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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다의 예언
왕하 22:14-20
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15 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18 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왕하 22:14-20 / 다섯 사람이 여자 예언자 훌다를 찾아가서 왕의 질문을 전하였다. 이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신시가지에 살았는데 그의 남편 살룸은 디과의 아들이요, 할하스의 손자로서 성전의 예복 창고를 감독하는 자였다. 15) 훌다가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알려 주었다. `여러분은 왕에게 돌아가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십시오. 16)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재앙을 내가 예루살렘 도성과 그 주민에게 그대로 내리겠다. 17) 그들은 나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들이 스스로 온갖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써 나의 분노를 터뜨려 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도성에 나의 분노를 쏟아놓겠다.' 18) 그러나 주님의 뜻을 여쭈어 보려고 여러분을 이곳으로 보낸 요시야왕 자신에게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 `내가 이 도성과 주민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네가 알고 옷을 찢고 울면서 나의 경고를 두려워하였다. 이 도성은 잿더미가 되고 사람들이 예루살렘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저주받은 이름이 될 것이지만 너는 내 말을 듣고 순종하였으니 나도 네 기도를 들어주겠다. 20) 너는 이 도성의 멸망을 직접 보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너는 평안히 잠들어 네 조상들의 묘실에 안치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율법책을 통해 깨달은 요시야가 선지자 훌다에게 사람들을 보낸 이유는 실낱 같은 희망의 줄기를 붙들어보고자 하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과 자비에 기대를 걸면서 백성을 살려보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요시야는 나라가 멸망할 것을 다시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며 요시야는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훌다(14-17) 훌다는 남북왕조를 통틀어 성경에 나타나는 유일한 여성 예언자였으며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였습니다. 이 훌다라는 여선지자에 대해서는 본문에 나오는 정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그녀의 지위는 성별에 의해 영향받지 않습니다. 다만 훌다의 신분은 왕이 예언을 요청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궁정 예언자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훌다가 거주하는 지역은 예루살렘의 ‘두 번째’구역이었습니다. 이 구역은 예루살렘의 서쪽 구역으로 히스기야 시대 때 확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히스기야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많은 피난민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으며, 그로 인해 예루살렘이 급격히 불어났기 때문입니다. 훌다는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15) 즉, 요시야 왕을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으로 지칭함으로써, 창조주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높입니다.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18-20) 훌다가 예언한 내용은 유다와 요시야를 향해 각각 예언한 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언에는 최초로 유다의 멸망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예언에는 요시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또한 요시야의 말을 “듣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은 요시야의 말을 듣는다는 표현은 성도와 하나님과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드러냅니다. 전체적으로 훌다의 예언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긍정적으로 격려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러나 유다를 멸망 가운데서 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열왕기서에서 배운 모든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시야의 회개와 개혁에 근거하여 유다를 용서하실 것으로 기대하도록 이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나 회개와는 상관없이 유다를 멸망시키려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배교는 정벌을 초래하고, 개혁은 보상을 가져온다는 원칙의 단순한 적용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것 같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다루시고 그의 행위를 낱낱이 보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를 세시는 분이시며 그 행위를 달아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더욱 깊게 알아야 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먼저 생각할 때입니다. 타인도 나와 함께 살고 있구나. 그에게도 아픔이 있고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를 수도 있구나. 그때 비로소 우리는 어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가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평생 어른 아닌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 설 교 >
여선지자 훌다가 한 일 / 유관지 목사
오늘 본문은 훌다라는 여자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홀다는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과,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인 역대하 34장에만 그 이름이 나옵니다.
다른 곳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인데 저는 오랫동안 이 여선지자의 이름이 홀다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신경 써서 기억할 필요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인명이나 지명에서 ‘ㅗ’와 ‘ㅜ,’ ‘ㅣ’와 ‘ㅏ,’ ‘ㅏ’와 ‘ㅑ’ 같은 것들은 잘못 읽기 쉽습니다.
또 우리나라 말에는 모음조화 현상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필요가 있어서 성경사전에서 이 사람의 이름을 찾는데 ‘호’자 항목에서 안 나오더군요. ‘이상하다’ 하고 돋보기를 대고 성경을 보고 이름을 다시 확인해 보니 훌다입니다.
그래서 훌다, 훌다,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종종 ‘훌더’라고 되더군요.
아까 모음조화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훌다는 그만큼 인지도가 낮은 인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훌다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두 가지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훌다가 살룸이라는 사람의 아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훌다가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둘째 구역이라는 것은 성전 서북쪽 낮은 지역에 새로 만든 시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다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오늘은 이 훌다를 중심으로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우리는 훌륭한 일을 잘 돕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22장과 23장은 유다 왕 요시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3장 25절을 보세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놀라운 칭찬입니다. 이런 것을 ‘극찬(極讚)’이라고 하지요.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를 보통 유다의 3대 성군이라고 합니다.
요시야는 유다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개혁운동을 한 임금입니다.
요즘 정조(正祖) 임금의 이름이 매스컴에 종종 등장하는데 요시야는 정조와 비슷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은 뒤 유다의 운명은 빠른 속도로 기울어 마침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요시야는 유다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밝은 빛을 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요시야 왕은 혼자서 이런 개혁운동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요시야 왕의 주변에는 좋은 신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14절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제사장 힐기야, 아히감, 악볼, 서기관 사반, 아사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피고 있는 여선지자 훌다, 모두 요시야 왕의 개혁운동을 도운 사람들입니다.
요시야 왕은 이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개혁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요시야 왕의 개혁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 가운데 대제사장 힐기야에 대해 살펴볼까요?
힐기야는 요시야 왕의 명령을 받들어 성전 수리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이 율법책은 모세오경 전부이거나 신명기의 일부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 훨씬 이전 시대의 어떤 경건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앞으로 악한 왕이 나와서 율법을 다 파괴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서 그 때를 대비해서 율법책을 성전 한 구석에 숨겨 두었던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는 이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을 통해 요시야 왕에게 전달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만일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대해 ‘이건 별거 아니야’ 여기고 묵살해 버렸다면 일은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14절을 보세요. 힐기야는 또 왕의 명령을 받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율법책에 대해 잘 해석해 줄 사람을 찾아나가는 일도 하였습니다.
열왕기하 23장 4절 이하를 보면 대제사장 힐기야는 요시야 왕이 일으킨 종교개혁 운동 - 우상을 위해 만든 그릇을 불사르는 일, 우상들의 형상을 불살라 가루를 만드는 일, 이런 일들을 집행했습니다.
개혁운동 집행본부장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이 힐기야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한 번 잠깐 말씀드릴 것입니다.
서기관 라반도 요시야 왕을 성실하게 도왔습니다.
군대에 연락장교라는 직책이 있는데 서기관 라반은 요시야 왕과 대제사장 힐기야 사이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본문 앞의 5절과 6절과 7절을 보세요.
성전 수리를 맡은 기술자들, 목수, 건축자, 미장이들도 매우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이들에게 성전 수리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고 그 돈을 따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7절 끝에 그 이유가 있는데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성전 수리를 맡은 일꾼들은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요시야 왕은 개혁운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명군, 성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 가운데 ‘그 분은 참 훌륭한 분인데 밑의 사람들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분이 있습니다.
‘밑의 사람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아부를 했기 때문에, ’다 잘 되갑니다.‘ 했기 때문에, 언로(言路)를 막았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통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요시야는 그렇지가 않은 왕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시야는 매우 행복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일에는 좋은 조력자, 또는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에게는 바룩이라는 서기가 있었습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썼습니다.
그리고 자주 옥에 갇힌 예레미야를 대신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바룩은 백성들 앞에서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악한 왕 여호야김의 신하들 앞에서도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했습니다.(렘 36장)
예수님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전도와 치유와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누가, 디모데, 실라, 두기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 밖의 많은 동역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성경들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성경으로 꼽힙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에서 평일에는 담임목사가 한 성경을 계속해서 강해하고 주일 새벽기도회는 부목사님들이 한 달 씩 담당하는데 역시 성경 한 권을 택해 강해합니다.
부목사님들은 새벽기도회에서 한 주일에 한 번씩, 주일에만 설교하기 때문에 연속강해이기는 하지만 매 주일 독립된 설교처럼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2월의 주일 새벽기도회는 새로 부임한 임형준 목사님이 담당하는데 이런 원칙을 설명하고 ‘무슨 성경을 강해하시겠습니까?’ 했더니 ‘로마서를 강해하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저는 속으로 빙긋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의 세계에는 ‘어느 목사든지 교회에 새로 부임하면 로마서부터 강해하려고 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로마서는 그만큼 중요한 성경입니다.
그 로마서도 더디오라는 사람이 받아썼습니다. 로마서 16장 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가 이 편지를 가지고 로마까지 갔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협력을 거쳐 로마서는 완성되었고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도 위대한 일을 한 분 옆에는 좋은 조력자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할 때는 그의 부인 캐더린, 또 제자 멜랑히톤이 지혜롭게, 그리고 정성껏 루터를 도왔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감리교 운동을 할 때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 죠지 휫필드(G. Whitefield) 토마스 콕(T. Coke), 애즈베리(F. Asbury), 이런 사람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유명한 부흥사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전도집회를 할 때는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작곡한 잘 알려진 찬양 가수 죠지 바블레 샤(G. B. Shea)가 그를 도왔습니다.
이런 조력자나 동역자들이 없는 경우에는 그 일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또는 잠깐 성공했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담임자나 여러분이 속해 있는 속회, 선교회, 교회학교, 찬양대, 부서의 책임자를 잘 돕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직장에서도, 여러분이 속해 있는 조직에서 책임자를 잘 도우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다 대장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 대장이 되려고 하는 군대는 질서를 잃게 됩니다.
대장을 잘 도우려고 하는 참모들이 많은 군대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수고도 크게 기억하십니다.
느헤미야서에는 느헤미야의 일에 동역한 사람들의 이름이 수십 명 나옵니다.
오늘 요시야 왕의 이야기에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그와 같은 원칙 때문입니다.
위대한 일에 기쁨으로 잘 동참하며 힘을 다해 협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어려운 문제, 중요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의논하기 위해 찾아오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제사장 힐기야, 아히감, 악볼, 서기관 사반, 왕의 시종 아사야, 이런 사람들은 성전에서 발견된 성경에 대해서 물으려고 훌다를 찾아갑니다.
여선지자 훌다는 이름의 뜻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훌다는 사마귀, 두더지, 이런 뜻입니다.
훌다의 부모가 딸에게 왜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훌다의 남편인 살룸에 대해서는 할아버지 이름은 무엇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었다, 예복을 주관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훌다의 집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적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훌다는 천민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훌다의 남편 살룸은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예복을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예복은 왕실의 예복이 아니면 성전의 예복을 말합니다.
살룸은 그리 높지 않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실의 예복을 맡은 사람이었다면 지금 그의 집을 찾아가고 있는 아히감, 사반, 이런 사람들의 부하가 됩니다.
그가 성전의 예복을 맡은 사람이었다면 대제사장 힐기야의 부하가 됩니다.
그런데 왕실의 고위 관리들, 왕의 최측근들,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왜 이런 사람의 집에 찾아갔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후 문맥을 살펴서 훌다가 경건한 인물로 소문난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이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대해서 하나님께 물으라’ 명령을 내렸을 때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아, 다른 사람 말고 여선지 홀다에게 가면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교회도 이런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세상이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교회를 향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을 수 있어야합니다.
큰일을 만나면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요?’ 찾아와서 물을 수 있어야합니다.
‘이번 남아시아에서 지진해일이 일어나서 수십만 명이 죽은 것은 단순히 자연재해일까요?’ 묻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불경기, 경제 불황이 심한 때에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답을 구해야 합니다.
나라가 지금처럼 혼란과 갈등이 심할 때 대통령이 교회 지도자들을 찾거나 청해서 겸손하게 자문을 구하고 기도를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도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런 상담을 청하는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신약에서 권사의 모범을 보인 인물은 두말 할 것 없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행11: 2) 교회를 부흥시킨 사람이었고,(행11: 2) 별명이 “위로의 아들”이었고,(행4: 36) 봉헌에 힘쓴 사람(행4: 37)이었고, 바울이 사도로 출발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었습니다.(행 9: 27, 11: 25~26)
‘구약에서 권사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 누구일까?’ 또 권사님들 가운데는 여자분들이 많은데 여자 인물 가운데 권사의 모범을 보인 분이 누구일까, 저는 한참 찾다가 훌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훌다는 어려운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는 존재였고, 바르게 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권사는 영어로 'Exhorter'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편한 대로 ‘Adviser'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충고해 주는 사람‘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 부목사님에게 ‘나는 그냥 Adviser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공식 용어는 따로 있으니 찾아봅시다.’ 하고 사전을 들춰 Exhorter라는 단어를 찾았습니다.
Exhorter는 ‘열심히 권하는 사람, 권고하는 사람, 당부하는 사람,’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사님들은 그런 이름에 걸맞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권사님들을 비롯해서 성도들은 사람들이 충고를 들으러 오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권고를 들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성실함을 가지고 있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경건함을 가지고 있을 때 그렇게 돌 수 있습니다.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신뢰를 받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남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존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나아만은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소녀의 권고에 따라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나아만은 왜 아내의 몸종인 소녀의 말에 따랐을까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는데 그 때문이었을까요?
신앙의 민족인 그 이스라엘 소녀가 무엇인가 다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 소녀는 무엇인가 다르다.’ 하는 느낌을 평소에 나아만의 부인과 나아만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실함과 경건함과 지혜와 신뢰와 남과 다른 모습과 남이 갖지 못한 것을 지녀 사람들이 물으러 찾아오는 존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훌다는 찾아온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이들은 남편의 상관들입니다. 훌다는 듣기 좋은 말로 얼버무렸습니까?
아닙니다. 16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릴 것이오!’ ‘이 곳과 그 주민은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될 것이요!’ 서릿발 같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 ‘그것은 이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행위로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였기 때문이오!’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만 왕은 하나님 앞에 겸비해서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이 재앙에서 제외될 것이요!’ 말합니다.
훌다가 한 말 가운데 18절, 19절, 20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하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겸비한 삶,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여기 옷을 찢고 통곡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할 때 갖는 자세입니다.
우리도 회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럴 때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훌다는 고관들을 향해, 나가서는 왕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추상 같은 기상을 가지고 전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대단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 때는 저 유명한 선지자 예레미야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1절에서 3절까지를 보세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에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 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이 말씀을 비롯해서 여러 기록들이 증명해 주는 것과 같이 이 때 예레미야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들은 왜 예레미야에게 가지 않고 여선지 훌다에게 갔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예레미야의 활동 초기였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로 집권층과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예언을 했기 때문에 그를 찾기가 거북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선지 훌다는 왕실 전속 선지자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과 함께 훌다가 대단한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대제사장과 왕의 신하들이 ‘이 사람에게 가면 하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히 말해 줄 것이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 여자 사사 드보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훌다, 이 셋을 구약의 3대 여선지자로 꼽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기 왕의 신하들 가운데 아히감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14절에도 아히감이 나옵니다.
아히감은 예레미야서에도 나오는 인물입니다.
악한 왕 여호야김 때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서 26장 24절을 보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유다 성읍들을 맡아 다스렸는데 그다랴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를 보호했습니다.
예레미야서 39장 13절과 14절의 말씀입니다.
이에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살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예레미야를 감옥뜰에서 데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가운데 사니라
아까 ‘요시야 왕에게는 좋은 신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고 서기관 사반, 그의 아들 아히감의 이름을 들었는데 그들은 이렇게 대를 이어가며 좋은 일을 했습니다.
여선지자 훌다는 영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교회의 힘은 교인들의 숫자나 건물의 웅장함이나 많은 예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힘은 영적인 권위에서 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비극은 영적인 권위가 약해 가거나 영적인 권위를 상실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영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양교회는 저 웅장한 대 성전 만큼이나 큰 영적인 권위를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권위’라는 말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무엇인가 영적인 분위기를 가진 존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나가서는 이 시대가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를, 교회를 찾아올 수 있는 존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절 끝을 보세요. 왕의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가서 홀다의 말을 보고했습니다.
여선지 홀다의 말을 전해 들은 요시야 왕은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을 모았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 주민들, 제사장들, 선지자들,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백성을 모았습니다.
그들 앞에서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읽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약속합니다. 23장 3절을 보세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겠습니다.’ 언약을 합니다.
이어서 개혁운동을 일으킵니다.
그 일부는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보면 산당을 파괴했습니다,
그 때 자기의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금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제단들을 다 헐었습니다.
우상들의 석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빈틈없고 신속한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진행합니다.
어떻게 보면 과격하다고 할 수 있는 개혁을 합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훌다가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전하지 않았더라면, 뜨뜻미지근하게 처리했다면 이런 개혁운동이 가능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이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감 없이 전하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특히 권사 여러분, 훌륭한 일에 동참하고, 그 일을 돕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성실함과 경관과 지혜와 신뢰와 남과 다른 모습으로, 남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을 지녀 사람들이 중요한 문제,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존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하여 우리를 통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같은 위대한 일이 이 시대에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