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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도시현실
전시기간 : 2023.05.25.-2024.08.04.
평일(화–금) 오전 10시–오후 8시
토 · 일 · 공휴일 하절기(3–10월), 오전 10시–오후 7시
동절기(11–2월), 오전 10시–오후 6시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 가나아트컬렉션전시실
관람료 : 무료
도슨트 안내
ㅇ 도슨트 운영 일정
- 2023년 11월 21일 ~ 2024년 8월 4일
※ 미술관 휴관일, 월요일, 성탄절(12/25), 설 연휴 기간(2/8~2/12)에는 운영하지 않습니다.
ㅇ 운영 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에 2층 전시장 입구에서 가나아트 컬렉션 및 천경자 컬렉션 도슨트 전시 해설이 시작됩니다.
ㅇ 서울시립미술관 도슨팅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으시면 무료 전시 해설 서비스를 상시 이용 가능합니다.
※ 구글플레이 또는 애플 앱스토어에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도슨팅” 앱을 다운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전시부문 : 회화, 사진, 조각
전시장르 : 기획,상설
참여작가 : 권순철, 김정헌, 김호득, 민정기, 박인철, 서용선, 신학철, 심정수, 오경환, 오치균, 이상국, 이흥덕, 전민조, 전수천, 정강자
작품수 : 21점
주최 및 후원 :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문의 : 이송은 02-2124-8974
관람문의 : 안내 데스크 02-2124-8868
전시 안내
《80 도시현실》은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한국의 현실을 가나아트 컬렉션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을 통해 다각도로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가나아트 컬렉션은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200점의 작품군으로 1980-90년대 한국의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민중미술 및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1960-7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도시화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지만, 빛나는 성장의 이면에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존재했습니다. 근로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하고, 농촌 경제는 쇠락하며 이촌향도 현상은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강남개발, 중산층의 등장, 수입자유화 등으로 인해 도시를 중심으로 소비문화의 발달이 가속화됩니다.
이러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당대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시각과 방식으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현실 인식의 여러 양상을 ‘도시화의 이면’, ‘도시인’, ‘도시를 넘어 - 생명의 근원’의 세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차원의 현실을 당대를 살아갔던 예술가의 눈을 빌려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당시의 문제의식과 고민이 40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숙고할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파트1. 도시화의 이면
1980년대 도시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과 부조리는 당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표출되었습니다. 민중미술 1세대 소집단 ‘현실과 발언’을 포함한 민중미술 진영은 도시 개발, 외래문화 수입, 무분별한 소비문화 확산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습니다. 또한 민중미술 운동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동시대 도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한 작가들이 다수 존재했습니다.
이상국, <마을>, 1981
이상국은 소박한 풍경과 평범한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온 작가입니다. 1970년대에는 산동네, 공장지대 같은 주변부 풍경을 작품으로 담아내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 말부터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 주목하고 시대의 아픔을 투영한 인간의 형상을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을 평면적으로 구성하고 마르고 거친 붓질을 통해 질감효과를 주어 팍팍한 서민들의 삶을 체감하게 합니다. 한편 1980년대 도시에서는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되고 지하철, 고속도로 등 끊임없이 새로운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개발 공사로 지어지는 화려한 아파트는 가난한 서민들에게 현실의 주거공간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 도시 외곽으로 내쫓기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작가는 이와 같은 생활 주변의 구체적인 현실 모습을 절제된 감정과 독창적인 조형 정신으로 담담하게 화폭에 그려냈습니다.
전민조, <명동>(1980), <을지로 2가>(1976), <명동>(1989), <종로 5가>(1978)
보도 사진계에서 30여 년간 활동한 전민조는 다양한 삶의 현장과 순간들을 포착해왔습니다. 1960년대 후반 작가는 도시와 사람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를 말해준다고 생각하여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 사진은 1970-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며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서울 도심을 기록한 사진들입니다. 을지로 2가의 만원 버스에 손님을 태우는 버스 안내양의 모습, 명동 길 한 가운데에서 구걸하고 있는 걸인과 그 옆을 바쁘게 걸어가는 행인들의 모습, 서양의 명품거리를 연상시키는 백화점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삼삼오오 모여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피카디리 극장에서 상영 중인 <007 유어 아이즈 온리>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을 통해 당시 서울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백화점과 영화관의 번화한 모습을 통해 서울에 소비문화가 상당 수준 발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정헌,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럭키모노륨>, 1981
김정헌은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결성에 주도적 인물로 활동하면서 민중미술의 대표 주자로 발돋움을 하였습니다. 그는 1980년대 초반부터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물, 도시화, 분단 조국의 상황을 주요 소재로 다루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노동자, 땅, 흙, 농민, 자연 등의 소재를 민중의 삶과 연결시키며 현실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작업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이 작품의 화면은 당시 도시의 풍요를 상징하는 아파트 바닥재인 럭키모노륨의 광고를 차용한 것입니다. 정교하게 묘사된 거실의 세부, 화려한 색채의 모노륨 바닥과는 대조적으로 화면 하단은 논바닥에 모를 심고 있는 농부가 투박하고 거칠게 터치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구도는 여타의 김정헌 작업에서도 발견되는 구도로서, 현대사회가 야기한 갈등과 모순의 이중구조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방식입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도시와 농촌의 불균등한 발전과 생활의 이질성, 소비와 생산의 불일치 같은 사회 문제를 부각시키고, 여전히 산업화와 도시화가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대중에게 주입하는 당시 세태를 풍자하고자 하였습니다.
신학철, <변신 5>, 1981
1980년대 초반 민중미술 진영에 합류하여 작업을 지속해 온 신학철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미시적으로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개인의 고통과 마주하고자 했습니다. 관념적인 역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로서 민족의 수난사를 다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마치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는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줍니다. <변신> 시리즈는 신학철이 1970년대 후반부터 작업한 주제로, 경제 성장과 함께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대량 생산과 소비 사회로 변화하는 시대와 물질주의와 소비문화에 지배당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작업입니다. 모노톤으로 그려진 기괴한 형상은 얼핏 보면 사람 얼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캔, 신발, 요구르트 병 등 여러 가지 상품 이미지들이 결합해 변형된 것입니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제트기와 땅 속에서 튀어나온 손의 이미지는 전쟁이 휩쓸고 간 삭막한 폐허를 연상시킵니다. 대중 소비문화 속에서 외래문화는 보다 가볍고 쉽게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고,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지배합니다. 신학철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작품을 통해 시각화함으로써 보는 이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신학철, <상황 812>, 1981
인체와 기계, 산업문물 등이 하나의 몸에 덩어리와 같은 형상으로 집약되어 묘사된 작품입니다. 이 덩어리는 화면 하단부의 땅을 지탱하고 있는 인간의 발에서부터 시작해 현대 물질문명이 양산한 공산품인 가스통, 알약, 통조림 캔, 야쿠르트 병과 같은 플라스틱 용기들과 기괴한 동물, 기계 부속품들이 뒤섞여 있으며, 이는 화면 상단부의 오토바이와 결합된 인간의 팔과 가슴까지 이어집니다. 좌측 상단에 등장하는 야마하 오토바이, 우측 중앙의 스카시 오렌지주스 상표는 의도적으로 상품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대량 소비 사회의 물신성을 풍자합니다. 작가는 다양한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충돌하는 이러한 광경을 두고 ‘현실 그 자체’라고 역설했는데, 화면 중앙 비눗갑 뚜껑 위에 쓰인 ‘인계(人界)’는 이 풍경이 곧 인간 세계의 현실임을 각인시킵니다. 이처럼 다양한 도상들의 결합이 하나의 형체를 이루는 표현은 이후 신학철 작업의 중요한 근간이 됩니다.
파트2. 도시인
1980년대 도시를 살아간 예술가들은 도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도시적인 감각으로 작품들을 그려내었습니다. 도시는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장소였습니다. 급속한 도시 개발로 인하여 소외된 개인의 불안이나 유학 생활 중 낯선 타지에서 느낀 고독을 다룬 작가들이 있는 반면, 도시를 자신의 당당한 활동무대로서 인식하거나 도시의 세련된 미감에 영감을 받은 작가들도 존재하였습니다.
이흥덕, <잠자는 도시의 정오 사이렌>, 1985
이흥덕은 도시 사회의 일상적인 장소들을 통해 현대인의 삶의 모습과 그 안에 내재한 욕망, 불안, 상처와 같은 이면을 풍자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가 보여주는 도시 풍경은 술집, 카페, 거리, 신도시, 지하철 등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이 있는 공간입니다. 이 작품은 민방공 훈련 사이렌이 울리는 정오의 서울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남산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바라본 장면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빌딩과 주택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전반적으로 파란 색조를 사용하여 얼어붙은 듯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도시의 긴장감을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좌측 상단에는 당인리 발전소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라 도시를 뒤덮고, 우측 하단에는 붉은색 길 위에 한 여성이 검은 개에 의하여 쫓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작가는 여러 시각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도시의 불안과 부조리함을 표현하였습니다.
서용선, <거리>, 1994
1980년대 초반 자연을 소재로 작업하던 서용선은 1980년대 중반부터 도시인 시리즈를 그렸는데, 이 작품들에는 급속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불안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화면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고층 건물들을 배경으로 하여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붉은색과 노란색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표정은 무뚝뚝하고 무표정하게 보이면서도, 뭔가에 매혹당한 듯 오묘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예술계에서 절제된 색채미가 강조되던 시기에 의도적으로 과도한 색채와 붓놀림을 강조한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밀집된 현대 도시건축 공간 속에서 억압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담아냈습니다.
전수천, <빛의 소멸>, 1989
전수천은 결코 어느 한 분야에 구애받지 않고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퍼포먼스, 대형 프로젝트 등 다방면으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해왔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일식’ 혹은 ‘월식’을 의미하는 영어 ‘이클립스’로 태양을 가린 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인간상은 소용돌이처럼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자연에 둘러싸여 어딘가를 우두커니 응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무렵부터 드로잉과 유화로 발표한 ‘행성’시리즈에도 동일한 소재와 인간이 등장하고 있어 표현 형식이 다르더라도 개념상 유기적인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붉은빛과 어두운 빛의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공간 속에서 익명의 인물은 개기 일식이 일어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태양빛의 타는 듯한 붉은빛을 그대로 얼굴에 비추고 있습니다. 대자연의 불가항력적인 섭리 속에 서 있는 인간은 담담히 그 상황에 순응하며 자신의 실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박인철, <독일의 밤>, 1987
독일에 거주했던 박인철의 실존주의적 회화 작품 중 하나로, 색채와 화면 구도, 거친 붓질 등에서 독일 표현주의로부터의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붉은 얼굴의 남성과 뒤쪽의 쓰러질 것처럼 기울어진 벽돌색 건물, 강렬한 노란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검은 개의 형상은 매우 고독하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또한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곁눈질하는 인물의 표정에서 방황하는 자의식과 불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유럽 한복판에서 동양인으로서 살아가는 작가의 감정을 대변합니다. 작가가 표현한 고독, 불안, 방황의 감정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지만, 정주민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현대인들에게 공감대를 얻기에 충분합니다.
오치균, <인체>, 1989
오치균은 뉴욕에서 유학했던 1980년대에는 인물을 소재로 하여 억눌린 현실 속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감정을 응축하고 있는 표현주의적인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인체> 시리즈는 유학 시절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던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오치균은 아내에게 자신의 누드 사진을 찍게 한 후 그것을 재해석한 형상을 캔버스에 담아냈는데, 어두운 방 안에 웅크린 나체의 인물에는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두려움, 고독, 불안, 좌절 등의 감정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축 쳐져 있는 남성과 바닥으로 흐르는 아크릴 물감의 마티에르는 고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작가의 상황과 심리를 시적으로 암시합니다. 결국 그는 빈곤을 이기지 못하고 귀국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리즈는 그에게 성공적인 전시와 화단의 호평, 화랑과의 전속 계약 등 작품 활동의 활로를 열어 준 고마운 작품이 됐습니다.
오경환, <정물>, 1990
오경환은 한국 공공 미술 1세대 작가로 캔버스 안팎을 넘나드는 작업에서 화면의 견고한 균형과 건축적 구조를 중시합니다. 1970년대 파리 유학 시절에 제작한 다색 목판화 <거리> 시리즈에서 그는 대도시 생활의 정서를 대담한 색면 구성의 대비와 동양적 필선을 결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평면 안에서 강렬한 색채와 해체된 원근법, 거친 선과 두터운 질감 등 여러 회화적 요소들이 충돌하면서 이루고 있는 균형을 보여 줍니다. 작가는 정물, 인물, 거리 풍경 등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이와 같은 회화적 조형을 탐구해왔습니다. 그의 작품 안에서는 신표현주의적인 원색들과 동양적 필선이 자유롭게 결합됩니다. 그는 원근법에 의한 자연주의적 재현을 배제하고 오히려 추상에 가깝게 대상을 생략하거나 과장합니다. 이러한 오경환의 회화는 빛나는 도시의 세련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고독한 도시의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정강자, <명동>, 1973
정강자는 1960-70년대에 미술 집단 ‘신전(新展)’과 ‘제4집단’에 속하여 활동하면서 퍼포먼스, 해프닝, 조각 등 다양한 실험적 방식으로 사회적 발언을 하였습니다. 특히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 행위 예술과 여성의 몸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통하여 기성 체제에 도전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위 예술에 대한 당국의 감시가 심화되면서 1970년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무체전(無體展)》이 강제 철거되는 등 작품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작품의 화면 중앙에는 상반신을 탈의한 작가가 화구를 들고 당당한 표정과 자세로 번화한 명동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명동은 정강자가 1960-70년대에 주로 활동하며 다른 작가들과 교류했던 곳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였습니다. 작가는 1970년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체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였습니다.
파트3. 도시를 넘어 - 생명의 근원
민중미술 진영의 작가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도시 문제와 농촌 파탄의 현실을 고발하는데 집중하였는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농촌 문화를 민중의 정체성으로 파악하게 되면서 농촌과 자연이 지닌 생명력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 외에 민중미술 계열에 속하지 않았던 작가들도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강인한 민중의 역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심정수, <일어서는 여인>, 1990
심정수는 1980년대에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민간 신앙과 샤머니즘, 그리고 농민들의 삶과 같은 한국적 조형의 본질을 탐구하였는데,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작가의 관심은 자연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는 농촌과 자연에서 한국의 조형미를 찾았으며, 특히 인체 조각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이 작품에서 심정수는 여인의 신체를 마치 나뭇가지가 뻗은 모양처럼 형상화하고 소나무 껍질 같은 질감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심정수는 일부러 서툴고 거칠게 인체를 표현한 조각들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금 직시하게 만듭니다.
이상국, <나무>, 1991
구불구불 엉킨 나뭇가지들이 함께 모여 이룬 단단한 나무 둘레는 우리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인고의 세월을 겪어온 자연을 상기시킵니다. 높은 나무를 아래에서부터 우러러보는 화면 구성은 동양 전통화법인 고원법을 운용한 것으로 동양화를 전공했던 작가의 소양이 서양화로 전환한 후에도 다채로운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상국은 뒤틀린 모습의 상처투성이인 나무를 통해 민중의 아픔과 상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음을 고백한 바 있는데, 오랜 세월 자신과 투쟁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나무의 형상과 터져 나오는 기는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자연주의적인 추상의 진수를 보여 줍니다.
권순철, <용마산>, 1977
권순철은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거친 붓칠, 두꺼운 마티에르, 뭉개진 형상, 탁한 색조를 통해 표현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는 주로 ‘산’과 ‘얼굴’, 그리고 ‘넋’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삶의 애환을 표현했는데, 이 세 가지 주제는 초기 작업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용마산> 시리즈에서는 새롭고 신선한 것이 아닌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 권순철의 작업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산은 인류의 그 어떤 것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한국의 수많은 산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 형세를 화폭에 담아왔습니다. 해발 348m의 ‘용마산’은 서울과 경기도를 경계 짓는 아차산 줄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그가 선화예고에 출강하며 매일 바라보던 곳이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려진 용마산은 아름답고 웅장한 산세보다는 산의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있을 역사의 상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작가는 산과 함께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소재로 삼았는데, 커다란 상흔을 간직한 채 묵묵히 시대를 지나온 산은 한국 근현대사를 몸소 겪으며 꿋꿋하게 살아온 민중의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김호득, <폭포>, 1988
김호득은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실험해왔습니다. 초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작품은 산, 폭포, 꽃, 계곡 등 전통적인 수묵산수의 소재와 형상을 공유하지만, 작가의 역동적인 몸짓을 상상하게 만드는 거친 붓 놀림의 흔적들은 사의(寫意), 사실(寫實)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실경에 바탕을 둔 관념, 관념을 품고 있는 실경 사이를 오가며 거친 붓놀림만큼 기존 수묵 산수화에 대한 강한 반발과 대결의지를 엿볼 수 있는 필묵의 실험을 보여주었습니다. 폭포는 김호득 작품의 대표적인 소재로, 운필의 생생한 자취와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은 몇 개의 굵은 먹 선만으로 폭포를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폭포 양 옆의 암벽에 그어진 농묵이 물살의 속력을 체감케 합니다.
김정헌, <땅 미륵>, 1992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촌여인을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보살’에 비유하여 그린 것으로, 제목이 암시하듯이 땅, 미륵, 여인은 서로 동일한 존재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전작들에 등장한 농촌여인이 마을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져 그 의미가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김정헌은 ‘흙’을 순수한 생명이 만들어지는 원천으로 여기며 땅과 흙이 통합된 세계를 꿈꾸었는데, 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질경이 옆에서 또 다른 생명을 심고 있는 여성은 강력한 ‘생명’의 메타포, 그 자체로서 그의 이상적인 세계관을 실현시키는 도상으로 등장합니다. 비록 땅은 인간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온갖 갈등과 반목의 씨앗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여전히 땅은 민중을 지켜주는 존재이자, 지켜 나가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민정기, <오대산 오대도>, 1996
민정기는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1980년대 도시의 풍경과 대중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모순에 주목하여 사회 비판적인 현실 인식을 화면에 담은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조선 중기 산수화에서 자주 쓰이던 구도인 부감법과 고지도의 조감법의 구도를 적용하여 오대산을 그린 작품입니다. 푸른색의 산줄기는 산의 정기를, 그 사이를 흐르는 흰색의 물줄기는 오대산의 기운생동하는 근원을 힘찬 필치로 시각화합니다. 실제 장소를 답사하여 그린 이 산수풍경은 “직접 찾아가면 산과 물뿐 아니라 사람, 역사, 설화 등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작가의 언급처럼, 가시적인 대상뿐 아니라 비가시적인 세계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민정기는 전통적인 형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세상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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