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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조용헌의 영지순례(靈地巡禮)
나는 지금 부산의 화명동(華明洞)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다. 화명동은 ‘화산 아래 명당 동네’라는 뜻이다. 사람 살기 좋은 곳, 가족들이 건강하고 자손이 번창하는 곳을 명당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에는 명당이 아주 많다. 내가 태어난 창녕의 옥천리 ‘고두방지’라는 동네도 명당이 아닐까 싶다. 옥천사(玉泉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관룡사(觀龍寺)라는 고찰이 있는 곳으로 물 맑고 공기 좋고, 인심 좋으니 명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다. 신라말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전국에 명당이 3,600여 곳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는 명당이 많다.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곳이 명당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곳을 지금 당장 찾아가 보기는 힘들다. 특히 기괴한 전염병으로 외국의 명당에는 더욱 가기 힘들다. 이럴 때 우리 땅에 있는 명당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렵다면 책을 통해서 찾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용헌의 영지순례》란 책을 접하게 된 이유다.
저자 조용헌은 사주 명리학자로 스스로 ‘강호동양학’이라는 학문의 경지를 이룬 모양이고, 젊어서는 도사(道士)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산을 찾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즉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순간 모든 괴로움이 떨쳐 나간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았고, 평범한 여행가가 아닌 ‘칼럼니스트’로서 집필 활동은 자연의 기운을 통해 지혜와 위로를 전해주기 위한 작가만의 방편이라고 출판사는 저자를 소개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명당과 저자가 생각하는 명당은 다른 것 같기도 한데, 달리 말해 영지(靈地)의 기준 말이다. 저자는 영지의 기준으로 ‘첫째, 지리적으로 강한 기운이 온몸에 전해진다. 둘째, 풍수지리적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한다. 셋째, 풍광이 매우 뛰어나다. 넷째, 기록과 구전으로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다섯째 큰스님이나 대학자 등 역사적 인물이 태어나거나 머물렀다. 여섯째, 승려와 도사, 선비, 민초들의 수많은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도처이다. 일곱째, 유서 깊은 사찰이 자리한다. (영지 터에 불교가 들어와 자리잡았다) 여덟째, 풍부한 사료와 문학과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면서 이런 곳을 영지라고 했다.
저자는 책에서 첫 번째 영지(명당)로 월정사(月精寺)와 상원사(上院寺), 그리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 오대산(五臺山)을 꼽았는데, 오대산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양산 물금과 경주에도 있는 오봉산(五峯山)처럼 다섯 개의 봉우리로 된 산이다. 동양에서는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지고, 음양이 다시 오행으로 분화된다고 믿었는데, 오행에서 만물이 배출된다.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라고 하는 오행사상은 전통문화에 자리한 어떤 ‘틀’이라 할 수 있다. 오대산은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로, 중대 꼭대기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오며 상원사, 월정사가 자리하는데 여기를 명당이라고 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오대산 중대는 조선 시대 이전부터 도인들이 몰려들고, 애착을 가졌던 것이라는 것은 이 산을 ‘지로산(地爐山)’이라고 부르는 데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로는 화로를 뜻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수련을 통해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여기에는 단약(丹藥)을 제조하는 화로가 핵심이다. 화로가 금이냐 은이냐 동이냐 혹은 합금이냐 옥이냐에 따라 단약의 효능이 달라진다. 화로에 불을 때서 단약을 만드는데 불은 곧 신물이다. 신선이 되느냐, 못 되느냐는 화로에서 결판난다고 할 수 있다. 오대산의 중대를 지로산으로 불렀다는 것은 중대에서 도를 닦으면 사방의 기氣, 즉 에너지가 모여들어 득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이 가지고 있는 영적 에너지의 중요성을 주목한 문파는 도교가 아니라 불교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 대국통(大國統)으로 왕사(王師)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신라를 불교국가로 만드는 ‘마스터 플렌’을 짠 고승이고, 황룡사 9층탑을 기획했으며 울산의 태화강 어귀에 태화사(太和寺)라는 절을 세워 해운물류와 국방의 거점으로 삼게 했으며, 양산 통도사(通度寺)를 건립해 승려양성 시스템을 구축하였는데 그가 오대산을 주목한 것이었다. 오대산 중대 꼭대기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셨고, 여기가 최고 명당이라고 하는데 다른 이론이 없다.
오대산 꼭대기에 절멸보궁이 있다면, 중간에 상원사, 아래에 월정사가 있다. 두 절의 내력을 살펴는 것도 한두 가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銅鐘)으로 성덕대왕 신종보다 46년 전에 주소한 상원사 동종은 안동성 남문 ‘관풍루(觀風樓)에 있던 것을 세조의 아들인 의종이 여기로 옮겼는데 당시 죽령을 넘을 때 종을 실은 달구지가 꿈적도 하지 않자 누가 떠나기 싫어 그러는 것이라며 종 일부를 떼어 남문 아래 묻어야 한다고 하여 종의 유두(乳頭) 한 개를 떼어 묻어주자, 달구지가 움직였다고 하는데, 유두 하나가 없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최인호의 「유림」이라는 소설에 소개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한국전쟁 당시 전국의 수많은 절이 불타고 소실되었으나 상원사는 화를 면한 이야기는 적어둘까 한다.
근세 한국불교에서 한암(漢岩, 1876∼1951)은 선사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50세 때인 1925년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촌(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상원사로 들어갔다. 그동안 맡고 있던 불교계 벼슬을 모두 버리고 ‘일본사람들 눈치 보면서 써 준 원고나 읽을 수는 없다.’며 학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인민군이 거처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전방에 있던 절들은 아군에 의해 불태워졌는데 상원사도 피할 수가 없었다. 이미 월정사를 불태우고 올라온 국군이 “스님 나오십시오. 여기도 불태워야 합니다”고 하자, 한암이 “나는 나갈 수 없소. 나도 같이 불태우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산채로 화장당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이자 국군 장교가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법당 문짝을 몇 개 떼서 불사르고 불태웠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상원사는 한국전쟁 때도 불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오봉산 주사암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되지 않거나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할 때 사람들은 주금사(呪噤師)를 동원하곤 했다. 주금사가 외는 주술(呪術)이라는 전통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왔으며, 그 고유의 전통을 잇는 유적지 가운데 하나가 ‘주사암(朱砂菴)’이다. 주사암은 경주 서쪽에 여근곡으로 유명한 오봉산(해발 730m) 정상 바로 아래에 있다. 오봉산 정상은 바위로 되어 있고, 바위 모양이 마치 투구를 닮았다고 하여 ‘투구바위’라고 부른다. 투구바위가 있는 곳에는 장수가 배출된다는 속설이 있다. 신라 명랑법사(明朗法師)가 감포 앞바다에서 신라를 침략해 오는 왜적을 신인종(神印宗), 즉 주술로 물리쳤다는 기록은 주술의 효험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가장 믿지 않는 분야가 주술이다. 아프리카 부두교*에나 남아 있는 하찮은 미신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도 불교 사찰에서는 주술만을 전문으로 하는 주금사가 있었다. 주사암에는 정신세계를 관장하는 ‘신장 탱화(神將 幁畵)’가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신장이 머물고 있다고 믿고 있다. 효험이 있기 때문인지 사람의 정성이 갸륵해서 감응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시대는 대략 1500년 전이다. 수십만 년 동안의 정신세계 역사에서 1500년은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다.
*부두교 : 서아프리카에서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로 16세기에서 19세기에 팔려 온 흑인 노예들이 믿던 종교로 전 세계에 6천만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
경주 오봉산은 신라 화랑의 우정이 서려 있는 곳으로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며 지은 〈모죽지랑가〉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부산성(富山城)이 있던 곳으로, 경주 서쪽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백제의 침략을 막던 곳이다. 동쪽으로 왜구가 쳐들어왔으므로 석굴암을 지어 왜구를 견제하였고, 문무왕은 해룡이 되어서라도 왜구를 막겠다고 해 감포 앞바다에 장사(葬事)지내게 했다. 하늘의 신병을 불러올 만한 곳이 여기 주사암이다. 주술 신화와 화랑도의 역사가 여울진 영지임이 분명하다.
[모죽지랑가 (慕竹旨郞歌)]
① 원문
去隱春皆林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 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②“간 봄 그리매/모든 것ᅀᅡ 우리 시름/아ᄅᆞᆷ 나토샤온 즈ᅀᅵ/살쯈디니져/눈 돌칠 ᄉᆞ이예/맞보ᄋᆞᆸ디지ᅀᅩ리/郎이야 그릴 ᄆᆞᅀᆞᄆᆡ녀올 길/다봊ᄆᆞᅀᆞᆯᄒᆡ 잘 밤이시리(간 봄 그리매/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눈 돌이킬 사이에나마/만나뵙도록(기회를)지으리이다. /郎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이/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양주동 해독)
③“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 하옵내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하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최철 풀이)
양주동의 해독은 15세기의 음가를 중심으로 해석하였는데, 신라 시대의 음가가 과연 15세기의 음가와 동일 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제시된 바 있다. 이러한 견해를 대변하는 해독으로는 홍기문과 정열모의 연구를 들 수 있다. 홍기문은 신라어의 음가에 최대한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특이하게 해독한 바 있다. 그리고 김완진은 네 가지 원칙을 세워서 작품을 해독한 특징이 있다. 일자 일음의 원리, 훈수종음의 원리, 맥락 일치의 기준, 율조의 기준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해독하였다. 양주동과 김완진의 해독상 차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皆林米’에 대한 해독에서 양주동은 ‘그리워함에’로 하였고, 김완진은 오지 못하다로 하여 음역(音譯)과 훈역(訓譯)의 차이점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에 대해서는 양주동이 ‘아름다움 나타내신’으로 풀이한 반면, 김완진은 ‘殿閣을 밝히오신’으로 풀이해서 큰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逢烏支惡知作乎下是’에 대해서도 양주동은 ‘만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해석한 반면, 김완진은 ‘만나보기를 어찌 이룰 것인가’로 해석하여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래를 보면 지나간 봄을 그리며 시름에 젖고, 또 죽지랑의 아름답던 모습이 쇠함을 바라보는 득오의 낭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작품의 주된 정조를 형성하고 있다. 한때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후 여러 대에 걸쳐 대신으로서 존경과 찬미를 한 몸에 받았던 노화랑(老花郎)의 쇠잔한 모습을 안쓰러워 하는 득오의 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변하지 않는 존경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모죽지랑가〉의 제작 시기에 대해 죽지랑 생존시에 지은 작품이라는 설과, 그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여 지은 노래라는 설이 학계에 제기되어 있다. 전자에 따를 때는 득오가 앞서 익선에게 끌려가서이거나 그 일이 있은 뒤, 낭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되고, 후자의 경우 죽지랑이 죽은 뒤 그의 덕을 사모하여 추모 찬송한 추모가의 성격을 지닌다. 어떻든 이 작품은 지난날 위대했던 노화랑 죽지랑이 일개 아간 벼슬의 익선에게 수모를 당할 정도로 위엄과 위의를 상실해 간 화랑이 세력을 잃은 모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절벽 위 암자 정취암
지리산 아래 산청(山淸)은 문씨(文氏)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고려말 문익점(文益漸) 선조가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시배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산청에 살던 문익점의 후손 가운데 문가학(文可學, ?∼1406)이란 이가 있었는데 비를 내리게 하는 신통력이 있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그래서 태종(太宗)이 쌀과 옷을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일설에 따르면 ‘문가학이 역모 과정에 둔갑술을 부렸지만, 마지막 상투 부분 혹은 옷자락 끝부분이 변하지 않아서 역모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둔갑술을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문가학이 문익점의 동생 아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그로 인해 산청지역에서 문가학의 집안은 곤욕을 치렀다는 것이 분명하다.
산청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유명한 정취암(淨趣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이곳은 정취보살(正趣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취보살은 관음보살과 나란히 하는 양대 보살이다. 우리나라에는 관음도량은 많이 있으나, 정취도량은 이곳 정취암 뿐이다. 의상대사가 금강산 원통암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여기 대성산 정취암에 정취보살을 모셨는데 그만큼 비중 있는 수행처다. 정취암에서 기운이 가장 센 곳은 산신각으로 벽에 산신의 탱화가 없고 유리창 너머로 돌로 만든 산신상이 보이는데 “몇 년 전 양산에 산다는 어느 석공이 산신상을 만들어서 정취암에 모시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어요. 석공이 꿈에 산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해요. 꿈에 본 모습대로 산신령을 조각했대요. 그리고 1년 넘게 산신상을 모실 사찰을 샅샅이 찾아다녔다고 해요. 어떤 절이 꿈에 본 모습과 비슷한 곳인지를 찾기 위해서요. 결국 정취암에 와서 꿈에 본 풍경을 찾았어요.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는 산신령의 손에는 파초선(芭蕉扇)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무게가 3톤이나 돼요. 산신상을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데 엄청 고생했지만, 무사히 산신각에 모셔놓게 되었어요”정취암 수완 스님의 설명이다.
우리나라 토속 신앙에는 3대 축이 있다. 산신, 칠성, 용왕이 그것이다. 산에 가서는 산신을 숭배하였고, 강과 호수, 바다에서는 용왕을, 그리고 하늘의 신이 칠성이었다. 칠성 신앙은 뿌리가 아주 깊다. 북방 유목민족에게 이동하는 방향과 시간은 절대적이었으며, 방향과 시간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한 별자리가 북두칠성이다. 칠성은 하루 저녁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빙빙 돈다. 칠성의 꼭지점인 추성(樞星)을 중심으로 한 바퀴씩 돈다. 이때 6번과 7번 별을 시침(時針)이라고 부른다. 시침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밤하늘의 방향과 지금이 몇 시쯤인가 가늠할 수 있다. 시계가 없던 고대에는 칠성이 바로 시계였다. 하늘에 떠 있는 시계, 그것은 시간의 神이었다. ‘사막의 대상(大商)들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오가던 시절, 별빛이 길을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한 게오르크 루카츠*는 탄식이 들리고 ‘칠성님을 믿고 따라가던 그 시절이 좋았다’로 들린다.
*게오르크 루카츠 :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 철학자로 후기 자본주의를 '물화(reification)' 개념으로 분석하여 비판 이론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고, 리얼리즘 문학과 문예비평 등 광범위한 지적 영역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 말은 《소설의 이론》첫 구절이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칠성님께 돌아갔다는 의미다. 하늘이 부여한 시간을 다 써버리고 갔으니 다시 시간을 부여받기 위하여 칠성에게 돌아가서 시간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새로 시간을 부여받기 위해 칠성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또 죽은 사람은 칠성판 위에 누워 저승으로 간다. 칠성 신앙이 불교 신앙에 흡수되어 철성각 또는 칠성전으로 이어져 오고있는 것이다. 각(閣)보다 전(殿)이 앞인데, 크고 영험하다는 것이다. 대개 각으로 불리지만 정읍 백양사는 칠성전이라고 현판이 달려 있다. 그만큼 높여 부르는 것은 효험이 있어서일 것이다. 영험한 명당터는 그 땅의 형상과 풍수도 중요하지만, 그 터에 조림(照臨)하는 별의 각도 또한 중요하다. 명당은 칠성이 조림하는 곳이다.
“갈 때는 쉼을 잊고 쉴 때는 가기를 잊어
솔 그늘 밑에 멈추고 물소리를 듣네
뒤따르던 몇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가지만
각자 나름 갈 길 가니 다투어 무엇하리” 송익필 -〈산행〉
그 이름 계룡산
내가 듣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가 세고 기도 영험이 있는 산으로는 계룡산과 월출산, 일월산 그리고 마니산이라고 들었다. 산행하며 이들을 모두 다 올라 가 보았지만, 그 중에 계룡산이 높지 않아도 자태를 뽐내는 산이었던 것 같다.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을 안고 있는 계룡산은 머리봉-천황봉-쌀개봉-관음봉-문필봉-연천봉으로 이어지고 거의 높이가 비슷해 일자형(一)을 이룬다. 국사봉은 고려 때부터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별이 인간의 운명을 관장한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있었다. 하늘의 메시지, 하늘의 문양이 천문 아닌가. 천문을 관측한다는 것은 어느 별이 지구에서 몇 광년 떨어져 있고, 별에 가스가, 암석이, 혹은 물과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등과 행성의 움직임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면, 고대에는 내 운명이 별과 관계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관심이 훨씬 더 깊었다. 고려의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탄생 설화도 별과 관련이 있는데, 문곡성(文曲星)이 떨어진 곳을 낙성대(落星臺)라고 하고, 그곳이 서울 관악구에 있던 강감찬 장군의 집이었다는 것이다.
통일교 세계본부와 오하산방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홍천군 경계에는 장락산(長洛山)이라는 골산(骨山)과 보리산(菩提山)이라는 육산(肉山)이 있다. 두 산은 1m 오차도 없이 해발 627m로 똑같다. 완벽한 쌍둥이 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골산은 영기(靈氣)로 기도발이 받는다면, 육산은 돈과 먹을 것이 생긴다. 골산, 즉 암산이 종교인에게 맞는다면 육산은 사업가에게 맞는다. 서울 주변 산들 가운데도 유독 남산이 육산인데, 남산 주변에 기업가들 저택이 많은 이유도 그래서 일까? 아무튼 장락산 아래에 故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통일교 세계본부에 해당하는 천정궁(天正宮-박물관)을 지었는데, 미국의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합쳐 놓은 듯한 스케일의 석조건물이다. 두 팔로 껴안을 수 없을 정도의 기둥은 세계적 규모다. 또 보리산 아래에는 한컴그룹(한글과 컴퓨터)김성철 회장의 오하산방(梧河山房)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연수원과 강당 등이다. 음양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진안 마이산도 암·수로 되어 있고,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이 마이산에서 신인으로부터 꿈에 금척(金尺)을 받았다고 전하는데, 제왕이 될 징표를 받았다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2개 봉우리를 태을(太乙) 또는 천을(天乙)이라고 해석하는데 상서롭다는 뜻이다.
간월암
부산 해운대 ‘달맞이 길’도 ‘대한팔경’중 하나로 명승에 속하지만, 달그림자를 보기 좋은 곳은 간월암(看月菴)이다. 산중에 사는 재미는 아마도 달을 보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간월암은 산중에 있지 않다. 영남알프스에 속하는 간월산은 간월(看月)이 아니라 계곡의 달 간월(澗月)이다. 달을 보며 농월(弄月)도 하고, 무월(撫月)도 하고, 망월(望月)도, 보월(步月-달밤에 걷다)도, 승월(乘月-달빛을 쫓다)도, 여월(艅月-배를 타고 달을 감상하다)도 하면서 살아간다면 정말 운치가 있겠다 싶고,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불가에서는 내면세계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내면에 집중한다는 말일까.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모든 환경이 의식을 바깥으로 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향미촉법(性香味觸法), 설신의안이비(說身意眼耳鼻) 모두가 인간의 의식을 밖으로 향하도록 한다. 독서를 하고, 휴대폰을 사용하고, 인터넷을 하는 것도 외부로 의식을 향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을 뒤집어 안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녹록치가 않다. 내면세계로 의식을 집중하는 상태, 고요함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이것은 결국 본인의 마음이 중요하겠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환경도 중요하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그 환경 중 하나가 달빛이 바다나 호수에 비치는 풍경이다.
밤은 캄캄하다. 어둠이란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밖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안으로 향하게 된다. 보름달이 비친 간월암에서 천수만(淺水灣)의 달빛을 보고 있노라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을 느끼게 된다. 도시에서 느끼는 고요함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간월암의 바다는 호수와 같아서 파도 소리도, 갈매기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달은 태양처럼 눈부시지도 않아서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달을 바라보자.
간월암 - 2008.6.24
사자산 법흥사 백골관
도교와 선도(仙道)에서는 호랑이를 좋아하지만,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사자를 좋아한다. 큰스님의 ‘할(喝)’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 사자산이라는 이름이 더러 있는데,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와 장흥 사자산 보림사(寶林寺)가 꽤 유명하다. 사자산에는 사자앙천혈(獅子仰天穴)이라고 하는 명당이 있기 마련인데, 사자가 하늘을 보고 포효하는 형국을 말한다. 법흥사는 사자 주둥이 부위에 자리한 절이라고 한다.
법흥사에는 적멸보궁이 있을 뿐, 대웅전이나 부처가 없다. 적멸보궁 뒤에는 석분(石墳)이 있는데, 석분(석굴)의 높이는 160㎝, 길이 150㎝, 너비 190㎝로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가 앉거나 누울 정도다. 석분 안쪽 뒤편에 길쭉한 돌판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의 뼈가 있었다고 한다. 어떤 수행자가 수행하다가 그대로 죽은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마 갖다 놓은 것으로 짐작되었다. 인도에서는 죽은 사람을 길바닥에 그대로 두는 관습이 있다는데, 화장하려면 장작이 필요하고 장작 살 돈이 없어서 그대로 방치하는 풍습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인도에는 개가 시체 일부를 물고 다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고 하고, 썩어가는 시체 옆에 수행자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명상하기도 한다고 한다. 냄새 속에서 썩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명상을 한다는 것. ‘아! 육신은 결국 이렇게 썩어 없어지는구나! 내가 그토록 아끼려고 바둥거렸던 육신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썩어 가는 시체를 눈과 코앞에서 생생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고통의 수행법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확실히 안다. 육신의 허망함은 책으로 읽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점이 무르고 짓이겨지고 역한 냄새를 풍기면서 마침내 몇 개의 뼛조각으로 남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때 확실히 알게 된다. 그때야 애지중지하던 세속의 욕망을 떨쳐버릴 수가 있다.
이것이 ‘백골관(白骨觀)’이라는 수행법의 유래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백골관을 수행했다고 한다. 법흥사 석분의 백골은 수행하던 고승의 백골이라기보다 수행의 도구로 백골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되는데, 처음에 자장이 백골관 수행을 닦은 이래로 그 전통이 이어져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백골을 놓고 이 돌방에서 수행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도에서처럼 썩기 시작해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를 갖다 놓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얻음은 그때를 만난 것이요. 잃음은 자연의 순리에 따른 것이다.
세상에 오면 편안히 그때에 머물고, 떠나면 또 순리에 몸을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 장자
경주 감포 대왕암
새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되던 2001년인가? 경주 감포로 ‘해맞이’를 간 적이 있다. 그전 해부터 해맞이가 유행해 전 해인 2000년에는 토함산에 올라가 해맞이를 할 생각으로 새벽에 집을 나섰으나, 꽉 막힌 도로로 해 뜨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대신 단석산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1월 1일 해맞이를 한다는 것은 새해의 포부를 새롭게 새기게 하므로 또 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감흥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1초에 30만㎞를 달리는 태양의 첫빛을 본다는 것이 신비로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포는 어떤 의미에서 경주, 아니 신라의 관문이다. 적이 바다를 통해 공격해 온다면 여기가 취약지역이 아닐 수 없다. 이곳을 방비하기 위해 신라는 여러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으면 약속대로 신라에 줄 것은 주었어야 하지만, 당나라는 욕심이 과했다. 신라까지 집어삼키려 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신라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라는 주술법을 이용해 당나라 군대를 수장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에서 온 말로 ‘신의 도장(神印)’이라는 뜻이다. 명랑법사가 도력 높은 승려들과 독송하고 기원하자 큰 파도가 일어나 당나라 배를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이때가 670년경, 바로 감포 앞바다에서의 일이다. 이때 문무왕은 주술적 힘으로 당나라를 격파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을 것이고, 이때 문두루가 행하여진 곳이 문무왕이 세운 사천왕사(四天王寺)로 경주 낭산 아래 있는 절이다. 지금은 일부 유적만 남아 있다.
지금 그때의 ‘감포 해맞이’를 가만히 돌아보면, 첫빛의 감동에 이은 기이함은 아마도 전국의 무속인이 여기 다 모였던 것 같은 광경이었는지 모르겠다. 이게 밀레니엄 시대에 맞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있고, 왕의 은혜에 감읍하기 위해 지은 ‘감은사(感恩寺)’란 절터가 있고, 대왕암을 바라보기 좋은 곳에 ‘이견대(利見臺)’라는 정자가 있다는 것 말고는 그냥 평범한 백사장과 바닷가일 뿐인데 말이다. 용왕이 되었다고 믿은 신라사람들의 기원이 담겼기 때문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견대는 ‘주역’의 첫 번째 괘인 건괘로서 용으로 이치를 설명한다.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으로 ‘용이 하늘을 날아오르니 대인을 만나야 이롭다’는 뜻이다.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인 문무왕이 용이 되어 보였다고 하는 곳에 이견대가 있다.
대왕암 주변에는 이처럼 감은사와 사천왕사, 이견대가 있고,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설화가 전하는 곳이다. 거대한 세트장이 아닐 수 없다. 이 판타지는 토함산에서 시작해 바닷속 대왕암으로 이어진 영발(靈發)이다. 영발 신화는 1300년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졌지만, 감포 해변에서 굿을 하고, 주술을 읊던 무당들을 통해 아직도 생생히 이어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어찌할까? 어찌할까?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 공자
팔공산 갖바위
“대구 팔공산에 간다는 것은 사흘 굶은 사람이 안심스테이크를 원 없이 먹는 격이다. 대구 일대 사람들이 그동안 이 산의 기운을 받고 산 셈이다. 산 전체가 거대한 발전소라고 할까. 아니면 메시지와 에너지를 주는 안테나라고 해야 할까”- 저자의 말이다.
나는 대구에서 살지도 살아본 적도 없으나, 팔공산에는 몇 번 가봤다. 산행하기 위해 혹은 답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도 아니면 집사람이 기도하러 가는데 동행해서도 갔다. 아마 다시 팔공산에 가게된면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시작 해야 할지 고민될지 모르겠다. 저자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갖바위는 한국의 영험한 기도처로 이미 소문이 나 있다. 거기에는 바위 속에 함유한 지자기(地磁氣)가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텔피 신전’은 ‘파르나소스산(2457)’의 700m쯤에 위치하는데, 절벽투성이 산에 있듯이 그리스의 수도원 대부분은 이런 바위산에 있다. 심지어 수백 미터 솟은 바위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중국에는 오대 명산을 오악(五嶽)이라고 하는데, 동악 태산(泰山), 남악 형산(衡山), 서악 화산(華山), 북악 항산(恒山), 중악 숭산(嵩山)이 그것이다. 화산과 태산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지만, 형산은 그렇지 않다. 부석부석한 푸석돌로 되어 있다. 2000년 초에 갔던 화산은 무협지 단골 무대이기도 하지만, 서울의 인수봉 두세 배 되는 높이가 온통 바위 절벽이다. 대구 팔공산도 단단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해발 1192m로 낮은 산이 아니다. 그래서 ‘팔공산은 인간에게 메시지와 에너지를 주는 거대한 안테나’라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십승지, 정감록
《십승지》와 『정감록』이라고 들어보기는 하였어도, 그걸 믿거나 연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고, 매일 학진자 숫자를 새롭게 쓰고 있는 이 마당에 도시인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가 있을 것인가 싶기 때문이다. 선조들도 압제와 핍박을 피하고 삼재(三災)를 피할 곳을 찾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재는 불교 신자들이 절에 가서 천재·인재·지재를 막아달라고 비는 삼재와 비슷한 전쟁과 기근, 역병을 말한다. 십승지에 숨어들어 가면 전쟁이 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대흉년에도, 전염병이 창궐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첫 번째로 꼽히는 곳이 경북 풍기의 금계포란(金鷄抱卵)이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말이다. 태백산은 동해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아주고, 소백산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은 물론 북풍까지 막아주는 지형이다. 그러면서 암산이라기보다는 육산이다. 먹을 것이 재배된다는 이야기로 풍요로운(豊) 터(基)가 바로 풍기다. 1890년대 동학혁명 등으로 민심이 흉흉하자 북쪽 황해도, 평안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했다. 그들 중에는 비결서 『정감록』신봉자들이 많았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이민 수준이었다.
조선 영조 26년(1750)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해 1월부터 7월 사이에 20만 명이 죽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인구 700만 명 가운데 3.5%가 죽었다는 것으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피할 수 있는 곳을 ‘십승지’라고 했다. 풍기의 금계촌을 비롯해 봉화 춘양·안동 화곡, 합천 가야산 밑 만수동, 영월 정동, 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 단양 영춘, 공주 유구·마곡, 부안의 호암, 남원 운봉, 무주 무풍 등이 그곳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조사되거나 공식적으로 인정된 곳이 아니고 『정감록』과 『남사고비결』등 민간의 주장으로 약간씩 들쑥날쑥한다.
유럽의 그리스나 터키, 중동은 산은 있지만,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또는 사막으로서 물도 나무도 없는 곳이 많다. 이런 곳에서는 십승지가 만들어질 수 없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이 모인 곳일수록 돈 벌기가 좋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면 사람 없는 곳이 좋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미국 LA나 뉴욕이 한국인에게 십승지였다면, 미세먼지와 치열한 생존경쟁에 지친 2021년에는 자연환경이 좋은 호주나 뉴질랜드 아니면 남극이나 북극이 십승지가 아닐까 싶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옥구슬, 별들을 주렴으로 하여,
만물의 호송 속에 떠나갈 것이다.
장례 준비가 다 되었는데 뭘 더 보태겠는가.” - 장자
선운사 도솔암
하동 쌍계사에 가면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四山碑) 중 하나인 ‘진감선사’탑비가 있다. 한국전쟁 때 총을 맞았는지 깨진 것을 철테로 겨우 묶어 둔 모습이 안쓰럽지만, 여기에 진감선사의 내력이 소상히 적혀있다. ‘진감선사(744∼850)는 익산 금마 출신으로, 804년 당나라로 건너가 공부한 뒤 830년에 귀국했다. 그는 신분이 미천해 정식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유학할 형편이 못 되었다. 당시 유학은 귀족이나 갈 수 있었다. 그는 배 젖는 노꾼으로 고용되어, 당나라로 건너가서 거기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귀국해 고향 가까운 서해안 고창 바닷가에 도착했고, 당시 도적의 소굴이던 지금의 선운사 자리에 있던 도적들에게 소금 굽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고창 사등마을에 가서 살게 하고, 도적들이 살던 소굴에 선운사(禪雲寺)라는 절을 창건했다.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소금 굽는 기술을 배워온 내력은 생략하더라도, 지금은 바닷물을 햇볕에 말려서 ‘천일염’을 만들지만, 조선 시대까지도 이런 제조방식은 몰랐고 시행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알려진 방식이다. 구한말까지 바닷물을 솥단지에 넣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들었다. 이것을 자염(煮鹽)이라고 하는데, 자煮는‘삶다, 굽다’는 뜻이다. 장작으로 소금을 만든다고 해서 화염(火鹽)이라고도 한다.
선운사 도솔암(兜率庵)으로 가는 길 암벽에는 커다란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데, 창건주 ‘검단선사’의 모습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원래 도적의 소굴이었던 곳을 도둑들에게 소금 굽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절터를 확보한 검단선사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마애불과 산신각의 탱화로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검단선사가 바로 진감선사라고 주장한 이가 있으니 전주대 송화섭 교수다. 그는 〈고창 선운사 검단선사의 문화사적 고찰〉이라는 논문에 그렇게 주장했다. 아무튼 현재도 고창 사등마을에서는 해마다 전통 방식으로 화염을 만들고 그것을 달구지에 싣어서 선운사에 보은염을 시주하고 있다. 선운사도 사등마을도 모두 명당터가 임에 분명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해인(海印)’이란 말은 한 번 들으면 쉽게 잊어먹지 않는다. 동아대에 이혜인 교수가 있어서 이름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바다의 도장’이라는 뜻이 의미심장하다. 바다의 도장은 무슨 뜻일까? 여러 설화 중에 용왕이 쓰는 도장이라 하여 보물 중의 보물이라는 뜻이다. 이 해인을 식食자에 찍으면 먹을 것이 나오고, 주酒자에 찍으면 술이 나온다고 여긴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고 부르듯 만사형통하는 도장인 것이다. 설화에는 합천 해인사도 해인의 신통력으로 순식간에 뚝딱 만든 절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해인사’라고 한다고 전해진다.
국보 중의 국보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해발 1430m의 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해인사 장경각 건물 2채에 보관되어 있다. 험한 바위산인 가야산은 화산(火山)에 속하므로 불꽃 같은 영발(靈發)을 지녔다. 해인사는 북방의 거란 등으로부터는 물론 남쪽의 왜구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다른 취약점을 지녔는데, 그것은 화재다. 목판으로 된 대장경은 화재가 나면 모두 소실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 순조 때 해인사에 불이 나서 대적광전이 모두 불탄 적이 있다. 대적광전 뒤에는 장경각이 있으니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만약에 불똥이 여기로 튀었다면 우리는 지금 팔만대장경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피인지, 백성의 염원이 통했는지, 화재 때 불타지 않아서 우리는 지금 대장경을 만날 수 있다. 당시 불타버린 대적광전을 복원한 인물이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으로 그는 경상관찰사였다. 복원 비용의 3분의 1은 관찰사가 사비를, 또 3분의 1은 경상감영에서, 나머지는 해인사에서 감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취약점을 예방하기 위해 해인사는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풍수비보(風水裨補)이다. ‘남산십일봉’이라 불리던 해인사 앞산을 ‘매화산(埋火山)’으로 이름을 바꿨다. 불꽃처럼 뾰족뾰족한 산을 ‘불을 묻어 놓은 산’이라고 하여 천지개벽이 일어나기 전에는 일어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또 해마다 오월 단오일에는 대적광전 앞 축대 위와 율원(律院)앞 바위와 그리고 해인총림 현판 앞 바위에 구멍을 파 소금을 넣기도 하고, 매화산 정상부에도 소금 단지 6개를 묻는 행사를 치른다. 화기가 가장 강하다는 단옷날에 화기로부터 보호하는 비책이 바로 소금인 것이다.
아! 지리산
신라는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고, ‘모례(毛禮)’라는 신도의 집에 머물던 아도(阿道)가 도리사(桃李寺)를 짖고는 모례의 이름에서 ‘절’이 구전되었다고 하고, 왕의 이름은 법흥왕·진흥왕으로, 왕손의 이름은 금륜·동륜, 선덕·진덕 등 불교식으로 지었고, 진흥왕은 “신라의 여인들이여! 모두 미륵을 낳아 달라”라고 호소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미륵이 누구인가? 56억 7천만 년 후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내세를 구원할 부처, 그때까지는 보살로 남겠다고 서원한 석가모니 후생 부처가 아니던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듯 불교가 우리 생활에 들어오기 전에 믿음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누가 뭐래도 ‘삼신할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에게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생명줄을 이어주는 것이 삼신할머니가 관장하는 일이다. 앞에서 본대로 삼신은 산신·칠성·용왕으로,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산신은 불교가 들어와서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등산 동호 클럽은 시산제를 지낼 때마다, 새로 절을 지을 때에도 제일 먼저 세우는 건물이 산신각이다. 산신이 절을 지어도 좋다고 결재하지 않으면 절 짓기 힘들다고 여기는 전통 때문이다.
지리산에는 연기조사(緣起祖師, 경덕왕(재위 742~765)때의 승려)가 세운 여러 개의 절이 있는데, 화엄사·법계사·대원사·연곡사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절에는 모두 석탑이 있다. 그중에 화엄사에는 네 마리 사자가 삼신할머니를 옹립하고 있는 ‘사사자석탑’이 있다. 석탑을 세운 터는 대개 기운이 너무 세거나, 너무 약한 곳이 많은데 그것을 비보하고 있다. 법계사는 해발 1450m 높이에 있다. 남한에서 여기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절은 없다. 땅에 내려치는 가장 강한 기운은 번개로 지리산 천황봉에 번개가 치면 맥을 따라 법계사로 내려온다고 한다.
조선 시대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중이 활동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역을 피하거나, 죄를 짓고 산속에 들어와 가짜 승려행세를 하는 이가 많았다. 이를 억제하기 위해, 승려들이 스스로 비밀결사대를 조직했으니 이를 ‘당취(黨聚)’라고 한다. 이들은 서민들을 착취하는 양반이나 부자, 벼슬아치를 응징하기도 하고, 가짜 승려를 색출하기도 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고 산봉우리마다 절과 암자가 있으니 당취에 속한 조직을 관에서 파악하거나 진압하기는 불가능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큰 기와집과 왕실의 시주받으며 살았던 성직자 계급인 승려들이 갑자기 천민으로 격하된 것인데, 승려는 사노비,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工匠) 등과 같이 팔천(八賤) 계급의 하나가 됐다. 동아시아 국가에서 승려를 천민으로 강등시킨 것은 조선이 유일하다. 이러한 푸대접에 대항해 자생한 조직이 당취지만 그들의 활동이 온전할 수 없었고 관에서도 골치를 앓았다.
지하조직이었던 당취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오직 구전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세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산속 노장스님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칠불사에서 잘록한 고개 ‘당재’를 넘으면 피아골 연곡사 쪽이 나오는데 이 당재가 당취들이 검문검색을 하던 장소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자락에 잘록한 지점, 해발 500∼600m쯤 돼는 지점에, 지리산을 통과하는 과객과 포부상 또는 승려들은 당재를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지리산은 첩첩산중 해방구였다. 온갖 사연으로 숨어들어 와서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특히 죄를 짓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라며 가짜 중이 된 이들을 관이 아닌 당취들이 색출해 낸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갑질을 일삼는 지배계층과 유생들에 대한 원한을 가진 승려조직이었으니 관의 입장에서 이들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당재에서 보면 ‘농평마을’과 ‘당재마을’이 보인다. 당재마을이란 아마도 당취들과 관계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은신하기도 탈출하기도 용이한 마을이다. 지리산에는 삼신사가 있는데, 의신사(義神寺)·신흥사(神興寺)·영신사(靈神寺)가 그것이다. 지리산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요새(要塞) 같은 절들이다. 그중에서 의신사는 당취 대장이 머물던 곳이다.
서산이 15∼16세쯤 친구들과 지리산에 놀러 갔다가 머리를 깎은 곳이 ‘원통암’인데, 원통암은 당취의 중심이던 의신사 조실스님이 머무르던 암자였다. 지리산 당취의 맥을 먹고 성장한 서산은 이후 승과에 합격하고 금강산과 묘향산을 비롯한 전국의 당취들을 규합했다. 그런 다음 나라를 뒤집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반정부 활동이 아닌 구국의 길로 나선다. 서산의 역할이 대단했다는 것은 선조(宣祖)가 내린 그의 벼슬 이름으로 짐작하고 남는다. 「國국一일都도大대禪선師사禪선 敎교都도摠총攝섭扶부宗종樹수敎교普보濟제登등階계尊존者자」라는.
나라로부터 핍박받던 승려들이 나라를 위해 일어난 일은 아마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서산대사 이후 당취들의 명맥은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몇 번이나 세상은 바뀌었으나 지리산의 신록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푸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이지만, 불변하는 청산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안정시켜 준다. 지리산과 금강산, 묘향산 등 전국의 명산을 두루 섭렵했던 서산대사가 그 명산에 대해 내린 평가를 들어보자.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라고 했으나, 묘향산은 장이수(壯而秀)’라고 했다. 해발 1909m의 묘향산은 언제쯤 가 볼 수 있을까.
돈과 권력보다 위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대자연과 합일이 되는 것이다. 물아일체로 대자연과 일체가 되어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신神들려야 하고, 신선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무데서나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땅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조상들은 지리산 삼신동이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산 깊숙한 곳, 의신사가 당취 본부가 될 수 있었던 곳, 서산대사가 머리 깎은 원통암이 있는 곳, 원통암은 의신사에게 1시간쯤 더 올라가야 한다. 친구들과 지리산에 놀러 왔다가 머리 깎고 중이 된 휴정 서산대사, 이 근방에는 서산대사 자취가 남아 있다. 신흥사에서 의신마을로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이 지리산 둘레길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서산대사 길’이다.
아무튼, 전쟁은 목숨을 내놓으러 가는 것이다. 승려라면 살생을 금하는 근본 원리에 맞지도 않다. 조선 시대의 승려는 천민 취급을 받았다. 국가에 빚진 것도, 책임질 일도 없는 천민들은 누가 승자가 되던 그 밑에서 밥이나 얻어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취라고 하는 비밀결사조직은 이미 훈련이 되어 있었고, 그를 지휘하던 수장(首將) 혹은 정신적 지주가 서산대사였다. 일본군의 조총에 쓰러지는 백성을 보다 못한 서산은 승군에게 궐기를 당부했고, 금강산에서 사명대사, 계룡산 갑사에서 영규대사, 행주대첩에서 처영대사 같은 승장들이 불꽃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입으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으며,
뜻으로 읽지 말고 몸으로 읽자” - 석가모니
추억의 덕유산
덕유산(德裕山)은 ‘덕이 풍부해 여유로운 산’이다. 이름만으로 여유가 넘치고 인심이 느껴진다. 덕유산 정상은 향적봉(香積峰)으로 무주를 품고, 남덕유산은 함양을 품고 있다. 함양의 남쪽은 지리산 고봉이 자리하므로 함양은 웅장한 산속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함양에는 인물이 나가지 않고 들어온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치원 같은 이가 그렇다는 말 같다. 남덕유산 깊은 계곡 속에 자리한 영각사(靈覺寺)는 지금은 도로가 뚫려서 그렇지 예전에는 오지 중 오지였다.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0m)사이 움푹한 곳에 자리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고갯길이 일찍부터 나 있었다고 한다. 고갯길이 바로 육십령(六十嶺)인데, 지금은 그 고개 아래로도 터널이 뚫려 있다.
영각사는 876년 신라 헌강왕 때 심광대사(心光大師)가 창건했다. 한때는 19개 건물과 13개 암자가 소속될 만큼 큰 규모였으나 한국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고 2층 목조인 구광루(九光樓)만 살아남았다. 1911년 지어진 구광루 앞산이 ‘투구봉’이라는 암봉인데, 이곳을 산꾼들은 ‘칼날봉’이라고 부른다. 투구봉에서 월봉, 거망산, 황석산 등 영봉이 줄줄이 이어진다. 영각사는 나에게, 아니 우리 부부에게도 아주 특별한 추억이 있다. 오래전에 덕유산 야간 종주산행을 갔다 지쳐서 중간에 하산했는데, 일행들의 하산지점인 영각사까지 수㎞를 어떻게 가야 할지를 궁리하던 중에 마산에서 왔다는 어느 관광회사 가이드 청년의 차를 얻어타고 영각사까지 갈 수 있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대여 머리 위로 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직 좋은 날이다”
“늘 행복하자. 그리고 힘을 내자. 나는 혼자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