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수) 욥기 30:1-15 찬송 431장
1.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2. 그들이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3.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4.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 거리를 삼느니라
5. 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같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나서
6. 침침한 골짜기와 흙 구덩이와 바위 굴에서 살며
7.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에 모여 있느니라
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10.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11.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12. 그들이 내 오른쪽에서 일어나 내 발에 덫을 놓으며 나를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며
13.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
14. 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 같이 내게로 달려드니
15.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개역 개정)
29장에서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축복된 삶과
그 삶 속에서 실현된 의로움과 영광을 세밀하게 언급했던 욥은
이제 30장에서 그와 극히 대조되는 현재의 참담한
고난의 상황을 처절히 그려나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말씀은 비천한 자에게까지
조롱당하는 욥의 비참한 처지를 서술하는데
이는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이전의 축복과 영광 중에 있던 욥의 모습과
극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욥의 불행의 정도를 더욱 크게 하고 있다.
즉 욥은 이전에는 귀인들에게까지 존경과 높임을 받던 자신이(29:8-10)
이제는 비천한 자들에게까지 천대를 받는 처지가 된 것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과 영광의 말만을 듣던 자신이
이제는 온갖 조롱과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된 사실들을 통해
극적으로 달라진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함으로써
자신이 현재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가를 보여 준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 등을 이전에는 욥이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었다는 앞 장의 내용과 연결시켜 볼 때(29:12-25)
욥은 여기에서 자신이 구체적인 죄악을 범함이 없이
현재 비천한 타락자들에게까지 조롱받는 처지가 된 것을
지극히 부당하고 불의한 것으로 여겨 더욱 비통해 하였다.
한편 여기에서 욥은 자신이 이렇듯 비참한 지경이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곤고케 하심 때문이라고 보고 있는데(11절)
여기에는 다분히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고난에 대해
계속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단지 자신의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깨닫지 못한 신앙적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전에 자신에게 베풀어졌던 축복과 영광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한 욥의 진술을 통해 볼 때(29:2-6)
여기에서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반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난 결과로 보고 더욱 비통해 하는 것이다.
결국 욥은 여전히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은 변치 않고 있으나
극심한 고난 속에서 특별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에 순응하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신앙적 한계를 보인다.
15절)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9-15절에서 욥은 자신이 지금처럼 온갖 독설을
쏟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서
자신의 은혜를 배신한 젊은이들의 악한 행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사실 그가 말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젊은이들의 행위는
결코 그 자신이 당해야 할 어떤 타당한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욥은 이들 젊은이들로부터
그들의 원수라도 견디기 어려울 이와 같은 모욕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노래하듯 욥을 조롱하였으며,
그 얼굴에 침을 뱉는 모욕을 가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욥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대적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그들의 행위는 간악한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욥은 지금 자신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랐고, 그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다.
그러나 욥이 그렇게 위해 주던 자들은 도리어
욥의 가장 큰 원수가 되었고,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욥의 고난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매우 유사함을 느낀다.
욥의 고난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예표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죄의 억압에서 허덕이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의 온 생애를 죄인들을 위해 바치셨으며
그의 피와 살까지 다 주셔서 죄인의 구속을 성취하여 주셨다.
그러나 다윗이 예수님에 대하여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22:7-8) 라고 예언하여 말했듯이
예수님께 돌아온 것은 조롱과 모욕과 폭력과 죽음뿐이었다.
즉 욥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듯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모욕과 핍박,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계속되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해 침묵하셨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 역시 당신의 독생자가 고통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인내하시며 침묵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과 하나님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속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바울은 그 일에 아주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기를 자처하였다.
그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는
바로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 땅에서 받을 고난이 있음을 알고
그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고난을 자처해야 한다.
조금만 불공평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몇 배로 호들갑을 떨면서
그들을 고발하고 보복하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터무니없는
공격과 폭력과 조롱 속에서도 묵묵히 그리스도를 위해 참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정녕 우리의 신앙이 고난을 회피하고, 즐거움과 기쁨과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받는 불이익과 억울함조차도 참고
그것을 구원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