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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보뱅의 [마지막 욕망]을 읽고 인간의 [존엄사]에 대한 작가 자신의품위있는 죽음에 대한 은밀하고 소중한 이해를 하게 된 이후로 다시 그의 책 [지극히 낮으신]을 독서한다. 독서는 독서의 꼬리를 이어가는 유희다.
이 책을 며칠 째 읽으며, 독자인 “나”, 시간과 공간을 망각한 채 깊이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특별한 책이다.
13세기 초 청빈을 신조로 ‘작은 형제회’를 조직하고 세속화된 로마 카톨릭의 개혁운동을 이끈 탁발 수도승인 [성 프란시스코]의 삶을 다룬 책이다.
‘지극히 높으신’을 대응하는 ‘지극히 낮으신’이란 책 제목이 우선 마음에 와 닿는다.
진짜 삶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을 잊어야 하고.미지의 세계 앞에 선 어린아이의 시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한 번역자의 문구도 매우 인상적이다.
꼬리를 덧붙인다면, 헨리 소로우의 [월든]을 읽고 난 이후 나의 독서 방시은 읽기/글쓰기를 병행하게 되었다.
소로우가 최초로 월든, 자연 숲으로 들어가 직접 통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밭을 갈고 자립하며 시간과 계절마다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답고 놀라운 섭리를 보고, 깨닫고, 배우며, 매일 메모지에 글을 썼던 방식을 도입해 [자연=책]. [탐험=독서] 라는 내 나름대로의 독서 방식을 사용한다.
이런 방식은 전쟁터 참호에서 일기를 썼던 [비트겐슈타인]의 글쓰기 방식과도 일치한다.
이제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자.
[첫 주제;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 하나]
✍ 성서는 수많은 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책이다.
책마다 수많은 문장이 들어 있고, 각각의 문장은 별과 올리브 나무, 샘, 작은 당나귀, 무화과 나무, 보리밭, 물고기로 넘쳐 난다.
✍ 오늘의 책들은 종이로 되어 있고, 어제의 책들은 (파피루스)가죽이었다.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여인의 머리카락 속에서, 아이들의 눈 안에서, 길을 잃듯, 페이지들 속에서 길을 잃은 의미, 책은 곧장 날아올라 자신이 담고 있는 글귀들을 읽는 이의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흩뿌려 놓는다.
✍ 아이시의 성 프란체스코에게 딱 들어맞는 문장은 이것이다.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이 문장에선 천사도 아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개만 보인다. 그가(프란체스코) 눈에 띄지 않는 두 존재를 딸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 아이는 무사태평으로 인해, 천사는 단순함으로 인해,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뒤처져 다른 두 존재를 쫓아간다.
가끔씩 늑장을 부려 풀밭 위를 헤메고, 쇠물닭이나 여우 앞에서 꼼짝 않고 멈춰 서기도 한다. 아이와 천사는 함께 나란히 걸어간다. 아이가 천사의 손을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노래를 흥얼대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야기하면 천사는 미소 지으며 동의한다. 그러는 동안 개는 이 둘의 뒤를, 이 개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말한다.
✍ 답변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다. (..) 이는 어린아이의 질문이다.
한 줌의 푸른 하늘, 감당하기 벅찬 침묵 속에서 뒤척이는 영혼이 제기하는 질문, “언제나 이곳에 있지 않았던 나, 나는 어디에서 온 걸까?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 이 세상을 살펴 볼 필요도 없다. 저세상이 없듯 이 세상도 없으니까. 그러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살던 13세기엔 답변이 더 길었다.
13세기의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갔다. 답변은 온전히 성서 안에 존재했으며 성서와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답변은 성서 안에 있었다기보다, 답변을 찾기 위해 성서를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겠다..먼 곳에서 온 말, 머나먼 푸른 하늘로부터 온 이 말이 살아 있는 사람을 뚫고 들어간다. 순수한 사랑의 지하수처럼 살아 있는 사람으 몸속에 흐른다.
반드시 성서를 알아야 이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느님을 믿어야만 그 숨결로부터 생기를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나무 이파리나 동물의 털에도, 대기 속을 날아다니는 각각의 먼지 알갱이에도 배어 있다.
물질의 원천, 최종적인 핵심, 최정상의 물질이 아니라 이 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며, 영원토록 너 – 먼지, 짐승, 사람...이 말은 요람 위에서 떠돌기 전에, 어머니들의 입술에서 춤추기도 전에, 목소리들을 – 한 시대의 획를 그으며 그것에 톤과 색조를 부여하는 목소리들을 – 헤치고 나아간다.
✍ 사건이란 한 사람의 삶에 닥치는 ‘생명’을 말한다. 그것은 예고없이, 눈부신 광채도 없이 닥친다. 사건은 요람의 모습을 띤다.
힘없고 평범한 요람을 닮아 있다.
✍ 아이와 천사는 아시시에서 멀어져 갔지만 아무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다..개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세 발자국 뒤에서, 갓난아이가 잠을자다 한숨을 쉰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답변이 불과한 질문 하나”에 불과하다)
[두 번째 주제; 사실 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녀는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움 이상이다. 그녀는 더없이 부드러운 새벽빛을 띤 생명 자체다. 우리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그녀의 초상화 한 점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어머니들은 모두 이런 아름다움을 지녔다. 모두 이런 정확성과 진실성, 성스러움을 지녔다. 어머니의 무한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영광을 무한히 초월한다. 상상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다.
(왜냐면 필자의 생각은 그 아름다움은 신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없다)
✍ 그리스도는 한번도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사랑이라는 그 진짜 이름으로 오로지 아름다움을 벗 삼을 뿐이다.
아름다움은 사랑으로부터 온다. 낮이 해애서 오고, 해가 하느님에게서 오며, 하느님의 출산으로 기진맥진한 여인에게서 오듯,
✍ 아버지가 된다는 건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된다는 건 절대적인 신비에 속한다. 그 무엇과도 화해할 수 없는 신비, 그 무엇에도 비견될 수 없는 무엇이다.
✍ 어머니들은 살아가며 그들의 아이와 동시에 성장한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 하느님과 동등해지는 것처럼, 어머니들 역시 단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로,
무엇이 자신들을 충족시키는지 전혀 모르는 채, 삶의 가장 신성한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과 아이에 대한 거룩성은 하느님의 속성임에는 분명하다)
✍ 순수한 아름다움이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면,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랑은 어떤 질료로 이루어지며, 사랑의 초자연성은 어떤 본성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 프란체스코의 어머니가 프로방스의 하늘 밑에서 자란 이런 처녀들 중 한 명이란 사실이 그저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전과 꿈으로 키운다. 젖은 그들의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난다. 젖가슴에서, 마치 행복한 상처에서처럼 흘러나온다.
그들의 꿈은 유년기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서 솟구쳐 입술에 가장가로 떠오른다. 그리고 무한히 파고드는 부드러움으로 갓난아이를 감싼다.
(왜, 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작가가 말하는 성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신묘막칙한 인간이 아니라 아름답고 사랑스런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본다)
[세번째 주제; 달콤한 無]
✍ 아이는 자란다. 어머니의 땅에 두 팔로 뿌리를 박은 채, 말씀이라는 덤불 속에서 양분을 길어 올리며, 다양한 관계를 늘러 가면서 생각의 가지들을 외부의 빛 속으로 들어 올린다. 유년기를 살찌우는 시기다.
✍ 이 단순한 시절의 하느님은 이미 요람 속 아이의 마음을 빼앗아 아이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이것은 13세기에 그랬든 20세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20세기는 아이를 왕으로 떠받들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어린이들, 그대들의 부모는 피곤하다. 부모들은 이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들이 어깨 위에 그들을 실어 나르기를, 자신들에게 애정과 용기를 주기를 요구한다.
현대의 어린이들, 그대들은 사막의 왕들이다.
✍ 어린 프란체스코가 자라는 모습을 누가 보았을까? 하느님 외에는 본 사람이 거의 없다. 아버지도 보지 못한다. 그는 여행이나 돈, 직물에 지나치게 마음이 쏠려있으니까. 어머니는 조금 본다. 아주 조금, 타고난 모성애도 빛을 잃기 때문이다.
✍ 마르다와 마리아, 그들은 몸과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 여자와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는 여자, 쉴새없이 분주한 여자와 차분히 진정되어 있는 여자, 어머니들은 흔히 이 두 여자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다.
아이에 대한 걱정이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만큼 장님이 되게도 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보다 더 중요한 영향을 아이에게 끼친다는데 공감한다)
✍ 어머니는 자신의 분신을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의) 살을 나눈 분신이다.
프란체스코의 유년기에 대해 텍스트를 무어라 말하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프란체스코가 죽고 40년 뒤, 도미니크회 수사, 제노바 대주교가 되는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가 성인들의 삶을 모아 엮은 《황금 전설》이라는 책을 쓴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책,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과도 흡사한 책이다.
✍ 프란체스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종복이자 친구인 그는 스무 살 남짓까지 허영의 삶을 살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직자다. 이런 사람에게 허영은 無와 맞먹는다. 새의 지저귐처럼 시작되는 첫말은 허영, 無다. 모두가 허영이다.
無다.
✍ 어린아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만 온전한 대접을 받는다.
신학자는 말씀에 주석을 다는데 부산을 떠느라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만다. 그는 조직 속의 인간이며, 그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 부르는 것은 성직자 계급의 군대식 위계질서에 의거해서다.
(이 대목은 오늘날 현대, 신학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 ‘지극히 낮으신 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음을 잊은 소치다. 13세기는 건축가들의 시대다. 돌로 지어진 교회들 옆에 말로 쌓아 올린 교회, 즉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우뚝 서 있다.
수많은 사상이 이 저서의 한마디 핵심 문장에서 버팀목을 발견한다..“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 프란체스코...그는 ‘지극히 낮으신 분’의 종복이자 친구인 그는.스무 살 남짓까지 감미로운 삶을 살았다.
(아하! 그래서 작가는 이를 두고 “달콤한 無라고 했구나!” 순간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과 하나된 느낌이다. 독서의 신비로운 환희다)
[네 번째 주제; 일각수, 불도마뱀, 귀뚜라미]
✍ 이제 그는(프란체스코) 아버지의 어깨를 나란히 한다. 계산대 뒤를 오가며 물건 파는 일을 돕는다. 그는 장사에 소질이 있는 청년이다.
민첩한 손놀림으로 피륙을 펼치고 유창한 언변으로 천의 부드러움을 자랑한다. 여자들은 그 고장에 이만한 장사꾼은 없다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맑은 눈, 떡 벌어진 어깨에다 여자처럼 손이 흰, 잘생긴 청년이다.
✍ 그는 스물 살이며, 먼지다 (작가는 인간을, 훗날 성 프란체스코를 한 인간으로서 먼지에다 비유했다. 그렇다. 처음 인간, 아담은 태어날 때부터 흙의 먼지로 태어난 것이다)
✍ 먼지는 영혼에 해당한다. 영혼은 그의 관심 밖이다. 그는 아시시의 예쁜 여자들, 술과 노름과 노래 곁에한 자리를 내어 준다.
(본문은 작가가 프란체스코의 청년 시절을 말하고 있다)
먼지 덮인 아주 보잘 것 없는 자리, 일 년에 몇 시간, 성탄절과 부활절이면 그곳에 들어가며,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 그것을 믿기는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 – 예를 들면 일각수 –을 믿듯이 말이다 영혼의 주제는 일각수의 존재만큼, 딱 그만큼 전설적인 무엇이다.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 영혼은 새들과 한 가족이다.
그런데 이 가족에 합류하기 전 프란체스코는 일각수 가족에 속해 있었다.
(..) 스무 살 청년의 두 팔은 어린 처녀들의 허리를 휘감기 위한 것, 그렇다해도 두 다리는 세상 끝까지 가기 위한 것이다.
✍ 주일날 사제들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음을 단단히 상기시킨다. 강론대 위에 올라서서 우리 머리 위로 돌처럼 단단한 말들을 내던진다.
우리는 가련한 모습으로 긴 의자에 움츠리고 앉아 눈을 내리깐 채 그 말에 귀 기울인다.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러고나면 곧 삶의 핵심으로 되돌아온다. 교회문을 나서며 재잘대는, 천사처럼 해맑은 소녀들에게로 돌아온다.
그들을 응시하며 달콤한 희열을 느낀다. 달콤한 희열과 고통을 느낀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신비여서, 영혼의 신비보다 더 흥미롭다. 젊은 처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은 우리 눈에 완벽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완벽이다.
스무 살이라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건, 영혼보다 더 영원한 건, 몸이라는 것,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다. 스무 살이라면 그저 그렇다고 느끼는 사실이다. (...) 그무 살이니, 먼지에 대해선 말하지 말자. (저자의 글은 매우 진솔하며 이 책을 통해 사제들에게나 신도들에게 진한 메시지를 준다)
✍ 누가 프란체스코에게 그의 미래를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놀라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나요? 나는 훌륭한 기사가 되고 공주를 아내로 맞아 많은 아이를 낳을 겁니다”
이 대답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미소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거품 한 점 잃지 않고 한 술잔에서 다른 술잔으로 부어진 고급 와인처럼, 어머니의 마음에서 아들의 마음으로 전달된 사랑의 광기를, 그런데 아들의 이 말에는 어머니의 열정보다 더한 것이 들어 있다.
이 순진한 자기 확신과 어린아이 같은 삶의 욕구에는 하느님의 미소 또한 들어 있다. 감미로운 삶, 자기애, 이곳엔 ‘지극히 낮으신분’이 익명으로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존재한다 한 조각 하늘을 가르는 번개나 회개의 무덤에서 그 분을 찾는 도덕주의자들의 눈에는 뛰지 않는 방식으로..
✍ 상황은 달랐다. 그는 고향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는 포로가 되고 감옥에 갇히고, 병으로 쇠약해져 그곳을 벗어난다.
그는 고래 배 속에 든 요나 같아서, 한 줄기 빛도 그에게 닿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노래 속에서 빛보다 더한 것, 세상보다
더 한 걸 발견한다. 자신의 진정한 집, 진정한 본성, 진정한 고향을...
✍ 그는 일각수와 불도마뱀의 변신이 시작된다.
귀뚜라미로의 변신이다.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좋아 거기 흠뻑 빠진 탓에 먹을 것을 구하지 않아 노래를 부르다 죽는 게 귀뚜라미의 천성이다.”
[다섯번째; 그림자로 가득한 몇 마디 말]
✍ 그는 잠자리에서 뒤척이고 또 뒤척인다.
삶 속에서 뒤척이고 또 뒤척인다. 구겨진 시트는 촉감이 불쾌하고 그 구김살에 살갗이 붉게 ㅆ를린다. 닮고 닮아 부미해진 삶이 영혼을 비벼대 꿈을 망가뜨린다.
아무한테도 이야기 할 수 없는 문제다. 이 삶을 버리고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모른다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사랑으로 살았지만, 이제 그 사랑이 나를 죽인다고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 할 수 있을까?
✍ “삶을 바꾸라.” 이 한마디가 침상을 못 박는다.
병은 길의 부재며, 수단의 불확실성이다.
새로운 삶, 그것을 우리는 바라지만, 옛 삶에 속한 우리의 의지는 아무 힘이 없다. 평범한 건강보다 휠씬 좋은 건강이 찾아들 때 그것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 평범한 건강은 양립할 수 없는 건강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항한다.
✍ 프란체스코는 가슴이 뜨겁고, 두 뺨이 상기된 채 자신의 주인이 계시는 집을 찾았으니까. ‘지극히 낮으신 분’이 어디에 거하는지 이제 그는 알고 있다.
세속의 빛이 가까스로 닿는 곳, 삶에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삶은 꾸밈없는 원시적 생명에 불과하며, 단순한 경이요 조촐한 기적이다.
[여섯번째; 보세요. 전 떠납니다]
✍ 부모가 아이를 먹이고 키우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아이가 먹고 크는 걸 가로막는 시기도 있다. 오직 아이 자신만이 이 두 시기를 구별하고 거기서 필연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즉 떠나는 것이다.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냥 떠나야 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신경전을 벌이며 반항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 프란체스코는 아버지가 아들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절호의 기회로 포착한다.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으킨 진짜 소송이다.
✍ 79쪽에서 85쪽까지
“프란체스코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에게 귀 기울이도록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행동으로 족하다. 아들은 침묵으로 응수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 안에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이었다.”
그렇다면, 제게 이 태초는 하느님의 침묵 속에, “말씀”이 지닌 힘 속에 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죠. 그저 제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처 제 아버지였어요. 그건 한순간에 불과해요.
저는 당신보다 휠씬 앞서 존재한 모두를 되찾습니다. 연어처럼...영원한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며, 그곳을 향해 떠납니다. 내 누이인 땅, 내 연인인 땅을 향해 말이죠.“
(필자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스스로 아들의 신분과 아버지의 유산, 재산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 속의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 십자가를 지고 험한 골고다(해골이란 뜻의 언덕)를 향하여 떠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연상되어 숙연해진다.
그래서 그를 [聖 프란체스코]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거짓과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다)
✍ (의미 깊은 문장이 있다) “무한한 욕구를 가진 자에겐 무한한 요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감싸고 있던 (호화스러운) 옷들을 벗어버렸기에 그는 헐벗은 마음속에 무한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 87쪽, “어제는 공주들과 기사들의 꿈을 꾸었지요. 오늘은 제 꿈보다 더 굉장한 것을 찾아냈지요. 사랑이 제 잠든 삶을 깨웠습니다. 저는 생명을 발견했으니, 이제 그것을 향해 더나 그것을 위해 싸우며 그 이름을 섬기렵니다. 제 마지막 옷까지 당신(아버지)께 넘깁니다.”
(그리하여 프란체스코 젊은이는 헐벗은 몸으로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난다. 고급 직물상의 아들의 옷이 아니라 거친 천으로 만든 겉옷을 입고, 허리엔 밧줄을 두른다)
[일곱 번째; 사천 살, 그리고 먼지]
재판이 있고 몇 시간 뒤, 그는 아버지가 거절한 축복을 우연히 만난 한 거지에게 구한다. 그렇게 진짜 부모를 얻은 그는 마침내 떠날 수 있게 된다.
(이 대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이 책을 사랑하는 독자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는 숲속으로 들어가 고라시와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짓는다..돌 위에 무릎을 꿇고나 풀밭 위에 누워, 기도를 하거나 잠을 자는 모습을 본다. 그렇다. 그러고 있는 그의 나이는 사철 살이다. 사천 살, 그리고 먼지, 그는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이다.
✍ 나는 내 스스로가 진실은 아니라고, 나는 거룩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만이 거룩하다고, 나는 미치광이와 성인은 역사 속에서 나란히 걸어간다. 그들은 서로 스쳐 지나가거나 서로를 찾거나 때로 마주치기도 하는데 이것이 미치광이에게는 더없이 큰 불행이요, 재앙이다.
[여덟 번째; 내 형제 당나귀]
✍ 프란시스코 곁에서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나무 인간, 꽃 인간, 바람 인간, 땅 인간인 그의 곁에서..
✍ 그는 종달새에게 말을 걸고, 늑대들과 대화한다 돌들과 집회를 갖고, 나무들가 토론회를 연다. 그는 온 우주와 이야기 한다. 사랑 안에서 만물은 말의 힘을 갖게 되고, 엄청난 사랑 안에서 만물은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 실제로 프란체스코의 삶에도 당나귀 한 마리 있었다. 프란체스코가 잠들면 그도 잠들고, 프란체스코가 먹으면 그도 먹고, 프란체스코가 기도하면 그도 기도한다. 당나귀는 잠시도 프란체스코 곁을 떠나지 않고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그와 함께한다. 당나귀는 다름 아닌 프란체스코의 몸이다.
[아홉 번 째; 여자들의 진영, 하느님의 웃음]
✍ 여자란 무엇일까?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여자가 낳아서 먹이고 달래고 돌보고 위로하는 하느님 자신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여자는 하느님이 아니다.
✍ 1310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죽고 한 세기 뒤에, 교회의 종교적 권위는 <무화 無化한 소박한 영혼들의 거울>이라는 책을 쓴 [마르그리르 포레트]라는 여자를 화형에 처한다.
이 책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면 인정했을 내용밖에 없다. 프란체스코가 말대신 노래로 설파한 내용이 그 안에 그대로 들어 있다.
그녀는 사제들의 라틴어 대신 음유시인들의 프로방스어로 책을 썼다.
[열번 째; 노쇠한 하나님]
✍ 젊은 빛이 지닌 너무 늙은 이름, 어떤 언어에 담아도 눈먼이름, 어떤 목소리를 담아도 빛깔 없는 이름 – 하느님.
✍ 하느님이 남는다 이 오래된 태양을 출발점으로 만사가 잠에서 깨어난다..새도, 노래도..
✍ 많은 이들이 환영에 굴복해 아버지의 정원이나 어머니의 방에 칩거한다. 그러나 아시시 프란시스코는 그러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무리에 끼지 않는다. 소송이 있던 날, 아버지와 함께한 긴긴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는다.
알몸으로 다시 태어나, 아들이라는 낡은 옷을 벗어 던진다.
“저는 돌아갑니다 그분은 당신보다 휠씬 가벼운 아버지입니다. 그분은 내가 가고 오는 걸 지켜 봅니다. 당신처럼 돈과 의무와 심각한 과업을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아이들, 개, 당나귀 같은 하찮은 무리와 함께하는 데 시간을 몽땅 쏟아 붓습니다".
✍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그런 미친 방식으로밖에는 사랑할 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아이를 세상의 중심에 두며, 세상을 자신들 마음의 중심에 둔다. 프란체스코는 어머니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 뜨거운 사랑을 온 세상에 전파하며 어머니에게서 벗어난다.
✍ 내 누이강, 내 아우 바람, 내 누이 별, 내 아우 나무 – 모든 것이 그에 의해 배치되고 응분의 자리를 되찾는다.
✍ 하느님, 그토록 가난한 하느님, 빛 속에서 빛이 지글대며, 침묵이 침묵에 대고 속삭인다.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도 그런 침묵에 대고 말한다.
누군가 프란체스코의 말들을 얇은 책 속에 모아 두었다. 진짜 가난한 사람의 말을 담은 책이다.
아름다울 것도 없는 편지들, 우아하지도 않은 기도, 너무 자주 빨고 기운, 가난한 사람의 닮은 옷 같다. 성서에서 빌려와 짜 맞춘 것들, 여기에 시편 한 편, 저기에 또 한 편, 그것으로 충분하다.
✍ 언제나 미소띤 얼굴이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놀이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빛에 다가갈수록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사랑을 할수록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이성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 앞에선 어른이 없으며 누구나 아이가 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런 합산에게서 벗어나 있으며, 만물의 탄생과 더불어 매번 다시 태어난다.
✍ 하느님은, 아이들만 알며 어른들은 모르는 무엇이다. 어른에겐 참새들을 먹이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다.
[열 한 번째; 당신들은 저를 사랑한다 말하면서 제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 145쪽이다. 13세기는 십자군의 세기이다. 여우와 늑대가, 이슬람교됴와 기독교가 맞선다. 성서 아래 묻힌 같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들은 그의 유해를 차지하기 위해 물어뜯고 싸운다.
종교는 하나되게 만드는 것인데, 증오만큼 종교적인게 없다. 사랑은 여린 얼굴이나 목소리로 사람들을 하나씩 해방시키는 반면, 증오는 어떤 강력한 이념이나 이름 아래 사람들이 대거 모이도록 한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가 하나됨이 없이 정치적 종교로 타락하여 거리에서 어떤 강력한 이념이나 이름 아래 사람을 모이게 하고 증오스런 추태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 생각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 떠나야 한다. 다시 떠나야 한다. 끊임없이, 끝없이 떠나야 한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처럼 우리도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 혼합되지 말아야 한다. 떠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필자는 세상속의 프란시스코처럼 떠나고 싶다. 다만 자연과 함께 어울리고 싶다)
[열 두 번째; 추한 이미지, 거룩한 이미지]
✍ 13세기엔 상인과 사제와 군인 들이 있었다. 오늘날은 상인들 뿐이다. 이미지야말로 그들이 세상에 피우는 향이다.
20세기는 상품을 팔기 위해 말을 그러려면 눈을 만족시켜야 한다. 만족시킴과 동시에 장님이 되게 해야 한다. 현혹시켜야 한다.
✍ ‘폐기물’이라는 말, 처음엔 쓰레기통의 내용물을 지칭했던 말이 이젠 머글 걸 찾는 이들까지 차츰 오염시킨다. 이 나라에선 기자들과 경찰관들과 심지어 사회학자들까지 결국 거지들을 ‘폐기물’로 지칭하게 되었다.
(인간을, 이민자들을 ‘페기물’로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을 믿지마라,
소련에게 속지마라,
일본은 다시 일어난다.
인간을 자신도 믿지 마라.
(다만 페기물이 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고 산책, 사색하며 프란시스코 같은 인물을 닮으려고 애써야 한다는 생각이 이 책을 완독하면서
필자가 느끼는 개인적 생각이다.)
성 프란시스코는 가난한 자의 얼굴이다.
1181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그는 13세기 초 [청빈]을 신조로 살다간 침묵하는 성자였다.
다만 몸으로 자신의 말을 글을 대변한 성자임에 분명하다. 지금까지 필자가 읽고 만난 인물 중 가장 닮고 싶은 프란시스코다.
천사, 당신의 천사를 만나려면 주변의 잡다한 것들을 치우고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정지’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누리는 단순한 기쁨을 성 프란시스코가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고 여긴다.
이 책을 쓴 저자 [크리스티앙 보뱅]에게 감사드리고.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 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하쿠나 마타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