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편지 사랑
두사람의 인연은
청마 유치환이 통영여자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정운 이영도 시조 시인이 가사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 되었다.
이영도는 1940년대말~50년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청마가 세상을 세상을 떠나자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고 뇌출혈로 삶을 마감했다.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인상이었다.
이영도와 유치환
유치환과 이영도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것은 통영여중 교사시절이었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둔 29살 과부였다.
당시 통영으로 시집 온 그녀의 언니집에 머물러있었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청마는 만주로 떠돌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되었다.
청마는 정운보다 아홉살이 많은 38살의 유부남이었다.
정운은 워낙 재색이 뛰어나고 행실이 조신했기에 누구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유치환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정운의 얼굴을
보며 감정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한 청마와 홀로 된 정운은 닿지 않는 인연이 안타까워 연서로 그리움을 달랬다.
누군가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노년의 이영도
청마가 60살이 되던 1967년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한 후에야
이들의 사랑도 끝이 나고 러브스토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7년 이후 20년 동안 청마가 정운에게 뛰운 연서는 모두 5,000여 통이였다.
사모의 정을 담은 편지를 거의 매일 보낸 셈이다.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 중 200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청마 사후 정운은 <탑>이란 시를 통해 그녀의 애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사리로 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