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출생 1842(?), 미국 사우스다코타(지금의 래피드시티 근처), 사망1877. 9. 5, 네브래스카 로빈슨 요새)
수족이 백인의 대평원 북부 침략에 대항해 싸울 때 가장 뛰어난 전략가이자 결연한 전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수족 전쟁과 조약).
그는 1865년 젊은 나이에 이미 몬태나에서 금광지로 향하는 길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저항하는 부족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윌리엄 J. 페터먼 대위와 그의 부하 80명을 학살했으며(1866. 12. 21), 4륜마차 전투(1867. 8. 2)에 참여했다(모두 와이오밍 준주에 있는 포트필커니 근처에서 일어났음).
또한 제2차 포트래러미 조약(1868)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관한 조항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출입이 금지된 들소떼 지역으로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사냥과 낚시를 하는 한편, 적대 부족과 백인에 대항한 싸움을 계속했다(→ 페터먼 학살).
1874년 다코타 준주의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자 금을 찾는 사람들이 조약에 인정된 수족의 권리를 무시하고, 이 광활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조지 크룩 준장은 크레이지 호스 일행을 몬태나 준주의 텅 강변과 파우더 강변에 있던 그들의 겨울 거주지에서 내쫓으려 했으나 그는 오히려 언덕 깊숙이 숨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샤이엔족에 가담해 몬태나 남부에 있는 로즈버드 계곡에서 크룩 장군을 기습공격했다(1876. 6. 17). 공격을 받은 크룩군은 철수했다.
그뒤 그는 북으로 가서 리틀빅혼 강가에 있는 시팅불 추장의 수족 본진지에 들어갔다. 여기서 조지 A.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미군 대대를 섬멸한 전투에 참여하고(1876. 6. 25), 부하들과 함께 다시 진지로 돌아와 이전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계속해서 넬슨 A. 마일스 대령의 추적을 받았는데, 마일스는 모든 인디언들을 인디언 보호기관에 강제 수용하기 위해 군대를 강화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부족은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쇠약해졌다. 마침내 그는 1877년 5월 6일 네브레스카 레드클라우드 인디언 보호소에서 그의 오랜 적인 크룩 장군에게 항복했다.
산 크기만한 규모의 세계 최대 조각상인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의 머리상만 건설하는데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크레이지 호스의 전신상의 완공시기는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이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블랙힐스의 거대한 돌산에서 '크레이지 호스'의 머리 조각상이 윤곽을 드러냈다.
이 조각상은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을 조각한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에서 약27km떨어진 곳에 있다.
크레이지 호스 머리 상은 높이가 27m로 러시모어의 미 대통령들 머리 상보다 9m나 높다.
하지만 크레이지 호스 전신 상이 완성되면 높이 172m,넓이 195m에 이르는 산 크기만한 초대형 조각상이 된다.
이 작업은 1948년 코작 지올코스키(Korczak Ziolkowski·1908~82)라는 폴란드계 조각가가 시작했다.
미국 정부가 수(Sioux)족 성지인 블랙힐스(Black Hills) 돌산에 백인 대통령 얼굴들을 조각하자 당시 추장이던 헨리 스탠딩 베어(Standing Bear·서 있는 곰)는 그 작업에 참가했던 코작에게 아메리칸 인디언 중에도 영웅이 있음을 조각으로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1939년 뉴욕 미술대전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촉망받는 조각가였던 그는 19세기 백인 기병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산화한 크레이지 호스에 매료돼 블랙힐스로 다시 향했다.
단돈 174달러를 들고 시작한 무모한 도전에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몰렸다. 그중에 루스 로스(Ruth Ross· 현재 92세)라는 여대생도 끼어 있었다.
루스는 코작의 열정에 반해 열여덟 살 나이 차를 극복하고 50년 결혼했다. 그러곤 10명의 자녀를 키우며 코작을 내조했다. 82년 코작이 사망하자 루스는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유업을 물려받았다.
◆ 루스와 그녀의 자녀들
처음엔 비웃었던 미국 정부는 세월이 흐르며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 부분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자 몸이 달았다. 미 정부가 지원해주겠다고 나섰으나 루스는 거절했다. 원주민의 염원이 담긴 조각에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남편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그동안 경비는 현장을 찾는 관광객으로부터 거둔 입장료와 기부로 충당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크레이지 호스 조각 현장은 한 해 10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그 덕에 2006년 시작한 기부 캠페인에서 1930만 달러를 모금했다.
◆ 지올코스키 부부
그렇지만 크레이지호스가 언제 완성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각 규모가 러시모어의 4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제 얼굴과 전체 윤곽을 잡았을 뿐이다. 다음 단계는 말머리 조각이다.
루스는 “조각이 언제 완성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끝내지 못하면 자식들이 뒤를 이을 것이고 그래도 완성하지 못하면 손자·손녀가 물려받아 언젠가는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 1948년 시작된 전설의 인디언 전사 '크레이지 호스' 조각상 작업 '60주년'과 코작 지올코브스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08년 6월 3일의 보도.
말을 타고 달리는 인디언 전사를 묘사하는 이 조각상은 폭 195m에 높이 172m 크기이며, 60년 만에야 거의 완성된 머리 부위의 크기는 26.5m다. 이 조각상이 완성된다면 '세계 최대 크기'가 될 것이다.
첫댓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인이 침략자와 싸웠는데 학살이라고 명명하다는 웃기네요.
저들에겐 자기 땅, 가족, 재산을 지키기위한 저게 전쟁이었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