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 행해진 열 차례의 박해
1. 네로(Nero) 통치 하에 가해진 첫 번째 박해(A.D. 67)
교회에 대한 첫 번째 박해는 로마의 여섯 번째 황제인 네로가 통치한 67년경에 일어났다. 이 군주는 그 지역을 통치하여 5년 동안에 걸쳐 교회를 핍박했다. 그는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였으나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는 도를 지나친 성미와 가장 잔인한 야만적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악마적인 변덕스러움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무도했던 것은 로마를 방화하였던 그 사건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로마 시를 방화하라고 명령하였고, 이 명령은 그의 수하에 있던 부하들과 군인들에 의해서 집행되었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불타고 있는 동안 그는 마케나 탑에 올라가 하프를 연주하며 "불타고 있는 트로이"라는 시를 읊고 있었다. 그는 또 자주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귀족적인 대 건축물인 컬커스 외에도 다른 많은 궁궐들과 가옥들이 전소되었다.
이 무시무시한 화재는 9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네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확산되고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이 높아지자 책임을 피하기 위해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새로운 잔인성을 보여 주었다. 이런 일은 첫 번째 박해 때 발생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던 그 야만성은 오히려 로마 시민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네로의 포악성은 더해갔으며 악마적인 상상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는 갖가지의 방법들을 고안했는데, 그것은 가히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야수들의 가죽을 벗겨 꿰매 맞추어 입고 개들을 괴롭혀 죽게 하는가 하면 왁스를 먹여 굳어진 옷을 입은 사람을 굴대에 고정시켜 놓기도 했고, 궁전의 정원을 밝히기 위하여 정원을 방화하기도 하였다. 이 박해는 로마제국 시대를 통틀어 자행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갔다. 이 와중에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당하였다. 여기에 고린도 교회의 청지기인 에라스토(Erastus), 마케도니아인 아리스타코(Aristarchus), 바울을 통해 회개한 에베소인 트로피모(Trophimus), 그리고 그와 함께 수고했던 동료로서 보통 바나바(Barnabas)로 불리는 요셉(Joseph), 다마스커스 교회의 감독인 아나니아(Ananias) 등의 이름이 바울과 베드로와 함께 순교자 명단에 더해진다. 이 일들은 각각 70년대에 일어났다.
2. 도미티안(Domitian) 통치 하에 가해진 두 번째 박해(A.D. 81)
도미티안 황제는 타고난 성품이 포악한 사람으로 자신의 형을 살해하였으며, 제2차 박해로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는 개인적인 분노로 로마 원로들을 죽였고, 악한 생각으로 다른 많은 로마인들도 죽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다윗의 혈통에 속한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목자인 시몬(Simon)은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요한(John)은 끓는 기름 속에 던져질 뻔하다가 팟모로 추방당했다. 로마 원로원의 원로의 딸인 플라비아(Flavia)는 폰토(Pontus)로 추방당하였다. 그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법령이 세워졌다. "법정에 일단 출두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을 단념하지 않는 한 결코 처형을 피할 수 없다." 그의 통치기간 중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온갖 종류의 날조된 거짓말들이 횡행하였다. 로마지역에 기근이나, 역병, 지진 등이 일어나면 그 발생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것 등의 거짓말들이 많았다.
이러한 박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이익을 얻기 위하여 결백한 삶을 버리고 밀고하는 사태도 증가하였다. 또 다른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관료들 앞에 섰을 때 반드시 신앙에 관한 선서를 하는 것이 강요되었던 점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 당연히 사형에 처해지며 그리스도교를 택하지 않겠다고 해도 죽음이 선고되었다.
다음은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던 이 박해 기간 동안에 살았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다. 아레오파고스(Areopagite)의 재판관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아덴인(Athenian)의 혈통으로 태어났고 그리스의 모든 유명한 수사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문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경이적이고 초자연적인 일식현상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이 현상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시간에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품위 있는 언변과 행동의 순수성 때문에 그는 아덴 교회의 목자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자애로운 그리스도인이었던 니코데모(Nicodemus)는 도미티안의 박해 기간 동안 로마에서 고난을 당하였다. 프로타시우스(Protasius)와 게르바시우스(Gervasius)는 밀란(Milan)에서 순교당하였다.
사도 바울의 제자로 이름 높은 디모데(Timothy)는 에베소 교회의 목자로서 A.D. 97년까지 그 교회를 열정적으로 섬겼다. 이 기간 중에 로마제국이 카타고기온(Catagogion)이라는 명절을 기념하려 하자 디모데는 그들의 악마적인 우상 숭배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로 인해 격분한 사람들이 그를 끌어내어 무자비한 방법으로 구타하였고 그는 구타당한 상처로 인해 이틀 후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3. 트라얀(Trajan) 통치 하에 가해진 세 번째 박해(A.D.108)
이 세 번째 박해 때 트라얀 다음의 권력자였던 플리나(Pliny)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교육을 받았으며 지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트라얀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트라얀에게 매일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되지만 그 중의 누구도 그런 형을 받을 만큼 로마법을 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들이 범한 죄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그들은 지정된 날짜에 서로 교제를 위하여 대낮에 모여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에게 함께 기도를 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켜야할 신념으로 그들 스스로 일체감을 갖는 것 등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추호도 사악한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절도, 강도, 간음과 같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거짓이 없으며 그 누구도 속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 사이에 퍼져 있는 관습입니다. 그리고 흠 없는 고기를 함께 나누기 위해 다시 모이곤 합니다."
이 박해 기간 중에 사랑하는 순교자,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유명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베드로의 후임으로 안티옥(Antioch)교회의 목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여 시리아에서 로마로 송환되어 야수들에게 던져져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로마로 가는 중에 아시아를 통과할 때 그는 호위병들로 둘러싸인 가장 엄격한 감금 상태에서도 그가 지나가던 모든 도시들의 교회들에게 권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여 교회들을 강하고 견고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스머나에 이르러 그는 로마에 있는 교황들에게 자신을 구출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편지로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 기다리고 소망하던 바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제자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에도, 그것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불에 태우고 십자가형에 처하고, 야수들의 먹이가 되게 하고, 뼈를 부러뜨리고, 손발을 찢고, 몸을 가루로 만들게 하십시오. 모든 마귀의 공격이 내 위에 임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얻기 원합니다!" 그는 짐승들에게 던져지는 형이 선고되었는데 그 형벌은 그가 받기를 고대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입니다. 내 몸은 야수들의 이빨과 더불어 흙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순수한 빵을 낼 것입니다."
트라얀의 왕위를 계승한 아드리안(Adrian)은 전임자에 뒤지지 않는 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이 시기에 로마의 목자였던 알렉산더(Alexander)가 두 명의 집사와 함께 순교당하였다. 구리누스(Guirinus)와 헤르네스(Hernes)도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로마의 귀족이었던 제논(Zenon), 이 외의 약 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였다. 아라랏(Ararat) 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 때와 같은 방법으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며,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로 순교당하였다. 용맹스럽고 유능한 로마인 사령관이었던 유스타키우스(Eustachius)는 황제로부터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우상숭배자들의 제사에 참석할 것을 명령받았으나 그의 믿음은(그는 마음 속으로 그리스도인이었다) 매우 신실했기 때문에 그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이 유능한 사령관의 공적을 잊어버린 채 그와 그의 모든 가족들을 처형하였다. 브레시아(Braescia)시민이었던 파우스틴(Faustines)과 요비타(Jovita) 형제의 순교는 특히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었으나 그들의 인내심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을 본 이교도 칼로세리우스(Calocerius)는 감탄과 경이함으로 선언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도다!" 이로 인해 그도 체포되었으며 그들과 같은 죽음을 당하였다. 이 밖에 많은 가혹한 형벌들이 그리스도인들 위에 가해졌으며 아덴(Athens)교회의 목자였던 퀴아드레투스(Quadratus)가 황제 앞에서 그들에 대한 선처를 바라며 사과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그 도시의 철학자인 아리스티데스(Aristides)도 서신으로 아드리안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아드리안이 A.D. 138년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그는 그 전에 통치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성격이 온순한 군주였고, 박해의 고삐를 늦춘 사람이었다.
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통치 하에서의 네 번째 박해(A.D. 162)
A.D. 161년에 왕위를 계승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누구보다도 천성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이나 시민 정치사에서 훌륭한 위인으로 평가되지만,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매우 매섭고 잔인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바로 이 사람에 의해 그리스도인에 대한 네 번째 대박해가 시작된다.
이 기간 중에 행해진 잔악한 행위들은 그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고통당하는 자들의 용기와 담대함에 오히려 목격자들을 아연케 했던 두 면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순교자들에게는 부상당한 발로 바늘, 못 또는 날카로운 가시등 위를 걸어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근육과 혈관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악한 고통을 겪다가 결국에는 끔찍하게 죽는 순교자들도 있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젊은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그가 가진 믿음 때문에 사나운 맹수에게 던져졌으나 그의 담대한 행동으로 몇 명의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 믿음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스머나 교회의 존경받는 목자였던 폴리캅(Polycarp)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피했으나 한 어린아이에게 발견되었다. 그를 체포한 호위병들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폴리캅은 기도할 수 있도록 1시간의 여유를 부탁했고 이 청이 승락되자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본 병사들은 자신들이 그를 체포하는 것에 대하여 회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폴리캅은 총독 앞에 끌려가 유죄를 선고받고 시장 거리에서 화형당하였다.
총독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를 비난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풀어주리라." 이에 폴리캅은 "저는86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속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나이까?"라고 대답했다. 그 후에 병사들은 그를 화형주에 묶고 그의 주위에 반원 모양으로 나뭇단을 쌓아 점화하였다. 그의 몸에 닿지 않을 정도로 불을 붙여 나무가 타는 것을 보면서 집행관은 칼로 폴리캅의 몸을 찔러 피가 솟아나게 하였다. 그의 몸에서 나온 피는 화염에 쌓인 나뭇단을 꺼뜨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폴리캅의 시신을 그리스도교식으로 장사하기를 간청했으나 복음의 적인 선동자들, 특히 유대인들에 의해 이 청은 거절되었고, 결국 장작 더미 위에서 불태워졌다. 그의 친구들은 남겨진 그의 뼈 조각들을 할 수 있는 한 모두 모아서 정중하게 장사지냈다.
매우 강력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던 목자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박해에 반대하여 탁월한 사과문을 썼던 피오니우스(Pionius)도 마찬가지로 화형당하였다. 보석 같은 두 명의 그리스도인 카르푸스(Carpus)와 파필루스(Papilus), 그리고 경건한 여인이었던 아가토니카(Agathonica)는 아시아의 퍼가모에서 고난당하였다. 로마의 유력한 집안의 교양 있는 귀부인이었던 펠리시타티스(Pelicitatis)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는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를 최고의 모범이 될 만한 신앙심으로 교육하였다. 큰아들 제누아리우스(Ja- nuarius)는 채찍에 맞은 후 압사당하였으며, 그 밑으로 두 동생 펠릭스(Felix)와 필립(Philip)은 곤봉에 맞아 머리가 부숴져 사망하였다. 네째인 실바누스(Silvanus)는 박해자들에 의해 절벽에서 밀려 떨어져 살해당하였다. 밑으로 세 명의 아들인 알렉산더(Alexander), 비탈리스(Vitalis), 그리고 마르티알(Martial)은 참수형을 당하였고, 그 어머니는 세 아들의 머리를 내리친 그 칼에 또다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불안에 떨고 있던 북쪽 지역의 몇몇 나라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황제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는 복병을 만나 전 군의 커다란 손실을 입었으며, 산에 둘러싸이고 적들에게 포위당하였으며, 갈증으로 고통당하여서 이교도 신들에게 헛되이 천우신조를 빌었다. 로마 군대와 교전 중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자 기적적인 구원의 길이 즉시 뒤이어 일어났다.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림으로 제방이 물로 채워진 것이다. 기이하게도 폭풍은 적들의 면전에서 발화하여 그들을 위협하였고, 이로 인하여 군대의 얼마는 탈영하고 나머지는 격파되어 로마의 수하에 들어갔던 지역들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 일로 잠시 동안 그 박해가 잠잠하였으나 적어도 이들 지역은 황제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곧이어 박해는 프랑스, 특히 리용(Lyons)에서 다시 맹위를 떨치게 되며, 그곳에서 당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문은 설명하기에 한계를 느낄 정도이다. 이들 순교자들 중의 첫 번째 그룹은 젊은 베티우스 아가투스(Vetius Agathus)와 허약한 체질의 그리스도인 발란디나(Blandina), 비엔나(Vienna)의 집사였던 생투스(Sanctus) - 그는 그의 신체 가운데 가장 약한 부분에 빨갛게 달군 놋쇠 덩어리를 올려 놓는 고통을 당하였다. - 허약한 여인 비블리아스(Biblias)등이 있다. 퍼가모의 아탈루스(Atalus), 리용의 존경받는 집사였던 90세의 포티누스(Pothinus) 등도 여기에 속한다. 블란디나가 다른 전사들과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간 날, 경기장 안의 나무에 매달려 맹수들의 먹이가 되는 순간에도 그녀는 순수하게 기도드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맹수들 가운데 한 마리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아 그녀는 감옥에 남게 되었다. 그녀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짐승의 먹이로 내던져질 때 그녀는 15살의 소년인 폰티쿠스(Ponticus)와 함께 끌려 나갔다. 지속적인 그들의 믿음은 군중들을 격분하게 만들어 그 둘 중 하나는 여자이고 다른 한 명은 소년이라는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으며, 모든 종류의 형벌과 고문이 그들에게 가해졌다. 이 기간 중 그들이 순교를 받아들일 때, 그들은 광채를 더했으며 화관을 썼다. 이는 그들이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땅 위의 박해와 땅 아래의 기도"로 이어지는 삶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삶은 콜롯세움과 카타콤으로 표현된다. 로마의 땅 바로 밑에는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동굴들이 있다. 이곳은 한때 교회이자 무덤이었다. 로마의 초기 교회는 카타콤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로마 근처에는 육십여 개의 카타콤이 있으며 이 안에는 960km의 통로가 발견되고 있다. 이 통로들은 높이가 약 2.4m이며, 약 90cm - 1.7m의 폭으로서 양쪽에 길고 낮은 평면으로 된 오목한 곳이 있는데, 마치 여객선의 침대처럼 한 개의 오목한 공간 위에 또 다른 한 개의 오목한 곳이 있다. 이곳에 죽은 시신들이 안장하고 앞 부분을 막는데, 하나로 된 커다란 대리석을 밀어 넣거나 회반죽으로 만든 타일 여러 장을 놓아 막기도 하였다. 이 대리석이나 타일 등에 비문이나 상징 등을 새겨 넣거나 그렸다.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 모두 그들의 시신을 이 카타콤에 장사하였다. 그리스도인 무덤이 발견될 때마다 그들의 뼈대는 그들이 당한 끔찍한 일들을 말해준다. 머리는 그들에 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의 갈비뼈와 어깨는 부수어져 있으며, 뼈들은 종종 불에 태워져 있다. 그러나 박해라는 공포스러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평화와 희락과 승리의 숨결을 담은 비문을 읽을 수 있다.
"여기 마르시아는 평강의 소망 가운데 안식을 취하며 눕다."
"그의 귀여운 아들 라우렌스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가다."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서 승리를 거두다."
"부름을 받아 평강 가운데 가다."
이런 비문을 읽을 때면 기억하라. 그 비문과 뼈들은 박해와 고문과 타고 있는 불을 의미하고 있음을. 이런 비문에 새겨진 충만한 능력들은 이교도들의 다음과 같은 비문과 대조해 볼 때 알 수 있다.
"현재를 위해서 살라.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20세의 나이에 나를 데려가는 신을 저주한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나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나그네여, 지나가며 나에게 욕하지 말라. 나는 어둠 가운데 있으며 대답할 수 없노라."
카타콤의 벽에 새겨진 그리스도인의 상징들 가운데 많은 수는 어깨에 양을 지고 있는 자상한 목자와 평화롭게 항해하는 배, 하프, 닻, 면류관, 포도송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고기가 가장 많다.
초기에 행해진 열 차례의 박해 Ⅲ
5. 세베루스(Severus)로부터 시작되는 다섯 번째 박해(A.D. 192)
한 그리스도인의 도움으로 심한 발작증세에서 회복되어가던 세베루스는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우세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무지한 군중들의 편견과 분노 그리고 진부한 법조문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발휘하였다. 기독교의 확산은 이교도들을 놀라게 했으며, 우연히 발생된 재앙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케케묵은 중상이 A.D. 192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맹위를 떨쳐도 복음은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또 사나운 적들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복음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견고하기만 하였다. 이 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로마 군주들에게 항복했더라면 로마 황제는 결코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의 목자였던 빅토(Victor)는 A.D. 201년 즉, 3세기가 시작되는 첫해에 순교당하였다. 세레누스와 헤론(Heron), 그리고 헤라클리데스(Hera clides) 등도 참수당하였다. 라이스(Rhais)는 그녀의 어머니 마르셀라(Marcella)와 마찬가지로 끓는 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후 불에 태워졌다. 라이스의 자매인 포타이니에나(Potainiena)도 라이스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때 군대의 소속 장교였으며, 그녀의 형집행에 참석했던 바실리데스(Pasilides)는 후에 회심하게 되었다.
장교였던 바실리데스는 로마인의 우상에게 선서를 강요당했다. 그때 그는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므로 우상에게 맹세할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당혹한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재판관 앞에 불려갔으며 투옥되었다가 지체함 없이 참수당하였다.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네우스(Irenaeus)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예절과 그리스도교로 교육받으며 자랐다. 리용에서의 박해에 관한 많은 부분이 그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추정된다. 그는 순교당한 감독 포티누스(Pothinus)의 뒤를 이었으며 훌륭한 예의 범절로서 자신의 교구를 다스렸다. 그는 이단교리에 맞서 강력하게 싸웠다. A.D. 187년 그는 이단 교리에 대적하는 괄목할만한 책을 썼다.
이제 박해는 아프리카에까지 퍼져나갔으며 지구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했으며, 그들 중에 가장 특별한 사람들을 우리는 언급할 것이다. 22살의 결혼한 여인이었던 페르페투아(Perpetua)와 함께 고난당했던 텔리스타스(Telicitas)는 노예였다. 이 때 고난당했던 다른 죄수들 가운데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세쿤둘루스(Secundulus) 그리고 사투어(Satur) 등이 있다. 그들의 형이 집행 되던 날 그들은 원형 경기장으로 인도되었다. 사투어와 사투르니누스, 그리고 레보카투스는 사냥꾼들 사이에서 태형을 당하거나 맹수들에게 던져지는 형을 받았다.
사냥꾼들이 두 줄로 열지어 서 있고, 그 사이로 이들을 달려 가게 해서 지나갈 때, 사냥꾼들이 그들을 심하게 채찍으로 때렸다. 펠리시타스와 페르페투아는 옷이 벗겨진 채로 미친 소에게 던져졌다. 그 소는 첫번째로 페르페투아를 공격하여 기절시켰고 다음으로 펠리시타스를 공격하여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그들을 군대 장교인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칼로 살해하였다. 레보카투스와 스투어는 맹수에게 의해 순교하였다. 사투르니누스는 참수당하였으며 세쿤둘루스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 일은 A.D. 205년 3월 8일에 일어났다.
스페라투스(Speratus)와 다른 12명의 형제들도 참수당하였고, 안도클레스(Andocles)도 프랑스에서 참수당하였다. 안티옥의 목자였던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는 고문으로 많은 시련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남겨 두셨다. 로마의 명성 높은 집안의 젊은 숙녀였던 세실리아(Cecilia)는 바레리안(Valerian)이라는 신사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그녀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이후에 그녀의 형제들은 참수형당하였다. 이들을 집행장소로 인도하던 장교도 후에 같은 운명이 되어 고난 받았다. 그들은 세실리아를 옷이 벗겨진 채로 끓는 욕조 속에 오랜 시간 동안 들어가 있게 한 후, 칼로 머리를 베여 죽게 하였다. 이 때가 A.D. 222년이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칼리스투스(Calistus)는 A.D. 224년에 순교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던 방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로마의 감독 울반(Urban)도 A.D. 232년에 같은 운명을 맞는다.
6. 맥시무누스 통치 하에서의 여섯 번째 박해(A.D. 235)
A.D. 235년은 맥시무누스의 통치 중간기이다.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총독이었던 세레미아누스(Seremianus)는 자신의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극악한 일을 자행하였다. 이 기간에 순교한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로마의 감독이었던 폰티아누스(Pontianus)와 그의 후계자 안테로스(Anteros)이다. 안테로스는 온 가족과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순교자인 팜마치우스(Pammachius)와 로마 원로였던 큐리투스(Quiritus) 등의 행적을 수집함으로써 통치자를 화나게 하였다. 로마 원로 심플리시우스(Simplicus), 그리스도교 목자였던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등은 타이버(Tuber)에 던져졌으며 귀족 출신의 아름다운 처녀였던 마르티나(Martina)와 고위 성직자였던 힙폴리투스(Hippolitus)는 야생마에 묶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끌려다니다가 순교하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맥시므누스에 의하여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재판도 없이 살해 당하였으며 알아 볼 수도 없도록 매장되었고, 때로는 50명 또는 60명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도 없이 한 구덩이 속에 매장당하였다.
A.D. 238년에 포악한 군주 맥시무누스가 죽고 고르디안(Gordian)이 그 뒤를 승계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과 그의 후계자 필립(Phillip) 재임 기간 동안 교회는 10년 이상 박해의 피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A.D. 24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이교도 제사장의 사주로 무자비한 박해가 일어났으며, 이것은 황제도 모르는 가운데 저질러졌다.
7. 데시우스(Decius) 통치 하에서의 일곱 번째 박해(A.D. 249)
이 일곱 번째 박해는 데시우스가 자신의 전임자였던 필립(그는 그리스도교인으로 추정된다)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에서 기인된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놀랄 만한 증가를 보이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 이방 종교 사원은 버림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리스도인 교회의 숫자는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데시우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박해를 시작하도록 자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 이교도들은 제국의 법령을 시행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살인 행위를 자신들의 출세를 위한 첩경으로 여겼다. 이 시기에 희생된 순교자는 그 수를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이지만, 여기에서는 몇 가지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박해 기간에 혹독한 고통을 당했던 명망 있는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은 로마의 감독이었던 파비안(Fabian)이다. 고인이 된 황제 필립(Philip)은 매우 고결한 사람으로서 파비안을 돌보아 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후임자 데시우스(Decius)는 그 훌륭한 성직자 위에 자신의 증오심을 퍼부었다. 파비안은 곧이어 체포되었고 A.D. 250년 1월 20일 참수당하였다.
준수한 용모와 고결한 마음을 가졌으며 매우 온순하였던 젊은 그리스도인 피터(Peter)는 비너스 여신에게 경배할 것을 거절하여 참수당하였다. 이 젊은이는 경배를 강요당하자, "나는 당신들이 아무 가치도 없는 한 여인에게 경배해야 한다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당신의 역사 기록에도 있듯이 방탕한 여인이 아닙니까? 그녀의 일생은 지금 당신들의 법으로 말한다면 당연히 처형당해야 할 행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아시아 총독은 그 즉시 이 청년을 바위 위에 매달아 굴려 모든 뼈를 부러뜨리게 하였다. 그 후 그를 참수형에 처하였다.
총독 앞에 불려나온 니코마쿠스(Nicomachus)에게도 이방 우상들에게 경배해야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니코마쿠스는 이에 대해 "나는 사탄에게 존경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그 경외함은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만 합당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이 고백이 지방 총독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그는 바위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통으로 그가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고 하나 그의 박약함을 증명해 주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그는 가장 혹독한 고문에 처해졌으며 땅에 내동댕이쳐서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광경을 본 데니사(Denisa)라는 열여섯 살의 소녀는 "오 불쌍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하여 무시무시한 영원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단지 현재의 안일함을 사려하고 있는가!"라고 말한 후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참수형을 당했다.
루시안(Lucian)과 마르시안(Marcian)은 처음에는 마술을 행하는 사악한 이방 우상 숭배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자신들이 범했던 죄들을 회개하였고 은둔자의 삶을 살며 빵과 물만으로 연명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은 그런 삶을 마치고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이때에도 박해의 불길은 계속되었고, 결국 그들은 체포되어 비두니아(Bithynia)의 통치자인 사비누스(Sabinus)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무슨 권세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투신하였는지에 대하여 대답을 요구받았을 때 루시안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법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웃을 회심시키도록 만듭니다. 또 그 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을 사탄의 올가미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마르시안도 함께 "교회를 광적으로 박해했던 바울을 회심시키고 그를 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한 그 동일한 은혜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회심하였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은 그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버렸다.
시실리(Sicily) 출신의 젊은 여인 아가타(Agatha)는 경건함으로 이름 높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 때문에서 시실리의 통치자 퀸티안(Quintian)을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 순결한 아가타를 음탕하고 방탕한 여인인 아프로디카(Aphrodica)의 손에 넘겼고 이 사악한 여자는 그녀가 음행하도록 모든 방법들을 동원했으나 그것은 헛된 노력일 뿐이었다. 그녀의 순결함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이는 아가타가 이미 고결한 도덕성만이 진실한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퀸티안은 자신의 욕정을 원한으로 바꾸었고, 아가타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자 관철시키지 못했던 자신의 추악한 욕망대신 복수심을 일으켜 아가타를 채찍으로 때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쇠 덩어리에 태웠으며 날카로운 쇠고리로 온 몸을 찢었다. 그녀는 이런 고통을 꿋꿋하게 견디었으며 결국에는 유리조각이 섞여있는 불붙은 석탄위에 벗긴 채로 뉘여 감옥으로 보내져서 A.D.251년 2월 5일 마침내 순교당하였다.
고르티나(Gortyna)의 감독이었던 시릴(Cyril)은 그 곳의 통치자였던 루시우스(Lucius)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루시우스는 시릴에게 황제의 칙령을 준수하고, 우상에게 경배하여 다른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시릴은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혼을 구하라고 가르쳐 왔으며 자신이 지금 유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라고 대답하였다. 고결한 이 형제는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집행장소로 걸어가 놀라운 꿋꿋함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A.D. 237년 제비누스(Zebinus)의 뒤를 이어 안티옥의 감독이 된 바빌라스(Baby- las)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열심으로 교회를 섬겼으며, 가장 극심한 박해의 폭풍우가 몰아닥친 그 시기에 매우 사려 깊게 교회를 다스렸다. 그가 집무하던 시기에 안티옥에 발생한 첫 번째 불황은 페르시아 왕 사퍼(Saper)가 그곳을 포위하려 공격했던 일이었다. 사퍼는 시리아 온 지경을 침략하여 도시들을 차지하고 강탈하였으며, 그리스도인 거주민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심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곧 고르디안(Gordian)에게 완전히 패배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고르디안이 죽고 데시우스가 집권하였을 때, 그는 안티옥에 있는 그리스도인 모임에 자신이 방문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바빌라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그가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거절하였다. 그 때 그 황제는 크게 진노하였고 그 감독을 송환하여 그의 오만함을 비난하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신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거절한 그는 사슬에 감겨 감옥으로 보내졌고 매우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한 뒤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Alexander)도 이 때쯤에 투옥되었다가 심한 고문으로 순교하였다. 연로한 줄리아누스(Julianus)와 크로니온(Cronion)은 낙타 등에 매여 혹독하게 채찍질을 당하였고 불에 태워졌다. 안티옥에서는 40여 명의 처녀들이 투옥되었다가 채찍에 맞은 후 화형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안티옥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 테오도라(Theodora)는 로마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아 사창굴에 던져지는 선고를 받아 그녀의 순결함이 그 곳에서 정욕에 찬 짐승들에게 희생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디디무스(Didymus)는 로마 군인 복장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테오도라가 있는 곳에 가서 자신이 입고 있던 로마군인 복장을 입혀 탈출시켰다. 그녀 대신 디디무스는 총독 앞에 끌려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실을 들은 테오도라는 재판정에 스스로 출정하여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무죄한 사람의 통곡에 귀멀고 정의로운 요구에 무감각한 총독은 두 사람 모두에게 사형을 내려 차례대로 목을 자르고 불태우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된 세쿤디아누스(Secundianus)가 로마 병사들에 의해 송환될 때 베리아누스(Verianus)와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가 그 병사들에게 "이 결백한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라고 물었다가 함께 결박되어 후에 심한 고문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동안에 데시우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갈루스(Gallus)가 왕위를 잇는다. 그는 고트 족(Goths)과의 전쟁에 열을 올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모처럼의 '박해가 없는 상태'를 맞게 되었다. 갈루스 황제가 전쟁을 마쳤을 때 로마 제국에 역병이 발생하였다. 이 황제는 로마신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온 나라에 선포하였고 이 명령으로 인하여 또 다시 박해의 바람이 불어 로마제국의 중심부에서부터 멀리 있는 변방까지 광범위하게 순교의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코넬리우스(Cornelius)와 그의 후계자 루시우스(Lucius)가 이 기간에 순교하였다. 이 때가 A.D. 253년경이다.
이 때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이 몰래 들어와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등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항하는 인간의 이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리겐이 비록 이 기간 중에 죽임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의한 이단 교리는 교회 안에서 그 순수성을 해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오류는 자격 있는 목자들에 의해 그릇됨이 판명되었으며 육신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견해들은 태양 앞의 별처럼 무력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초기에 행해진 열 차례의 박해 Ⅴ
불 속에서도 평안을
8. 발레리안(Valerian) 황제 통치 하에서의 여덟 번째 박해(A.D. 257)
A.D. 257년 4월 발레리안 치리 하에서 시작된 박해는 3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사람들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으며, 그들이 당한 고통과 처형당한 방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찬 것들이었다.
루피나(Rufina)와 세쿤다(Secunda)는 아름답고 교양있는 숙녀들로서 로마의 저명한 신사였던 아스테리우스(Asterius)의 딸이었다. 언니인 루피나는 젊은 귀족 아르멘타리우스(Armantarius)와 약혼 중이었으며 세쿤다도 부유한 상류 계급 출신의 베리누스(Verinus)와 약혼하였다. 두 숙녀의 약혼자들은 박해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위험에 놓이게 되자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믿음을 부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두 자매들로 하여금 믿음을 포기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것이 실패하자 몹시 실망하였으며 자신의 약혼녀인 두 자매를 밀고하였던 비열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자매는 A.D.257년에 로마 관료인 쥬니우스 도나투스(Junius Donatus) 앞에 불려가 피로 그들의 생을 마감하였다. 같은 해 로마의 감독 스테판(Stephan)도 참수당하였으며, 툴루스(Toulouse)의 경건한 감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도 그 때 순교하였다. 사투르니누스는 우상에게 경배할 것을 거절하였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모욕 당하였다. 그들은 숫소의 꼬리에 그의 다리를 묶어 고정시켜 놓고 그 미친 짐승으로 성전의 계단을 질주하게 함으로써 그의 뇌를 산산조각나게 하여 죽였다.
스테판의 뒤를 이어 로마의 감독이었던 섹스투스(Sextus)는 그리스계 혈통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스테판 밑에서 집사로서 교회를 섬겼던 그는 충성스럽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범상치 않은 용기가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가 이단 교리를 놓고 벌이는 논쟁을 벌일 때면 경건과 온유로서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 내곤 하였다. A.D.258년에 로마정부의 관료였던 마르시아누스(Marcianus)는 황제 발레리안(Valerian)으로부터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받았을 때, 이 감독은 그의 집사 6명과 함께 순교당하였다.
여기서 순교자 로렌스(Lawrence)의 불 곁에 가까이 감으로써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훈훈하게 해보자. 사악한 전제군주 발레리안은 자신을 성사의 목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 재산의 분배자로 생각하고 자신 스스로 일석이조의 일을 실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첫째는 황욕의 갈고리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긁어오는 것이고, 그 후 압제의 불타는 갈퀴로 그들을 흔들고 교란시킴으로써 그들을 믿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악한 여우는 사나운 얼굴과 난폭한 안색으로 로렌스에게 교회의 재산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3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간청하였고 그 군주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3일 후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얼마 후 로렌스는 많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그가 약속했던 날이 이르자 약속의 이행을 명령하는 폭군 앞에서 그는 그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들은 우리 교회의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 안에 그의 거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들 안에 거하신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큰 건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도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대접하였도다.' 또 '여기 내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그 분이 사랑하시는 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 누가 이 광기 어린 군주의 격노한 마음에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때 그 군주는 발을 구르고 그를 노려보며,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꽃 같았고, 그의 입은 멧돼지 거품을 문 것과 같았으며, 그의 이빨은 개가 이를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다고 불리는 것이 마땅하였다. "불을 붙여라!" 그가 소리질렀다. "나무를 아끼지 말고 태워라. 이 악한 놈이 황제를 기만하였다. 그를 죽여라. 그를 죽여 버려라. 채찍으로 내리치고 장대로 비틀고 주먹으로 때려 눕혀라. 머리를 때려 부수라. 이 반역자가 황제에게 말장난을 하였다. 벌겋게 단 인두로 그를 지지고 불타는 쇠판을 그의 몸에 동여매라. 가장 튼튼한 쇠줄과 불타는 갈퀴와 쇠침대를 가져와 불을 붙여라. 그의 손과 발을 묶고 쇠침대가 달아올랐을 때 그를 눕혀 튀기고 끓이고 뒤집고 엎으라." 이 명령들은 이렇게 빠르게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모두 완전하게 수행되었다. 이런 난폭한 명령이 집행된 후에 이 온유한 양은 달군 쇠 침대에 눕혀졌지만, 나는 그가 부드러운 솜털 침대에 누웠다고 말하고자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순교자 로렌스와 함께 계셨으며 기적적으로 그 불길을 조정하셨다. 따라서 그것은 고통을 태우는 자리가 아니라 풍성한 휴식이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도 심한 폭력을 동반한 박해가 위세를 떨쳤으며,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카르타고(Carthage)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Cyprian)은 교회의 광채를 더해 주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언행은 우아하고 겸손하였으며, 그는 참으로 경건하고 예절바른 설교자였다. 젊어서 그는 이교도의 교리로 교육받았으며, 막대한 재산가였고 모든 화려함의 극치 가운데서 생활하였다. A.D. 246년에 카르타고의 목자였던 코에실리우스(Coecilius)에 의해 회심한 그는 침례받기 전에 성경을 매우 주의 깊게 공부하였으며,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에 크게 충격을 받고 기록되어 있는 명령을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침례에 뒤이어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였으며, 자신은 매우 소박한 차림새에 궁핍의 생활을 하였다. 그의 미덕과 선행은 광범위하게 칭송되었고 A.D. 248년 도나투스(Donatus)가 죽자, 그는 거의 만장일치로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시프리안의 영향력은 카르타고에서뿐만 아니라 누미디아(Numidia)와 머리타니아(Mauritania)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만장일치만이 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사역에 있어서 형제들의 조언을 구했다. "감독은 교회 속에, 교회는 감독 안에"라는 그의 말은 격언이 되었고, 그러한 일치됨은 목자와 양들간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만이 유지될 수 있었다.
A.D. 250년에 시프리안은 데시우스(Decius) 황제에 의해서 그리스도인 감독 코네실리우스 시프리안이란 이름으로 추방당하였다. 그 이교 로마는 "시프리안을 사자들에게, 시프리안을 맹수들에게 던지라"고 부르짖었고 시프리안은 주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한 후 그는 그의 양들에게 30회에 걸쳐 경건하고 향기로운 서신을 보내 그들을 돌보았다. 박해의 위세가 조금씩 가라앉자 그는 카르타고로 돌아와 교회 내의 위험스러운 견해들을 없애는데 그의 모든 힘을 기울였다.
카르타고에 무시무시한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늘 그렇듯이 그 책임이 교회로 돌아갔으며, 그 역병에 대한 교회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시프리안의 편지에 행정관료들은 다시 교회를 차례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A.D. 257년에 시프리안은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왔으나 정부 관료에 의해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A.D. 258년 10월 14일에 목잘려 순교당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시프리안의 제자들은 루시우스(Lucius), 플라비안(Flavian), 빅토리쿠스(Victoricus), 레무스(Remus), 몬타누스(Montanus), 쥴리안(Julian), 프리메루스(Primelus)와 도나티안(Donatian) 등이 있다.
곳곳에서 심한 폭력을 동반한 박해가 위세를 떨쳤으며,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다음은 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행적이다.
우티카(Utica)에서는 가장 잔인한 비극이 발생되었는데, 3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불타고 있는 가마에 둘러 세워져서 주피터를 경배하지 않으면 불타는 가마 속으로 던져지는 무서운 명령이 지방 총독에 의해 내려진 것이 그것이다. 그곳의 모든 형제들은 주피터에게 경배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 가마에 뛰어들었다.
스페인 타라곤(Tarragon)의 감독 프루투오수스(Frutuosus)와 그의 두 집사 어거리우스(Augurius)와 율로지우스(Eulogous)도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불태워졌다.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알렉산더(Alexander), 말쿠스(Malcus)와 프리스쿠스(Priscus)는 한 여인과 함께 자진하여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힘으로써 호랑이에게 던져지는 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선고는 곧이어 집행되었다.
투버가(Tuburga)의 세 처녀인 막시마(Maxima)와 도나틸라(Donatilla), 세쿤다(Secunda )에게는 쓸개와 식초를 마시게 한 후 채찍으로 때리고 교수대에서 고통을 주고 맹수들로 위협하다 결국 참수하였다. 그러나 A.D. 260년 발레리안 황제의 뒤를 이은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통치하는 동안은 몇 명의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교회는 수년 동안 평안한 기간을 구가하였다.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9. 아우렐리안(Aurelian) 통치 하에서의 아홉 번째 박해 A.D .274년
이 때의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로마의 감독이었던 펠릭스(Felix)를 거명할 수 있다. 그는 A.D. 274년에 로마 감독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참수당하였다. 젊은 그리스도인이었던 아가페투스(Agapetus)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매우 신실한 형제였으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명으로 붙잡혀 많은 고문을 받은 후 로마로부터 하룻길 떨어진 곳인 프레네스테(Praeneste)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들이 이 기간에 순교당한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기록에 남은 사람들이다.
아우렐리안의 뒤를 이어 타시투스(Tacitus)가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프로부스(Probus)가 그리고 그 후에 카루스가 뒤를 이었다. 이 황제가 벼락을 맞아 죽자 그의 두 아들인 카르니우스(Carnious)와 누머리안(Numerian)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들이 집권한 동안 교회는 평화스런 기간을 갖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이 A.D. 284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던 초기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286년 그가 막시미안(Maximian)과 연합하면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기 전 죽음에 처해졌다. 이들 중에 펠리시안(Felician)과 마르셀리아누스(Marcellianus) 형제가 있다.
마르쿠스와 마르셀리아누스는 쌍둥이였으며 로마인으로서 귀족의 자식이었다. 그들의 부모들은 이교도인이었으나 그들을 교육한 가정교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끈 주 안의 형제였다. 그들이 이교 로마인이 되기를 열렬히 기원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견고한 신앙에 누그러졌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비난하던 부모와 다른 모든 가족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교 로마는 이들을 기둥에 묶고 못들을 밟게 하는 등 많은 고문을 가하였고 이들은 그 고통으로 순교하였다.
감옥 간수의 아내였던 조에(Zoe)도 그들에 의해 회심하였다. 그들은 그녀의 발밑에 짚으로 불을 지피고 나무에 매달았으며, 그녀의 몸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강에 떨어지게 하였다.
A.D. 286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테비아스(Thebias)에서 일어난 군대라고 하여 테반군단이라고 불렀던 군단에는 6660명의 군인이 있었는데, 이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막시미안 황제로부터 버간디(Burgundy)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골(Gaul)로 행진할 것을 명령받아 마우리티우스(Mauritius)와 캔디두스(Candidus), 엑수페르니스(Exupernis)의 지휘 아래 진군하고 있었다. 이때 막시미안은 그들에게 이방 신에게 숭배할 것과 골에 있는 기독교를 박멸하는데 참여해야 할 것을 명령하며 이 일에 충성을 선서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에 대해 경각심을 가진 테반 군단의 각 개인들은 이 두 가지 명령을 완전히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막시미안은 열 명 가운데 한 명씩 죽이는 명령을 내려 그들을 칼로 처형하였다. 이 피의 명령은 곧 집행되었으나 살아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두 번째 이 명령이 내려졌을 때 또다시 열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두 번째 명령은 첫 번째 다 그들에게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불굴의 정신과 자신들의 신조를 지켰으나 그들 상관의 조언에 따라 황제에게 충성스런 진정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이것이 황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의 확고부동함과 일치함에 격분한 왕은 전체 군인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 명령은 점차적으로 다른 군대에까지 퍼져나가 집행되었다. 그들 모두는 A.D. 286년 10월 22일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하였다.
영국에서는 헤르트폴트쉬어(Hertfor- dshire)의 성 알반(Alban)에서 그 이름을 딴 알반이 첫 번째 순교자였다. 영국은 최초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던 루시우스(Lucius)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루시우스는 원래 이방인이었으나 암필바루스(Amphibalus)라는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회심하게 되었다.
존경할 만한 형제 베데(Bede)는 알반이 순교할 때 그 집행자였다. 그때 그는 돌연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이 알반을 대신하여 죽거나 또는 함께 순교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은 알반과 베데의 목을 잘라 참수시켰다. 이 일은 A.D. 287년 6월 22일 베룰람(Verulam)에서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콘스탄틴 왕 당시의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대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현재의 이 교회는 섹슨 전쟁(Szxon wars) 때 파괴된 것은 메르시아(Mercia)와 오파(Offa)에 의해 재 건축된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프랑스 엑큐타인(Acquitain)의 그리스도인 자매인 페이드(Faith)는 A.D.287년 기름 가마에 던져진 후 참수형당하였다. 큐틴(Quintin)은 로마 사람으로서 루시안(Lucian)과 함께 가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미엔스(Amiens)에서 설교했으며 이후에 루시안은 뷰마리스(Beaumaris)에 갔다가 순교하였다. 큔틴은 피카르디(Picardy)에 남아 매우 열정적으로 사역하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그의 정강이가 끊어질 때까지 잡아당겨지고 채찍으로 때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했으며 벗긴 몸에 끓는 기름을 끼얹는 등의 고문을 행하였다. 큔틴은 이런 모든 고통을 당한 후에 A.D. 287년 9월 31일 순교했으며 그의 몸은 소메(Somere) 강에 던져졌다.
10.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통치 하에서의 열 번째 박해(A.D. 303)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들의 통치 기간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수와 그들의 부는 얼마간 계속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디오클레티안의 양자였던 갈레리우스(Galerius)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증오심으로 불타서 디오클레티안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도록 설득하였다.
그 피의 역사가 시작된 운명의 날은 A.D. 303년 2월 23일로서 그 날은 테르미날리아(Terminalia)를 경축하는 날이었고, 짐승 같은 이교도들은 그 날이 기독교를 종결시키는 날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 날로부터 박해는 소아시아의 한 도시인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엄청난 수의 군인들과 행정 관료들이 교회의 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가 그곳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그 도시를 온통 뒤엎어 놓았다. 이런 일들은 디오클레티안과 갈레리우스의 면전에서 일어났으며, 책을 태워버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교회 건물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이 공포됨과 동시에 분노한 한 그리스도인이 순교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그가 이 칙령이 붙어 있는 곳마다 그것을 찢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부당함을 부르짖으며 그를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동은 황제를 자극하였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에 산채로 화형당하였다. 이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박해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을 찾기 위하여 황제의 궁을 비밀리에 방화하고 그 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하였다.
로마 치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일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박해가 가해졌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이교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집들을 불태웠고 그리스도인들을 불길 속에 내던졌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을 커다란 돌에 묶어 바다에 던지기까지 했다. 그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퍼져갔고, 특히 동쪽 지역에서 더욱 심하였다. 이 일은 1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때 순교한 사람들의 숫자나 그들이 순교당한 방법들을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문대, 채직, 칼, 톱, 처형대, 독약 등이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 데 사용되었으며, 더 이상 고문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나, 그들은 그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리기아(Phrygia)는 도시 전체가 그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살육하는 데 싫증난 지방의 몇몇 총독들은 황제식 법정을 열어 꼴사나운 판결을 내리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형집행을 연기하여 가능한 한 그들이 단번에 처형되지 않게 하면서 서서히 그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곤 했던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귀를 베어버리고, 코를 자르거나, 오른쪽 눈을 뽑고, 손발을 꺾었으며, 벌겋게 달군 인두로 사람들의 몸을 지지곤 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순교에 내어 던졌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세바스티안(Sebastian)이다. 그는 골 지방의 나르본네(Narbonne)에서 태어났으며, 밀라노에서 기독교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 로마에서 황제 수비대의 장교가 되었다. 그는 우상 숭배가 기승을 부리던 가운데서도 왕궁의 화려함에 유혹되지 않았고, 악에도 오염되지 않았으며, 승진할 욕심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기독교를 버리고 이교도가 되는 것을 거절한 그에게 황제는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라는 도시 근교의 들로 끌고 가 활을 쏘아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곧이어 집행되었다. 그의 시신을 가져다 장사지내기 위하여 그곳에 왔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를 안전한 장소로 옮겼으며, 얼마 후 세바스티안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순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스스로 성전으로 가고 있던 황제 앞에 나타나 그의 잔인함과 기독교에 대한 비이성적인 행동의 부당함을 비난하였고,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놀란 디오클레티안은 그를 잡아 때려죽이도록 하였으며, 장사지내지 못하도록 공중 하수구 속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루시나(Lucina)는 그의 시신을 카타콤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었다.
빅토르(Victor)는 프랑스 마르세이유 지방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자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밤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돌보아 주었으며, 약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런 경건한 일들은 신변을 위협하는 일이었으므로 낮에는 지속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막시미안(Maximian)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체포된 그는 결박된 채 거리에서 끌려 다녔고, 난폭한 성난 군중들에게 온갖 폭행을 당하였다. 고문대에 올라간 그는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고, 놀라운 인내로 고문을 참아냈다. 고문 집행자들이 지쳐 그를 토굴로 옮겨 놓았을 때, 그는 오히려 그곳의 간수였던 알렉산더(Alexander), 펠리시안(Felician), 롱기누스(Longinus) 등을 구령하였다. 이 일이 황제에게 알려지자, 그는 즉시 빅토르를 사형시키도록 명령하였고, 그 구원받은 간수들도 참수형 당하였다.
빅토르는 또다시 고문대 위에 올려졌고, 몽둥이로 맞고 투옥되었다. 그의 종교와 관련하여 세 번째 심문을 받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였고, 그들이 작은 제단을 가져와 그에게 향을 피울 것을 명령한 때에도, 그는 즉시 거절하며 그 제단을 발로 차버렸다. 이 일로 빅토르는 맷돌에 갈려져 산산조각나 순교하였다. 이 때가 A.D. 313년이었다.
디오클레티안 황실의 고위 의전단이었던 드로테우스(Drotheus)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을 구령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에 고르고니우스(Gorgonius)라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순교하였다. 황실에서 살았던 내시 피터(Peter)도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석쇠에 눕혀져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서서히 불에 태워지는 형을 받았다. 마술사로 알려졌던 시프리안(Cyprian)은 안티옥 출신으로서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자유주의 학문으로 교육받았고, 특히 점성술에 심취하였다. 그는 점성술을 더욱 익히기 위하여 그리스와 이집트와 인도 등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 안티옥의 젊은 여인 저스티나(Justina)와 교류하게 되면서부터 회심하였고, 자신의 점성술과 마술책들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침례를 받았다. 시프리안의 회심은 한 이교도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 짧은 시간에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로 시프리안과 저스티나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참수형 당하였다.
A.D. 303년에 박해가 스페인까지 미쳤을 때 테라고나(Terragona)의 총독이었던 다시안(Dacian)은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와 집사인 빈센트(Vincent)를 체포하여 인두로 지지고 투옥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앙은 너무나 견고하였으므로 그들은 발레리우스를 추방하고 빈센트는 고문대에서 고문하고 갈고리로 몸을 찢은 후 석쇠 위에 올려놓고 석쇠 밑에서는 불을 피웠으며, 위에서는 대못으로 그의 몸을 관통하여 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고문도 그를 믿음으로부터 돌이키게 하거나 죽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두운 토굴 속에 던져졌는데, 그곳에는 날카로운 돌과 깨진 유리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A.D. 304년 1월 22일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디오클레티안 박해는 A.D. 304년경에 특히 그 위세를 떨쳤고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고문과 혹독한 죽음에 처해졌다. 이때 순교한 사트리니우스(Satrinius)는 아프리카 알비티나(Albitina)의 한 사제였다. 그는 고문 끝에 투옥되었으며, 거기서 굶어 죽었다. 그의 네 명의 자녀도 갖가지 고문을 받은 후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 한편 아그라페(Agrape), 치오니아(Chionia), 이레데(Irene), 이 세 자매는 박해가 그리스에까지 다달았을 때 데살로니가에서 체포되었고, A.D.304년 3월 25일 화염 속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는 가이우스(Gaius)의 뒤를 이은 인물로서 디오클레티안 황제에게 존경을 표시할 것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때는 A.D. 324년이었는데, 그는 숱한 고문 가운데서도 자신이 받을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바라보며 숨을 거둘 때까지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빅토리우스(Victorius), 카르포포루스(Carpophoru -s), 세베루스(Severus), 세베리아누스(Severianus)는 친형제들로서 모두 로마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이방 신을 경배하는 것을 비난하다가 그들 모두는 체포되었고, 채찍으로 맞았으며, 납으로 만든 종에 묶이는 고문을 받았다. 이 형벌은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이 고문으로 신실한 네 명의 형제들은 순교하였다.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의 집사였던 디모데(Timothy)와 그의 아내 마우라(Maura)는 결혼한 지 3주일도 안되어서 박해로 인하여 헤어지게 되었다. 테바이스(Thevais)의 총독 아리아누스(Arrianus)는 디모데가 성경책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불사르기 위하여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그가 대답하기를 "만약 내게 자식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희생시킬지언정 성경책은 불태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대답에 화가 난 총독은 벌겋게 달군 인두로 그의 눈을 빼라고 명령하면서 "이제 그 책은 더 이상 네게 쓸모가 없게 되었다. 너는 그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단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문에도 놀랍게 인내하는 그를 보고, 총독은 그의 발목을 붙들어 거꾸로 매달고 입에 자갈을 물게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 마우라는 그에게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며 그의 고집을 비난하였다. 그들이 디모데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자갈을 꺼내 주었을 때, 그는 그 아내의 간언에 동의하지 않고 그녀의 잘못된 사랑을 통렬히 비난하였고, 신앙을 위하여 죽겠노라고 하였다. 결국 마우라는 남편의 용기에 감동하였으며, 자신도 그의 영광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독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으나, 결국에는 그를 혹독한 고문에 처하였고, 디모데와 마우라는 A.D. 304년에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