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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光敎山, 581m)-백운산(白雲山, 562.5m)
산 행 일 : ‘20. 9. 12(토)
소 재 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와 수원시 장안구, 성남시 분당구, 의왕시 경계
산행코스 : 고기리 노인회관→돌담집→다이노스타 테마파크→광교산 체육공원→수지 꿈학교→수리봉→광교산 정상→노루목→백운산→고분재→관음사→고기리 노인회관(소요시간 : 4시간 20분)
함께한 사람들 : 산과 하늘
특징 : 시가지 가까이에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나지막한 산들이다. 하지만 넓이는 꽤나 넓은 편, 남쪽으로 수원시, 북동쪽으로 성남시 분당구, 동쪽으로 용인시 수지구, 북서쪽으로 의왕시와 접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바위가 거의 없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는 점이다. 능선에 수목이 울창해서 두 정상을 포함한 서너 곳을 제외하고는 조망이 터지지 않은 이유이다. 이는 볼거리가 거의 없는 산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두 산은 찾는 사람들로 항상 넘쳐난다고 한다. 도시와 가까워서 접근성이 뛰어난데다 몇 구간을 제외하고는 등산로까지 평탄해서 삼림욕 하듯이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 들머리는 고기리 노인회관(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215)
또 다시 도시 근교의 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경기 중부지역에 위치한 광교산이다. 대부도에 살고 있는 취우님 부부에게 이보다도 먼 거리는 무리라는 최군의 배려였다. 들머리인 ’고기리 노인회관‘은 수인분당선(또는 신분당선) 미금역에서 내려 관음사가 종점인 14번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오면 된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관음사(또는 장작골 마을)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도로라서 특별히 눈에 담을 것이 없는 풍경이 펼쳐지나 들러볼만한 곳은 있다. 노인회관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 ‘PURPLE RABBIT’이다. 국제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유기농밀가루와 프랑스산 최상급 버터, 그리고 수제 과일청과 국산 팥앙금으로 빵을 만들어 낸단다.
▼ 판소리연구소를 부설기관으로 갖고 있는 듯한 ‘법향정사’를 지나자 실제 들머리라 할 수 있는 ‘돌담집’ 입간판이 보인다. 근처의 버스정류장도 역시 ‘돌담집 앞’이다. 출발지인 ‘노인회관’에서 도보로 8분쯤 되는 지점인데 버스를 이용했다면 이곳에서 내리면 되겠다. 참고로 우리 일행은 승용차의 주차 때문에 노인회관을 들머리로 삼았다.
▼ 능이백숙 전문점인 ‘돌담집’을 지나자 길이 둘로 나뉜다. ‘우리는 커피가 미치도록 좋다’는 현수막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오른편에 위치한 카페 ‘별 다섯 크래프트 커피공장’에서 내건 것이다. 베이커리도 겸한다니 출출할 때 들러봄직 하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한다.
▼ 조금 더 걷자 공룡 테마파크인 ‘다이노스타’가 나온다. 공룡 놀이기구와 체험시설을 중심으로 미니골프에 정글짐, 인공암벽까지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는 천문교실로도 변한다니 가족단위의 놀이터로 제격이겠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 테마파크를 지나자 탐방로는 시골길로 변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 들머리로 삼았던 돌담집에서 12분쯤 떨어진 지점인데, 이곳에서는 ‘호원관(鎬源館)’의 방향표시를 따른다. 이곳 삼거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산사랑’이라는 한정식집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도 있으니 참조한다.
▼ 방향을 틀자마자 호원관으로 들어가는 널찍한 길을 버리고 왼편 비포장 임도로 들어선다. 밭과 야산의 사이로 내놓은 전형적 시골길이다. 이 길을 따라 4분 남짓 걸었을까 ‘광교산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최군의 말로는 마을버스(14-3)의 종점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운동기구 외에도 깔끔하게 지어진 화장실까지 들어서 있었다.
▼ 공원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대안 초·중등학교인 ‘수지 꿈학교’ 방향이다. 이 학교는 수지 지역에서 '공동 육아'와 '방과후'를 하면서,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길을 일궈오던 부모와 교사들이 공동으로 열었다고 한다.
▼ 꿈학교의 담벼락 끝,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등산로가 열린다. 체육공원에서 200m쯤 떨어진 지점인데, 이정표는 이곳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를 1.7㎞로 적고 있다. 비교적 짧은 거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 새로 세운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2.8㎞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 들머리인 나무계단을 올라서자 전원마을이라 할 수 있는 ‘고기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고기리는 광교산(남쪽)과 백운산(서쪽), 바라산(북쪽)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모양새이다. 오직 동쪽으로만 뚫려 분당지역과 연결된다. 그래선지 용인시(수지구) 관할인데도 주말농장은 대부분 성남(분당구) 사람들이 짓는단다. 고기(古基)란 지명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고분현과 손기동이 병합되면서 양쪽에서 한 글자씩 따다 만들었다고 한다. 1996년 용인군의 시(市) 승격에 이어, 2001년 수지읍이 구(區)로 승격되면서 고기동이 되었다. 용인(龍仁)이란 지명도 한번 살펴보자. 용인은 지금의 수지(水枝) 일대를 지칭하는 ‘용구(龍駒)’에서 출발했다. 고구려 때에는 구성(駒城)이었다고 한다. 태종 13년(1413년) 용구(龍駒)와 처인(處仁: 현재 용인시 처인구)이 합쳐 용인이 됐다.
▼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정비가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고 길가에는 밧줄난간까지 설치했다. 거기다 야자수 매트를 깔아 미끄럼까지 방지하고 있다. 수도권의 산답게 이정표도 갈림길마다 거르지 않고 세웠다. 등산로 곳곳에 벤치를 놓아두었음은 물론이다. 타 지역에서 보아오던 등산로, 아니 국립공원도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육산이라 해도 봉우리를 오를 때 숨이 차오르는 건 매한가지다. 지자체에서는 이런 점까지 신경을 썼나보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아래 사진은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삼거리(이정표 : 광교산 정상↑ 1.3㎞/ 미륵사← 1.2㎞/ 체육공원↓ 1.3㎞)이다.
▼ 산길은 가파름의 연속이다. 그것도 내림 한번 없이 오로지 오르막길 일색이다. 주능선이나 마찬가지인 수리봉까지의 거리가 1㎞에 불과하다보니 서둘러서 고도를 높이고 있는 모양이다.
▼ 숨이 턱에 차게 오르길 25분,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봉우리에 올라선다. 전형적인 육산인 광교산에서는 보기 힘든 바위봉우리라 하겠다. 그래선지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았다.
▼ 전망대에 서면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산줄기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용인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난개발의 대표라고 지탄 받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사뭇 빼어나다.
▼ 잠시 후 수리봉(565m)에 올라선다. 등산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구간(광교산 정상↔수지성당)에 위치한 바위봉우리이다. 아니 정상 부분만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더구나 낙석사고가 우려된다고 해서 한때는 막아놓기까지 했었다.
▼ 힘겹게 올라선 수리봉 정상은 텅 비어있었다. ’정상표지석‘은커녕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망만은 끝내준다고 알려져 있다. 용인과 수원의 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조금 전까지 비를 몰아왔던 구름이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수리봉 아래에도 이정표(광교산 정상→ 0.3㎞/ 법륜사← 2.0㎞, 수지성당 6.5㎞/ 미륵사↓ 2.4㎞)가 세워져 있었다. 등산에 제법 이력이 붙은 내 눈에도 수준급으로 보이는 이정표이다. 검정바탕에 흰 글씨야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 하지만 광교산의 것은 지도까지 장착했다.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 위에 현재 위치까지 표시함으로써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도록 했다.
▼ 수리봉은 한남정맥에 놓여있지 않으니 광교산의 주능선은 아니다. 하지만 성지바위산을 거쳐 수지성당에 이르는 능선은 6.5㎞나 된다. 주능선에 뒤지지 않는 굵직한 능선이라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의 기세가 많이 꺾여 있었다.
▼ 느긋하게 10분쯤 걷자 광교산의 정상인 ‘시루봉’ 올라선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주봉이다. 시루봉은 약간 용인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한다. 그래선지 ‘광교산등산로 안내판’ 등 시설물들이 하나같이 용인시에서 세운 것들 일색이다. 그나마 ‘수원 23’으로 표기된 삼각점이 수원시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긴 수원의 진산이니 어련하겠는가.
▼ 광교산(光敎山)이란 지명은 1530년(중종 25)에 증보하여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광교산(光嶠山), 광악산(光岳山), 광옥산(光獄山) 등으로 불리다가 ‘수원부지도」(1872년)’에 있는 아래 내용으로 인해 광교산으로 굳어졌다. <고려 야사에 의하면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옥산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서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광교(光敎)'라고 하였다.> 참! 용인군 ‘지도읍지’에는 ‘서봉산(瑞峯山)’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북쪽으로만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비까지 내린다. 큰 기대 없이 전망대로 다가가는데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구름이 걷히면서 청계산과 관악산이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몸매가 자칫 화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북한산과 도봉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이제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백운산으로 갈 차례이다. 이때 토끼재로 내려가는 길이 왼편으로 나뉘나 개의치 말자. 그렇다고 김준용(金俊龍) 장군의 전승지 및 비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8도에서 근왕병이 밀어 닥쳤다. 전라근왕병은 감사 이시방과 병사 김준용이 이끄는 6000명과 승통 각성이 이끄는 2000명이었다. 전라병사 김준용은 병사 2000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고, 전투에서는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楊古利) 등 3명의 적장을 전사시켰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얼룩진 병자호란 때 이러한 승전이 있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장세영이라는 중학생의 시를 적어놓은 시판(詩板)이 세워져 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99년 수원시 장안구에서 공모한 ‘광교산에 어울리는 시’에 최우수 작품으로 당선되었다는데, 광교산을 어머니에 빗대어 적어간 내용이 그동안 읊조려봤던 그 어떤 시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 큰 오르내림이 없는 탐방로는 정비까지도 잘 되어 있다. 길가에는 ‘수원 팔색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이 능선은 수원시에서 만든 둘레길인 ‘팔색길’ 가운데 육색(六色)인 ‘모수길’이기도 하다. ‘물길의 근원이다’하여 백제시대부터 모수국이라 불렸던 수원의 대표 하천인 서호천과 수원천을 따라 도심 속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코스로 광교공원에서 출발해 화홍문, 팔달문시장, 수인선협궤열차길, 잠사과학박물관, 서호공원, 광교산을 거쳐 광교공원으로 되돌아오는 길이 19㎞의 둘레길이다. 참고로 수원팔색길은 수원이 지닌 팔의 긍정적 의미를 담아 수원 곳곳을 연결하면서 수원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팔의 의미로는 수원의 주산이자 혈처인 팔달산과 사방으로 통해 있고 팔방으로 도달한다는 교통의 중심지 수원을 상징한단다.
▼ 잠시 후 아름드리 노송들이 꽉 들어찬 ’노루목‘에 이른다. 딱히 특징이랄 것은 없고, 그저 광교산의 유일한 대피소가 지어져 있을 따름이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책도 몇 권 비치되어 있단다. 참! 노루목 대피소에서도 길이 나뉘고 있었다. 왼편은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고려 때의 절 창성사로 이어지고, 오른편은 수지의 고기리 방향이다.
▼ 대피소를 지난 탐방로는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무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 또 다시 완만해진 능선을 따라 걷는데 백운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이정표(송신소↑/ 등산로←)가 눈길을 끈다. 능선은 송신소가 차지하고 있으니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래선지 산비탈에 다리 모양으로 탐방로를 내놓았다.
▼ 통신시설에 빼앗긴 봉우리를 돌아서니 수북하게 쌓인 돌무더기(이정표 : 백운산 0.9㎞/ 광교산 1.1㎞)가 나온다. 생김새로 봐서는 어김없는 ‘서낭당’이다. ‘원추형’으로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서낭당의 특징이니 말이다. 이곳에서 지지대 및 절터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니 서낭당의 또 다른 특징인 ‘고갯마루’가 아니겠는가. 서낭당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아쉽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는데 어쩌겠는가.
▼ 그 옆에는 ‘억새밭’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친절하게도 억새와 참억새, 무늬억새에 대한 특징까지 적고 있다. 하지만 막상 억새밭을 보면 헛웃음부터 나온다. 한 평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면적이 작기 때문이다. 억새밭이라고 하면 정선 민둥산이나 화왕산의 그것을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네 근린공원에 표본용으로 식재한 수준에 가깝게 정말 조그맣다. 지금은 억새가 별로 없는 때라는 변명도 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 앞서가던 최군이 커다란 바위로 냉큼 올라간다. 능선에는 저런 커다란 바위들도 제법 보였다. 하지만 탐방로는 어김없이 바위를 피해 우회시키고 있었다. 안내산악회의 산행대장 출신인 최군이 지금 내 얘깃거리를 위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다른 눈요깃거리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4형제 소나무(가칭)‘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네 개의 줄기가 자라났는데, 혹독했던 그네들의 삶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나같이 몸을 배배꼬고 있었다.
▼ 버섯으로 덕지덕지 뒤덮인 나무도 보였다.
▼ 길가에는 꽃망울을 활짝 연 들국화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2주 전, 춘천의 금병산을 오를 때만 해도 무더위에 무척 시달렸는데 오늘은 선선하기까지 하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 얼마쯤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통신대’가 나타난다. 경기방송의 송신소로 백운산은 물론이고 광교산의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하지만 등산객들에게는 하나의 장애물일 따름이다. 시설에 빼앗긴 산봉우리를 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 이곳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압권이다. 인구가 이미 100만을 넘겼다는 수원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거기다 불에 타다 남은 고사목까지 더해져서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 통신대 앞(통신대 헬기장← 0.8㎞, 지지대 5.1㎞/ 백운산→ 0.3㎞/ 억새밭↓ 0.6㎞)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왼편은 지지대고개로 이어지는 한남정맥 마룻금이다. 백운산은 물론 통신대를 왼쪽 옆구리에 차고 이어지는 오른쪽 길이다.
▼ 갑자기 가팔라진 비탈길을 잠시 치고 오르자 백운산 정상이다. 분지(盆地)를 연상시키는 널따란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석외에도 삼각점(수원 451)과 이정표(바라산 2.2㎞/ 광교산 1.9㎞)가 세워져 있었다. ’종합안내도‘ 등 두어 개의 안내판도 보이는데 그 가운데서도 ’한남정맥(漢南正脈)‘에 대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산줄기가 광교산과 백운산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시작된 한남금북정맥은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과 금북으로 갈라진다. 그 중에 서북쪽으로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을 한남정맥이라 한다. 이 산줄기는 경기 남부권 일원을 포용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수계의 분수령을 이루는 경기산하의 모체라 할 수 있다.
▼ 정상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조망을 돕고 있다. 의왕시가지는 물론이고 군포시와 안산시까지 눈에 들어온다며 조망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모락산과 수리산 등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북쪽 멀리로는 관악산도 보인단다. 하지만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굵어진 빗줄기가 100m 앞의 풍경까지도 가려버렸다.
▼ 백운산 정상은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그늘 아래 놓아둔 수많은 벤치는 기본, 심지어는 육각정까지 지어놓았다. 굵어진 빗줄기를 피해 주저앉은 우리 일행은 정자에서 1시간 이상이나 쉬어버렸다. 점심 식사도 이곳에서 때웠음은 물론이다.
▼ 운지버섯으로 여겨지는 버섯이 탐스러워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그 위에서 놀고 있는 달팽이가 더 눈길을 끌었다.
▼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둘로 나뉘는 길 가운데 오른쪽 방향, 그러니까 바라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왼편으로 나있는 길은 한남정맥으로 백운사를 거쳐 의왕시의 ‘모락산’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고분재까지 1,560m를 남겨놓은 이 길은 잠시 후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하지만 침목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안심되지 않는다면 길 양편에 세워놓은 난간에 의지하면 될 일이다. 참! 급경사 내리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쭉나무가 숲을 이루는 평평한 구간이 나오는가 하면 564.2고지와 464고지 등 작은 봉우리를 넘기도 했다.
▼ 의왕시에서 만들어 놓은 ‘길안내판’이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의왕대간’이라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대간(大幹)’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이중환(李衆煥)의 ‘택리지(擇里志)’이다. 그는 ‘큰 줄기는 산협으로 잘리지 않고 횡으로 뻗어 수천리를 남하하여 경상도 태백산에 이른다(大幹則不斷峽 橫亘南下數千里 至慶尙太白山)’라면서 대간을 ‘큰줄기’라는 일반명사로 쓰고 있다. 그러다 여암 신경준(申景濬)이 쓴 ‘산경표(山經表)’에 오면 대간(大幹)이란 단어는 더 이상 일반명사가 아니다. 택리지에서 말하던 백두산에서 수천리를 남하하는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했고. 함흥에서 동쪽으로 뻗는 줄기를 장백정간(長白正幹)이라 했으며 백두대간에서 분기하여 바다로 달리는 13개의 산줄기를 정맥(正脈)이라 했다. 그러니 대간, 정간, 정맥이라는 단어는 일반명사로 쓰기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곳 의왕시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이어야 할 대간을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정상에서 20분 남짓 내려오니 고분재(古盆 峴·峙)이다. 고기동(용인시)에서 학의동(의왕시)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옛날에는 산골마을이던 고기리 사람들이 고단한 삶을 위해 지겟짐 지고 안양장 보러 다니던 길이었다. 요 아래 마을인 ‘고기리(古基里)’는 이 고갯마루와 손기동(遜基洞)에서 한 글자씩을 따왔다고 한다. 고개의 이름에 ‘동이 분(盆)’자를 쓴 이유는 이 근처에서 장석(長石)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란다. 장석은 사기그릇 유약의 첨가물로 쓰이며, 이게 또 풍화되면 도자기의 원료인 도토(陶土)가 된다. 옛날 이곳에서 캐낸 장석은 광주의 ‘분원리 도요(分院里 陶窯)’로 보내졌다고 한다.
▼ 왼편 고기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길은 곧장 내려서지를 않고 횡(橫)으로 굽어 산자락을 옆으로 짼다. 구불구불 많이도 휘었다는 얘기이다. 고분재(古盆峴)의 또 다른 이름인 ‘곡현(曲峴)’은 이래서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 그렇게 잠시 걷자 길가에 ‘서낭당’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색색의 천과 같은 옛 정취를 불러일으켜줄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당목(堂木)으로 여겨지는 나무 아래에 돌무더기만 수북하게 쌓여있을 따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서낭당을 ‘성황신(城隍神)을 모시는 것으로 안다. 예전 나라와 지방 관아에서 모시던 그 상황신 말이다. 하지만 성황신이 아니라 산왕신(山王神)이 변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학자들도 있다. 민초들이 산길에서 만나는 서당당과 잘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 고분재를 출발한지 20분 만에 산자락을 벗어나고(이정표 : 고분재 0.7㎞, 바라산 1.4㎞), 탐방로는 이후부터 마을길을 따른다. 광교·백운·바라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동막천, 東幕川)와 나란히 나있으나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평범한 길이다. 아니 산골에서나 볼 법한 허름한 주택과 산뜻하게 지어진 전원주택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점은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 산행날머리는 고기리 노인회관(원점회귀)
마을길을 따라 5분쯤 더 걷자 관음사라는 절간이 나온다. 백운산이나 광교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들머리 또는 날머리로 삼는 곳이다. 일단 경내부터 들어가고 본다. 하지만 눈여겨 볼만한 것들은 갖고 있지 못했다. 누가 언제, 왜 지었는지도 알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건 그렇고 산행이 종료되는 고기리 노인회관은 아직도 30분 정도 더 걸어야만 한다. 이 시간까지 합칠 경우 오늘 산행은 총 6시간 10분이 걸렸다. 점심식사 등을 위해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4시간 20분을 걸은 셈이다.
♧ 에필로그(epilogue), 이왕에 왔으니 광교산과 백운산의 산자락에 스며있는 선현들의 얼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빗줄기에 쫓긴 탓에 우리는 찾아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유적지 가운데 둘은 오늘 산행의 들·날머리인 고기리(수지구)에 위치하는데, 하나는 왜구(倭寇)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李從武) 장군의 묘이다. 그로 인해 왜구가 ’항복문서(通書于禮曹判書乞降)‘를 보내왔으니 이후 이런 순간이 우리 역사에 또 있었던가? 이 묘는 500여 년 동안 잊히어 오다가 1972년 ‘장자승평이 세웠다(長子昇平立)’ 묘표의 글자가 판독되어 다시 찾았다. 다른 한 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완(李莞) 장군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싸움을 독려해 대승을 거둔 인물이다. 이후 명장이 되어 활약하다가 정묘호란 때 의주에서 분사했다. 마지막 분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 김준용(金俊龍) 장군의 전승지이이다. 전라병사이던 그는 전라근왕병 2천명을 지휘하여 광교산에서 싸워 누루하치의 사위 양고리(楊古利) 등 3명의 적장을 전사시켰다. 산전도의 치욕으로 물든 병자호란에서 거둔 유일한 승전이 아닐까 싶다. 그 흔적인 김준용 장군의 전승지 및 비는 종루봉(또는 토끼봉, 수지구 신봉동) 너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도 산자락에는 고려 때 지어진 세 개의 커다란 절이 있었다. 서봉사(峯寺)와 성불사(成佛寺), 창성사(彰聖寺)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셋 모두 터로만 남아있다. 특히 성불사는 ‘문화재 안내판’만이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서봉사도 폐사지에 ‘현오국사비(玄悟國師碑 : 보물 제9호)’만이 외롭고, 창성사 터에도 초석과 장대석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창성사에 있던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 보물 제14호)는 현재 화성 안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옆으로 옮겨져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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