들, 후원회 만들어서 뭐해? 바로 나 같은 사람 도와줘야지!” 밤새 떠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큰 폐가 될 것 같아 겨우 달래 가까운 식당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행색이 특별한 그분과 그에 못지않은 제가 식당으로 들어가니, 식사를 하시던 분들,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더군요. 주인집 아주머니는 난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죄송한데요, 지금 밥이 떨어져서.” 그 순간 우리 아저씨, 또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죄 없는 아주머니에게 던집니다. “야, 이 #$%&#@!” 몇몇 손님들은 심상찮은 분위기에 식사를 하다 말고 일어서 나가시더군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막가는 사람’,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한 식탁에 앉는다는 것,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차라리 일어서는 편이 더 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레위가 마련한 잔치에 참석하십니다. 그 잔치는 오랜 세월 몸담았던 세리직을 그만두고 떠나가는 레위를 위한 송별잔치 성격이 강했습니다. 마지막 잔치인 만큼 ‘걸게’ 잘 차렸습니다. 참석한 사람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면면을 보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세리였던 레위였기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다들 동료 세리들이었겠지요. 아니면 공금횡령과 관련된 거래처 직원들, 그렇고 그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바리사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는 표현을 봐서 아마 그 잔치는 세리들,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 조폭들, 깍두기들, 똘마니들, 창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잔치석상에서 오가는 대화들도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누가 떼먹고 날랐느니, 누가 들통 나서 감방에 갔느니, 누가 칼침 맞았느니, 험한 말, 욕지거리들을 섞어가며 그렇고 그런 대화들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할지라도 편안하게 식사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불편할 것입니다. 밥맛도 떨어질 것입니다. 소화도 제대로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특별한’ 분위기에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평상시보다 더욱 흥겨운 얼굴로 만찬을 즐기십니다. 참으로 대단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류인생’들과의 어울리십니다. 세리들이 차린 음식에 젓가락조차 대지 않고 있던 바리사이들이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이 순간 예수님께서 던진 말씀은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도 정말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 안에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정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께 부여하신 사명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여되는 사명이기에 마음에 꼭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 부끄러운 죄인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 편에 서셔서 용기를 주시고, 제 등을 두드려주시는 주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건강한 사람이 불행한 이유...
차별 없는 사랑 -조욱현 신부 -
† 난 오늘 기꺼이 병자요 죄인이고 싶다.†
어떤 그룹의 회장님이 사원들에게 새 비전을 선언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회장님께서는 개그맨 이경규씨의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항상 근엄한 모습만을 보았던 사원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이렇게 놀라워하는 사원들에게 회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경규 가면을 쓴다고 이경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의 미션과 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만들어 놓고 벽을 장식한다고 해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새기고 복습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회장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들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우리 역시 단순히 예수님 가면을 쓴다고 해서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우리의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 나갈 때, 예수님처럼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가면만 쓰고서는 예수님처럼 산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난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우리들은 실제로 가면을 쓰고 다니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성당에 나왔을 때에만 신앙인답게 생활하고, 세상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가면 쓴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 앞에서만 예수님처럼 거룩한 척 하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만 하고 있다면 이것 역시 가면 쓴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면을 쓰고서는 그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생각합니다. 이는 현재의 사람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지요.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즉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히 나오지요. 레위라는 세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아다가 당시의 지배자인 로마인들에게 갖다 바치는 역할을, 어떻게 보면 매국노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동족들을 배신하고 적국에게 충성을 다하는 레위가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위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레위가 주님의 선택을 받게 된다는 성서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면만을 쓰고서 생활하는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가면을 쓰고 있다면 정말로 예수님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위선을 가면 속에 숨기고서 살아가는 모습은 이제는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초등학생 시절에 가출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단지 방학숙제를 제대로 마치지 못해서 선생님 얼굴 뵙기가 두려워 개학하는 날
아침에 덜컥 가출을 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며 부모님께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쪽지를 두고 나왔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겠습니까. 혹시 친척집으로 갔나 싶어 아버지는 서울 반대쪽에 있는
큰집에 들러 제 소식이 있었나 물어보시고 이곳저곳 찾아다니셨답니다.
가출을 했지만 갈 곳이 없어서 전 결국 해질 무렵 몰래 집에 들어와 새우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가출소년 찾기에 지친 부모님들이 돌아와 저를 발견하고선 기가 차서 흔들어 깨우며
하시던 말씀이 “저녁밥 먹어라”였습니다. 종일 찾다 지쳐 화도 나고 당황한 마음에 큰소리라도
나올 법한데 저에게 아무 말씀 하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해주신 부모님의 기억이 잘못한 벌로 회초리를 맞은 것보다
더 크고 깊게 남아 있습니다. 때리고 야단쳐서 잘못을 바로잡는 길도 있지만
따뜻하게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그 마음을 서로가 알아준다면 그 어떤 훈계보다 더 큰 교훈이 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마 그러하실 겁니다. 밥 먹어라 하고
부르셨던 부모님의 목소리에서 지금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정순옥 수녀-
수녀회에 입회하자마자 시작한 가톨릭노동장년회 활동을 26년째 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은 직장생활하는 서민들의 부부 모임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 연장모임입니다. 관찰·판단·실천의 원리를 가지고 생활을 복음에 비추어 성찰하면서 가정과 이웃과 사회 안에서 사도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훌륭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입니다. 나는 이 활동을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제자와 사도로 변화시키는지 똑똑히 보았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가는지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요셉 형제님은 가톨릭노동장년회 활동을 통해서 마음속에 품어온 칼을 없앨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의 인생 목표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그 칼은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언제든지 상대방을 해칠 수 있는 흉기였습니다. 그런데 가톨릭노동장년회를 알고부터 팀회합을 통해 예수님과 복음의 빛으로 자신의 삶이 정화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출가를 앞둔 지금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자신보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마음을 내어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톨릭노동장년회 활동을 통해 복음에 맛들이고 그 가치를 살고 있는 젬마씨는 단칸방에서 2남 2녀를 양육하면서도 자녀들의 개성과 기를 살려주었습니다. 셋째가 20점을 받아왔을 때 아들의 등을 토닥거리며 다음에는 조금 더 잘하라고 격려하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부모가 몇이나 될까요? 젬마씨가 42세의 나이로 늦둥이를 임신했다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난색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젬마씨는 낳아서 잘 기르겠다며 기쁜 표정이어서 인간적인 걱정이 앞섰던 저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요즘 젬마씨 장남은 평화의 사도로 사명을 다하고 있어서 뜻있는 사람들의 지지와 회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 추구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복음적 가치를 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평신도 사도들은 바로 그분의 부르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제자와 같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루카 5.31-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루카 5.32)는 말씀, 한 때는 너무나 좋아했던 성서구절 이었습니다. 특히 나의 부족함으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참으로 위로와 희망을 준 성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는 말씀에 궁금증,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좋은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을까? 하느님은 왜 인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았을까?”하고요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외아들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인류를 구원했는데, 인간들 모두 “나는 죄인이요, 나는 죄인이요”하고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신 사람의 모습, 창조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욥기 9.2) “하느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에서 깊은 침묵에 잠깁니다. 그러면서 넓은 의미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면 불효자로 불리듯이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모를 때 죄인이 아닐까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150억 년 전에는 우주를, 그리고 46억 년 전에는 지구를 창조한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지구에 40억 년 전에 최초의 생명체인 단세포생물(박테리아)을 탄생시켰습니다. 단세포생물의 진화는 계속되어 식물, 동물,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과 본성은 우주가 창조된 때부터 계속 피조물(하느님이 창조한 것)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찬미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분명한 죄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라고 투덜거렸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바라본 죄인들이란 어떤 분류의 사람들일까요? 여기서 죄인들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공인하는 사람들 입이다. 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자, 이방인들과 사귀는 자, 그리고 매춘부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것은 확실히 반율법행위로 취급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식사 자체가 종교 예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이 곧 종교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분개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종교적으로 더럽혀지는 행위였습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의 판단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법은 (유대교)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선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의 법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애청자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시니까?
예수님의 별명은 “술꾼이요, 먹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렸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거룩함이 아니라 “술꾼이요, 먹보”라는 소리를 들으실 정도로, 일상 생활의 밑바닥에서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되실 정도로, 사람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 저는 이런 예수님이 좋습니다. 이런 사랑스런 존재인 예수님을 만난 레위라는 세리(마태오-‘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는 기쁨의 잔치를 베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일생을 바쳐 예수님의 삶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 하실까? 구원해 주실까?” 하면서 머뭇거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어서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달려오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멘.
-이회진신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전문가들을 쫓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마음 놓고 따를 주님이 계시어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우리 삶의 가이드이신
“수도승의 생활은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만이라도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 제49장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자가 수도자란 말도 있듯이,
“나를 따라라.”
세관에 앉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주님을 잃어
주님을 따라 나서는
주님을 따라 나서는 내적여정이 깊어질수록
그러나 주님을 따라 나서는 길 막연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리는 것,
바로 이때 다음과 같은 축복이 뒤따릅니다.
우리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대낮처럼 됩니다.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에 당신 길을 가르쳐주시어,
사람도 암에 걸린 사람도 모두 같은 표정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병이 가장
심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렇지만 고해소에서도 신자들은 자신의
죄가 세상에서 제일 용서받기 힘든 죄라고 고백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은 비리와 부정한 사건이 터지면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무죄이고 음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죄수들은
세상에는 더 나쁜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들만 억울하게 잡혀왔다고 합니다.
로마시대의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죄인의 대표적 인물들은 세리와 창녀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세리의 잔치에 참석하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당신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말씀은 스스로 거룩한 체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질책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반기지 않으시고, 자신의 부족함과 구원의 필요를 깊이
느끼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을 만날 것인지
아니면 죄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아서 하느님을 만날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주님을 만나는 편이 훨씬 쉽겠습니다
-정호신부-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건강’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들 건강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운동, 음식, 취미 뭐 하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면 피해가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누구에게 질세라 좋다는 것은 다 찾아 경험해보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이보다 건강한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보다 병자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고, 하느님의 사람들이라 스스로를 부르던 사람들에게 당신이 악하다는 사람과 약하다는 사람들 곁에 계신 이유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의인은 스스로가 의인이라, 아픈 곳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라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정말 의인인지 판단할 기준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는 사람이 말씀 속에 의인이며 예수님이 죄인들 편에 서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느 한 편에 서 계셨던 분이라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사람들 사이에 오셔서 잘났다는 사람과는 구별되는 평범한 사람으로 사셨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기에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분께 편한 마음으로 기댄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을 그 편이라 내 몬 것은 사실 의인이라 스스로를 생각하던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서 있을 수 없기에 붙인 변명에서 나온 구분에 가깝다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느 한 편에 치우쳐 계시지 않고, 우리 모두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고, 저마다 필요한 사랑을 하고, 받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사랑하며, 사랑을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누구도 구분하여 단정 짓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 자신들을 의인이라 부르던 이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작용했고, 그래서 그분 역시 죄인의 범주로 내 모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사실 불쌍한 이들은 그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입견 때문에, 또 자만심 때문에 주님의 사랑도, 위로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스스로 멀어지고, 외로워지고, 사랑 못하는 참으로 병든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늘 건강하고, 아프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건강한 사람이지만, 또 늘 병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그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사랑해주시는 참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분 때문에 병에서 회복되고, 위로를 얻고,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곤 합니다. 죄로 병들어도 늘 용서로 낳게 해주시고, 사랑하려는 시도에 축복으로 그 사랑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주시기에 우리는 병자임에도 건강을 꿈꾸고 그래서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과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주님도 나누지 않는 우리를 우리가 서로 나누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지 말았으면 합니다. 모두가 건강해지려 애를 쓰는 세상에 사는 우리,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건강하지 않다는 걱정이 많아서는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약한 병자라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럼, 어디엔가 우리 곁에는 언제든 주님이 서 계신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아픈 내 주변에 나를 위해 계시는 주님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 서는 세리를 부르신다.
세금을 거두어 가는 세관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현상 이다.
지금도 세무감사를 받는다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 때에는 더구나 세 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가장 미움을 받으며 살았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에 세금을 내야했는데, 중앙 정부는 각 지역에
일정한 세금을 매겼고, 그 지역에서 세금 징 수 권리를 입찰에 붙여 최고 입찰자에게 팔았다.
그러면 입찰된 사람은 재량껏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 하여 로마에 바치고 여기서 온갖 비리가 발생되고
그래도 백성들은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세금을 물어 야만 했기 때문에 세리들을 매국노요
반역자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회당에도 들어오지 못 하고 죄인으로 취급되어 그들과 옷깃만 스쳐도 부정을 탄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당시에 강도와 살인자 들과 같은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람을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신다(27 절).
예수께서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아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셨 다.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섰다(28절). 그리고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고,
다른 세리들과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한 자리를 준비 한 이유는 무엇일까 ?
레위는 아마 지금까지 자기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멸시, 천대에 비해 예수께 서는 자신을
인격적으로 받아주셨다는 데 대한 기쁨이 충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다른 어떤 사람에게나 그 무엇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 무엇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도 큰 기쁨을 느꼈을 때에는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예수께서 세리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못마땅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입니까 ?(30절)하고 트 집을 잡는다.
예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 하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1-32절)고 하셨 다.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별로 필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한낱 죄인들과 사귀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그러 나 죄인이라고 불려지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초대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 이셨다.
그리고 함께 먹고 마시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의인으로 여 기면서 말로만 죄인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은연중에 멸시하며
스스로 주님을 멀리하며 살아가고 있지나 않은지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
만일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다 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져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얼마 후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세리를 불러 제자로 삼으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공생활 개시(開始)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주변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복음선포의 활동을 시작하셨다.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어부들을 뽑아 제자로 삼는 등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은 크게 하느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병자치유·구마기적의 활동과 제자교육의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 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선포된 복음이 인간 측에 수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포된 복음이 무조건 인간에 의해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그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는 복음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며, 이는 곧 하느님의 선물(膳物)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을 베풀 때 다른 무엇을 주시지 않고, 당신 스스로를 주신다면 인간이 과연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인간이 이 선물을 받는데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죄(罪)다. 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선물은 수용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수께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 지붕을 뜯어 내려보냈을 때 그들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병자의 병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병인 죄까지도 용서해 주셨던 것이다.(5,18-26) 이 일로 말미암아 루가복음에서 예수와 바리사이파 율사들 간에 본격적인 반목이 시작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들이 예수 안에 육체의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죄의 용서까지는 능력 밖의 일로 믿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창조 이래로 깨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분관계를 회복시키는 메시아이심을 계시(啓示)하는 일은 복음서의 중요한 목적이다. 따라서 루가는 중풍병자를 놓고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를 제자로 삼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식탁공동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레위라는 세리를 '나를 따라 오너라'(27절)는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당신 제자로 삼았다.
죄인을 제자로 삼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레위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송별만찬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예수님도 당연히 함께 자리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죄인들과 식탁에 함께 앉으신 것이다. 이는 의사가 앉아서 병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수 찾아 나섬이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인자(人子)의 사명인 것이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손수 병자와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때이다. 하느님 친히 병자와 죄인들을 당신 식탁에 초대하여 식사와 친교의 공동체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초대받은 병자와 죄인들 중에 스스로 자격이 있어 그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죄인들도 마찬가지다.
식탁에 들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일은 허물을 벗고 죄를 씻는 일이다. 따라서 세관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던 레위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는 말씀은 곧 '죄로부터 떨어져라'는 말씀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은총의 때인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공동체에 앉을 수만 있다면, 나도 기꺼이 병자요, 죄인이고 싶다. 아니, 이미 병자요 죄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