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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형성한다. 그는 현대 산업사회가 관리되는 사회이며 개인의 부자유를 영속화시키는 사회라고 본다. 예술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반영하는데 이전의 예술이 했던 바와 같이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 속에 쌓여 있는 무언의 고통을 표현하여 현상에 대한 부정의 계기를 드러내는 식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부정의 계기는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서 더 나은 현실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지향의도를 함축한다. 아도르노는 오늘날 확장된 대중예술을 비판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욕망에 부응하며 값싼 대리만족 역할을 하는 예술이나 자본의 논리에 편승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화된 예술은 진정한 자율성을 상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예술을 비판하며 순수하고 자율적인 예술을 구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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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가 보기에 예술은 문화산업에 의해 문화상품으로 양산되면서 상품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술의 본질을 상실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은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술의 본질이란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문화산업의 문화상품들은 동일성의 속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예술의 본질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중 문화 상품들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즉 착취와 불평등을 드러내기 보다는 늘 즐겁고, 행복한 자본주의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그러한 부조리와 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중문화 상품들은 규격화, 표준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개인의 감상 능력이나, 개성도 규격화 표준화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 가령 남들과 다른 면모(성정체성-홍석천, 하리수/ 외모-매우 잘생기거나 못생기거나/유머-예능인들~~)는 상품이 되기 때문에 대중예술은 정체성마저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기제가 되죠.
그래서 예술은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한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가치를 단일한 가치화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돈이겠죠. 그리고 사회적으로 높이 추앙되는 명예, 규범 같은 것들일 것이고요.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동일화의 회오리를 벗어나 비동일성을 지향해서, 아름다운 상품이 아니라, 불쾌하거 추한 것이어야 합니다. 규격화, 표준화, 동일화 되지 않는 비정형성, 비동일화, 비규격화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회적으로 '아름답다'고 규정된 틀을 벗어나 '추하고 불쾌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은 작가가 직시한 현대 사회의 본질, 즉 부조리와 모순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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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예술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아도르노가 예술이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한 "불쾌하고 추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이런 음악을 들으면 비동일화를 체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인 혁명적 구호나 계몽적 문구들을 나열해서 그런 것들을 따르게 하는 것은 동일화의 폭력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봤습니다. 아도르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관객이 예술을 통해 비동화를 체험하는 것,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예술은 사회적 산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을 탐구하는 미학은 예술의 밑바탕이 되는 사회의 본질, 즉 부조리와 모순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비동일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전위예술을 아도르노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아도르노가 예술의 자율성, 즉 예술이 사회적 산물이지만 동시에 사회에서 떨어져 사회적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말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도르노의 미학의 긍정적인 면은 기존 예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세잔의 작품을 예로 들면서 아도르노라면 이렇게 사과와 같은 정물을 그린 그림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의 본질과 유리된 가상일 뿐이라고 평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아도르노의 세잔에 대한 평가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잔의 작품은 미메시스를 표현한 작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미메시스란, 재현을 의미하는 단어로(다른 제시문들에서 플라톤과 관련해서 많이 언급되는 단어임. 다른 제시문들에서는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으니, 참고할 것), 세잔의 작품이 미메시를 표현한다는 것은, 예술가의 시선에 포착된 세계의 참모습을 재현하고, 이에 대한 예술가의 사유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을 아도르노는 간과한 것이라고 필자는 비판하고요.
그래서 아도르노 미학의 한계는 예술에서 사회적 부조리, 즉 비정형성, 비동일성만을 체험하는 것만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술가의 주관의 재현, 즉 미메시스를 부정하게 되어, 세잔의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도르노 미학의 또 다른 한계는 전위예술만을 진정한 예술로 본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예술 평가가 다 전위예술을 중심으로 될 수 밖에 없고, 전위예술이 아닌 것들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기에,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동일화의 틀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필자는 비판합니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반대로, 베냐민은 모든 예술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리고 아도르노가 문화 산업에 의해 양산되는 문화상품으로 비판한 대중예술에서도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 (록음악, 힙합음악 등)가 있듯이, 대중예술이 무조건 자본의 논리, 모든 것을 교환가치 체계로 환원시키는 동일화의 논리로 평가받아서는 안된다고 필자는 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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