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BS에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KAL858기 폭파 `마유미` 영화장면과 1990년 영화 `마유미`포스터.
< 당시 사건일지 >
1978년. 홍콩서 영화배우 최은희, 감독 신상옥 북한으로 월북(1984. 안기부 북한 납치 발표) 1986년 3월 13일. 최은희˙신상옥,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 1986년 4월. 최은희˙신상옥, 미국 워싱턴 도착. 이후 미국 워싱턴(3년)과 로스앤젤레스 거주 1987년 11월 29일. 중동 근로자등 탑승객 115명을 태운 KAL858기가 버마(미안마) 안다만 해상에서 실종 1988년 1월 15일. 안기부, KAL사건 용의자 김현희(하치야 마유미),김승일(하치야 신이치)의 북한 평양->소련 모스크바->헝가리 부다페스트->오스트리아 빈 여정 수사 결과 발표 1989년 2월 3일. 서울 지검, 김현희에게 항공기 폭파 치사죄,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 '불구속 기소' 1989년 5월 23일. 최은희˙신상옥 미국서 서울로 일시 귀국 1889년 11월~ 신상옥 감독, 헐리우드 영화사의 폭파 효과팀과 KAL858 폭파사건 '마유미' 영화 촬영 1990년 3월 5일. 이렇다할 물증없이 재판이 진행 되던중 88올림픽 마크가 찍혀진 KAL기 동체 잔해 대량 발견 (안기부, 재판이 끝난 후 고물상에 폐기 처분)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KAL858 폭파범으로 김현희에게 국가보안법 위반등으로 사형 판결 확정 1990년 4월 12일. 노태우정권은 '테러범 김현희'에게 역사상 초유의 대통령 특별사면 조치 1990년 6월 5일. 'KAL858 희생자 유족회' 특별사면 철회와 영화 '마유미' 상영중단 성명서 발표 1990년 6월 9일. 반공영화 '마유미' 전국 동시상영
- KAL858기 폭파장면과 신상옥 감독 영화 `마유미` -
1989년 KAL858 폭파범 김현희에 대한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실종자 가족들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의 비호 아래 수 십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 `마유미`가 제작, 상영되어 다시 한번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칼기 실종 사건을 정략적으로 악용하여 대국민 기만극을 연출했다.
영화 마유미는 김현희 진술서와 안기부 수사결과를 기초로 제작된 일종의 반공영화로 칼 폭파범 김현희의 대법원 재판이 끝나자 마자 한 달도 안되어 1990년 4월 노태우 군사정권의 `특별사면` 조치로 사건이 엉터리로 종결된 직후인 1990년 6월 전국의 영화관에서 일제히 상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858 폭파범 김현희는 특별사면 조치이후 사건당시 진술과 80여곳 이상이 엇갈리는 내용으로 내외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수기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발간 준비에 들어간다.
그런데 문제의 영화 `마유미`는 사건 진상이 규명이 되기도 전에 피해자 가족들을 앞세워 반공 궐기대회를 하고 3개월만에 사망처리를 다하고 픽션영화를 제작했다는 점, 영화 제작사상 초유의 수 십억원이 들어간 제작비의 출처 의혹(시중에는 노태우정권 시절 황태자로 유명세를 탔던 박아무개씨 의원이 댔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미국 폭발전문 용역회사 인트로비젼사에 100만 달러를 제공하여 충격적인 KAL858기 폭파장면을 촬영한 점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일본에 약 123만달러에 팔리면서 오히려 일본에서 더 유명세를 탔으며, 또한 영화 제목 'VIRGIN TERRORIST'라는 영어제목으로 미국의 세계적인 배급회사 퍼시픽 아티스트를 통해서 2백만 달러에 팔려 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를 통하여 무고한 우리국민 115명을 죽인 칼 858 폭파범 김현희는 `미모의 테러리스트`로 완전히 둔갑하였고, 또 수기 '이제 여자가 되고싶어요'을 출간하면서 연약한 여자의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부각하면서, 김현희는 책판매 수입등으로 일약 돈 방석에 앉게 된다.
그러나 이면에는 유품하나도 못찾은 실종자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를 철처히 외면했으며, 당시 군사정권은 사건의 진실을 정치적으로 호도하고, 칼858기 실종사건을 `상업적 돈벌이` 로 악용하는 동시에 김현희는 `화려한 변신`을 하며, 국내 TV출연은 물론이고, 일본방송에도 스타로 출연하는 등 호화스러운 인생을 즐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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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서
정부는 115명 살인자 김현희 사면 철회하라.
1. 정부는 115의 살인자 김현희의 신병을 인수하여 죄수답지 않게 고급 승용차에 태우어서 재판정에 출정시켜 안기부 직원과 정보경찰관은 방청 참관 자리를 채워 당연히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방청하여야 할 유가족들은 참관치 못한채 정부와 사법부의 각본대로 사형 구형 사형등의 예정대로 3심 재판을 거쳐 모든 형사사건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하등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사면시킴으로서 모든 민주국가의 법전통을 깨뜨리고 공작정치적 차원에서 사면하므로서 유족 인권과 관심있는 국민들을 또한번 놀라게 하였습니다.
정부는 KAL 858기 폭파사건을 분단의 비극의 유일한 생존자 또는 산증인 운운하면서 사면하였다고 국민 여론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돌이켜 볼 때 김현희 사면은 정부의 공작 정치의 도구에 불과한 것임으로 한반도의 분단의 비극이 더 고착화되고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음으로 사면은 철회 되어야 할 것이다.
2. 또한 김현희의 사건 진상의 진실성 여부를 조사중임에도 불구하고 증거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김현희사건(마유미) 영화제작 함으로서 사건을 알지 못하는 많은 국민들을 현혹시킴으로서 사회적인 물의로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상영 중단되어야 할것이고 또한 정부 발표는 3만 7천 피트 상공에서 폭발로 인하여 기체가 눈송이 처럼 산산조작이 되어 기체 유품한점 찾지 못하였다고 하나 이번 미얀마 어민의 길이 17m 높이 3m의 동체후미와 유품을 발견 한국정부에 인계하고 계속 동체 앞부분을 동체를 수색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로 왜곡되고 흥행위주로 제작상영함으로서 특정기업의 돈벌이 수단의 제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바입니다.
1990. 6. 5
대한항공 858기 희생자 유족회 --------------------------------------------------------------
최은희 신상옥의 납북과 탈북[자료]
지난 1984년 4월 2일 국가안전기획부는 1978년 홍콩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영화 배우 최은희 씨와 영화 감독 신상옥 씨가 북한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북한 공작원에 의해 홍콩에서 강제 납치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안기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1978년 1월 14일과 7월 19일 각각 최은희 씨와 신상옥 씨를 홍콩에서 강제로 납치, 북한으로 데려갔다. 북한은 이들 두 사람을 평양시 대동강변에 있는 철봉리초대소에서 집중 세뇌교육을 시킨 후, 소련·동독·체코·헝가리 등 동구권을 돌면서 김일성 부자의 영도력을 미화·찬양하고, 남한의 지도자와 고위층 인사를 비방 모략하는 영화를 촬영·제작하도록 했으며, 국내 가족을 해외로 유인하여 납치 입북하도록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발표에 따르면 이들의 납북 경위는, 최은희 씨의 경우 1978년 1월 11일 홍콩 거점 북한 대남 공작원 이상희(여)의 홍콩영화사 초청을 받고 출국했다가 3일 만인 14일 오후 5시쯤 투숙중이던 프라마호텔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강제 납치, 선편으로 황해도 해주로 납북 됐다고 한다. 또 신상옥 씨의 경우는 공작원 이(李)의 하수인으로부터 "최씨가 실종됐으니 급히 홍콩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1978년 1월 27일 출국, 최은희 씨의 행방을 찾아 미국·일본·동남아·프랑스 등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 해 7월14일 홍콩에 입국하였는데, 이 때 그를 추적하던 북한 공작원에 의해 5일만인 19일 공작선편으로 강제로 납북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지난 1979년부터 최은희와 신상옥 두 사람에게 영화 [첫 보안서원이었다], [설한령의 메아리], [춘향전] 등의 연기 및 연출 지도를 맡겼는데, 특히 이들이 제작한 [돌아오지 않는 일대(一代)]는 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충성의 선물'로 상납되었다고 한다. 또 이 작품들은 평양국제박람회 예술제에서 상영된 후 4월 동독영화제, 5월 칸영화제 등에 선전 목적으로 출품 예정이라고 하였다. 안기부는 북한측이 4월 15일 김일성 생일을 전후해 동구 공산권 또는 북한에서 기자 회견을 통해, 두 사람이 강제 납치된 게 아니라 북한사회 체제를 동경하다가 의거 입북하여 자유스럽게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듯이 위장 발표하려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지 2년 뒤인 1986년 3월 15일 최은희·신상옥 두 사람이 북한을 탈출했다는 소식이 일본 교도(共同)통신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이 날 교도통신은 그 동안 두 사람은 북한의 지원을 받아 동구권에 촬영소를 차려 놓고 영화 제작 활동을 해 오던 중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탈출, 12일 밤 빈을 거쳐 13일 현재 모처의 미국 대사관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17일 미 국무성은 두 사람을 보호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 두 사람의 북한 탈출이 마침내 사실로 확인되었다.
 최은희, 신상옥 귀국 기자회견. 1989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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