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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6일(목)
* 시작 기도
(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주님...
이스마엘 상인들에 의해 애굽에 들어온 요셉은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려 그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주어진 일을 볼 때에 요셉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형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립하게 됩니다.
내 뜻대로 잘 되는 것이 형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임을 봅니다.
그렇게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지만 거기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의 범사가 형통케 됩니다.
그의 현재의 상황은 감옥살이이지만 그의 영은 주님과 함께 하므로 형통합니다.
나의 현재의 상황 역시 만만치 않은 상황이지만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함으로 진정한 형통을 누리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주 안에서 영이 누리는 은혜를 보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이 하루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0:22-31
제목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 나의 묵상
주님은 말씀하신다.
문을 통해서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들어가는 자들은 모두가 도둑이요 강도라고.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다.
문지기는 양의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 또한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알기에 그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그 음성을 듣고 잘 따라오지만 다른 이들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도망한다.
여기서 양의 목자는 나는 양의 문이요 또한 선한 목자라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다른 이 곧 양들이 음성을 듣고도 따르지 않으며 오히려 도망하는 이들은 자칭 선생이라고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면서 꼴을 얻는데 그 꼴은 곧 구원의 꼴이요 영생의 꼴이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이지만,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그러나 삯군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도망하므로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헤친다.
선한목자이신 우리 주님이 양을 알고 양이 주님을 아는 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 품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선한 목자이신 아들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 곧 생명을 버릴 수 있다.
게다가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어서 그들을 인도하여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 주님이 선한 목자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요 3:13-15)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십자가)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다.
예수님의 생명은 누가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 자신에게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는데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이 권세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이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사용하신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들의 일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며 그것은 곧 자신이 높이 들리는 것과 그 일을 통해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 곧 영생이다.
(요 17:4-5)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한편 초막절이 지나고 3개월 정도가 지나 수전절이 왔다.
그 때는 겨울이다.
수전절은 ‘하누카’라고 하여 ‘빛의 절기’라고도 불린다.
그 이유는 각 가정마다 가장 깨끗한 기름으로 등불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태양력으로 11, 12월에 해당하며 유대력으로 9월25일부터 8일간 지켜지는 절기이다.
헬라의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에 4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다.
그 중 시리아를 통치하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 피를 뿌린 사건이 있었다.
이를 보고 마카비 형제가 저항하여 결국 주전 164년에 이를 물리치고 성전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다.
이 수전절을 겨울이라고 한 것은 당시 때가 우기였기에 아마도 지붕이 있는 솔로몬 행각으로 다니시면서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르치셨던 것 같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또다시 대적한다.
당신이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려고 하느냐면서 당신이 만약 진짜 그리스도라고 하면 밝히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 때 주님께서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하였지만 너희들이 믿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도 내 양을 알기에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가 내 음성을 듣는 내 양들에게 영생을 주는데 그 영생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생명이며 또한 이것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결단코 없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만물보다 크시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라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오늘 본문 24절 이하에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이 심히도 초조하고 불안한 것 같아 보인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기는 싫고 그렇다고 안 믿자니 그가 행한 표적들이 결코 범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기에 굉장히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대하면서도 당신이 진짜 그리스도이면 제발 좀 밝히 말해 달라, 좀 속 시원하게 말해달라고 채근하고 있는 모습이 못내 안쓰럽기까지 하다.
안 믿을 수도 없고, 믿기는 싫고, 마치 자기들이 먹을 수는 없고 안 먹고 남을 주자니 아까운 그런 꼴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것, 아니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은 자연스럽게 받으면 되는 것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이를 감사히 받으면 되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양이 아니기 때문에 아들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선물인데 심지어 그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어느 무엇 하나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의로운 행위를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자랑하고자 함이 하늘을 찌르는데 아무런 의도 드러내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은 고사하고 사도 바울이 내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자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적대적으로 대들며 대적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이라면 하지도 못하는 몸을 써서 하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부교역자 시절에 예배당을 리모델링하는 일이 있었다.
리모델링 맨 마지막 순서로 예배당 옥상에 화단을 조성하기 위하여 흙을 나르는 일을 하였는데 때는 여름이었다.
토요일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나와서 흙을 퍼서 옥상으로 나를 때 나도 함께 양복을 벗고 흙짐을 날랐다.
날이 얼마나 더웠던지 온 몸에서 땀이 비같이 쏟아졌다.
사실 난 힘이 없어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지만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의 칭찬이었다.
‘역시 우리 김목사님은 달라도 뭐가 달라.’ 하는 식의 칭찬은 없던 힘도 생기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일을 할 때에 그 많던 부교역자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나 혼자만 웃통을 벗고 흙짐을 날랐던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 날 기가 한 껏 살아서 그 일을 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때문이었다.
내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이런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이런 내가 영락없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아집과 고집불통으로 똘똘 뭉쳐있는 자기 義는 하나님의 이름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직 자기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말만 동역자들이었지, 부교역자끼리는 알게 모르게 경쟁상대였을 뿐이다.
말이 좋아서 선의의 경쟁상대였지, 다른 부교역자에 비하여 뒤처지거나 더 좋은 결과물을 내지 못하면 도태되는 그런 시대에 영적지도자 생활을 했었다.
이런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영적으로 도전을 주었을 것이며, 복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복음은커녕 그저 이 땅에서 잘 되는 복만 추구하며 설교랍시고 전했던 나 자신이 정말 비참하고 추하기가 그지없을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사셨다.
이는 창세전의 세계에서부터 그리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아들은 그 생명을 받아 아버지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였다.
그 아버지는 또한 아들의 복종을 받되 그것을 착취하거나 빼앗지 않으시고 받은 그 복종을 다시 아들에게로 주시는데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으로 하셨다.
그 사랑의 본질이 곧 영광이며 이 영광을 가리켜 ‘본질의 계시’ 또는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한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들은 누가 그의 생명을 빼앗아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릴 권세를 가지고 양들을 위하여 버린 것이다.
이를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었다.
아들은 창세전이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실 때나 초지일관 아버지의 품속에 거하셨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처럼 독생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심에도 자신은 감추셨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아들을 알지도 못하는 그런 자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 복음이 나를 살렸다.
그래서 지금은 날마다 생명으로 살아간다.
이 생명은 곧 아들의 생명이요 궁극적으로는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생명이다.
오늘 하루도 이 아들 안에 있는 생명으로 살기를 원한다.
나는 없어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내 영혼을 소성케 하시는 주님이 나의 생명의 원천이기에 그분만 따라가는 순한 양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며 주님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 주님이 말씀하시는 곳까지 가면 되는 것이다.
그보다 앞서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않는, 주님과 손잡고 연합하여 함께 동행하는 그런 주의 자녀로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 나라가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앞을 가릴 것을 생각하니 기쁨이 한량없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런 자로 사는 자는 다른 소원이 없다.
오직 한 가지 내 아버지 집에 거하여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시 27:4-5)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날개)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리시리로다.
나를 주님의 초막과 장막 곧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기시고 지켜 보호하시는 그 크신 은혜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쉐키나의 영광이 나를 비춘다.
오늘도 나는 승리의 걸음을 걷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혼의 안식처요 피난처 되시는 주님의 품속이 가장 안전합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시고자 가장 높은 곳에 들리셨습니다.
감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 높은 십자가에 스스로 오르셨습니다.
머리에는 멸시와 수모의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는 대못이 박히며 옆구리에 창이 찔려 우리의 머리로, 손과 발로, 온 몸으로 행한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신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감히 사랑할 수 없으나 이런 비천한 죄인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또한 그 품에 품어주셨으니 나도 주님을 따라 그 길을 걷겠나이다.
주님의 사랑의 품이 되어 이 땅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의 품으로 끌어안습니다.
나의 품이 주님의 품이 되게 하사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님의 품에 받아주소서.
오늘도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내 몸과 마음 가득 채우나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오늘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육신의 곤고함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종들을 긍휼히 여기사 저들도 주님의 초막에 비밀히 그리고 가장 안전히 지켜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