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와 로마제국
제 1 장 세계의 제국 로마
중부 이탈리아에는 주전 삼천년 전부터 인도-게르만 일족인 이탈리키인이 정주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라티니의 후족인 라틴인의 촌락이 세워졌고 천년 동안 로마제국의 수도로 발전되었다.
또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왕정(B.C.753~509)은 전설상의 왕조와 에투루리아인의 시대다. 7대로 유지 계승하였고 끝의 몇몇 왕은 에투루리아인이었다.
6세기 말에는 라틴족이 전제 군주정으로 독재를 행하던 에투루리아 왕을 몰아내고 왕정을 폐하였다.
라틴인은 공화정 로마를 주전 509년에 세우게 되었고 위대한 로마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태리 반도와 지중해 통일시대인 공화정(B.C.509~27)에 이어 Pax Romana와 기독교 시대인 제정시대가 열렸다.
제정로마는 세계 동포주의 사회 구조를 형성하였다.
원수정 시대는 옥타비아누스의 탁월한 정책을 기반으로 로마의 평화시대가 구현된다.
주후 3세기 말엽까지 군대가 황제를 임의대로 폐위하는 소위 군인황제시대를 통해 제국은 해체 직면에 놓이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권력싸움이 시작된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황제로 즉위한다.
그 후 로마는 통일되고 도읍을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또한 제국통일의 방편으로 기독교 사상을 지향함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사상적 지주로 나타나게 되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이분하여 두 아들에게 상속하였고 이로서 제국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서양고대역사에 화려한 번영을 이루던 로마는 하루아침에 몰락하였다.
기독교와 로마의 동반은 서양 유럽에 새 기독교 사상을 정립함으로 인간의 근본적 본질과 목적을 이 땅 위에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계기를 제공하는 역사성을 보여주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발흥한 라티니의 후손인 라틴족이 세운 로마와 유대 적 배경을 가지면서도 유대주의 몰락을 통해 변방의 팔레스틴에서 발흥한 기독교는 근 3백년의 기나긴 역사 안에서 함께하게 되는 서양역사의 모체가 된다.
제 2 장 기독교의 발흥
나사렛 예수와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바벨론이 주전 538년에 페르시아에 멸망되자 포로들이 귀환하였다.
그중에 남은 자들은 후에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될 때 용이하게 사용되어지는 회당 형태의 예배를 드렸다.
이 시대는 구약의 선지자 시대가 끝났고 구약의 성경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율법의 사본을 대량으로 복사하였다.
이런 사건들은 기독교 발전을 위한 계시적 사건이 되었다.
희랍의 도시국가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함으로 헬라주의를 성립시켰다.
알렉산더는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세계를 통합한 문화세계를 형성시켰다.
프톨레미 왕조의 식민지인 유대는 자유로운 정치종교생활을 영위하였다.
기독교 발흥의 배경은 당시 로마종교의 종교성과 로마종교가 다신교적 형태와 혼합주의 사상으로 타종교에 관용을 취했다는 것이다.
후기 유대교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디아스포라 유대교로 양분되며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유일신이라는 기독교적 신 개념으로 발전할 수 있던 사상이다.
또한 교리적으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내파라는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함으로 기독교적 사상이 전달될 수 있는 사상적 텃밭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유대는 주전 63년 이후부터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인들은 유대인에게 악의와 증오감을 갖게 되었고 예수는 예언대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타 종교와 비타협적 자세를 취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종교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다.
스데반 순교이후 박해로 인해 신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기독교 전파자들은 로마제국이 주는 이점을 잘 활용했다.
로마에 의해 닦여진 도로로 통행했고 단일화폐를 사용했다.
복음서 내용역시 기독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 기독교의 로마 전파와 확장은 오순절 성령 사건이후 로마로부터 온 디아스포라의 귀향,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의 선교 열정이 한데 묶여서 나타난 결과라고 추측할 수 있다.
제 3 장 기독교와 로마의 갈등
기독교는 로마라는 도가니를 통해서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기성질서가 굳어진 전통로마사회에 이질적인 기독교 신앙이 전파, 수용되어 이에 대한 거부적인 대응이 야기되고 박해가 가해짐은 통례적인 역사전개의 한 양상이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복합적이며 종합적인 요인들이 상호작용 하에서 일어난 역사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첫째, 전통사회의 변화를 초래할 독소성이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으로 로마대중의 혐오심과 와전된 기독교관, 신분제도의 타파이다.
로마의 중상계층민은 희랍의 사상과 종교철학에 영향으로 헬라전통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일반대중은 다신교의 제신관과 전통 지방종교를 신봉하였다.
에베소 신전 주위의 대중들은 신전경제에 크게 의지하였고 그것은 동방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작은 여신상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색욕의 비밀제, 유아살해, 식인, 근친상간을 자행한다는 와전된 소문을 믿었다.
로마사회는 계층구조를 형성한 신분적 계급사회였다. 중상층의 계급사회는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이었으나 하층민으로 구성된 계급사회는 자유가 제한된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둘째, 반국가적 정치혁명의 결과는 정치성을 지닌 정치적 측면으로 유대적 요소로 반기독교 국가관을 들 수 있다.
권력 유지의 목적으로 권력의 신격화를 위한 황제 예배를 추진함으로써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기독교도와 정면 대립을 가져왔다.
이 양자의 대립은 힘을 배경으로 한 메시야와 사랑을 배경으로 한 메시야간의 대결이었고 기독교도에 있어서 황제 예배는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이므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으며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반역적인 행동이었다.
셋째, 사상의 전환이라는 종교적 측면에서 로마의 제종교와 종교관의 상호대립 등으로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신교 혼합주의인 로마의 종교관과 유일신 사상의 기독교와 사상적 교리적인 이해차이로 박해가 유발된 것이다.
이것은 다신교 교리적 관용과 유일신관의 배타성이라는 종교관의 피할 수 없는 대립이었다.
전통 로마 종교관에 기인하는 황제들의 귀의적인 종교성에서 근거한 보수성의 경향은 기독교가 새 가치체계의 수용이라는 반작용에 대해 종교 사회를 파괴하는 사교 사도체계로 간주한 역사성의 일면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현상은 로마라는 정과 기독교라는 반의 대립과 모순 그리고 갈등 속에서 새로운 조화라는 종합의 역사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후에 로마제국 안에 새 역사 사상을 잉태한 국가종교라는 역사적 실체였다.
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려졌지만 기독교는 서양 유럽에 있어서 영원한 정신적, 영적인 모체로서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과 목적을 제공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제 4 장 기독교의 시련과 신앙생활
신앙공동체 카타콤
기독교는 제국의 혹독한 박해를 피해 로마의 지하 도시로 신앙과 생활의 안식처를 옮긴 것이다.
그들은 구원과 부활을 상기하는 벽화로 표현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신앙을 지켰다.
카타콤은 초기에 코메테리아라 불렀던 로마제국 전 지역에 산재한 지하 묘소다.
그곳은 가장 안전한 장소며 천국과 복음화를 바라는 그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었다.
벽화는 주로 프레스코화로 기독교 신앙의 확신인‘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내세’에 대한 희망과 영원한 구원을 상기시키는데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들은 지하의 어려운 환경과 지상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예술로 조화를 이루며 신앙을 생활화 하였다.
온갖 방법으로 박해를 하고 금지해도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땅 위에 싹트는 열매는 또 하나의 새 역사를 잉태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로마제국이 박해를 통한 기독교 근절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카타콤의 신앙 공동체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가 승리한 것은 정신적 강인함 때문이었다.
카타콤 신앙공동체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지상으로의 뜨거운 열정을 품어 내었다.
이 열정은 인류의 진정한 목적과 역사 주관자의 뜻을 이행하기 위한 지상세계의 선교 열정이었다.
로마신분사회의 암울한 계층과 정신적 안위를 찾고자 하는 로마 대중에게로 향한 끝없는 복음의 전파였다.
특히 노예와 해방노예의 신분 상향적 유동속에 던져진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는 주님이 예언한 대로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영웅적인 신앙의 발로였다.
제 5 장 로마사회의 신분제도와 기독교의 선교
기독교도들은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와 시련에도 카타콤에서 다져진 신앙심으로 선교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상층 계급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계층에도 복음의 평등성을 강조하며 선교의 열정을 가졌다.
기독교가 전파된 초기 이후 3세기 초에는 기독교가 스페인과 브리튼에까지 확장됨으로 거의 로마제국 전역에 전파되었음을 볼 수 있다.
3세기 중엽에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상반부에도 기독교가 확장되어 이교의 예배가 거의 중단되었다.
로마의 노예제도는 로마가 도시국가와 반도국이라는 지역적 성격을 벗어나 지중해와 그 연안지대를 정복하여 새로운 제국으로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과정 속에서 발전하였다.
노예는 법적 권리가 없는 무 인격으로 취급받았으며 주인의‘생명이 있는 재산’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진 존재였다.
로마제국은 엄격히 계층화된 계급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태동한 기독교는 노예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그 결과는 어떤지 라는 문제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기독교는 인간을 또 다른 인간 아래 종속시키는 로마의 노예제도와 신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이념사이의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형태를 인정해 왔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노예제도는 그 뿌리가 뽑히지 않은 채 계속 잔존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노예관이 갖는 의미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시대 시대마다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평가 되야 하며 기독교가 초래한 사회적 변화의 문제는 그들의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당시 제국의 정치 문화 사회적 배경에 힘입어 활발한 선교를 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 상황과 기독교가 전파한 복음의 내용은 당시 최하층에서 생활하던 노예들을 기독교의 신자로 흡수하였다.
모든 신분과 민족의 차별 없이 노예까지도 믿음 안에서 한 형제로 사랑할 것을 가르친 그리스도의 교훈과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외국인임과 나그네임을 시인했던 기독교는 당시의 제종교와 철학 등이 민중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던 터라 더욱 빨리 그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자 중 상당수가 노예와 해방된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 뚜렷하게 노예제도를 정죄한 적은 없다.
그는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가르침이 교회와 역사 가운데서 열매 맺기를 바랬다.
바울에게서 인간관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언급과 진전된 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빌레몬서에서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에서 자기 자신을 맞이하듯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정죄한 적은 없다. 교부들의 사상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노예와 해방된 노예는 자유민에 비하면 법적 지위에서는 그 신분이 확실하게 열등했다.
그러나 노예로 확정된 신분체제라 할지라도 그 본래 상태가 변형되지 않고 장시간 유지되는 관례는 없었다.
상당수가 기독교도였던 노예들이 사회 각층으로 유동하게 됨으로써 기독교는 이 유동의 경로에 따라 각계각층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동성의 결과는 로마제국의 정치,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많은 기독교도가 나타나게 했으며 이런 요소들은 로마제국의 복음화라는 새 경향성을 만들었고 점진적인 승리의 조짐이 여러 영역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승리를 향한 새 일보가 시작된 것이다.
제 6 장 기독교의 승리
기독교는 약 3세기를 거치는 동안 로마의 기존사회의 전통과 종교적 반목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는 기독교를 우호적 종교로 간주했고,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함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밀라노칙령은 기독교의 공인과 발전이라는 점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이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긍정적인 면으로 순수한 종교적 차원에서 교회와 제국 발전에 기여했다.
부정적인 면에서 대제의 공인과 개종은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교회와 영적인 가치가 아니라 정치적 가치를 더 우선으로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인정받게 된 것은 약 80년 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기독교의 세계화는 로마제국과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영향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대제의 공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종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혹독한 정치적, 사회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때가 차매 위대한 승리를 취한 것이다.
기독교는 정치와 분리한 순수한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세계화를 추구하고 로마는 위대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초대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희랍의 헬레니즘 문화의 변혁 그리고 로마의 박해라는 도가니를 통해 로마 역사의 무대를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변혁 수용했기 때문이다.
교회사학적으로 볼 때 역사 이면에서 주관하는 객관자의 주권 안에서 나타난 역사의 필연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기독교가 로마 안에서 확장되고 세계적 종교로 발전한 것은 객관자 신의 뜻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와 로마는 긴 역사의 시간 속에 서로의 자기 실체를 역사 안에서 “인간 지상주의”와 “신적 영원주의”를 스스로 실증했던 두 개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져 희미한 기억 속에 남겨진 반면 후자는 역사의 계속성을 통해 영원으로의 소망을 인류에게 전하는 한줄기 빛이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