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에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빛을 돌이켜 자신을 비추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을 읽기는 읽되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는 경전 독송이어야 합니다.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시아문을 무엇이 이와 같이 인가.
내가 들었다는데 내가 누구인고.
이렇게 바로 자신에게 묻는 것이 수행입니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꿰뚫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바라보는 가슴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어떤 신출귀몰한 존재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열반의 세계로 안내한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수행의 주체고 운명의
주인이고 행복의 디딤돌입니다.
불교는 자신 이외의 다른 절대자를 믿지 않습니다.
신을 믿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가 주인공입니다.
현재의 과학적인 성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인간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우주를 지배하는 시대가 오고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천하의 어떤 존재도 그대를 능멸할
존재는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답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따라서 검증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은 『화엄경』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했습니다.
미진 속에서 우주의 실체를 본다고 했습니다.
인체를 해부하지 않아도 조직세포 하나만
떼어 보면 몸의 상태를 알고 병을 진단할
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일을 비롯해 이 우주까지도
나로부터 비롯됐습니다.
옳고 그름, 행복과 불행, 잘 살고 못하는 것,
모든 것의 원인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머릿속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진리를 처절한 몸부림과 냉혹한 시련을
통해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운명이 기구하다면 운명을 바꿉시다.
박복하고 어리석다면 박복하고 어리석음을
바꿉시다.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하고 염불하면 바꿀 수
있습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운명에서 운(運)은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명(命)은 생명 또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내 생명과 생활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 삶은 변화시킬 수 있고, 실제로
현재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운명이 박복(薄福)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잘 사는 것이 영원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영리하다고 해서 다음 생에도 영리하게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운명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둔하다면 처절한 몸부림으로
지혜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비록 현재의 처지가 어렵다하더라도
일념으로 노력하면 그 어두운 터널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이 왜이래, 하고 집어 던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살고 못살고는 내 한 생각 놓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내 운명을 바꾸는 것은 나에게 있습니다.
부처님도 내 운명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못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조언자일 뿐입니다.
그렇고 보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무척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 공부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예속되거나 노예가 되지 않고
오로지 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우주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운명은 바꿀 수 있습니다.
노력에 의해 박복을 잠재우고 행복을 불러 올
수 있습니다.
노력에 의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내 안의 불성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처였음을 자각하고 중생의 굴레를
벗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 운명은 그 누가 도와주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운명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바로 내 마음을 똑바로 보는
순간을 체득해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그 세계를 맛보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참다운 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