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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는 대중을 매료시켰고 대중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광장의 함성과 박수 속에서 유대인 600만 명고 장애인 수십만 명, 국적 없이 떠돌던 100만 명의 집시족들이 죽어갔다. 독일은 이렇게 홀로코스트로부터 법치주의의 소중함을 배웠다. |
분단국의 운명
“건전한 사회는 보수와 진보, 양날개로 날아야 한다.” 옳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분단된 나라에게는 ‘독’이다. 진보와 종북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 말은 종북세력의 방패막이요 온상이다. 통진당은 민주당을 숙주로 정치권에 입성했다. 통진당원이 더불어민주당의 도움으로 20대 국회에 무소속으로 진출한 것도 사실이다.
서독과 베트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국이었다.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였으며 동독이나 월맹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하지만 독일은 서독의 주도 하에 자유민주통일을 이뤘고 베트남은 적화통일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분단국 베트남의 민주주의가 헌법을 수호할 의지와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서독의 차이다.
베트남의 여린 민주주의는 헌법을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킬 만한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서독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헌재와 헌법수호청이 나섰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74년 서독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평화무드에 빠져 있었다.
안보는 뒷전이었고 ‘접근을 통한 변화’가 대동독정책의 주류였다. 이런 가운데 헌법수호청과 검찰은 총리실에서 암약하던 귄터 기욤을 체포했다. 브란트는 안보 무능을 인정하며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49년 독일 분단 직후 서독, 극우 및 극좌파 정당이 출범하며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특히 1949년 10월 2일 창당한 사회주의제국당(SRP)은 네오나치를 표방하며 나치의 영광을 재연하려 안간힘을 다했다. 제국당은 나치당원들을 영입하며 당시 자민당 당원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4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기도 했다. 히틀러 정권 때 청소년기를 겪었던 자들이었다.
제국당의 불법은 헌법수호청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연방헌재는 1952년 사회주의제국당을 해산시켰다. 마찬가지로 헌법재판소는 1956년 독일공산당(KPD)에게 위헌 판결을 내리고 정당해산을 명령했다. 헌재는 2016년 이 시점에도 독일민족민주당(NPD)에 대해 위헌 여부를 심사하고 있다. 이러니 비록 좌파당이라는 정당이 등장해도 초법적, 반헌법적 활동을 절대로 하지 못한다.
서독은 통일 전 동독과 6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1, 2차 정상회담은 1970년 브란트 총리 하에서 동독 에어푸르트와 서독 카셀에서 열렸다. 3차 정상회담은 슈미트 총리가 동베를린을 방문해 호네커 총서기를 만났고 4차 정상회담은 호네커가 본을 방문해 콜 총리와 개최한 회담이었다.
1~4차까지의 회담은 예외 없이 분단 이슈가 의제가 되었다. 국경지대에 설치한 기관단총 철거, 양독 시민들의 상호 방문 확대, 베를린-서독 간 동행협정, 노약자 및 만성질환자의 서독 이주, 정치범 석방, 재야인사들의 서독 이주, 청소년 상호 교류 및 방문, 저널리스트 상호국 주재, 방송 교류 등과 같은 이슈들이 합의되었다.
5차 회담은 1989년 12월 19일 동독 급변사태 직후 콜 총리가 드레스덴을 방문하며 이뤄졌다. 당시 호네커가 당에서 축출되고 후임 크렌츠에 의해 임용된 모드로프 총리의 제안으로 드레스덴 연설 직후 성사되었다. 이 회담은 최초로 의제 속에 통일 문제가 포함된 회담이었다. 그리고 6차 회담은 동독 내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드메지어 총리와의 회담으로 그야말로 통일협상이었다.
우리의 1차, 2차 정상회담이 ‘통일’을 의제로 다루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 ‘NLL’ 등 초헌법적 사안을 논의했던 것과 대비된다.
에곤 바(Egon Bahr)의 추종자
에곤 바는 동방정책의 설계자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핵심 브레인이다. 그는 동서독 이질적 체제 간 기능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전략가이다. 에곤 바는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rung)를 모토로 내걸고 동독과의 관계 개선과 교류 협력을 강화해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했다. 동독의 호응도 대단했다.
하지만 헌법수호청이 고정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던 귄터 기욤을 체포했다. 국민은 안보에 무능한 브란트 정권을 거부하게 되었고 결국 브란트는 1974년 총리직을 사퇴해야 했다. 에곤 바의 설계 도면에는 없었던 일이다.
브란트의 후임에 같은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선출되었다. 1974년 선거에서 득표율 2위를 차지했던 사민당(SPD)이 1위인 기민련(CDU)을 제치고 제3당이었던 자민당(FDP)과 연정에 성공해 총리에 올랐다. 슈미트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이어갔지만 1978년 소련이 동독에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자 미국의 핵미사일 퍼싱 II를 서독에 배치하는 공세를 펼쳤다.
당시 유럽에는 평화운동이 대세였으며 서독에도 30만 명의 평화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에곤 바는 슈미트가 “동독을 협박하는 전쟁 상황”을 조장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99년 5월 17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도 슈미트의 결정은 “왜곡된 사고의 상징”(ein Symbol der Perversion des Denkens)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에곤 바의 실체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드러났다. 빌리 브란트는 장벽이 붕괴되던 날 발터 몸퍼(Walter Momper) 베를린 시장의 전화를 받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베를린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에곤 바는 언론의 질문에 당일 브란트와 동행했다고 답변을 했지만 거짓이었다.
독일의 주요 일간지 디 벨트가 2014년 “Wo war Egon Bahr nach dem Fall der Berliner Mauer?”(에곤 바는 장벽 붕괴 직후 어디에 있었나?)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에곤 바가 1989년 인터뷰에서 “브란트와 함께 베를린행 비행 중”이었다고 답변했던 사실이 거짓말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브란트와 동행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실렸다. 에곤 바가 베를린 장벽 붕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브란트를 배신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민당 내 극좌파인 오스카 라퐁텐 편에 붙어 통일에 반기를 들었다.
몸퍼의 전화를 받은 브란트는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하며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Jetzt wa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ort”(함께 태어난 것이 이제 함께 자라게 되었다)라는 명언은 그 때 남긴 것이다.
김영희 중앙일보 기자는 에곤 바의 열렬한 추종자이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했을 때도 ‘핵동결과 평화협정의 교환’이 해답이라고 썼던 인물이다. 김 기자는 그의 책 <베를린 장벽의 서사>에서 에곤 바의 이런 행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언어 장벽 때문에 관련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거나 그의 성향으로 보아 이런 자료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책에는 에곤 바의 동방정책을 맹신하는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19대 국회 외통위 위원장을 지낸 나경원 의원도 에곤 바의 열렬한 팬이다. 나 의원은 ‘접근을 통한 변화’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며 2015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과 5.24 조치를 뛰어넘는 전면적인 경제협력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과연 이들이 에곤 바의 이런 행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런 발언을 했는지 의아하다. 그리고 5차 핵실험과 다종의 미사일을 발사하며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지금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다. 에곤 바야말로 머리로는 통일을 원했지만 가슴으로는 동독에 깊은 애정을 갖은 인물이다.
대한민국은 분단국이다. 주요 이슈들이 북한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헌법을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회복하는 일이 그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첫댓글 2017년 삼재띠의 경우,
양.
돼지.
토끼.... 3가지 띠입니다.
해당 없으시죠.
독일은 홀로코스트로부터 법치주의의 소중함을 배웠다.
이 교훈이 1949년 기본법에 담겨 있다.
기본법 20조는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과 함께...
“국민은 선거를 통해 행정, 입법, 사법 등 삼권을 창출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정하고 있다.
국민이 권력을 삼권에 위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