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백은 누구인가?
최루백崔婁伯의 본관은 수원이며, 고려시대 수원(고려시대 행정구역상 수원으로 현재의 화성시 지역임, 이후 수원 명칭도 고려시대 기준으로 사용하였음)의 향리鄕吏였던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그는 향리의 자제로서 뒤늦게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여 벼슬에 나아간다. 1153년(의종 7)에는 기거사인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였고 1155년 평장사平章事 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양원준梁元俊, 좌사간左司諫 박득령朴得齡 등과 함께 왕의 국정國政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1158년에는 국자좨주國子祭酒 염직량廉直諒과 함께 승보시升補試(생원시生員試)를 맡아, 윤돈서尹敦敍 등 16명을 급제시켰으며, 뒤에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당대 명문중의 하나인 파주염씨 집안의 염경애와 혼인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인 최돈인崔敦仁은 예빈주부藝賓注簿(從7品), 차남인 최돈의崔敦義는 공역령供驛令(從7品) 지냈다. 3남인 최돈례崔敦禮는 과거에 급제 후 벼슬길에 나가 감찰어사직監察御史職에 재임하면서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의 찰방사察訪使가 되기도 하고 낭중직郎中職 정5품에 있을 때 금金나라 황태후상皇太候喪의 조문사로 가는 등 활동이 많았다. 4남 최돈지崔敦智는 승려가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아버지를 죽인 호랑이를 잡아 먹다!
『삼강행실도』 중 ‘루백포호’
최루백의 나이 15세 때, 수원의 호장으로서 평소 사냥을 즐기던 그의 아버지 최상저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 잡혀 먹히었다. 그러자 최루백은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고 견딘단 말씀입니까”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끼를 들고 단신으로 산에 올랐다.
호랑이의 자취를 더듬어 가던 중 아버지를 잡아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였다. 최루백은 그 앞으로 달려가 “네 어찌 하늘같이 받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해쳤느냐, 내 너를 잡아먹어야겠다”고 꾸짖었다. 이 말에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면서 납짝 엎드리는 것이었다. 최루백은 도끼를 들어 호랑이의 머리를 내리치고 배를 갈라서 아버지의 뼈와 살을 꺼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뼈와 살을 정결한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 기슭에 안장을 하고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최루백이 시묘살이를 하던 어느 날, 잠이 잠시 들었는데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사라졌다.
가시 덩굴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마음 속 느끼는 것이 많아 눈물이 그치지 않네
흙 져다가 날마다 무덤 위에 얹으니
이 뜻 아는 건 밝은 달과 맑은 바람뿐이네
살아서 잘 봉양하고 죽어서 지켜주니
그 누가 효의 처음과 마침이 없다 하리요
최루백은 삼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항아리에 묻어 두었던 호랑의 고기를 꺼내어 모두 먹었다고 한다.
후에 정조가 화산 아래 수원구읍치에 현륭원을 천장하면서 그 남쪽에 있던 효숙공 최루백의 비각을 서남쪽 홍범산 기슭으로 옮기고 최루백이 태어난 마을을 효자동으로, 호랑이를 잡은 뒷산의 큰 바위를 효암이라 명명하고 그의 자손에게 부역을 면해 주었다고 한다. 한편 최루백은 아내인 염경애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아내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묘지명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효의 표상으로 자리잡다!
이러한 최루백의 효행은 「고려사열전」․「세종실록지리지」․「삼강행실도」․「동국여지승람」․「오륜행실도」뿐만 아니라 중국의 「해동금석원」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봉담읍 분천리에 위치한 최루백 효 유적지
한편 월정 윤근수尹根壽 문집과 수원최씨 족보를 보면 최루백의 효행이 명나라에까지 알려진 사실이 전해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윤근수는 나라의 명을 받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마침 각국에서 모인 사신들이 자기 나라의 보물들을 자랑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신들이 저마다의 진기한 보물을 내세워도 윤근수는 침묵을 지킨다. 한 사신이 기이하게 여겨 ‘귀국에는 자랑할 보물이 없습니까?’하고 묻자, 윤근수는 ‘우리나라의 보물은 귀국 것들과 다소 다릅니다.’라고 하고 최루백의 효행을 설명한다. 그러자 각국 사신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것이 어찌 조선만의 보물이겠습니까. 만천하의 보물입니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수원최씨 사적지에 보존되어 있는 최루백의 효자비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앞면에는 ‘高麗孝子翰林院學士崔屢伯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비두碑頭는 비신과 별석으로 조성된 투구형의 단조로운 조각형태이다. 비각은 팔각지붕의 한식 골기와를 얹은 겹처마집이며 기둥은 원주형 목주로 1969년 3월에 중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