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점심 이후
먼저 가 기다리겠다는 규갑 형이 전화를 해와 우리가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원조토종닭이 휴업이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진짜일까 싶었다. 그 집은 일년 내내 용맹정진 장사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터였다.
약간은 착란 같은 게 왔다. 한동안 우왕좌왕, 유턴도 여러번 하고 해서 다시 원조집 근처 성미가든이란 곳을 갔다. 도무지 정신 없는 집이었다. 관광버스 몇대가 동시에 주차할 정도이고 홀도 널찍해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난 전날 점심 때 먹은 오름나그네 가도 상관 없었으나 동연이 때문에 면 종류는 피해야 한다고 했다.
동연이를 앉히고 규갑 형이 케어하려면 맞춤한 공간이 있어야 하고 가급적 휠체어 들어가는 널찍한 자리가 확보되어야 해 애를 먹었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자리가 정리돼 앉았다. 그런데 너무 번잡하다. 반주를 들며 떠드는 아자씨들, 직원들 불러 뭐 더 달라고 하는 아우성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이렇게 누군가에게 주목할 수 없는 분위기가 오히려 규갑형 부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온전한 백숙에 인삼주, 녹두죽이 나오는 원조집과 달리 여기는 샤브샤브를 즐기고 발기발기 찢긴 백숙, 그리고 녹두죽이 차례로 나왔다. 정갈한 원조집과 달리 밑반찬이 조금 정신 없다. 그래도 닭껍질을 샤브샤브한 것은 괜찮았다. 토종닭도 건강하고 쫄깃한 식감은 비슷했다. 녹두죽도 원조집이 조금 더 깊은 맛이 우러났지만 이 집도 먹을 만했다. 나중에 1만원 짜리 포장해달라고 했는데 양이 꽤 많아 놀랐다.
규갑 형은 동연이 케어하느라 본인 점심 해결하느라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우리는 그 앞에서 산삼주에 주린 배 채우느라 바빴고, 참 미안하고 염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규갑 형이 미리 점심 먹을 데 없나 둘러보다 봤다는 팥 카페로 향했다. 손님이 올 만한 위치가 아니어서 우리의 독차지였다. 팥빙수 둘을 시켜 먹었는데 좋은 팥을 써 건강하고 너무 달지 않아 좋았다. 닭과의 궁합도 괜찮은 듯했다. 문을 연 지 얼마 안됐는지 고부 사이인 듯한 두 분이 손님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손님들을 너무 닭보듯이 하는 주인들이 많아서다. 다음에 교래리 토종닭 드신 다음 이곳을 둘러볼 것을 권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사려니숲길로 향하고 형은 서귀포쪽 바다를 구경하겠다고 했다. 헤어져 사려니숲 쪽으로 향하는데 즐겨 듣는 명연주 명음반에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토벤 전원교향곡의 LP 버전이 새로 나왔다며 흘러 나온다. 1악장의 경쾌하면서도 독특한 선율이 흘러나와 잠시 차를 사려니숲 앞의 초지가 훤히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볼륨을 크게 높였다. 1악장이 끝날 때까지 10분 남짓 더 머물렀다. 이런 호사가 없다. 나중에 은경은 전원 선율에 풀들이 몸을 흔드는 것 같았다고 시적인 감상을 들려줬다.
사려니숲을 걸었다. 난 이어폰으로 전원 남은 악장들을 들으면서였다. 50분쯤 걸었을까. 이제 돌아가나 마나 하던 차에 길섶 오른쪽에 사람들 드나드는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들어가니 가마니로 덮인 조붓한 산책로가 나온다. 조금 걸으니 휴양림 가는 곳이란 표지가 나왔다. 붉은오름 휴양림인 모양이었다. 20분쯤 걸었을까? 휴양림이 나오는데 시설이 참 잘돼 있다. 조금 헤매다 붉은오름 올라가는 것이 사려니숲 주차한 곳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결론을 내렸다. 물론 중간에 현준은 계속 대장 잘못 만나 사서 고생한다고 타박을 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남은 일정을 소화하려면. 휴양림에서 낸 길이라 그런지 길은 편안했다. 물론 약간 오르막이 있었는데 현준이 아까 휴양림에서 화장실 다녀왔는데도 급하다고 보챈다. 휴지 없냐고. 주머니를 뒤적이니 언젠가 카페에서 챙겨놓은 냅킨 한 조각이 손에 잡힌다. 옛다, 주면서 농을 했다. "저기 큰 잎을 꺾어 들고 있다가 누가 오면 잎으로 얼굴을 가리도록 하렴. 하핫"
여튼 정상 같은 곳을 올라 능선 길인 듯 보이는 곳을 걸었는데 차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수풀이 많이 우거져 방향 감각을 잃었는지 아래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상하게도 화산송이가 눈에 많이 들어온다. 2분쯤 내려갔더니 웬 초지가 나오는데 1분여 뚫고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온 사방이 오름으로 둘러싸여 있다니, 그럼 안되는데 삼나무숲이 나와야 사려니 쪽인데.
조금 더 나아가니 우리가 굼부리(분화구) 안에 들어왔다는 게 또렷해졌다.
미안, 이 길이 아닌가벼. 그나마 다행인 게 우리가 내려온 길을 쉽게 되찾았다. 다시 올라 더 진행하니, 진입 금지였나, 추락 주의였나 뭐 암튼 그런 표시는 돼 있지만 굳이 막지는 않겠다는 뜻이 보이는 내리막 길이 보인다.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먼저 내려갔다. 과연 사람들 지나가지 말라고 부러 나무를 쓰러뜨린 듯한 곳을 두 차례 통과하니 조붓한 길이 나 있고 삼나무 행렬이 똑 사려니숲이란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둘에게 내려오라고 하고 내려오는데 열과 오를 맞춰 조림된 삼나무 행렬이 마치 개선을 환영하는 것 같다.
다시 익숙한 길을 찾아 걷는데 마침 한 쌍의 신혼부부가 삼나무 사이를 뚫고 내려온 한줄기 빛 속에서 입을 맞춘다. 천사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다 부럽다고 나직한 탄성을 지른다. 그 부부 앞에 찬란한 내일만 있길.
차에 시동을 거니 오후 5시쯤. 남 선배 집에 가면 거의 6시가 될 것 같았다. 거기서 만나기로 하고 우린 남 선배에게 죽을 전달하고 형과는 7시쯤 안덕의 유명하다는 피자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출발했다. 인터넷은 고쳤지만 피자를 먹으러 가고는 싶지 않다고 하셔서 우리만 다시 떠났다. 서귀포에서 안덕 쪽으로 가려면 예래리란 곳을 거쳐야 하는데 여기 진입하는 교차로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자칫하면 사고가 날까 싶어 길을 내처 직진했다가 유턴한 뒤 다시 근처에 와 우회전을 했다. 안덕은 이제 막 숙소나 음식점 바람이 불고 있는 듯했다.
네비가 안내한 대로 가니 도저히 피자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멀리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에 가려져 뭔가 거무튀튀한 것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절벽이었다. 그리고 흰 바위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처음에는 바위인지 안개인지 구름인지 몰랐는데 다가가니 바위란 것이 분명해졌다. 그 즈음 산토리니의 흰집 같은 피제리아가 들어온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성난 파도가 때리는 포구에 맞닿은 곳에 피자집이라니. 조금 놀라웠다. 처음에는 누리꾼 반응 등을 따져 여러 집 중 하나를 고를 생각이었는데 이런 곳이라면 맛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들어가 뷰를 즐겨야 할 곳이었다.
그런데 우리만 들어가 있다가 동연이네가 뒤에 오는 게 약간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전화해보니 규갑 형은 아직 서귀포라고 했다. 우리는 해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20분쯤 됐을까? 어두워지기도 하고 해서 차를 다시 주차하고 들어가니 웬걸, 주문 마감이 다 됐단다. 토요일 저녁인데 벌써? 싶었지만 나중에 보니 이 집만 그런게 아니었다. 거의 모든 집들이 9시면 문을 닫고 8시면 주문 마감하는데 피제리아는 조금 빨리 그만 영업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20여분 동네를 샅샅이 뒤져도 우리 조건에 맞는 식당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동연이네와 약간 헤매다 약간 길에서 벗어나, 현지인들만 찾을 것 같은 정가네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난 정씨이기도 할 것이고, 정을 많이 주는 식당인가 보다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흑돼지 2인분과 옥돔구이를 시켜 먹었는데 여주인이 어린 딸이 보채는 와중에도 살뜰하게 손님들 챙기는 정성이 돋보였다. 특히 콩잎, 잎이 넷 달린 것을 차곡차곡 포개어 갈치속젓 넣고 고기 싸먹으니 풍미가 좋았다.
동연이는 점심 때와 뭔가 다르게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이유를 들으니 서귀포 네거리식당에서 갈치조림에 밥을 먼저 챙겨먹었다고 했다. 아주 든든히 먹어 그런 것이라고 했다. 우린 온전히 규갑 형과 식사를 온전히 즐길 수 있어 그게 더 좋은 일이었다. 아쉽지만 다음날 일찍 서울 돌아가야 하는 규갑 형네와 헤어진다. 게임에만 열중하는 동연이의 건강을 속으로 기원했다. 아울러 안전운전도.
남 선배 집에 도착하기 전 선배가 전화를 해왔다. 왜 그렇게 밤늦게 싸돌아다니냐는 타박과 함께. 집에 주차하니 9시가 넘어 있었다. 오늘은 노알콜 데이, 일찌감치 선언한 터였다. 차례로 씻고 잠자리를 펼치니 10시다. 벌써 현준은 코를 드르렁 골고, 머리가 마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은경은 손전화를 들여다보고 앉아 있다. 규갑 형은 동연이를 재웠는지 제주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생맥주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사진을 카톡에 올렸다. 난 나직하게 '아 맥주'를 외쳤다. 딱 한 잔만 마시면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은경이도 안방으로 들어가고 드르릉드르릉 현준의 코골이 소리만 드높다. 난 멀리 서귀포 앞바다의 한치잡이 집어등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첫댓글 고등어구이 아니고 옥돔구이!! 대장 잘못 만났다고 타박한 건 현준뿐. 난 무조건 추종자.... 붉은오름에서 굼부리 안에 들어가 본 것은 뜻밖에 보람찬 일이었습니다.
사소한 것들이지만 보는 즉시 수정했습니다.
@알자지라 지적질을 하려던 건 아니고...우리가 여행 동안 메뉴를 중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광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ㅎㅎㅎ
@꼬맹이 알지. 그 깊은 뜻.
전원에서, <전원>을 들으면서, 뜬구름이 쿨~쿨 잔다, 고 하셨을 때 '말러 5번을 트시지 않고...' 했었는데 온에어였네요...ㅎ
전원 1악장 정말 좋아. 강추
동연이도 함께 했군요! 좋은 추억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