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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란 종교, 인종, 성별, 성 정체성, 성 지향성, 생물다양성[1] 등의 정파(政派)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하고, 해당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이익과 관점을 집중적으로 대변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링크
2. 기준
정체성 정치를 하는 집단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이 대변하는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서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구조적 차별, 억압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별받는 해당 정체성에 의거한 정치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권 확산 주장'과 '정치적 의견 대변'이 혼재하는 경우가 많기에 정치적 의견을 대변하는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정체성 정치와 그게 아닌 정치를 나누는 첩경은 "네가 속해 있는 집단이 무엇인가?"를 정치철학의 핵심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민족주의 단체, 조직화된 종교 단체, 페미니즘 등이 정체성 정치에 해당한다.
반면 "니가 속해있는 집단이 무엇인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는 정치이념은 그렇지 않다. 물론 사회 전체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면 집단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특정 정체성을 내재화할 필요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적이며 따라서 그 해석이 개인마다[2] 자유로운 개념이 된다. 정치나 종교적인 목적의 사상이라도 생태주의, 계몽주의, 채식주의, 자유주의, 이신론, 무신론 등은 정체성 정치에 해당하지 않는다.
3. 정체성 정치의 출현과 출현 원인
정체성 정치의 기원은 한 두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매사추세츠 대학 애머스트 캠퍼스의 명예교수인 Howard J. Wiarda에 따르면 적어도 70년대, 심지어 60년대까지도 소급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3] 일어난 68운동에 의해 촉발된 신좌파 세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신좌파 특유의 정치 행태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선, 1960년대에 세계 곳곳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책 실패로 인한 대규모 인명 피해, 또는 공산당에 의한 대량학살에 관한 소식들이 서유럽과 북미에 속속히 전해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서방 세계의 좌파 젊은이들 사이에서 조차도 공산주의,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했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기 시작하면서[4] 기존의 억압자-피억압자라는 서사는 유지한 채, 자본가와 노동자의 자리에 각 정체성을 넣은 것이라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4. 정체성 정치의 의의
시몬 드 보부아르[5]가 본인의 저서 《모든 사람은 혼자다 (Pyrrhue et Cineas)》를 통해 정체성 정치의 뿌리로 여길 만한 성찰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만들어가야 할 존재다. 각각의 자유들은 통일되어 있는 것도,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인간이 자기 주변에 다른 인간들의 위치를 잡아줌으로써 자기 위치를 정하는 것은 세계 속에 자신을 기투[6]함으로써다. 그리하여 연대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한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들과 두루 연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택이 자유인 이상, 그들 모두가 같은 목적을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프롤레타리아에 봉사하기로 한다면 나는 자본주의와 싸운다. 군인이 되면 자기의 적을 죽임으로써 자기 나라를 보호한다. 계급이나 국가가 어떤 통일된 성격으로 정의되는 것은 그들이 공동의 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이 없다면 무산계급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국가는 오로지 국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립을 제거한다면 총체성은 해체될 것이다. 그 집단은 뿔뿔이 흩어진 다수의 개인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정체성 정치가 필요한 것은 이 방법만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이 산산히 흩어져 무력하게 개인으로 존재하는 한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변화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고 여성은 각자 구시대적인 억압 속에서 살게 될 뿐이다. 여성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모여 하나의 단일 정체성을 구축하고 고정관념화가 된 성관념과 가부장제에 대한 투쟁을 펼쳐야만 비로소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체성 정치가 확실한 집단은 그만큼 정치적 무관심이 적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신의 집단을 지키고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정치를 활용하는 만큼 정치적 관심과 참여도를 높일 수 있다.
이 것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애기가 아니다. 이는 다른 소수자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만일 조선인들이나 아일랜드인이 억압적인 지배자에게 저항하지 않았으면 문화 통치나 아일랜드 자유국이 생길 수 있었을까? 남북전쟁 이후 노예였던 흑인들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을 대하는 백인이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흑인 차별은 계속되었다. 그 후 1970년대에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흑표당으로 대표할 수 있는 흑인들이 인권 운동으로 어느 정도 변할 수 있었다. 하단에 사람들은 정체성 운동이 없어도 세상은 변한다고 하지만 조선의 억압적인 식민지배를 반대하는 일본인이 있었고 남북전쟁 이전에도 노예 제도를 나쁜 것 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이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 다수의 각성을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을 이끌어 낼려면 소수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시오니즘이라는 유대인의 정체성 정치를 들 수 있다. 만약 시오니즘이 없었다면 지금 서구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허나, 이 문제에 정체성 정치의 폭주 사례로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인 학살을 들먹인다면 어불성설이다. 당장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서양 우파들이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에 대해 모순적인 입장을 취하는 지부터 생각해보자. 또한 팔레스타인인에 비해 유대인은 결코 소수자라고 보기 어려운 집단이며, 현재의 팔레스타인이라면 모를까 팔레스타인과 이슬람권 국가들도 이스라엘의 일방적 피해자들이 아니며, 팔레스타인 탄압 반대와 1국 2체제를 내세우는 좌파 시오니스트 또한 상당수 존재하기에 정체성 정치인 시오니즘 자체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 실제로 서구권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면 극우파로 욕 먹는다.[7]
민권운동가들이 지지하는 정체성 정치는 다른 집단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다. 실제 현대 서구 페미니즘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기존 백인 중상층 사회 뿐 아니라 더 다양한 집단과의 연대를 통해[8] 사회적 다수자나 우월적 지위에 있던 이들의 그늘에서 탈피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메갈이나 대안 우파에서 보이는 반대 집단에 대한 적대와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특히 알아둘어야 할 것은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은 아니며, 진짜 1~2%도 안되고 경제적으로도 별 볼일 없는 소수자의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워낙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사실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에 기반한 모든 사회 운동을 의미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마틴 루터 킹이 이끈 미국 흑인 민권 운동도 정체성 정치고, 장애인 당사자들의 이동권 시위도 정체성 정치고,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하는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범죄에 반대하는 캠페인도, 게이머들이 중독법을 반대하고, 게임사 상대로 트럭을 보낸 것도 정체성 정치다. 물론 한국에서 매우 빈곤한 '청년 정치'에 대해 논하는 것조차도 정체성 정치다. 일부 극단적 비판자들은 정체성 정치 그 자체를 부정하지만 이러한 모든 정체성 정치가 사라진 사회는 전체주의 국가 그 자체일 것이다. 혹은 모든 정체성 정치의 부정이야말로 사실 기존의 주류 다수자의 정체성에만 따르는 또다른 정체성 정치일 것이다. 실제로 이런 정치를 지향하는 국가가 바로 단일민족국가이다. 단일민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절대다수로 만들어놓고 그외의 정체성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사실 전체주의로 향하는 초기단계에 일어나며, 언제든지 전체주의화되고 이것이 극단화되면 파시즘으로 흘러가게 된다. 기존에 사회에서 "정상성"으로써 간주되는 다수자 주류 문화에서 "비정상성"으로 타자화되는 소수자의 것들을 끌어올리려는 정체성 정치에 대해 모든 것을 부정한다면 결국 다수자만 정상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일되는 전체주의 체제가 완성될 수 밖에 없다.[9]
정체성 정치에 대해 공포감을 가진 사람들은 "억만장자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과 저소득층 백인 남성 중 누가 더 억압받고 있는가?",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명문대를 다니는 여성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저임금 노동으로 연명하는 남성 중 누가 더 억압받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타협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고 주장하나 이건 지나치게 극단적인 비교이다. "전통주의적 아시아인들"들에게 성소수자들이 각종 차별 당할수도 있고, 억만장자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흑인이 "히스패닉 경찰"에게 인종차별을 당할 수 있고,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며, 중산층 가정에서 명문대 출신인 백인여성도 "유색인종 남성"에게 여성혐오에 노출될 수 있으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국민의 절반"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아시아인 그것도 연약한 노인이나 여성이라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흑인 남성"에게 길거리에서 증오범죄를 당할 수 있고, 빈곤한 노동계급 백인이 "아시아계 고용주"에게 노동 착취를 당할 수도 있다. 이는 서로 대립되는 문제가 아니다. 즉, 정체성 정치에서 말하자는 것은 개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열 나눠서 대립하자가 아니라 각 정체성 때문에 차별 당하는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았으면 당하지 않았을 차별이나 부조리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얘기하지 말자는 것이야말로 되려 억압적이고 극단적이다. 결국 이러한 경우 '가해자의 정체성'이 아닌 '피해자의 정체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기에 정체성을 얘기할 수 밖에 없고 이런식으로 해석할 경우 정체성 간의 충돌이 발생할 여지는 (차별과 차별이 충돌하는 극히 예외적 상황이 아닌 한) 적다. 최소한 특정 정체성에만 함몰된 TERF나 흑인 우월주의급 극단주의자가 아닌 한 아무도 가해자의 다수자로써 특권적 위치가 아닌 소수자적 정체성을 얘기하며 우열을 나누지는 않는다.
보호를 받지 못해서 권리보호를 위해 이러한 정체성 정치로 흘러가기도 한다. LA 폭동의 한인사회가 이 사례이다. 미주한인들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됐는데# 초기 미주 한인들은 개개인들의 성공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굳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인사회가 뭉쳐야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이들이 원하는건 아메리칸 드림, 즉 자수성가였다. 그러다가 LA 폭동당시 LA 경찰의 노골적이고도 의도적인 방치[10]로 인해서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되면서 집단으로 뭉쳐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무시당할 뿐이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된다.
5. 정체성 정치의 한계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라기엔 너무 큰 집단이 피해의식을 주입받게 되면 지나치게 극단화한다.
세상엔 인종, 국적, 문화, 제도, 성별, 노동 등 수많은 정체성이 존재한다. 정체성 정치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본격적인 정체성 정치에선 "무수하게 많은 소수자적 정체성 중 어떤 정체성을 보호해야하는가?" 등의 정치적 문제가 발생시 각 집단 간에 타협이 불가능한 첨예한 대립이 발생한다. 단적인 예로 "억만장자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과 저소득층 백인 남성 중 누가 더 억압받고 있는가?",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명문대를 다니는 여성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저임금 노동으로 연명하는 남성 중 누가 더 억압받고 있는가?"와 같은 모순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에서 패배 시, 해당 정체성 집단은 자신의 정의관념과 상식 선에선 이해할 수 없는 정체성 보호 활동을 목도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 이 모순에 공감하는 자는 해당 파벌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하게 되며 극단적이고도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록 더욱 추앙받게 된다. 계속 극단주의화되는 정체성 정치집단의 특성상 후대에 선지자로까지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정체성 정치가 반드시 극단주의와 결부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정체성 정치를 하는 사람들 중에 극단주의를 막고자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라고 해도 침묵하는 다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자기들이 극단적이라고 낙인찍히기 싫다면 스스로 극단주의를 배척하는 등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하는데, 일부 정체성 정치 집단에서 보이는 닫힌 사회 현상[11]을 보면 이런 노력은 커녕 문제를 인식한 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한편 바로 이렇기 때문에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공통점을 찾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집단으로 분열되고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재구성된다. 불행히도 그 주동자는 거의 반드시 성별이나 인종 종교와 같은 변경이 힘들고 그 범주가 넓어 상당한 힘을 이미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다. 그래야 정치에 의미있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변수 만으로도 깨어질 수 있는 가변적 정체성이나 수가 너무 적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메이저한 정체성 정치단위에 이용당할 가치가 있는 경우가 아닌한[12] 적대적인 사회담론 풍토의 결과 더욱 철저히 소외된다. [13]
결국 정체성 정치 집단은 지속적으로 "선민의식", "피해의식", "배타성" "공격성" "인간성 마비" 등을 주입시키는 것에 특화하는 방향으로 진화된다. 이런 극단주의화가 계속 진행되면 "모든 자신의 정체성은 영구적으로 약자이고, 강자에 대한 혐오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우리에 대한 비판은 모두 기존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자들의 백래쉬(backlash)에 불과하다." 라는 반성의 포기 단계에 이르게 되며, 그 끝은 이상적이게는 균등하게 배분된 권력을 바탕으로 한 적대적 공생상태에서 사소한 계기[14]로 생기는 개별사건들을 정체성 집단간 권력투사와 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디스토피아가 그려질 뿐이다. 그 역시 이상적인 경우에나 해당하는 것으로, 적대적 입장의 과두제는 정변이나 내란급의 분쟁을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결국 그 끝은 편집증적인 특정 이데올로기 집단이 행정과 사법체계를 장악한 후 보호 정체성 외 모든 정체성을 린치하는 전체주의 국가로 발전될 수 밖에 없다고 비판자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양상이 모든 형태의 정체성 정치에서 동일하게 발현하는 원인은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인 "부족주의"이다. 어떤 인종이나 성별을 가해자로 설정하는 것은 곧 적대부족으로 인지하는 것이고 매번 피해를 입는 피해자인 우리 정체성은 같은 부족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전개양상도 인종주의건 공산주의건 페미니즘이건 흑인 정치운동이건 사상은 달라도 그 양상은 특별히 다를 수 없다.
정체성 정치를 옹호하는 SJW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다수자'라고 불리던 이들이 되려 피해의식을 가지며 그들에 맞서면서 성장한 것이 바로 대안 우파다. 이 점에서 극단화된 정체성 정치는 대안 우파와 다를 바 없게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15] 대안 우파의 특징 중 하나인 집단주의는 결국 극단적 정체성 정치의 집단주의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이는 집단이 세분화되었을 뿐이지 결국 기존의 집단주의와 전체주의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또 '정체성'이라는 게 집단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다. 가령 인종이나 성별 같은 경우에도 결국 그들을 억압하는 일부 다수자들에 의해 '같은 정체성'으로 묶일 뿐이지 세부적으로 보면 그 정체성만 같고 나머지는 생판 남남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을 같은 정체성으로서 연대 대상이나 같은 집단에 소속된 동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이다. 이는 집단주의로 흐르기 매우 쉬우며 애초 '정체성 정치'를 표방한다는 소수자 인권 단체에서 그 소수자 전체에 명령하거나 대표할 권한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체성을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함으로서 '모든 소수자 혹은 그들의 대표 단체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오해를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다수자 전체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억압하는 게 아님에도에도 정체성 정치 옹호자들 상당수는 다수자 역시 정체성 집단으로 엮어 연좌제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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