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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기도를 잘하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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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20 04:47
연중 11주 목요일-기도를 잘하려면
“너희는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제 말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단식과 자선과 기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면서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만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빈말이란 어떤 것이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빈말을 할 수 있을까요?
보통 빈말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하는.
빈말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면
하느님께 어떻게 빈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느님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진심인 사람은 이럴 수 없고,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말,
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관계부터 재정립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씨불여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고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하는 분으로 재정립해야 합니다.
그런데 재정립해야 할 관계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관계는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영광스럽게도 우리도 그런 관계를 맺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다니!
구약에서는 하느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게 했는데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다니!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도
저는 어머니로 부를 수 있게 해주셨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욕심도 내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이것이 욕심이긴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욕심은 괜찮을 것이고,
주님도 우리가 감히 이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더 따듯하고 푸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왜냐면 기도 특히 관상 기도는 말보다 만남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말도 중요하고 말도 많이 나누겠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아무 말 없어도 좋고 그것이 많은 경우 더 좋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말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의 사랑에 잠기기 위해서 만나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거듭 강조하지만 만나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기도가 명상이나 독백이 되지 않고,
그다음에 대화를 하든 청원을 하든 뭐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바꾸고,
오늘 강론은 이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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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절로 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초등학교 이전이 좋을까요? 아니면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초등학교 때가 좋을까요? 성소에 대해 갈등했던 중고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또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신학생 시절은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나의 과거를 쪼개어 보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는 결론을 짓게 됩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예전에 비해 지금 부족한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나이가 드니 운동 능력도 떨어졌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책을 보기 힘들 정도로 시력도 좋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하늘 나라에 가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과거의 시간으로 굳이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나이 들어 할 수 없는 것도 많아졌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여전히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할 수 없어.’라며 슬퍼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며 ‘아직도 할 수 있어’라며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나 많은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이유는 참 많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아질수록 더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대화를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편하십니까? 감사의 말, 인정과 지지의 말, 기쁨의 말, 긍정적인 말 등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편하지 않습니까? 만약 계속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부탁만 한다면, 남에 대한 험담과 갈등을 일으키는 말만 한다면, 듣기 싫은 부정적인 말만 하면 어떨까요? 이런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피하고만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는 기도를 통해 어떤 대화를 하십니까?
빈말만 되풀이하면서 진정한 대화를 만들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주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참 기쁨의 시간을 할 수 있는 것들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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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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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 안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의 기도”에는 주 예수님이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맨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곧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부르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이 기도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초청하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 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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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간절한 믿음의 기도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 ‘기도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고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바람을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하오나 제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것임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성 보니벤뚜라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묵상할 때 감각적으로 무엇을 느껴야만 제대로 기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감각적인 느낌 없이 기도하는 편이 하느님께 더 큰 봉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감각 없이 기도를 지속함으로써 그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낮출 줄 알게 되고 겸손하게 되어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에 감각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면 그런 감각이 자칫하면 그 사람을 부풀게 만들고 자기가 성덕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처럼 느낀 나머지 교만해지고 게을러져서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랑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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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음식에 맛을 내는 것을 ‘조미료(調味料)’라고 합니다. 조미료의 종류에는 설탕, 소금, 고춧가루, 식초, 간장, 된장, 고추장, 마늘, 후추, 기름이 있습니다. 미원, 다시다처럼 인공조미료도 있습니다. 캠핑가면 마법의 조미료를 가지고 다니는데 ‘라면스프’가 있습니다. 마트에 가면 육수를 낼 때 필요한 복합 조미료를 팔기도 합니다. 음식은 재료가 싱싱해야 하지만, 조미료가 있어야 음식의 맛이 살아납니다.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있었습니다. 강사들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심, 이상, 은총생활, 활동, 공부, 평신도, 은총생활의 장애, 은총안의 생활,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칫 단조롭고, 지루할 것 같은 강의가 활력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은 음식에 맛을 내는 조미료와 같은 ‘체험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교재를 읽을 때는 강사도, 강의를 듣는 청중도 대면 대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담이 시작되면 강사의 눈빛도 빛나고, 청중도 귀를 쫑긋하며 듣게 됩니다. 교재의 내용이 음식의 재료라면, 강사의 체험담은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와 같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청중은 체험담에 웃고, 체험담에 울고, 체험담에 박수칩니다.
구약의 예언자 중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어떤 예언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그분들이 체험했던 이야기는 기억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과 싸워서 통쾌하게 이겼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던 아합 왕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전했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자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처럼 엘리야가 옷을 강물에 내리치니 요르단 강의 갈라졌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것처럼, 엘리야도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승천하였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것처럼 엘리야가 아주 작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과부와 그 아들이 가뭄이 멈출 때까지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갔고,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자질, 예언의 종류, 예언의 효과는 잘 모르지만 예언자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보였던 표징은 알고 있습니다.
2023년 7월에 실종자를 수색하던 과정에서 숨진 해병대의 군인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사건의 진실을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해병대의 수사단은 사건의 전모를 조사했고, 바뀐 법령에 따라 조사한 자료를 경찰에 이첩하려했습니다. 그렇게 이첩이 되었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끝이 났을 겁니다. 작년 8월에 경찰에 이첩이 되었다면 지금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첩이 되었던 조사 자료는 회수되었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던 계획도 취소되었습니다. 사건을 조사했던 해병대의 수사단장은 항명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지만 그 사건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사단의 조사 이첩을 막으려는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자료를 회수하며 다시 이첩하는 과정에서 혐의의 대상에 있던 사람들이 빠졌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누군가의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특검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고, 국회에서 ‘특검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대통령은 특검법의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앞으로 이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역사에 기록될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대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였고,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조직, 제도,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듯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유혹에 빠지지 말며, 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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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느 날 갑자기 신부님이 우리 집에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리고 그것도 한 시간도 안 남았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정리와 청소가 아닐까요?
아무리 깨끗한 집이어도 먼지가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깨끗한 사람도 그 먼지가 있지요. 특히 스스로는 잘 못 보는데 손님은 더 잘 보이는 것이 먼지가 아닐지 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허물이지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사람들끼리 사용하는 말이지만 사실 이 말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지 합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께 용서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남들에게 알리기 부끄러운 죄. 하느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하느님도 모를 것으로 생각하며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린 어두운 죄도 있겠지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를 용서하시고.’라고 말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용서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용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먹은 데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수천 번 다짐하고 다짐해도 될까 말지 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에는 은총이 함께 필요합니다.
용서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 때문에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용서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위해 용서하십시오. 나를 위해 움켜쥔 분노를 놓아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도 우리가 자유로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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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그 이름, 나의 주님
얼마 전 한 식당에 들렀습니다.
식사하기 전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화장실 표지를 따라 문 앞에 도착했는데
문 앞에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참지 말아요.
모든 것을 다 밀어내세요.
화장실과 참 어울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도 꼭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병은 밀어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지 못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픔을 쌓고, 상처를 쌓다 보면 마음의 병이 옵니다.
참지 마세요. 밀어내세요.
아무한테나 밀어내지 마세요. 싸움 납니다.
그저 주님 앞에 머물러 밀어내세요. 아주 시원하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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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한결같이, 끊임없이 기도하라”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뿐 아니라 기도에도 우리는 영원히 초보자일뿐입니다. 기도는 기분이 감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위하여, 영혼이 살기위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심신의 건강에, 영육의 건강에 우선적 수행이 기도입니다. 기도야말로 하느님 마련하신 최고의 명약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끊임없이, 숨쉬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두발로 서서 기도하라고 직립인간이요, 눈들면 하늘입니다. 그래서 하늘보고 땅보고, 기도하고 일하고가 순서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심신의 건강에, 영육의 건강에 우선적 수행이 기도입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주님은 천국입장시 우리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기도한 얼굴인지 주님을 닮은 얼굴인지 그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을 보니 결정적으로 취약함이 눈에 띕니다. 기도가 빠졌습니다.
“일을 하듯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듯 일을 하라. 이것이 자신의 분야에서 대가가 되는 길이다.”<다산>
기도가 빠졌습니다. 일을 하듯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듯 일을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는 “기도하라, 일하라, 공부하라”입니다. 여기에 “운동하라, 걸어라”를 더하면 완벽합니다.
“장인은 작업장에 있음으로써 일을 이루고, 군자는 배움으로써 도를 이룬다.”<논어>.
여기에 하나를 더해야 완벽합니다. “성인은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아 참사람이 된다”고 말입니다.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사람만의 특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복된 존재들인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여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사람의 성인이요, 하느님 없이 막살면 광야인생여정중 악마도, 폐인도, 괴물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 수요일 삼종기도후 바티칸 광장의 수많은 신자들 앞에서 교황님은 시편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였던 시편은 모든 계절에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교향곡(symphony of prayer)’ 같은 시편이요 시편을 노래할 때, 하느님은 성인들의 공동체인 웅대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가 우리와 동반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기도의 일상화, 기도의 생활화, 기도의 습관화에 기도의 교과서인 시편집에 따라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의 수행은 없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성서나 교회의 성인들은 모두가 기도의 대가였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기도에 있어선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어야합니다. 기도에는 신비가, 일에는 전문가, 공부에는 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포부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일, 그리고 공부와 사랑의 봉사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도대체 죄를 지으며, 무절제하게 유투버나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주인공, 엘리야와 엘리사, 그 스승에 그 제자요 무엇보다 둘은 기도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엘리야가 (하느님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기도를 통해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가된 엘리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고맙게도 우리 역시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는 기도에 관한 참 좋은 가르침을 주시니 바로 주님의 기도요 그에 앞서 필수적 지침을 주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이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깨어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삶자체도 기도가 됩니다. 참으로 다양한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이 다 아시는데 무슨 기도냐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하면서 환상이나 허영의 걷히면서, 무지의 너울이 걷히면서,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본질적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또렷이 드러나는 참나의 모습입니다. 성 베네딕도의 말씀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의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의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 모든 이가 모여있을 때 기도는 짧게 할 것이다.”(성규20,3-5ㄱ)
기도뿐 아니라, 우리의 말이나 글도 사제의 강론도 짧고 순수해야 좋습니다. 바로 오늘 주님은 당신의 기도, 주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전범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의 기도의 노하우를 공개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단순한, 본질적 삶이 압축되어 있는 보물같은 기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인간의 본질적 필요 모두를 담고 있는 기도요,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기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인 하느님이요 인류는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류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간은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세 청원이 앞에 나옵니다. 늘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아버지 아닌 어떤 세상 돈이나 우상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향한 세 청원에 이어 지상천국을 살 수 있는 네가지 본질적 필수 사항의 청원입니다. “일용할 양식, 잘못을 용서받음, 유혹에 빠지지 않음, 악에서의 구출” 등 네가지입니다. 주님은 이어 용서 받기에 앞서 이웃을 먼저 용서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일방적 청원만으로는 무책임합니다. 청원에 따른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협력이 함께 가야 합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용서하기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악에서 구함 받기 위해 우리의 최선의 노력 또한 필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의 삶”을 살라는 것이요,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미사전례기도중 일용할 양식인 성체를 모시기전 온마음으로 정성껏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새삼 주님의 기도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며 거행되는 공동미사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예수님, 성경,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의 기도가 실현되어 우리 모두 지상천국을,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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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바람>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온유와 자비와 평화로
나의 이름을
거룩히 드려내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나의 나라를
곱게 피우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눔과 섬김과 살림으로
나의 뜻을
정성껏 이루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주린 탐욕이 아니라
맛난 밥이 되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날선 단죄가 아니라
너른 용서가 되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검은 유혹이 아니라
바른 길이 되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거친 악이 아니라
살가운 선이 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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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태 6,7)
말 많은 기도와 단순한 기도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는 말 많은 기도와 겸손하고 단순한 기도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말 많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바리사이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겸손히 죄를 갚이 뉘우치며 자기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는 세리는 제 자랑하는 바리사이보다 더 의로움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집회 35,21), 기도하는 이의 청을 들어주실 준비가 되어 계신 하느님께 도달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엑카르트가 영혼과 육체에 대하여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물리쳤다는 증거를 찾아보자. 성서를 기록한 유대교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영혼과 영과 육체를 구분한다. 그는 영혼과 영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영혼과 육체가 경쟁을 벌인다고 떠벌리지도 않는다.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 영혼은 영이고, 육체는 영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엑카르트는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영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구별한다. ”바울로 사도의 육체는 끌어올려져 그의 영혼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영적 존재도 끌어올려져 그 영혼의 존재에게로 돌아갔다." 육체와 영은 영혼을 향한다.
육체의 방향과 영의 방향은 상호 배타적인 방향이 절대 아니다.
“내가 쓰는 영혼이라는 말은 다음의 사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육체에 생명을 줍니다. 영혼은 육체의 형식입니다. 만일 영혼이라는 말이 영(spirit)으로 불린다면, 영혼이라는 말은 새로운 말로 바뀌어야 마땅합니다. 영혼이 영으로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지금 여기와 자연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의 형상이고, 하느님처럼 이름이 없습니다. 영혼은 새로운 낱말로 바뀌어야 할 필요를 알지 못하며, 하느님처럼 영원만을 알 따름입니다.” 29(189)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항상 깨어 있으라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파티마의 세 목동의 공적을 일일이 비교하여 발현 때 프란치스코의 역할이 두 소녀만 못하여 뒷전에 가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또 귀부인께서 직접 말씀을 건넨 적도 없고 히야친따처럼 정겨운 목소리를 듣는 은총도 받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프란치스코가 제일 뒤졌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언제든지 우리 공로의 보답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 그리고 약간의 증언을 위해 꼭 귀부인의 음성을 들어야만 되는 것일까? 소년에게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천국의 아름다움을 깨닫기 위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 아닐까?
성모 마리아께서는 두 소녀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이신 것처럼 프란치스코에게도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성모님은 제일 먼저 소년을 맞아들이셨다. 이것은 소년이 선택받은 성인들 중에 끼는 데 가장 적당하고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즐기는 데 넉넉한 준비를 갖추었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미 말해 온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소년은 충실함과 경건함에 있어서 동생이나 사촌에 못지 않았으며 희생을 할 때에도 진정 거룩히 잘 했었다.
그는 동생처럼 홍분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발현 후부터는 동생에 못지 않은 열심을 지녔었다. 그는 루치아, 히야친따와 같이 기도도 희생도 했고 그녀들이 제안한 희생도 반드시 설천했다. 그리고 종종 새로운 희생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권하는 것도 그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특별한 희생을 탐구하여 스스로 실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루치아의 대모가 갓탄 꿀물을 대접하고 싶어서 세 아이를 초대하였다. 대모는 프란치스코에게 먼저 잔을 건냈다. 소년은 잔을 받아서 동생에게 주었다.
“너희들이 마신 다음에"
그렇게 말하고는 마시기를 강요당할까 두려워서인지 살그머니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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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6,8~9)
기도할 줄 모르는 당신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살아야 할 삶과 진리는 너무도 가까이 있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의 기도를 사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이며 바탕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의 3가지 기원, 즉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그리고 아버지의 뜻과 후반부의 4가지 청원, 즉 양식, 용서, 유혹 그리고 악에 관한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상호 대칭 관계를 통해 그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악에서 구하소서. 』 ;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악에서 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원되는 것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유혹받기 마련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가 필요한 때입니다. 내 삶의 관심과 중심을 아버지의 나라,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둘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 용서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녀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며, 이를 살아갈 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아멘』 ; 아버지의 자녀답게 용서하고 세상에서 하느님 뜻을 살아갈 때, 천상적 삶과 지상적 삶이 하나로 묶이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육신적인 양식과 영적 음식을 베풀어 주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6,31.32)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보살펴 주실 것을 믿고 ‘아멘’하면서 맡기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심은, 당신의 기도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고 공유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방법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당신의 사랑과 신뢰의 언어를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꿈, 희망 그리고 이상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뢰, 우정 그리고 사랑의 일로써 기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끊임없이 사랑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당신을 부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성숙한 사랑의 교류와 태도를 함께 나누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아빠로서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죄와 한계, 약함을 없애시려는 이상과 꿈을 가지신 예수와의 친교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평화, 용서, 화해와 정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인간 영혼이 신적 지위로 격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변형됩니다. ‘Abba’를 향해 기도하는 것은 아빠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즉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죄의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 보호를 보증해 주고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일상의 걱정과 근심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자기 자신을 체험할 때 없어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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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굳이 청하지 않아도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분께 청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청원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합니다.
청원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청원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청원에 대하여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분과 나는 이 기도로써 어떤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응답받지 못하는 청원 기도는 없습니다.
청원 기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로 하느님께 바람을 아룁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들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청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다른 것들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그것과 함께 나의 청원이 정말 옳고 합당한지 돌아보게 되고, 내가 청하여야 할 올바른 것을 알게 됩니다.
청원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의 뜻을 고집하는 기도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나의 뜻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때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기쁨도 함께 느낍니다.
주님의 청원에 내가 응답하면서 주님 사업의 협력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청원 기도에 대한 하느님 응답의 한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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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 들어주실 그분께 기도를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마태 6,7-15)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5&id=2098088&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19 ㅣNo.173477
기도는 하느님과 마음을 연채 나누는 솔직한 대화이다. 꼭 무엇을 해 주십사는 요청보다는 삶에서의 감사와 청원을 드리는 것이리라. 따라서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사랑하는 그분께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는 것일 게다. 물론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마음을 온전히 아신다는 그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세속 대화에서의 중요한 신뢰를 그분께서야 어찌 모를 수 있으랴. 무엇에 익숙해져 능숙해진 것에서, 가끔 거기에서 내면의 진지함에 오해가 느껴질 수도.
우리 가톨릭 신자는 전례 시 보편적인 기도에 익숙해져 함께 소리 내어 기도하는 데에는 거리낌 없지만, 그 기도의 의미를 정녕 되새기고 삶으로 체험하려는 진지함을 잃곤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 아닐까 여긴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아시는 당신 뜻대로 살게끔 자신에게 어떤 의미의 일관된 확신을 청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꼭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언제 어디서 바쳐도 좋은 이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 땅은 과연 어디일까? 내가 머무는 지금 여기서의 ‘나의 현실’일 게다. 함께 할 가족이 있고, 사랑과 용서로 내 자신이 가꾸어 가야 할 미래가 펼쳐질 곳이다. 하지만 이 기도의 속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간청하는 것만은 결단코 아닐 게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전지전능하시기에, 우리가 굳이 기도를 올리지 않더라도 당신 뜻을 충분히 관철하실 수 있기 때문일 게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 뜻에 따라서, 늘 그분 가까이에 머물면서 꾸준하게 ‘사랑 실천의 삶’을 누리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실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우리가 다른 형제를 용서해야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자.
예수님은 평생 우리라는 남을 위해 사셨다. 물론 그분은 그렇게 사셨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관심사를 늘 먼저 헤아리신 분이셨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위주의 사고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온통 세상 것에 너무 얽매여 거기에만 늘 집착한다. 그래서 우리 삶 깊숙한 곳에 함께 계시는 그분을 종종 잊는다. 그분 없이 온전할 수 없는 우리인데도 말이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다스림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속적 문제를 더 염려하고 그걸 더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미 그것들을 다 아신다. 그래서 우리가 정작 청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에서 자녀 되는 조건들이다. 이는 구원에 필요한 회개와 용서, 그리고 구원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용기다. 이처럼 기도는 나의 욕망을 버리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 청 꼭 들으시려는 하느님 그분께, ‘아멘, 아멘!’하면서 정성껏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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