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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文武王, 신라 30대 왕)
본명 : 김법민 / 재위 - 661년∼681년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681년 07월 01일
본관 : 경주 / 종교 : 불교
능묘 :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
신라 제 30대 왕이자 무열왕의 장자로 이름은 법민. 왕위에 오른 후 재위 기간 동안 백제 저항군을 진압하고 고구려 정벌했으며, 당나라 군대를 축출하는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으며 귀족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했다.
외관을 감찰하기 위한 외사정을 두고 궁궐을 웅장하게 수리하는 등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는데 이러한 정책은 신라 중기의 왕권 강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681년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동해안에 능을 만들었다.
▷ 626년. 김춘추-문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작은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비(妃)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이다.
▷ 25세 - 부친 김춘추에 이어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 29세 - 부친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 본인은 태자 책봉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재위 654∼661.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 생애 및 활동사항 >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집단의 반발을 받았다.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뤄진 듯하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반환문제로 인해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와 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귀족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귀족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오히려 김춘추·김유신계의 신귀족세력에 의해서 30여 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648년(진덕여왕 2)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해 계속 사용해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해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지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해 신장된 신귀족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 만큼 화백회의에 의해 추대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로써 구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655년(태종무열왕 2)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또는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 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해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이에 대해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후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말갈(靺鞨)과 연합해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해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黃山之原]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사비성 함락 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태(金仁泰)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尒禮城 : 지금의 충청남도 論山) 등 2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해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積城)을 공격해왔다.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해 술천성(述川城 : 지금의 경기도 驪州)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했으므로 대나마(大奈麻)로 관등을 높여주었다. 이 해에 압독주(押督州 :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를 대야(大耶 : 지금의 경상남도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지 8년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상대등고」(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품주고」(이기백, 『이상백박사회갑기념논총』, 1964)
「무열왕권의 성립과 활동」(신형식, 『한국사논총』 2, 1977)
「新羅政治體制의 變遷過程」(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 35세 - 백제 정벌 참전. 백제 멸망
황산벌전투(黃山伐戰鬪) -
660년 황산벌에서 있었던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의 큰 싸움을 말한다. 황산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連山) 지방이다.
< 역사적 배경>
의자왕 초,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파견해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인 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에 이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 경과와 결과 >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가 왕의 요청에 응해,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 : 지금의 금강 하구)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왕경을 출발해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 :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른 뒤,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탄현을 진수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험준한 곳을 가려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소정방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해 신라독군(新羅督軍)인 김문영(金文穎)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 하니,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6건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국역삼국사기(國譯三國史記)』(이병도, 을유문화사, 1977)
『한국사(韓國史)』-고대편(古代篇)-(이병도,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59)
「신라(新羅)의 삼국통일(三國統一)」(임병태, 『한국사』 2, 국사편찬위원회, 1978)
「김유신(金庾信)의 백제공격로연구(百濟攻擊路硏究)」(정영호, 『사학지(史學志)』 6, 단국대학교, 1972)
황산벌 전투 개요도
◆ 문무왕 초상화
▷ 36세 - 부친 태종무열왕 승하. 국왕 즉위 (신라 제30대 왕)
◆ 석탈해왕릉
▷ 37세 - 본피궁(석씨 가문 본궁으로 추정) 해체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탈해왕) -
성은 석씨(昔氏)이며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또는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이처럼 탈해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그에 따라 탈해의 출자(出自)와 이동경로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다. 대체로 북아시아의 기마민족 계통으로 보는 북방설, 해양세력으로 중국이나 일본 열도를 거쳐 왔다고 보는 남방설, 낙랑계(樂浪系) 유이민으로 보는 낙랑설(樂浪說)이 있고, 이밖에 목지국설(目支國說), 고조선설(古朝鮮說), 사로국(斯盧國) 본토설 등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왕(南解王: 南解次次雄)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 생애 / 활동사항 >
부왕(父王)인 다파나국의 왕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거쳐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 때 한 노파에 의해 건져지게 되어 양육되었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 그 어미 또는 거두어 준 노파)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해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석씨 부족이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했지만 이미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탈해가 처음 신라 사회에 정착했을 당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일화는 이주민인 탈해집단과 선주민인 박씨족(朴氏族)과의 대립을 알려준다. 그러나 탈해가 박씨족 임금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또 탈해가 왕으로 즉위한 후 갈등관계에 있었던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삼는 등의 일은 박씨족과 연합한 양상을 알려준다.
탈해는 8년(남해차차웅 5)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랐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즉위 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와 이빨 수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왕의 사위이므로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한 철을 이용한 군사력 확보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함으로써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보기도 한다.
58년호공을 대보로 삼고,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해 이후 4∼5회 공격해왔다. 65년(『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초기국가성장사연구(新羅初期國家成長史硏究)』(이형우, 영남대학교출판부, 2000)
「신라 석탈해설화(新羅 昔脫解神話)의 형성기반(形成基盤)-영웅전설적 성격(英雄傳說的 性格)을 중심으로-」(김두진, 『한국학논총(韓國學論叢)』8, 1986)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이종욱, 영남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가족(韓國家族)의 사적 연구(史的 硏究)』(이광규, 일지사(一志社), 1977)
『한국고대사회연구(韓國古代社會硏究)』(김철준, 지식산업사(知識産業社), 1975)
「삼한(三韓)의 국가형성(國家形成) 상(上)」(천관우, 『한국학보(韓國學報)』2, 1970)
▷ 43세 - 나당 연합군, 고구려 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668년 9월 21일(약 1달여간)
나당연합군은 9월 21일에 평양성 포위를 시도했고 1달여간의 공방전 끝에 연남건의 심복 신성이 당나라의 이적과 내통하고 성문을 열어주며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 역사 최후의 전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 영화 평양성이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675년 2월 - 문무왕의 지시로 평양성을 공격해 탈환한다.
◆ 요동의 고려문
▷ 45세 - 신라의 요동 선제 공격. 나당 전쟁 발발
나당전쟁(羅唐戰爭) -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 당나라가 7년간싸운 전쟁을 말한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 백제가 멸망하였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한반도의 영토 문제로 신라와 당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나당전쟁(羅唐戰爭)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이어졌다. 670년 3월 신라의 오골성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어,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크게 패하였다.
나당전쟁의 분수령은 675년 9월에 발생한 매소성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전세는 신라로 기울었다. 이후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 역사적 배경 >
7세기 삼국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특히 642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을 함락하면서, 신라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신라는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고구려와 왜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신라는 당으로 건너갔다. 신라 김춘추(金春秋)는 당 태종(太宗)을 만나 상호 입장을 조율했고, 결국 648년 나당동맹이 체결되었다.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 대동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당이 차지하고 남쪽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하였다.
660년 당의 장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덕물도(德勿島: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덕적도)에 도착하였고, 신라는 5만 대군을 거느리고 황산벌(黃山伐: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로 나아갔다. 결국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이후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하자 지배층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668년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하면서 고구려도 멸망하였다.
< 원인 >
나당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 나당간의 영토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백제·고구려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승전의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후 당은 백제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영토 문제 외에 좀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나당전쟁을 주도한 신라 수뇌부의 입장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나당연합이 결성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원정하는 과정상에서 당에 의한 신라 군령권(軍令權) 침해가 위험수위에 다다랐으며, 그에 따른 신라왕과 신라 군부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평양을 견제할 수 있고 한강하류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략요충지인 비열홀(比列忽: 강원도 안변군)을 둘러싼 나당간의 갈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비열홀은 고구려 멸망 이전 신라가 장악하였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안동도호부로 귀속시키고자 하였다. 나당전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나당간의 영토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신라 군부의 불만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경과 >
신라는 고구려 멸망 후인 669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준비를 해나갔다. 정치·외교분야에서는 외교사절을 통해 기만작전과 정보수집을 진행하였다. 사회·경제분야에서는 대사면(大赦免)을 통해 사회 안정과 민심수습을 꾀하였다.
군사·기술분야에서는 무기의 성능을 향상시키고 목장을 재분배하여 기병을 강화하였다. 종교·심리분야에서는 불교계 인사를 기용하여 사회 안정 및 민심수습을 하는 한편, 심리전을 구사하여 전쟁준비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669년의 철저한 전쟁준비를 거쳐, 670년 3월 설오유(薛烏儒)의 부대를 요동(遼東)으로 전격 파견한다. 신라의 설오유와 고구려부흥군의 고연무(高延武)가 각각 1만명씩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烏骨城: 중국 요령성 단동시)을 선제 공격했다.
4월에 이르러 당군이 계속 도착하자 백성(白城)으로 물러났다. 설오유 부대의 요동작전은 신라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되었으며, 정병 1만이 동원되어 말갈병 및 당군과 접전을 벌인 점에서 본격적인 나당간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요동을 선제공격한 신라는 670년 7월부터 671년 7월까지 웅진도독부에 대한 전면공격을 감행하고 백제 옛 땅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80여 성을 한꺼번에 점령한 것으로 보아 사전에 치밀히 준비된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당은 웅진도독부에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이 웅진도독부 구원군은 671년 6월 석성(石城)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반면 신라의 웅진도독부 점령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국 7월에는 신라가 백제 옛 땅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도독(都督)을 임명하게 되었다.
앞서 670년 4월에 편성되었던 고간(高侃)의 동주도행군(東州道行軍)과 이근행(李謹行)의 연산도행군(燕山道行軍)은 671년이 넘어서야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671년 7월 안시성(安市城)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하고 평양으로 남하해 왔다. 672년부터 황해도에서 나당간의 본격적인 전투가 발생했다.
특히 672년 8월 석문(石門 :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전투에서 신라는 장수 7명이 사망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에 사죄사를 파견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대규모 축성작업을 단행하였다. 신라는 전략을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하게 되었다. 황해도 공방전을 거치면서 신라의 방어선은 대동강선에서 남하하여 673년 무렵에는 임진강선까지 밀리게 되었다.
신라 수군의 활동과 신라군의 결전 회피로 인해 당군의 보급문제가 점차 대두되었다. 장기간 신라 전선에 투입되었던 당군의 병력수급 문제 등으로 인해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에 당은 고간·이근행의 4만명만으로는 신라 본토 공격을 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674년 유인궤(劉仁軌)의 인솔 하에 대규모 신라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유인궤는 이듬해 신라 전선에 도착하여 675년 2월 칠중성(七重城: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당으로 돌아갔다. 유인궤를 대신하여 이근행이 병력을 충원받은 후 한반도 경략을 담당하게 되었다.
675년 당시 이근행 주도 하에 매소성에 주둔하던 당군은 20만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과장된 수치라며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기록을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최소 5만명 이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당전쟁에는 고간·이근행의 행군병력 4만명 이외에, 설인귀의 계림도행군 2만명을 비롯하여 유인궤의 계림도대행군 최소 4만명 이상이 투입되었다. 이들 병력과 안동도호부 산하의 병력 그리고 지원부대를 모두 더하면, 나당전쟁기 동원된 당군은 최소 10만명에서 많게는 20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675년 9월 설인귀의 수군은 서해의 천성[泉城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설인귀 함대는 상륙전을 수행한 것으로 보아, 보급함대라기보다는 전투함대로 여겨진다. 설인귀 함대가 천성을 공격한 의도는 한강 하류를 일대를 장악하여 임진강을 경계로 형성된 전선을 한강선으로 재조정하기 위한 의도로 파악된다.
천성 전투에 이어 9월 29일 매소성[買肖城: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전투가 발생하였다. 신라군의 장수나 병력 규모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전과는 확실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전마(戰馬) 3만여 필과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를 획득하였다.
전마 3만여 필을 보유한 당군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매소성 전투를 단일 전투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매소성 전투를 전후해서 천성(泉城)·아달성(阿達成)·칠중성(七重城)·적목성(赤木城)·석현성(石峴城) 전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당은 천성 전투가 시작되자 매소성에서 집결지 행동을 완료하였다. 임진강과 한강 사이의 내륙 거점인 칠중성·석현성을 공격하였고, 분견대를 파견하여 아달성·적목성을 함락시켜 강원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매소성 전투를 전후한 일련의 군사활동들은 하나의 큰 전투를 구성하는 전역(戰役)이었던 것이다. 이 매소성 전역에서 신라가 성공적으로 방어를 수행함에 따라, 당군은 임진강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당은 676년 윤3월 토번(吐蕃)의 공격으로 당 내지(內地)가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에 당은 교착상태에 빠진 신라 전선을 포기하고 토번 전선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676년 윤3월 이전부터 토번 전선이 악화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676년 윤3월 이전 시기에 토번의 침입이나 당의 대처로서 행군편성 및 병모실시 등의 어떠한 징후도 포착되지 않고 있다. 나당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매소성 전역은 당의 전략이 전환되기 이전 당이 토번 전선과 신라 전선을 동시에 유지하고자 하였던 시기에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이 한강 이북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지속하던 시기에 발생한 전투였던 것이다.
매소성 전역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당은 676년 11월 백제 고지(古地)로 급작스럽게 공격을 해왔다. 이것이 바로 나당전쟁의 마지막 전장이 되었던 기벌포(伎伐浦: 충청남도 서천시 장항읍) 전투이다.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의 장수 시득(施得)은 22회에 걸친 전투를 거쳐 4,00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기벌포 전투의 발생원인은 당군의 철수작전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당전쟁은 675년 9월 매소성 전역을 고비로 당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전선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676년 윤3월 토번이 당 내지를 침입하자 당의 군사전략이 토번을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당군의 철수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즉 676년 11월 이전에 이미 당의 군사전략이 전환되기 때문에, 676년 11월에 발생한 기벌포 전투를 당군의 대규모 공세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당의 철수 주도군과 백제고지 잔류군, 백제의 유민과 반신라적 인사 등이 기벌포로 집결하였고 이를 신라 수군이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676년 11월 무렵 당의 신라 원정군의 전면철수가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한반도에 있던 당군 전체가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그 주요 철수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금강 하구의 기벌포였던 것이다.
< 결과 >
나당전쟁의 결정적 전투는 매소성 전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전역에서 당은 패배 내지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의 대규모 원정군이 수년간 투입되어 영토나 인력·재물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0만 이상 투입된 당의 대규모 원정은 하북도(河北道)·하남도(河南道)·강남도(江南道)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나당전쟁의 종결과 함께 이들은 귀국길에 올랐고, 이들의 귀국은 당 정국에 상당한 파장을 미쳤다.
당은 676년 11월과 12월에 나당전쟁의 후유증을 무마하기 위해 개원(改元)과 대사면(大赦免)를 실시하고, 반군부세력인 이경현(李敬玄)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다. 나아가 대규모 순무사(巡撫使)를 나당전쟁과 관련된 지역으로 파견하여 민심 수습에 주력하였다. 중국 동부 지역이 나당전쟁에서 병력과 물자를 충원하던 지역임을 감안해 보면, 당은 나당전쟁의 결과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과 동북의 변방국인 신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이나 신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당은 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신라가 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의 보급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하다.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국내의 여론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서북변경 위협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의의와 평가 >
나당전쟁은 정확한 정세판단을 바탕으로 한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당은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하였음에도 신라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약소국’ 신라의 승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신라는 당에 맞서 대의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적절히 구사하였다. 그리고 신라군은 당시 고유의 군사 편제단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최대 7~8만명 정도 동원할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나당전쟁의 승리는 신라 자체의 전력이 안정되어 있었고, 신라 수뇌부의 전략전술이 주효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당전쟁은 신라에 있어 백제와 고구려 멸망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전쟁이었다. 국가의 존망을 다투는 그것도 외부의 지원없이 최강대국과의 전면전이었다. 신라는 당과의 전면전에 앞서, 백제 고지 일부지역과 군사 요충지인 비열홀을 장악하고, 요동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나당전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전략상의 요충지를 선점하여 당의 침략을 미연에 대비하고자 한 신라의 예방전쟁(豫防戰爭)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신라는 7년에 걸친 당과의 장기전을 치루면서 한반도를 지켜냈다. 이러한 나당전쟁의 개전과 종전은 국제정세의 영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역량과 주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나당전쟁의 승리로 삼국을 통일하고, 내부 정비를 거쳐 통일신라 시기를 열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나당전쟁 연구』(이상훈, 주류성, 2012)
『삼국통일전쟁사』(노태돈,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나당전쟁사 연구』(서영교, 아세아문화사, 2006)
『나당전쟁사』(서인한,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1999)
『七世紀中葉唐與新羅關係硏究』(拜根興,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唐代行軍制度硏究』(孫繼民, 文津出版社, 1995)
「나당전쟁에 관한 고찰」(민덕식, 『사학연구』 40, 1989)
▷ 50세 - 매소성 전투 승전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 -
675년(문무왕 15) 나당전쟁(羅唐戰爭) 중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맞아 매소성(買肖城)에서 싸워 승리를 거둔 큰 전투를 말한다.
< 역사적 배경 >
매소성의 위치는『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고구려 매성현(買省縣: 지금의 경기도 양주)으로 비정하나, 현지에서 실증된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편성해 660년에 백제를 패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고구려 양국을 직접 지배했으므로 신라는 장기간에 걸쳐 전쟁한 대가가 없었다.
더욱이 당나라는 663년부터 신라를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로, 신라왕을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으로 격하시켜 신라의 자주권마저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를 패망시킨 뒤, 곧 대당전쟁(對唐戰爭)을 전개해 전쟁의 정당한 이권과 자주성을 찾고자 하였다.
< 경과 / 결과 >
고구려가 패망한 뒤, 곧바로 고구려의 각지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는데, 그 중의 일파가 검모잠(劍牟岑)·안승(安勝)·고연무(高延武)가 거느린 항당(抗唐)세력이었다. 이들은 669년경 한때 평양을 탈환한 일도 있었으나, 차츰 당나라 군대에게 밀려 신라 역내로 들어왔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유민인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당나라 군사와 싸운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전개되었다. 다시 당나라는 한병(漢兵: 중국인으로 편성된 군인)을 거느린 고간(高侃)과 말갈병을 거느린 이근행(李謹行)을 보내어 평양·황해도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67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나당전쟁은 673년 무렵 임진강을 경계로 고착상태에 빠진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당은 675년유인궤(劉仁軌)를 계림대총관(鷄林大摠管)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신라는 당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9군(九軍)을 동원하였지만, 675년 2월유인궤에 의해 칠중성(七重城)이 함락되었다. 신라는 칠중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문무왕(文武王)이 당에 사죄사(謝罪使)를 보낼 정도였다. 칠중성 전투 후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가 되어 기병 7만을 포함한 최정예 20만 대군이 매소성 부근에 주둔하였다.
당시 이근행이 이끌던 병력은 당·말갈·거란의 혼성군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근행의 병력은『삼국사기』에는 20만명이라 했지만 중국측 사서를 참작하면 4만명으로 추정된다. 20만이라는 당군의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가 병력을 증가시켜 한반도에서 신라와 고구려부흥군에 대한 우세를 보장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675년 9월설인귀의 함대가 숙위학생(宿衛學生)인 김풍훈(金風訓)을 길잡이로 삼아 한강 하류의 천성(泉城)으로 침입하였다. 김풍훈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는 하슬라주(何瑟羅州: 강릉) 장관과 병부령(兵部令) 등을 역임하여 신라의 군사업무에 능통했다. 그 아들 풍훈을 길잡이로 삼은 것은 서해안의 복잡한 지형과 해류를 감안해 한강 하구 일대로 진입한 후 신라 내륙으로 진입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설인귀는 한강 하류 일대를 장악하여 임진강을 경계로 형성된 전선을 한강선으로 재조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이 이끄는 약 1∼3만의 신라군이 당군을 공격하여 말 1천필을 노획할 정도로 크게 이겼다.
당시 설인귀의 함대가 매소성에 주둔하던 당군의 식량과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보급함대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당군은 임진강의 수로를 통해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고 있었는데, 병력의 규모가 거대할수록 식량 보급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설인귀의 보급선단이 격침되고 겨울에 접어든 시점에 재보급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매소성에 주둔하던 이근행의 군대 역시 불안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신라군이 매소성을 공격하자 이근행의 20만 군대는 말 30,380필과 많은 병기를 버리고 북쪽으로 퇴각했다.
< 의의와 평가 >
매소성전투에서 신라의 승리는 나당전쟁에서 분수령을 이루었고, 이로써 신라는 나당전쟁의 승기를 잡을 결정적 기회를 얻었다. 이후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은 다시 크게 패하였다.
매소성전투 패배 이후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국내여론 악화와 더불어 토번(吐蕃)의 중국 내지(內地) 침입으로 말미암아 토번 전선에 주력하게 되면서 마침내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매소성전투는 당나라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통일신라가 명실상부하게 한반도 중남부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자치통감(資治通鑑)』
「당의 군사전략을 통해 본 나당전쟁기의 매소성 전투」(이상훈, 『신라문화』29, 2007)
「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2, 1930)
▷ 51세 - 기벌포 해전 승전 / 당, 웅진도독부 철수 / 삼국통일 완성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 -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기벌포(伎伐浦)에서신라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을 말한다.
< 역사적 배경 >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로 자국의 발전을 노려 싸우던 중 553년에 신라·백제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어 더욱 상호항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648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벌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의 자주성을 빼앗았다. 동시에, 고구려의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한 영토분할 약정을 위배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라는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당전쟁(對唐戰爭)을 감행하였다.
< 경과 / 결과 >
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신라는 북쪽 경계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675년천성(泉城)과 매소성(買肖城)에서 크게 이겼다.
이에 당은 육로로 신라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 함대를 침입시켜 신라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방어를 위해 중시되던 지역이다.
이곳은 강의 하구라기보다 바다의 만(灣)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으로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를 남북으로 양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해의 제해권과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앞서 신라는 673년에 함선 1백 척과 해군을 서해에 배치시켜 방비하고 있었다. 676년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에서 설인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 걸쳐 결국 당나라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의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신라가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이 싸움은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은 마지막 회전이었다.
< 의의와 평가 >
기벌포 전투에서 당의 패배를 두고 이 무렵 당을 둘러싼 새로운 군사적 국면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나당전쟁은 675년 9월 매소성 전투를 고비로 당군의 패색이 짙어졌으며, 676년 2월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긴다.
676년 윤3월 토번(吐蕃)이 당을 공격하자 당은 군사전략을 토번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당 조정은 토번과의 전쟁에 주력하기 위해 신라와의 전쟁에서 철수하는 방책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해 11월 기벌포 전투 당시 당은 상당수의 병력과 유이민들을 이송하기 위해 기벌포로 집결한 상태로 신라와 전투하였으며, 당은 방어적 태세로 대규모 접전을 회피하여 병선 보전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의 성격을 고려할 때 22차례의 싸움이 있었다는 기벌포 전투는 최초 접전은 대규모 해전이었으나, 그 외는 양측 주력군의 회전(會戰)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가 퇴각을 기도하는 당군을 추격하여 소탕하는 성격의 전투로 보기도 한다.
기벌포 전투 이후 서해상에서 당군의 어떠한 군사활동도 감지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신라 수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당 수군이 이미 대양(大洋) 함대를 구성한 반면 신라수군은 연안(沿岸) 함대에 머물고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최초 접전에서 패배한 후 전술을 전환하여 유연하게 대처한 점은 신라 수군의 쾌거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나당전쟁기 기벌포 전투와 설인귀」(이상훈, 『대구사학』90, 2008)
「白江及び炭峴について」(池內宏, 『滿鮮史硏究』上世2, 吉川弘文館, 1979)
「百濟戰役地理考」(津田左右吉, 『津田左右吉全集』11, 岩波書店, 1964)
「唐羅交戰地理考」(津田左右吉, 『津田左右吉全集』, 岩波書店, 1964)
▷ 향년 56세 - 승하.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 유언. 장남 신문왕 즉위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 사적 제158호. 대왕암이라고도 불린다.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왕으로 죽어서 호국용이 되겠다고 수중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뛰어난 군주(君主)이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이 능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이다.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인다.
대왕암에 올라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水路)를 마련한 것처럼 되어 있다.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이 안쪽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중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이 판석(板石)처럼 생긴 돌 밑에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더구나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러한 예가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4건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불국사삼층석탑 사리구와 문무대왕해중릉』(황수영·진홍섭·정영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신라의 동해구』(황수영, 열화당, 1994)
첫댓글 신라가 흉노족인지 유사짱개인지 역사는 믿지 않지만 신라의 현재 경상북도 사람들 보면 조선족 처럼 보임니다.
이 나라 잘되라고 있는 국민 같지 않습니다.
정말 이해불가를 넘어 혐오감이 듬니다.
말좀 가려서 합시다. 그렇게 말하면 본인은 어떤사람이 될것 같습니까? ㅉㅉ
외세 당나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백제 멸망시킨게 옳다고 말한것을 정당하다고
보는게 맞는지 모르겠군요
왜 백제와 갈등원인이 먼지 이유를 알아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