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5일(수)
* 시작 기도
(창 38:25-26) 여인(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주님...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의 불륜 사건을 다룬 내용입니다.
이런 것은 불신자들에게도 없을 법한 것입니다.
감히 주님 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불법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율법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율법은 곧 형사취수제 또는 시형제결혼법(신 25:5-10)입니다.
이를 통하여 야곱의 유언(창 49:10절)인 유다를 통하여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계시가 성취됩니다.
우리 인간의 시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니다.
이는 결국 교회로 상징되는 여인 곧 다말이 연약한 유다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지요.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0:11-21
제목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나의 묵상
양의 우리에 문이 있는데 그 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가는 다 절도요 강도이며 문으로 들어가는 이만 목자다.
문지기가 문을 열면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
목자가 양들의 앞에서 인도하여 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뒤를 따라간다.
그러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도망한다.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고 자신은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신다.
자신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가 다 절도요 강도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양들이 그들의 말을 진정으로 듣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유일한 양의 문이기에 자신을 통해서 출입하는 자만 온전히 구원을 받고 꼴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예수님 자신이 오신 목적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오늘 다시 예수님 자신을 ‘내가 그’라는 어법의 ‘에고 에이미’형태를 써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다.
선한 목자는 삯꾼과 비교가 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그러나 삯군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자기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리가 양을 물어가도 자기 살 길을 찾아서 도망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을 알고 양도 자기 목자를 안다.
이는 마치 하늘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하늘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또한 이 우리에 들어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는 더 있다.
그들도 내가 인도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이 우리에 있는 무리와 하나가 되어 한 목자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목자로서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그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자신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어서 누가 나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는데 이 권한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귀신들려 미친 자로 취급하면서 비난하지만 더러는 소경을 치료한 사건을 예로 들어 예수가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참 목자에게는 양 한 마리의 생명이 바로 자신의 생명과 같다.
그래서 그 양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참 목자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이는 그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함인데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사랑을 받으신다.
이 사랑은 아버지의 본질의 계시인 아버지의 영광이다.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버릴 권세도 있고 또한 얻을 권세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언젠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네팔의 고산 지대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이야기였다.
그곳은 밤이 되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곳이다.
저녁이 되어 양을 우리에 넣은 다음 취재진들과 텐트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는 목동이 담요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취재진이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양들에게로 간단다.
왜냐고 물으니까 양들하고 함께 자려고 나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밖에서 자느냐고 물으니 양들 틈에 끼어서 자면 춥지 않고 따뜻하다면서 괜찮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깨달았다.
아하, 이것이 바로 참 목자, 선한 목자구나.
이처럼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양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그러나 목자들 중에는 삯군도 있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자들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마음이 없다.
양도 자기의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양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자기 자신의 목숨을 먼저 생각하여 양들을 팽개치고 도망가 버린다.
결국 양은 위험에 처하여 이리에게 잡혀 먹히거나 죽게 된다.
그뿐 아니라 삯군 목자들은 주인 몰래 양을 잡아먹기도 한다.
당시 양을 치는 목동은 거의 대부분 사회의 최하위층에 속했다.
따라서 목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도 않았고 인정도 못 받는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목동들은 항상 배고프고 가난하기 때문에 양을 치다가 주인 몰래 양을 잡아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목동들은 증인의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선한 목자다.
아버지께서 주님을 알고 주님도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선한 목자되신 주님도 양을 알고 양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주님은 기꺼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아직까지 우리에 들지 못한 양들이 있어서 그들도 우리로 인도하여 함께 목자의 보호를 받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주님은 다시 얻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주님을 사랑하신다.
다시 얻기 위하여 버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영광스런 부활을 말한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국 많은 사람, 심지어 우리에 들지 않은 사람까지도 풍성한 생명이 있는 우리로 인도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새 생명의 역사, 즉 영광스런 부활과 함께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으며 이런 아들을 아버지께서 정말 사랑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창세 전 아버지의 품속에 계실 때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복종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복종과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셨다.
나는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오해하였던 자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근거로 양들을 나에게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군에 불과하였다.
양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로 인도하면서 영양가가 풍부한 꼴을 먹이고 살찌워서 하늘나라 사람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오히려 나는 살찐 양들을 잡아먹는 삯군이었다.
영양가 많은 꼴이 아니라 모래알을 씹게 만들었고 그래서 정말 빼빼 마르게 하였던 자이다.
양들은 말라 죽어 가는데도 나는 잘 먹이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사역을 하였다.
아닌 것처럼 하면서도 내 안에는 내 것을 챙기는 탐욕이 가득하였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이런 나에게 주님은 그 영생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복음으로 친히 찾아 오셨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양들을 다 죽이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먼저 나를 살렸고 또한 양들에게는 영양가 풍부한 꼴이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의 꼴을 먹였다.
맛있게 먹는 양들을 보니 나도 즐거웠다.
양들에게 좋은 꼴은 세상의 것, 땅의 것, 만물 안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창세전의 세계, 만물 위의 것이며 이것이 가장 좋은 꼴이다.
그 맛을 알고 이제는 만물 안에서만 돌고 도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다.
내가 볼 때는 가장 좋은 꼴인데, 그동안 먹어보지 못하던 꼴을 계속 먹으니까 힘든 양들도 보인다.
그래서 내 안에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수위를 조절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목자가 양에게 영양가 없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는 주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를 따르는 양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신 것처럼 나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이 계명을 이제는 나에게 주신 것이기에 이 계명을 잘 지키는 것 그것이 말씀에 쉐마하는 것이요, 조건의 규정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것으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세워진 새 언약을 유지하는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감히 선한 목자라는 이름을 들먹일 수조차 없는 악하고 게으른 삯군 중의 삯군이었나이다.
나에게 맡긴 살진 양을 잡아먹기도 하고 팔아먹기도 하는 등 나의 유익을 위하여 이 양들을 내 마음대로 해치우는 자였습니다.
내가 목자이기 이전에 우리 주님 앞에서 양인데, 양으로서의 의무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주인의 뜻을 알지도 못한 채 보냄을 받은 자로서 내 마음대로 살아온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자백하나이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하오니 주의 십자가에 나를 걸어 주옵소서.
나를 주장하는 의지를 꺾어 주옵소서.
십자가 앞에 엎드리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의 상한 영혼을 붙들어 주시고 이제는 창세 전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가운데 거하는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진멸 받아 마땅한 나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징계를 통하여 다시 살리신 아버지의 그 사랑으로 양을 사랑하게 하소서.
양을 사랑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는 것이오니 썩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인 복음을 바르게 증거하여 주의 나라로 인도하게 하소서.
날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여 그 사랑으로 풍성한 꼴을 먹이는 목사요 선교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