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조씨 세보(족보)는 영조7년( 1731 신해)에 歸鹿公(휘 현명)에 의해 경상 감영에서 창간보가 발간된 이래 모두 6차례 발간 되었다.
신해보 이후 영조36년(1760 경진)에 영호공(휘 엄)이 중간 경진보를 경상 감영에서 간행 하였으며, 뒤 이어 영호공의 손자인 운석공(휘 인영)이 순조26년(1826 병술)에 다시경상 감영에서 3중간 병술보를 간행하였으니 이상 3차례에 걸친 세보 인쇄는 목판 인쇄로서 인쇄 당시 쓰이었던 보판의 판목 674장과 이 보판을 보관하는 보각은 현제 경북지방 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어 상주시 남장동 376 소재 조씨 보각에 보관되어 보존되고 있다.
4중간 경자보는 서울에서 고종37년(1900 경자)에 간산공(휘 병필)에 의해 활판 인쇄로 간행 되었는데 이상 4차례에 걸친 세보 발간 사업은 조선시대에 행해진 세보 간행 사업이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6.25를 지난 후 1978년(무오) 현 대종회의 전신인 풍양조씨 화수회(회장 조정구)에서 5중간 무오보를 4.6배판 양장 활판본으로 간행하니 부피가 6,000여 페이지에 달하여 전 7책으로 편집 하였다.
이어 6 중간보는 2006년12월 풍양조씨 대종회(회장 조숙연)에서 전례에 따라 옛분들의 기록은 구보를 기준 하였고 새로이 출생한 자와 구보에 누락 되었거나 혼인으로 인해 새로이 입록해야 할 사람과, 별세나, 신분상의 변동등을 추가 입록 하니 12,000여 페이지 달 하였으며 이를 전 8권으로 발간 하였다.
세보나 문집등의 발간에는 반드시 서문과 발문이 씌여지게 마련이고 또 새로 발간되는 세보에는 당해분 서.발문외에 기 발행된 전보의 서.발문도 함께 순서대로 인쇄하기 마련이다.
우리 풍양조씨 세보는 국내에서 발간된 모든 성씨의 세보중 가장 우수한 세보로 세평이 나 있어 세인들의 이목을 받고 있다.
몇해전 어느 족보 연구가로 부터 우리 신해 세보의 서문에 관해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수준 있는 질문이라 종인들에게소개 하는 바이다.
질의 요지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약 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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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요지>
신해보는 1731년에 간행 되었는데 서문은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명곡(明谷)최석정(崔錫鼎)이 1678년(무오)에 쓴 문장이다.
세보 간행 시기 보다 서문이 53년이나 먼저 씌여 졌다.더구나 촤석정은 숙종41년(1715)에 별세한 분으로 세보가 간행된 신해년(1731,영조7)은 최석정 사후 16년에 해당한다.
시차가 찬술한 사람의 생존 기간을 경과 하였다.이해가 되지 않는다.
잘 못된 것이 아닌가?
<시차가 발생한 곃위>
1.핵심 설명에 앞서 우선 신해보에 쓰인 서문이 실제로 명곡 최석정이 지은 서문인지 여부 부터 알아 볼 필요가 있으며 사실이라면 질문요지 처럼 왜 그렇게 시차가 생겼는지 알아 봄이 순서일 것이다.
2. 최석정은 인조 24년(1624) 출생 하여 숙종41년(1715)까지 생존한 분으로 숙종 년간에 영의정을 지낸 실존 인물 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태두인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영의정 역임)의 손자 되는 사람으로 최석정은 서문을 쓴 시기를 저옹돈장(著雍敦牂) 중추라고 서문 말미 에서 밝히고 있는데 저옹돈장이란 태세를 이르는 옛날 말로서 古甲子의 무오(戊午)를 가리키는 말이다.최석정 생존 당시 무오년은 1678년에 해당 한다.
3. 최석정은 서문에서 이 서문은 趙始鼎( 醉水亭)형제의 의뢰를 받아 본인도 趙氏의 외손이라 수락 하고 서문을 짓는다고 밝 혔다.
4. 취수정 趙始鼎)공의 생몰 년대는 1624~1706년으로 최석정과 동 시대 인물이며 최석정이 신해보의 서문을 쓴 1678 년 당 시 취수정공은 생존 인물 이였다
5. 취수정공의 세보 방주에는 "先世譜牒之訛誤精力修正傳于家".란 기록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최석정에게 세보 서문을 의뢰하여 최석정으로 부터 전해 받은 서문을 보관 하였다가 자손에게 물려 주었음을 알수 있다.
6. 보다 확실한 증거는 신해보의 발문인데 신해보의 발문을 쓴 歸鹿公(趙顯命))은 "취수정공이 쓴 草稿에 최명곡(석정)이 서문을 쓴것이 있으나 널리 보급되지 못 하였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이로서 최석정이 풍양조씨 세보 서문을 쓴 사실은 명백해 졌으며 창간 신해보에는 서문이라고는 단지 최석정이 무오년에 쓴 서문 만이 수록 되었다.
7. 결론적으로 최석정으로 부터 서문을 받아 놓고도 풍양조씨는 세보 발간 여건이 되지 못해 서문이 쓰여진후후 53년간 이나 세보 간행이 지연 되었음을 알수 있다 .
당시 타성들은 이미 1600년대 후반에 상당수 성씨들이 족보 발간을 마친 상태 였음을 보드라도 우리 조상님들도 1600년대 후반경 부터 세보 간행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그 간행이 5~60년 이나 지연 되었다고 봄이 타당 하다 하겠다..
질의에 대한 답변을 요약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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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대종회 전 총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