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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강남들 / 여의도
강남의 원조국회와 방송국, 대기업 본사, 그리고 많은 금융기관을 거느린 여의도는
사대문 안, 강남과 함께 명실상부한 서울의 3대 중심지이다.
여의도 개발은 강남 개발의 모델이자 효시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 여의도는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 홍수와 잦은 침수에 시달리는 -
섬이어서 풀이 많이 자랐고 이 때문에 왕실의 가축을 기르는 땅으로 활용되었다.
원래 나의도(羅衣島), 여화도(汝火島) 등으로 불리었는데, 영조 때에 이르러
여의도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여의도와 쌍둥이 섬이었던 밤섬에는 양잠업이 성했다고 한다.
여의도는 20세기 들어 큰 변화를 맞는다. 1916년에 일제가 이곳에 한반도 최초의
비행장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올해가 2016년이니 정확히 100년 전의 일이다.
이때 여의도는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汝栗里, 여의도와 밤섬을 합쳐 지은 지명)에
속했고 따라서 최초의 비행장이 들어서는 대사건이 있었음에도 여의도라는 이름 자체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 5월 로마를 떠난 이탈리아 비행기 두 대가
1만 3천 킬로미터 이상을 날아 104일 만에 한반도에, 정확히는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면서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 무려 10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1922년 12월에는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귀국 비행기도 여기에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이때의 여의도비행장은
간이 시설에 불과했고 1929년 9월 5일에야 제대로 포장된 활주로를 갖추고 정식
비행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여의도비행장에 중국과 일본으로 떠나는 정식 항로가
개설되었고, 군은 물론 민간도 이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장준하 선생 일행이 이곳에서 내려 일본 장교에게 맥주를
대접받기도 했다.
여의도비행장은 한국 공군이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 1948년 5월 5일 국방경비대
산하에 항공부대가 창설되었고 여의도는 그들의 지상 훈련장이 되었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넉 달 후 L-4 연습기가 여의도에서 이륙하여
건국 기념 공중 분열을 실시하면서 공군의 첫 비행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에서도
여의도비행장은 큰 역할을 했고, 1971년까지 이곳과 더불어 인근의 대방동은 공군본부와
사관학교가 있는 한국 공군의 중심이 되었다.
1985년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는 공군회관만이 남았고, 공원에는
‘보라매’라는 이름을 붙여 지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여의도는 비행장 덕분에
확고한 존재감을 얻었던 시절을 지나 또 다른 천지개벽을 예비하고 있었다.
바로 윤중제(輪中堤) 공사였다.
현재 여의도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7.6킬로미터의 제방. 제방의 모양이 차 바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의도 개발은 1966년에 서울을 덮친 대홍수를
계기로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에 의해 추진되었다. 수해를 방지하는 한편,
아예 택지를 조성하고 신도시를 개발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계획이었다.
여의도 윤중제 공사는 훗날 수도 없이 보게 될 매립과 제방 축조, 신도시 건설의 시작을
알리는 사업이기도 했다. 김현옥 시장은 장마가 오기 전에 최대한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기공식은 엄동설한인 1967년 12월 27일 오후에 거행되었다.
실제 공사는 해를 넘겨 시작되었지만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1월 21일에 터진 김신조 사건조차도 김현옥 시장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섬 이름이 ‘아무나 가져라’라는 뜻이라고 할 정도로 별 볼일 없었던 여의도가 천지개벽
수준으로 다시 태어나는 동안 밤섬은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여의도 물길을 막아도 한강 흐름에 지장이 없게 하려면 밤섬이 사라져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윤중제를 쌓기 위해서는 많은 돌이 필요했는데, 밤섬의 돌이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1만 7,793평의 밤섬에는 78가구 44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왕조 초기부터 17대째 사는 이들도 있었고, 석씨, 마씨, 인씨, 선씨 등 희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또 병도 도둑도 없는 신비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삶의 터전인
섬을 내주고 와우산 기슭에 지은 연립주택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는데 지금도 그들의
신을 모시고 공동체 생활을 이어 오고 있다. 1968년 2월 10일, 전투기까지 동원된
밤섬 폭파 작전이 시작되었고, 밤섬은 여의도를 위해 11만 4천 세제곱미터 분량의
돌을 내주고 사람이 아닌 철새들의 섬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사라진 밤섬에 대한
이미지는 꾸준히 서울 시민들의 마음에 남았고 영화 《김씨 표류기》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윤중제 공사는 무자비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당시 서울시청에서 여의도 개발을 담당했던
손정목 교수에 따르면, 여의도에 임시 시청을 만들고 일에 미쳐 있는 김현옥 시장에게
‘신기’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연인원 52만 명, 중장비 연 5만 8,400대가 동원된 공사는 110일간의 혈투 끝에
6월 1일에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여의도 개발의 시작에 불과했다.
윤중제 공사가 한창인 2월 28일 서울대교(지금의 마포대교)가 착공되었다. 여의도에
처음 놓인 한강 다리였는데 전장 1,390미터로 당시 한국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또 마포 쪽에 하프 클로버형 입체교차로를 적용했는데 이 역시 한국 최초였다.
이 다리는 ‘속도전’ 시대의 산물답게 2년여 만인 1970년 ‘5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비행장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광장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바로 5.16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1971년 2월 20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 9월
29일 완공되었고, 이틀 후인 국군의 날 열병식 때 대중에 공개되었다.
무려 12만 평!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광장에 국민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광장은 1973년 5월에 닷새 동안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서울 전도대회에
200만 명이 넘는 신도가 몰려 다시 한 번 성가를 올렸다. 이후 반공 궐기대회,
이산가족 찾기, 국풍81의 무대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이름은 여의도광장으로 바뀌었고,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대회와 1987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대선 유세 장소로 사용되어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현장이 되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강바람이 불어 황량한 느낌이 드는 여의도에 아스팔트뿐인 거대한
광장을 지어 놓은 것은 시대착오적 행위라는 비판이 종종 제기되었고 이에 조순 시장은
광장을 공원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100만 명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광장을 많은 시민이
이용하지도 않는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비난이 많았다.
하지만 여의도공원은 지금 서울 시민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휴식처로 정착했다.
여의도는 한강변 중 88도로에서 벗어나 있어 지하철 역사에서 강변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 《괴물》의 촬영지로 여의도 둔치가 선택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윤중제 하면 벚꽃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벚꽃 가로수 거리는 1971년에 한 재일교포가 벚나무 묘목 2,400주를 서울시에
기증하여 탄생했다. 당시 벚나무 묘목의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지나는 포토맥 강가에도 일본 정부가 미일 우호를 기원하며
기증한 벚나무가 심어진 가로수 길이 있다.
여의도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여의도동 1번지, 즉 국회의사당이다.
사실 옛 국회의사당은 태평로에 있었는데 너무 좁아서 당연히 옮겨야 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이전은 계속 지연되었다. 남산이나 종묘 앞이 후보지로 결정되어 착공까지
했으나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회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지만 어쨌든 민주공화국인 이상 국회를 폐지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청와대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뜨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결국 여의도가 선택되었다고 한다.
한편 아직 입지가 결정 나지 않은 동안 국회의사당 설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1967년 당시 국회의원들은 김중업, 이광노 등 여러 건축가들이 참여한 설계안을 보고
“의사당이라고 하면 미국이나 유럽 국회의사당처럼 돔이 있는 건물이어야지.
왜 여긴 돔이 없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그들은 현대 건축에도 반감을 드러냈다.
이에 건축가들은 내심 돔 같은 옛 양식이 채택되는 사태를 원치 않았기에 일부러
보기 싫을 정도로 돔을 크게 설계한 투시도를 보여주었는데,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좋아해서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안영배는 “우리가 보기에 적절해 보이는 안을 가져가면 모두 ‘노’ 라고만 하니까 참으로
괴로웠다”고 말했다. 결국 건축가 김정수가 돔 높이를 낮추는 선에서 국회의원들과
타협을 했다. 국회의사당은 이런 정치권의 결정으로 지금과 같은, 지붕에 돔이 있는
6층 건물이 되었다. 유감스러운 사실은, 그 동안 정이 들지 말란 법은 없으나
그 디자인을 보고 멋지니 우수하니 하며 좋아하는 정치가, 행정가, 공무원들이 꽤 있는
듯 하다는 것이다.
국회의사당은 윤중제 공사가 끝난 다음 해인 1969년에 기공하여 1975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다. 남산에 있던 KBS는 1976년 12월에, 동양방송은 1980년에, 문화방송은
1982년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첫 민영 방송사인 서울방송(SBS)은 1991년에 들어왔다가 목동으로 이사했다.
국회와 방송국 외에 여의도 발전의 기폭제가 된 또 하나의 시설은 1979년 6월에 완공된
증권거래소 신 사옥이었다. 이때부터 여의도는 대한민국 금융업과 증권업의 중심으로
다시 한 번 거듭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관은 1979년 11월 16일에 공사를 마쳤고, 오랫동안
한국 최고층 건물로 군림하게 될 63빌딩은 1985년 5월 30일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19일 엘지그룹의 본사인 쌍둥이타워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여의도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맨해튼이 되었다. 하지만 서(西)여의도는 ‘국회의 횡포’로
고도 제한 지역이 되어 10층 내외의 고만고만한 건물만 들어서게 되어 여의도
특유의 동고서저 형세가 만들어졌다. KBS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20년 후 강남에서 비슷한 일이 재현되는데, 대법원이 들어선 서초동이 영락없이
제2의 서 여의도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의도는 본격적으로 고급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첫 지역이라는 또 다른 면모가
있다. 첫 주자는 1971년 10월 30일 준공되어 서울시가 직접 분양한 시범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는 중앙 공급식 난방을 채택하고 공공 구역을 설정했으며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첫 아파트였다. 24개 동 1,596호의 이 아파트 단지는 15평형부터 40평형까지 다양한
평수가 있었고, 초기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매스컴의 관심을 받으며 완판에 성공했다.
이 아파트의 구조, 특히 복도 쪽 베란다는 묘하게 한옥이나 단독주택을 닮았다.
뒤이어 삼익, 한양, 삼부, 라이프주택이 뛰어들어 지금의 아파트 단지를 이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시는 여의도 ‘땅장사’로 많은 수익을 거두었고 이 수익으로 지하철
1호선 공사에 필요한 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의도에 가장 먼저 들어선
대형 건물은 놀랍게도 순복음교회였다.
원래 서대문, 은평 지역에서 먼저 자리 잡았던 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혜안으로
여의도 이전을 결정했고, 1973년 8월 19일 여의도 성전에서 최초의 예배를 올렸다.
그리고 1973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5만 명의 한국 성도와 5천 명의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세계 오순절대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본 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9월 23일에는 1만 8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롭게 지어진 여의도 성전의 헌당예배를
봉헌하였다. 누군가가 대형 교회를 창립한 목사들은 사업을 했어도 재벌이 됐을 거라고 했는데,
당시 여의도에 이런 교회를 지을 생각을 한 조용기 목사는 그간의 과오와 별개로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연예 이후에도 성모병원, 산업은행, 금융감독원, 주택은행 등
굵직한 기관들이 여의도에 들어서면서 여의도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중심 중 하나가 되었다.
여의도에 출퇴근하는 인물들의 직업은 대부분 방송 예), 금융, 정치 분야이게 마련인데,
세 분야 직종의 공통점은 정보가 빠르다는 것이다.
당연히 여의도는 고급 정보가 활발하게 유통되고 소위 ‘찌라시’가 가장 많이 팔리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의 등장으로 여의도에서 방송 방면의 힘은
많이 약해진 듯하다. 그리고 아파트의 노후화로 많은 집주인들이 목동이나 강남, 분당으로
떠나고 전세를 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부분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는데 앞으로 여의도의
스카이라인뿐 아니라 거주자의 인구 분포와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여의도에서 배운 도시계획의 노하우는 강남 개발로 이어진다.
이 여의도에 관한 긴 글이 언뜻 강남 개발사의 축약본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 한종수, 강희용 저, ‘강남의 탄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