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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 칭찬 결핍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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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칭찬 결핍증?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칭찬받으려고 선행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악령이나 세상은 칭찬을 위해 선행하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칭찬받으려고 선행하는 것이 왜 나쁘다고 말씀하실까요?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말입니다.
우선 선행하는 것이 나쁜 것은 분명 아니고,
제 생각에 칭찬받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며,
다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나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칭찬받으려는 것은 왜 나쁠까요?
그것은 칭찬받아야 행복한데 야단맞으면 괴롭고 불행하게 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더 나쁜 이유는
그것이 칭찬 결핍증 더 나아가 애정 결핍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애정 결핍증의 사람은
늘 애정의 결핍을 느낄 뿐 아니라 인정과 칭찬도 고파합니다.
그렇습니다.
애정 결핍증은 사랑을 받아도 받아도 바다처럼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름다운 갈망이 아니라 지옥 같은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받아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칭찬을 목적으로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하느님의 상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이 세상 행복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저의 통탄할 가련함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아직도 바랍니다.
칭찬이 고프지는 않아도 아직도 바라기는 한다는 말입니다.
칭찬이 귓전을 울릴 때 사탕이 달콤하게 하듯 달콤한 것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실 상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합니다.
더 통탄할 가련함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모욕을 이것이 참을 수 없게 하고,
비난이나 모욕을 받을 때 그것을 주님 때문에 받지 못하게 하는 점입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하니 비난이나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칭찬의 달콤함을 의지적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수준이고,
그래서 저를 칭찬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마귀라고 하며 물리치려 합니다.
멀쩡한 사람을 마귀로 만들고 고마운 사람을 마귀라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칭찬하는 사람이 마귀가 아니라
그의 칭찬을 하느님 상 대신 받고 싶어 하는 제가 육의 영을 지닌 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저입니다.
“육의 영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신성한 두려움과 지혜와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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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분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저 때문에 자기 아이가 잘 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들어 보니 제가 독서를 강조해서 자신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는데, 어린 자녀도 시간이 나면 자기 옆에서 책을 읽고 읽는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 다른 아이들처럼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있는데, 아직까지도 스마트폰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책에 취미를 갖게 되어서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자녀 역시 그 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갖춘 좋은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 독서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큰 도움을 책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행동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따른다고 해서 내게 큰 손해가 올까요? 반대로 큰 영향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모범을 따름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에게도 좋은 영향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의 뜻이 이 땅 곳곳에 펼쳐지게 됩니다.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 하나의 변화를 통해서도 세상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그 기준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엄격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시지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다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이 아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선, 기도, 단식은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목적을 두고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이런 모범이 나의 이웃들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더욱 넓게 펼쳐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느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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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밤 하늘의 별을 따려고 손을 뻗는 사람은 자기 발 아래 꽃을 잊어버린다(제러미 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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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 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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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로부터 오는 상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의 속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대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인데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이는 숨겨놓은 애인의 이름을 부르고, 자녀의 이름이나 배우자의 이름을 부른단다. 그의 속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깨어나서 제가 한 행동을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누구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 부름을 받았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지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구애받지 않고 당당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풀든, 단식하든, 기도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바랍니다. 생색내기가 아닌 사랑의 진정성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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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머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습니다. 자명한 수학적인 진리도 있고, 존재의 근거를 알려주는 철학적인 진리도 있고, 현대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본과 물질의 진리도 있습니다. 수학적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감시의 그물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일에 그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사형집행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유배를 갔습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유배가 끝나 자유인이 되었던 그는 성경 말씀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유명한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가 되면서 성경이 금서로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이 감옥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도, 극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고, 이 말씀이 진리이며,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극한의 순교와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순교한 후, 한국교회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사제들이 올 때까지, 30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있었습니다. 사제가 없이, 미사가 없이 한국교회가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직해’라는 성경말씀입니다. 교우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박해가 심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조직이 무너져서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물질의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우리가 말씀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사목지침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0년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복음나누기 7단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복음나누기는 미국의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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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전에 쓰던 것인데, 물 퍼 올리는 펌프 기억나십니까? 물을 퍼 올리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물 한 바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 물을 넣어야만 이 압력 차가 생겨서 물이 올라오는 것이지요. 그 물 한 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물은 한 바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한 바가지를 펌프에 붓고 난 후 마을 사람들까지 마실 엄청난 양의 물을 퍼 올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내가 목마르다고 그 한 바가지를 마셔버리겠습니까?
설마 홀라당, 지금 당장 목마르다고 마셔버릴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지금 물 한 모금으로 내 갈증을 해결할 수는 있겠지만, 두고두고 오래 마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한 모금으로 더 많은 물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합니다. 나의 공적과 업적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과시는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꼭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나를 살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칭찬받는 것, 관심을 받는 것, 이해받는 것은 모두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칭찬하십시오. 칭찬할 일이 없어도 만들어서 해 주십시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고 동시에 나에게 그 기쁨이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뜻은 이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드러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드러내는 행위는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일이고, 이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으로 이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하지도 못하고, 칭찬하는 사람들은 당연시하고, 칭찬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비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찾아서 칭찬해 주고, 관심 가져주고, 사랑의 말을 해 주십시오. 그 모든 것은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칭찬의 나눔을,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신앙인이 되길 빕니다.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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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신비
처음 ‘고통의 신비’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신비’라는 말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결합하여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고통의 신비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고통의 신비라고 말하는 걸까요?
고통은 늘 우리에게 해로운 걸까요?
고통이 주는 것 중 이로운 것은 없는 걸까요?
사제로 지내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또한 그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품고 있는 그 고통이 그들의 삶 힘의 원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통에서 삶을 살아낼 힘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것이 고통의 신비가 아닌가 합니다.
고통이 늘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 힘이 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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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자유로운 삶”
“주여,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 위하여,
감춰 두신, 그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오니까.
당신께 의탁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을,
사람들 앞에서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오늘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 하권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는 장면입니다. 흡사 신명기에서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연상케 합니다. 이름 뜻도 흡사하니 엘리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God saves)”이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The Lord saves)”입니다. 말그대로 엘리사와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후계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요셉수도원에서 저와 현재의 빠코미오 원장수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1992-2014년까지 원장직 책임을 해오도가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빠코미오 수사가 원장으로 뽑혀 자연스럽게 뒤를 이엇기 때문입니다. 빠코미오 수사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요셉수도원에는 큰 복입니다. 10년전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밤새워 썼던 강론이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이었습니다. 미사시 한 강론이 아니라 그냥 기록상 남겨두려 쓴 강론 서두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제 사랑하고 신뢰하는 제 후배이자 도반인 최종근 빠코미오 신부가 원장좌 자치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주신 느낌입니다. 경사중의 경사요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분들을 모시고 대망하던 자치수도원 승격 감사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아랫집 수녀원의 모든 수녀님들이 두 개의 꽃다발을 들고 신임원장과 퇴임하는 저에게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축하합니다.’라는 신임 원장과 ‘감사합니다.’라는 제 꽃다발에 붙은 내용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임원장과 퇴임원장의 아름다운 조화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순간 떠남의 여정은 감사의 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도 저와 흡사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오다 마지막 승천의 떠남을 앞두었을 때, 엘리야에게는 바로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에 대한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떠남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동안 그 힘들었던 날들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면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아오다가 오늘 맞이하는 마지막 승천의 떠남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평소 삶을 그대로 요약하는 참 멋진 승천의 떠남입니다! 그동안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은 참 좋은 선물인 후계자 엘리사를 마련해주셨고, 이렇게 홀가분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같은 승천의 떠남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둘사이가 얼마나 돈독한 신뢰의 관계인지 오늘 전 독서는 물론 승천의 장면을 목격하고 부르짖는 엘리사의 외침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그는 이어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마침내 하느님의 응답을 받아냄으로 명실공히 엘리야의 자랑스러운 후계자임을 확인시킵니다.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엘리사가 말하며,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면서 엘리사가 강을 건너니 이제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서 이제부터 엘리사가 새역사를 시작합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일은, 특히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같은 죽음이겠는지요! 말그대로 엘리야의 승천처럼 영적승리의 기쁨의 축제같은 죽음일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축제같은 떠남의 여정을,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하느님 중심의 수행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자유로운 삶이요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떠나는 축제같은 멋잔 삶이겠습니다. 바로 모든 수행을 오늘 복음의 참된 기도, 참된 자선, 참된 단식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과시욕의 허영과 교만의 위선적 삶에서 벗어난 철저히 숨겨진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이웃에 자기에게 활짝 열린 사랑의 삶이요, 참으로 내적자유와 평화의 삶이요, 그대로 진리체현의 삶입니다. 이런 숨겨진 삶에서 샘솟는 맑은 기쁨, 참된 행복입니다. 다음 한마디 주님의 약속이 큰 위안이요 힘이 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다산의 다음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한 인생을 뜻할 것입니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성실함이 비범한 인생의 조건이다.”
특히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기념하는 성 로무알도 아빠스가 이런 인물입니다. 평범의 비범을 살았던 사랑과 진실, 겸손과 지혜의 은수자 성 로무알도입니다. 951년경 출생한 로무알도는 972년경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여 생활하다가 아빠스의 허락하에 마리노라는 수도승과 함께 고독한 삶중에 스승과 제자라는 동방의 모델에 따라 살고자 수도원밖 라벤나 근교에서 공동체를 시작합니다.
당시 10-11세기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획일적 공동생활에 환멸을 느낀 수많은 수도자들이 은수생활쪽으로 향하던 시기였고 이의 대표적 수도회가 까말돌리회와 카르투시오회입니다. 까말돌리 수도원은 약 1023년경 성 로무알도가 설립한 마지막 공동체입니다. 로무알도의 까말돌리 수도회 영성의 특징은 은수적 관상과 사도적 활동이 절묘하게 조화된 관상적이며 수도승적이고 베네딕도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답게 사는 것은 참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숨겨진 겸손하고 진실한, 자유로운 삶을 목표로 할 때, 하루하루 날마다 버림과 비움의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떠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시편31;24ㄱ,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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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둘만 있는 듯>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벗을
만나는
자선
둘만
있는 듯
오직
벗에게
몸과 마음을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
둘만
있는 듯
오직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나를
만나는
단식
둘만
있는 듯
오직
나에게
몸과 마음을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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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불이 물과 상극이듯 자기중심주의는 덕과 상극이다
물과 불이 상극이라 결코 같이 살 수 없듯이,자기중심주의와 덕도 서로 모순되니, 이 둘은 한 영혼 안에서 결코 쉽게 더불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이와 같이 오감은 감각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보고, 느끼고, 맛보고, 듣는 수단이다. 선한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고, 자신의 내부에서 흘러 나오는 선을 신뢰함은 물론이고 자신의 오감까지 신뢰하는 법을 익힌다. 밖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를 선하게 하거나 악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엑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선에 맞게 경험한다.” 오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세계의 지식은 “영혼을 강하게 하여, 신적인 빛을 감당하게 한다.”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까닭은, 그들이
육체와 영혼을 에너지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대상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육체와 영혼을 대상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뒤집는다. 그는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영혼 안에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엑카르트가 말하는 “영혼”은 육체 내부에 앉아서, 육체를 죽을 때까지 가동시키는 사적인 발동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형태와 일치를 부여하고, 자신의 무한한 성장 능력으로 우리의 육체를 훨씬 능가하는 에너지다.(188)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5절: 십자군 운동
제 6차 십자군(1248∼1254):
프랑스의 루이 9세 성왕(聖王)은 우선 이집트를 정복한 후 성지를 정복하려 하였다. 1250년 4월에 프랑스군은 카이로 근교에서 완전히 패전하고, 왕과 함께 모두 포로가 되었다. 루이는 1270년에 십자군을 다시 계획하였으나 이것도 좌절되었다. 위대한 시기는 지나갔다.
1291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마지막으후 아콘과 십자군 국가들의 나머지를 잃었다.
기사 수도회|: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게 한 깊은 종교적인 활기는, 중세의 가장 고유한 현상 중 하나인 수도자 기사를 낳았다. 세 개의 큰 기사 수도회는 성지에서의 직접적인 십자군의 체험에 힘입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청빈 • 정결 • 순명의 세 수도서약 외에도 기진맥진하고 병든 순례자들에 대한 봉사와 비신앙인들로부터 성지를 수호할 의무를 자신들의 회칙에 채택하였다.
요한 기사 수도회:
1099년에 예루살렘의 요한 병원에서 형제회로 창립되었고, 1120년에 수도회로 개편되었다(수도복은 흰 십자가가 있는 흑색 망토). 수도회 본부는 1291년에 키프러스 섬으로 옮겼고, 다시 로도스 섬으로(1309), 그리고 마지막으로(1530) 몰타 섬으로 이전되었으며, 거기서 “몰타 수도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전 기사 수도회:
1118년 경에 솔로몬 성전에서 여덟 명의 프랑스 기사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수도복은 붉은 십자가가 있는 흰 망토). 1291년에 역시 키프러스 섬으로 이전되었고, 1311/1312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미왕(美王)의 음모로 희생되었으며, 비엔 공의회에서 해체되었다.
독일 기사 수도회:
1189/1190년에 브레멘과 뤼베크의 시민들에 의하여 양로원 형제회로 설립되었고, 1198년에 기사 수도회로 개편되었다. 살차의 헤르만이 기사단 단장으로 있을 때(1210∼1239), 이 회는 그 활동 지역을 옮기고 후에 본부도 프로이센으로 옮겼다(1309년부터는 마리엔부르크). 그때부터는 발트 해 연안 지방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수도회 국가의 건설이 이 수도회의 과제였다(수도복은 흰색 십자가가 있는 흰 망토). 1525년에 기사단 단장 브란덴부르크의 알브헤히트는 이 국토를 강탈하고, 세속적인 프로테스탄트 공작령으로 바꾸었다.(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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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6,4.6.17)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6)하고 예수님은 당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 선행의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로써 우리 역시 존재적인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인간의 칭찬이나 인정에 연연하기보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행하는 게 올바른 선행의 동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선행동기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에 치우치다 보면 자칫 의도적이며 선심적인 행위로 전락할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행실의 3가지 실천을 예로 들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하는 것은 율법의 속죄 행위이기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 특별한 공로를 쌓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자선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디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먼저 받았기에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모든 것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받은 것을 베풀 때 그 비워진 영적 곳간에 주님께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베풂은 남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받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베풂은 세상에 없습니다. 베풂은 때론 되돌려 받기 마련인데 그것은 나의 베풂을 받는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기쁨을, 행복을 선물로 되돌려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주고받은 존재들이고 이런 자선은 곧 참된 형제애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선을 베풀 때 자존심을 빼앗지 않도록 늘 조심합시다.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우리의 기도는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와 찬미, 찬양과 영광 그리고 그분 앞에서 나답지 않게 살지 못했음을 깨닫고 참회와 용서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한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삶의 필요한 은혜를 청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응답의 종류보다 참된 기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있기에 이 점을 늘 명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단식은 단지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료 그리고 담배 등의 기호품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줄이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런 노력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더 좋아하시는 단식은 이사야가 선포한 것처럼,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이58,6) 참된 단식은 음식이나 그 무엇으로 채우려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 탐욕을 버리고 비워서 그 비운 그 자리에 하느님의 것, 영적인 것으로 채우는 것이 진정한 단식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선행보다 더 중요한 오늘의 가르침의 방점은 이 모든 것을 행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하느님 앞에서”(6,4.6.18) 행하는 데 있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이런 선행은 비록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받지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분명 30배, 60배 아니 100배로 그 상급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위선자들처럼, “남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을 받으려는 행동,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행동, 침통한 표정으로”(6,2.5.16) 하는 선행은 ‘하느님의 영광 보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이기심과 허영심에서 기인하기에 하느님이나 사람들 눈에 역겨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행보다 그 선행의 동기이며 마음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시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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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엘리사에게 이어진 사명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름을 묵상하게 됩니다.
엘리야의 사명이 엘리사에게 넘어가며 주님의 시간과 사업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야가 주님께 받은 사명을 엘리야라는 한 인간의 생애에서 본다면, 그 사명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생애는 하느님의 사명이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너무나 짧습니다.
온 생애를 통한 엘리야의 헌신에도 이스라엘은 아직 회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뜻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불러올리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에서 엘리야의 사명은 엘리사에게 넘어갔고, 구원사는 변함없이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저마다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 보이고, 목적지는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교회와 사회는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할 듯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명은 다른 이를 통해서, 다음 세대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그분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 노고의 열매가 비록 이 시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 속에서 사명을 한결같이 수행하여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묵묵히 충실하게 실천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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