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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
왕하 22:8-13
8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왕하 22:8-13 /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서기관 사반이 성전에 가서 대제사장 힐기야를 만나 왕의 명령을 전하자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서기관이 그 두루마리를 받아 읽고 9) 왕에게 가서 보고하였다. `제사장들이 성전의 헌금궤를 모두 쏟아 가지고 성전 수리를 맡은 감독들에게 돈을 넘겨 주었습니다.' 10) 사반은 힐기야 제사장에게서 받은 율법책에 대해서도 왕에게 보고하고 그것을 왕 앞에서 읽었다. 11) [크게 놀라는 요시야왕] 왕은 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자 두려워서 자기 옷을 찢고 12)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보좌관 아사야에게 이와같이 명령하였다. 13) `여러분은 이제 예언자를 찾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옳을지를 여호와께 물어 보시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책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유다 온 백성에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신분이 높을수록 그리고 권력이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듣기보다 명령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겼고 귀 기울여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시야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진리나 명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기록된 것(말씀)’(13)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옷을 찟으니라(8-11) 사반이 읽은 율법 책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는 그의 옷을 찢었습니다. 왕이 옷을 찢는 행동은 극도의 슬픔(왕하 2:12; 5:7)과 회개(왕하 19:1; 렘 36:24)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요시야의 경우는 회개의 표시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양극단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요시야는 옷을 찢어 회개했지만,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베어 화로에 던져 태워버렸습니다(렘 36장). 힐기야가 발견한 이 율법책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로 요세푸스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은 모세오경 전부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이 율법책은 신명기 31장 26절에서 보듯이 언약궤 옆에 비치해 두었던 성전용 율법서로서 제사장들에 의해 수시로 읽혀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므낫세 당시의 극심한 배교(背敎) 현상에 불안을 느낀 누군가가 이 율법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성전 모퉁이에 감추어 두었던 것 같습니다. 사반이 읽어 준 율법책의 내용은 아마도 이전에 읽은 어떤 책이나 교훈보다도 요시야의 마음에 더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13절에 비추어 볼 때 사반이 읽은 내용 중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멀리 할 경우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리라는 말씀(신 28:15-68)도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금 돌이켜 마음을 찢고 회개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책의 말씀(12-13) 요시야는 여호와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과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해서 여호와께 묻도록 명령합니다. 아하시야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불에게 묻는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동입니다(왕하 1:2-4). ‘여호와께 묻다’라는 구절은 단순히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태도(호 10:12; 사 9:13)로써 여호와의 구원을 기대하는 표현입니다. 요시야는 나라를 책임지는 왕으로서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백성을 위해 마지막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읽고 듣고 나누며 순종해 가도록 합니다. 나는 매일 성경을 어떻게 묵상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비단 옷을 입혀주는 것보다 더 따뜻하다.” 중국 전국시대의 유학자 순자의 말입니다. 사람은 정보나 지식에 목마르기보다 친절한 말 한마디와 부드러운 미소, 따뜻한 눈빛에 목말라 있습니다. 말은 그 사람 자체라 하겠습니다. 좋은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좋은 마음, 좋은 삶을 보여주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 설 교 >
개혁운동의 모델
열왕기하 23:1-23 / 손상률 목사
위대한 사상가요 신학자인 칼빈(J. Calvin)은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개혁」(Reform)이라는 말은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 판을 짜는 혁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질되고 탈선된 것을 본래의 길로 돌려놓고 그 원형을 되찾게 하는 것으로 그 개념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가야될 본래의 바른 길을 이탈하고 죄악된 길로 달리며 멸망을 재촉할 때 이를 깨우쳐주고 그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6:16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중세기 기독교가 로마 카톨릭의 교권주의와 우상숭배 및 인본주의의 형식 종교로 타락했을 때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제창하며 말씀으로 돌아가는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건전한 교회는 개혁신앙을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일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유대나라 16대왕(B.C 639-608) 요시야의 개혁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부 므낫세와 부친인 아몬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악으로부터 하나님 종교로 개혁하는 일을 과감하게 단행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가 타락하고 종교적 본질에서 이탈하게 되면 백성은 정신적인 혼미에 빠지게 되며 죄악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이런 때는 깨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고의 신호를 울리며 분연이 일어나 개혁운동을 전개하여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와 같이 살아 있는 생명운동의 몸부림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시대 하나님 종교의 개혁자였던 요시야의 사적을 보고 이 시대 개혁운동의 모델을 삼고자 합니다.
I. 말씀 운동입니다.
요시야는 여덟 살에 왕위에 올라 삼십 일 년 간 치리 하였습니다. 왕이 된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해준 법도를 따라 선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열왕기하 22;2에 보면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조상 다윗의 길”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일찍이 다윗은 왕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고 하였습니다(왕상 2:3).
1.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요시야는 왕위에 오른 지 십팔 년에 폐허가 된 성전을 수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수리의 책임을 맡았는데 그가 성전에서 인부들과 함께 퇴락한 곳을 수리하다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을 듣는 순간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이는 극도의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입니다. 그는 즉시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곧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고 하였습니다(왕하 22:13). 그동안 앞서 많은 왕들이 지나갔으나 모두 다 하나님의 성전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와 각종 세속문화에 젖어있었습니다. 율법책을 성전 안에 방치해둔 채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람한 건물은 있으나 말씀이 없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방치된 말씀을 가까이 하고 거기에 얽매이는 말씀의 회복운동에서 시작됩니다.
2. 말씀 앞에 굴복하였습니다.
서기관 사반이 힐기야에게 받은 율법책을 가지고 요시야 왕의 어전에서 낭독하였습니다. 이 때 왕은 옷을 찢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의 권위나 자존심을 벗어던지고 말씀 앞에 엎드리는 모습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의 열왕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서 왕도를 지키며 백성을 다스리도록 그의 율법서에 명시해 두었습니다. 신명기 17:18-19에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개혁교회의 성경관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고백 문에는 왕이나 교황이나 그 어떤 권력자도 말씀 앞에 굴복하여야 되는 죄인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중세기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을 외치며 일어선 것도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3. 말씀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3절에 보면 요시야 왕은 장로들에게 명하여 모든 백성을 한 자리에 모으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백성들 앞에 높은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서서 자신이 먼저 여호와께 순종하여 그 계명과 법도를 준수할 것이라고 선언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모든 백성들도 왕을 따라 그렇게 하겠다고 언약하였습니다. 왕은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읽어주며 그들이 직접 듣고 깨닫고 결단하게 유도하였습니다.
이것은 개혁운동이 말씀운동임을 나타내주는 증거입니다. 중세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전 깊숙히 묻어 놓고 백성들에게는 저희가 필요한 부분만 외우게 하는 등 말씀과의 만남을 차단시켰습니다. 이런 시기에 개혁자 루터가 라틴어로 된 성경을 독일말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직접 읽게 하므로써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고 그 일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Ⅱ. 성별 운동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로 멸망하게 됩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그가 철이 들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세월 흉년이나 기근, 또는 질병과 온역들의 재앙을 만나거나 전쟁으로 인하여 이웃의 강대국들에게 짓밟히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징벌로 보았습니다.
그는 여선지 훌다의 입을 빌려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왕하 22: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원인을 찾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로부터 풀려나는 길은 철저하게 회개하므로 거룩을 되찾는 일입니다.
1. 성전을 청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이 지킬 율법을 계시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 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5-6에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애굽에서 올라온 후 고달픈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성막을 짓고 거기서 매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 성막에서 드린 제사가 훗날 가나안 땅에서 성전 예배로 발전하였습니다.
다윗 왕 때에 성전 예배를 위하여 제사장의 반열과 레위인의 찬양대원들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모든 기구와 조직, 인원까지 제정하였습니다(대상 23:1-26:32). 그 후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후 안정된 예배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하며 영육 간에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이전의 여러 왕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오랜 세월 성전을 방치 하였고, 그 결과 성전은 퇴락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요시야는 하나님 전에 바친 은을 가지고 성전을 수축하게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회복을 뜻합니다.
2. 우상을 척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배도한 행위는 그들이 각종 우상을 만들며 음란하듯 거기 빠져 있는 일들입니다. 이에 요시야 왕은 그들 가운에 있는 우상을 철저하게 정리하고 척결하므로써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4절에 보면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를 위시하여 버금 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기드론 시내에서 불살랐다고 하였습니다. 또 유다 전역에 세워져 있는 바알과 아세라 상이며 우상의 잔재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그것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묘지에다 뿌리고 또한 범죄의 소굴인 산당과 미동의 집을 헐었습니다.
특히 그의 조부 므낫세가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세워 놓은 우상의 단들을 헐고 가루를 만들어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렸습니다(왕하 23:12). 북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워둔 단과 산당도 헐고 가루를 만들었습니다(15절). 그는 이처럼 철저하고 완벽하게 우상을 척결하므로써 회개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3. 거룩을 회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레 11:45).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과 구별된 신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도 거룩한 백성의 증거를 남기기 위함이었습니다(창 17:11-14).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빌립보서 2:15에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반드시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될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세속주의 우상,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쾌락주의 우상,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는 모든 인본주의 우상들을 무너뜨려야 됩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자기도취에 빠져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어도 자신을 꺾고 무너뜨리기를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기를 성결케 하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만이 개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Ⅲ. 회복 운동입니다.
21-23절에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왕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고 하였습니다. 요시야는 개혁운동을 마감하면서 온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의 절기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1.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 외에 일 년 중 율법으로 정해 놓은 절기를 지켰습니다. 신명기 16:16-17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를 제정하시고 그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이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2:24-25에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이전의 왕들은 이 명령을 어겼습니다.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킨 후 사사시대와 열왕들의 시대에까지 이 귀중한 절기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22절).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무시당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2.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행위입니다.
시편 116:12-17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명절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백 삼십 년 동안이나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해방되어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출 12:1-11). 그 날 애굽에는 바로의 아들로부터 모든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이 죽었으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가장 큰 상징물은 피를 흘린 어린양이며 이는 장차 인류의 죄와 죽음을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벧전 1:19).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절기를 지킨 것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 행위입니다(레 26:13).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며 보답하고자 하는 예배 행위를 의미합니다.
3.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서원을 뜻합니다.
요시야 왕의 개혁은 이 시대 그리스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표본이 됩니다. 잃어버렸던 율법을 되찾고 그 말씀의 조명을 받으며 우상숭배의 어두운 죄악들을 과감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을 모아 놓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역사를 되새기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으로 회복의 절기를 지켰습니다. 또한 왕이 스스로 백성들의 선두에 서서 다시는 죄악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서약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옛날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수 24:15).
오늘날 개혁교회의 이름을 표방하는 우리들이 요시야와 같은 개혁정신으로 자신의 신앙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개혁신앙의 생명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이 시대를 주도하며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잊혀진 책
호주 퀸스랜드에 있는 마운트 모간(Mount Morgan)은 과거에 금광이 있던 곳입니다. 지금은 관광지로 남아있지만 1882년부터 100여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매장량이 많은 광산의 하나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광산이 개발되기 전까지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황무지 같은 땅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금광을 매일 밟고 다니면서도 그 사실을 새까맣고 모르고 살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이 그와 같이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이 매장되어 있는 광산과도 같은 책입니다. 그렇게 귀한 성경을 옆에 두고도 방치함으로 그 풍성한 축복을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출판되는 베스트셀러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 잘 읽혀지지 않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성경은 ‘잊혀진 책’이 되기 쉽습니다.
본문에 보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경이 잊혀진 책이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북 분단 시대에 남 유다 왕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당시 왕은 요시야(제16대, B.C. 640~609 재위)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상 선왕으로 꼽히는 훌륭한 왕입니다. 성군 다윗의 길을 잘 따라갔던 왕들을 가리켜 선왕(善王)이라 부르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선왕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3대 선왕이 있습니다. 여호사밧,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입니다. 왕하22:2은 요시야가 선왕이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본문은 특별히 요시야 왕 제18년 때(B.C. 622)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이미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B.C. 722) 후 오랜 세월이 흘렀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우상 신을 숭배하고 범죄했던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마저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우상 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요시야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수리 작업을 추진합니다. 그의 앞선 왕들은 우상숭배를 방치 내지는 동조할 뿐만 아니라 성전을 훼손 내지는 방치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요시야 왕이 성전 수리를 단행한 것입니다. 그는 서기관 사반을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보내서 성전 수리를 명합니다. 백성들이 헌금한 것을 취합해서 감독자에게 주고 작업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수리가 시작되는 가운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본래 율법책(모세오경)은 성전의 언약궤 옆에 보관하게 되어 있었는데 분실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든지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왕하22:8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1] 잊혀진 책 : 죄악과 멸망
물론 고대에는 성경이 필사본으로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성전에 있는 성경책을 분실합니까! 그 당시 유다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성경책을 잃어버린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잊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성경은 잊혀진 책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자행자지하게 됩니다. 결국 죄악에 빠지고 종국에는 멸망하게 됩니다. 나중에 요시야 왕이 탄식한 말 그대로입니다. 왕하22:13(하) “ …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본성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잠14:12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인간이 자기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죄를 짓게 되고 그 결국은 영원한 사망입니다(롬6:23).
죄(sin)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aJmartiva)인데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게 죄입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기준인데 그 기준을 모르니까 이리저리 빗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엡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어서 총명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옳다고 주장하지만 욕심을 부리고 자꾸 죄악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 결국은 뻔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요시야 당시 유다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성경 말씀을 잊어버림으로 영원한 사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주변 강대국을 사용하셨습니다. 남쪽으로는 애굽이 있었고 북쪽에는 앗수르를 이어 바벨론이 융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강대국들을 통해 유다 백성은 고통을 당했고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2] 읽혀진 책 : 구원과 축복
그런 가운데 다행히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성경 말씀이 읽혀졌고 구원과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서기관 사반이 왕에서 성전 수리 상황을 보고하고 나서 율법책을 보이며 읽습니다. 그때 요시야 왕의 반응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하22:10~11 “10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옷을 찢었다는 것은 죄를 깨닫고 슬퍼하면서 회개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죄인이지만 자시의 죄를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죄의 특징은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약1:23).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합니다.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능력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렘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 게 회개하고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증거하는데, 회개와 믿음을 나능하게 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롬10:10,17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율법과 복음! 율법은 하나님이 제시하는 의의 기준입니다. 그 기준에서 빗나간 게 인간의 죄이고, 그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복음은 죄인인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요시야 왕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대제사장 힐기야와 서기관 사반을 비롯해서 신하 몇 사람을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냅니다. 그때 훌다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하22:19~20 “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회개하고 믿으니까 구원해 주시고 더 나아가 축복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유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워낙 유다 백성의 죄악이 깊어서 심판의 철회는 불가하지만 요시야 왕의 생전에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실제로 요시야 왕의 사후에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갑니다(B.C. 586년).
여기서 우리는 이런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순종함으로 축복을 받는다! 특별히 구원 이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는 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고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1:7~8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면 형통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에서 직역하면 읊조린다는 뜻입니다. 무언가 집중해서 골똘히 생각할 때 읊조리게 됩니다. 말씀을 읽고 집중해서 골똘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귀는 영적인 귀입니다.
스위스의 크리스천 정신과 의사이며 영성가인 폴 트루니에가 묵상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경건의 시간(Quiet Time)에 계속 침묵할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게 해 주시는 생각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해 보면 세 단계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깨달음입니다. 성경을 읽고 일고 묵상하다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아하 모멘트(aha moment)입니다. 둘째는 확신입니다. 깨달음이 반복되면서 확신하는 순간이 옵니다. 재확인(reconfirm)의 단계인 셈입니다. 셋째는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평안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캐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정말 신비로운 책입니다.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요? 기록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 기록자가 쓴 것 같지만 그 과정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여기서 ‘예언’은 성경 말씀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기록한 것은 맞는데, 자기 마음대로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한 겁니다. 성령의 감동을 가리켜 신학 용어로 영감(inspir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본래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었다(inspire)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기록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겁니다.
이런 예로 설명해 봅니다. 대통령이 연설문을 작성할 때 직접 하는 게 아닙니다. 작성자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해서 작성하고 점검도 받습니다. 결국은 대통령 자신의 연설문이 되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 하나님입니다. 인간 기록자는 보조 저자입니다. 성경의 특징을 보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몇 권입니까? 1권? 66권? 둘 다 맞습니다. 66권이 1권으로 묶여 있습니다.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합쳐져서 66권입니다. 그 하나하나가 일목요연하게 한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축복의 삶입니다.
성경은 A.D. 1세기 이전 1,600년 동안 40여 명이 기록했습니다. 기록자들의 시대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단 한 번도 한데 모여 편집회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록자들의 면면이 너무 다릅니다. 베드로는 불학무식한 어부 출신입니다. 모세나 바울 같은 사람은 학문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66권이 완전한 ‘통일성’과 ‘정확무오성’을 갖고 있어서 한 권이 된 겁니다. 수정판도 없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따져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도 역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이를 가리켜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부활 승천 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주신 말씀도 이런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런데 유의 사항이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흔히 정경(正經 Canon)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Canon은 헬라어 ‘카논’(kanw’n)에서 유래했는데, 본래 ‘갈대’라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표준 자가 없어서 갈대를 꺾어 대충 길이를 측정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갈대’라는 의미 외에 ‘척도’ ‘표준’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 66권만이 진리의 ‘표준’이며, 인생의 절대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성령은 정경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대로 살면 반드시 승리의 인생이 됩니다.
오래 전에 체신부장관을 지낸 이태선 씨는 대구의 섬유산업의 왕으로 불립니다. 그는 가난한 소년시절 말씀을 읽고 꿈을 키웠는데 정말 그 꿈대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일학교 부장으로 봉사할 때의 일입니다. 한 아이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하늘나라의 전화번호가 몇 번이에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러웠는데 그 때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하늘나라의 전화번호는 66-3927번이지.” 그러자 아이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이란다. 구약성경이 39권이고 신약성경이 27권이지. 그 속에 하늘나라의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어. 그러니 그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전화번호란다. 내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성경책을 샀는데, 그 후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지.”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살면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시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성경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피곤할 때 성경은 나의 침상이 되고 / 어두울 때 성경은 나의 불빛이 되네 / 주릴 때에 성경은 나의 만나가 되고 / 두려울 때 성경은 나의 무기가 되네 / 일할 때 성경은 나의 연장이 되고 / 찬미할 때 성경은 나의 악기가 되네 / 무지할 때 성경은 나의 교실이 되고 / 실족할 때 성경은 나의 반석이 되네 / 위험할 때 성경은 나의 보호가 되고 / 세상 뜰 때 성경은 나의 천국이 되리 / 외로울 때 성경은 나의 친구가 되네.”(작자 미상)
그런데 한 가지 요시야 왕에게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의 살아생전에는 유다 왕국이 그럭저럭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은 아들들이 다시 악을 행하고 백성들도 우상숭배와 죄악에 빠짐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됐습니다. 다음세대에 신앙을 전수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왕하23:32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의 아들로 왕위를 이었는데 3개월 짜리 왕이었습니다. 애굽 왕이 강제로 폐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왕은 그의 이복형제(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엘리야김인데 애굽 왕이 여호야김으로 개명해 버렸습니다. 자신의 지배권을 과시하게 위해서였습니다. 왕하23:37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r 역시 악을 행함으로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요시야는 자기 자신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함으로 축복을 받았지만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유전이 안 됩니다. 특별히 수고해야 전수할 수 있습니다. 재물도 물려주려면 수고해야 합니다. 학식도 물려주려면 수고해야 합니다. 신앙을 전수하려면 더 많은 수고를 해야 됩니다. 자손들에게 눈물로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더 나아가 자손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어야 합니다.
2014년에 영국성서공회에서 학부모들(3~16세의 자녀를 둔 학부모들)과 자녀들(8~15세) 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54%의 자녀들이 집이나 학교에서 성경을 1년에 단 1번도 읽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모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은 두 종류의 책을 갖고 있다. 하나는 영국이 만든 책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을 만든 책이다. 영국이 만든 책은 셰익스피어 작품이고, 영국을 만든 책은 바로 성경이다.” 영국이 고거 해기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크게 번성한 나라였지만 예전만 못합니다. 최근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등으로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홀히 한 것도 중요한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불신자들은 물론이지만 성도들의 경우도 성경을 소홀히 여기는 풍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성경은 소장용이나 감상용이 아닙니다. 묵상용이고 실천용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할 때 우리 앞에 진정한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성경을 제쳐 두고 엉뚱한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게 문제입니다. 성경을 결코 ‘잊혀진 책’으로 방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자손들에게도 성경이 ‘잊혀진 책’이 아니라 ‘읽혀지는 책’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가 얼른 보면 정보의 홍수 시대라는 말처럼 많은 지식과 정보가 있습니다. 성경 자료나 설교도 홍수를 이룹니다. 그러나 홍수 때 식수가 부족한 것처럼 영적인 기갈이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주셨던 예언 그대로입니다. 암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없으면 영적 기갈에 빠지게 됩니다. 부디 성경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인생에 축복의 대로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