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를 통해서 인간의 죄 때문에 의로우신 분이 주도권을 쥐고 나라를 만드는데, 그 나라가 거룩한 나라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이 거룩해서가 아니고 주도권을 쥐신 분이 그들과 동행함으로 그들이 거룩해 진다는 것이다.
*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가지고 이렇게 만드시는가? 그것은 바로 '언약' 이라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을 가지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신약에서 '예수 안에서' 라는 것은 무엇인가? 구약에서는 '언약 안에서' 라고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언약 안에서라는 의미를 먼저 알아야 신약에서의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비로소 무엇인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이 아무리 예수 안에서를 외쳐도 이런 구약의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면 모두가 다 거짓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언약 안이란? - 너희들 행위의 밖인 외부에서 작용한다 !!
* 그래서 언약 안이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활동하는 영역 안에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리품으로 너희들을 획득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전쟁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루어지는데, 전쟁은 물론 가나안 족속들과도 벌리시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인 그 내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전쟁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 전쟁에서 패배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언약 안에서' 라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날마다 패배를 당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만이 승리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잘못이라는 것이다. 주님만이 승리자임을 보여주는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열매가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내가 과거에 얼마나 많이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 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는 전쟁을 하는 나라안 동시에 전쟁을 당하는 나라이다 !!
*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나라안 동시에 전쟁을 당하는 나라이기에,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로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바로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계속해서 바로의 아들임을 보여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계속해서 승리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계속해서 주(主)가 되는 입장에 놓이는 것이다.
◈ 출애굽기란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
* 성경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가?' 라는 것을 알아보는 마음가짐으로 보면 다 이해가 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더욱더 잘난 놈이 될 것인가?' 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성경을 매일 보고서도 지옥 가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생 교회에 다니다가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를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귀의 자식이고 바로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승리자로 주님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늘 승리하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믿음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 되어야 하는데, 과거에 나도 의미가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고, 지금 이 순간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내일도 계속되리란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10년을 믿다가 한번 잘못(?)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그러나 언약 안이란, 그리고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가능성도 고려하지를 않는 장소인데, 이 언약이 커져서 하늘나라가 되는 것인데, 그래서 하늘나라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주님의 나라인 것이다.
* 인간은 원래 땅에 살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땅의 나라이고 인간의 나라인데, 그리고 하늘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의 나라인데, 이 하늘나라에서 인간인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건방지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 오늘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극장에 들어갔다고 해서 내일도 극장에 동일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일은 또 다시 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극장은 그 주인의 고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 한번 하늘나라에 들어왔다고 영원히 하늘나라에 속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 나라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나라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날마다 끊임없이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나는 오직 이 나라의 주인이 불러주었기에 여기에 왔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바로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들은 '내일도 동일하게 또다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이제는 절대로 실수를 하면 안 되겠네'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바로 자기가 자기의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고 유지시킨다는 것을 믿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에 자꾸만 자기의 의지와 열심에 기대를 건다는 것이다.
*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믿을 바에야 교회에는 왜 나오는가? 그냥 '내 주먹을 믿자' 라고 하면서 집구석에 박혀 있으면 되지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날마다 이런 자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추방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축구의 골키퍼라는 것이다.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들을 모조리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목회였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골키퍼와 같이 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꼭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소리만을 골라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서도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기적적으로 넣어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눈감고 찼는데 골인이라는 것이다. 즉, 들어가 보니 천국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자들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넣어준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 교회의 사명 - 인간을 구원시켜 주지 말자 !!
* 전력을 다하여 저지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렇게 나가라고 때려도 다른 곳에는 갈 곳이 없다고 끝까지 버티고 앉아서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고 말이다.
* 여기서 누가복음 9장을 한번 보자.
(눅 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여기에 보면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언약 안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자에게는 천국이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좇겠습니다' 라고 분명히 인간 쪽에서 먼저 말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래 오너라' 라고 하시면 되지, 왜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좀 봐주면 안 되는가? 장사 지내는 마지막 작별인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예의범절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가? 그냥 집을 나가도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아버지께 인사를 하는데 말이다. 예수님이 여기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주 작아 보이는 가족과의 작별인사를 확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여기서 쟁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돈을, 집을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는 것인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예수님을 따라가면 머리 둘 곳이 있지 않겠는가? ② 아버지 장사를 지내는 것은 설마 쟁기가 아니겠지? ③ 가족들끼리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쟁기가 아니겠지?
* 다시 말해서 이런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학교에 가겠다고 열심을 내어 보지만, 그러나 그 신학교 바로 뒤편에 지옥이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 가기 전에는 죄인인줄 알다가, 신학교에 가서는 그만 자기를 주의 종으로 여기니까 어떻게 되겠는가? 신학교에서 교만으로 '뻥!' 하고 튀겨져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 이러한 인간의 종교심들이 교회로 모이면 정치가 되는데, 힘의 구조가 되는데, 모든 것을 진리로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과 힘의 우열로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무슨 이러한 나라인가? 김일성의 나라이고 인간의 나라이지 말이다.
* 특히 신약성경이 어려운 것은 구약에서 이미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철저히 거부를 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은,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 버려두사'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교육을 하고 Q.T를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희망을 제공하는 것은 교육이고 말이다. 예수님이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신앙교육(훈련)을 시켰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선교단체 등에서 만들어낸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무식함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다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 하나님의 말씀이 폼으로 있는가? 반드시 실현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말의 때인데, 그 종말의 때가 인자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무지 사람들이 들어도 전혀 모르는데,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서도 아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렇게 '복이 있다' 라는 것은 사람의 혈육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복', '복' 이라고 해도, 사실 우리가 이러한 종말에 일어날 현상을 아는 복을 받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것이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다.
* 누가복음 9장에서 '나를 좇으라' 라는 의미를, 장사를 지내지 않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차원으로 이해를 하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여전히 자기의 행함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천국에 가겠다는 것인데, 그러나 생명나무는 이러한 자들에게는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자기의 소유를 다 팔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이 부자 청년이 자기의 소유를 팔면 주를 따라 갈 수가 있는가? 자기 소유를 팔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꼭 인간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의 행함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시면 자기에게로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어떠한 마음가짐으로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을 아버지에게로부터 좇아내는 말씀이다 !!
* 어떻게 인자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을 수가 있는가? 칼을 들고서 예수님의 몸을 해부하라는 말씀인가? 집에 돌아갔다가 성령이 부르거든 오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즉,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전자를 조작해서 낙타를 바늘귀보다 작게 만들면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 제자들이 의아해하면서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예수님은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고, 그래야만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을 출애굽기에다가 적용을 시켜보면, 언약 안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행, 인도하심 등이 그러한 의미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용사라는 것이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이것을 붙여주심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직접 치르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도록 해주시는, 그렇게 붙여주셔서 이기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돈까스를 만드는데, 중요한 것은 요리사의 솜씨이지 겉에 조금 뭍은 살 가루인 주제에 자기가 들어갔다고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이 말을 총신에 가서 했는데, '마지막 종말 때에는 에스겔에 예언된 성령이 와서 모든 것을 합니다' 라고 하니까, 학생들이 하는 말이 '성령을 받은 우리들도 무엇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명령법도 있으니까 말이다. 정훈택, 이한수, 권성수 등의 수준으로 말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통해서 일하는 줄을 모르고, 인간을 통해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 물론 이러한 것도 다 주님의 뜻인데, 아마 주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두심으로 말미암아 마지막에 핍박을 받도록 하는 그런 장치를 설치하도록 여겨진다는 것이다. 마치 서커스를 하는데, 엉터리 기술자들을 불러서 타는 줄을 잘못 매도록 함으로 말미암아 줄을 타다가 죽으라고 순교의 틀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함으로 말미암아 요한 계시록이 완성이 되고, 예언서들이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었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 매어진 엉터리 줄을 타고 서커스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려가야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순교자를 내는 것이 요한 계시록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직 주님이 시키는 데로만 살아가면 되고, 그래서 사도바울과 같이 죽는 것을 소원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주의 종으로 목회를 잘 할 테니까 잘살게 해달라'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흔히 이근호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많이 배워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무엇하겠는가?' 라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나 전쟁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들이 배운 지식을 써먹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데반처럼 외치다가 죽으면 OK라는 것이다.
*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성경지식이 많다고 해서 더 크게 사용하고 살려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사업적인 방법이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죽을 때도 아직 안 되었는데 죽으려고 설치는 것도 역시 자기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교만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순교의지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주기철과 손양원 등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이다.
*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안 한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다. 언약 안에서는 자기 목숨을 받친다고 할지언정 인간의 공로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 이런 것이 요한 계시록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불교 신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욕을 들으면 혼란스럽지나 않지만, 그러나 가장 고상하고 인격적인 김진홍이나 홍정길 등에게 순교를 당한다고 한다면 헷갈리는 것이다.
* 우리들 자신의 성경에 대한 지식의 축적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에 한번 언급을 했지만, 십자가는 진공 청소기와 같아서 십자가는 십자가 자체로 빨아들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이 모든 것을 다 빨아 당긴다는 것이 아니고 생명책에 기록된 명단대로 뽑아내는데 한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머리카락을 모두 다 뽑아서 대머리가 되어도, 교회에 나올 사람은 다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총신의 어느 교수가 복음에는 걸림돌이 있다고 하니까, 어느 학생이 안되었다는 투로 교수님에게 기도를 많이 하라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 학생을 마귀새끼라고 하면서 좇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F 학점 감이고, 이런 학생에게 학점을 준다면 주님에게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교수가 가만히 있더라도 복음을 아는 학생이 그것을 지적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 수업시간도 복음을 전하는 시간인데, 이런 대화를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무식한가를 깨닫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도전이 되고 더욱더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는 쉬는 시간이 없는 것이다.
* 주의 일은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든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없다고 해서 주의 일을 못한다고 하는 것은 삯군 목자들의 일관된 주장인 것이다. 강단을 자기들의 생계 수단으로 삼는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출애굽기에서의 일관된 주장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알아서 너희들을 데려오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너희들이 못마땅해지면 언제든지 탈락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가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레위기이고 말이다. 그래서 이 레위기는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그러한 취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레위기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매일 죽는 사람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감을 보여주는 책이다 !!
* 갈렙은 자신을 늘 죽이는 자였는데, 그래서 갈렙은 언약 안에서 주님의 막강한 용사 되심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가나안의 적들이 매우 장대하고 막강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데 그것하고 주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이 전쟁은 힘과 양의 싸움이 아니라, 의(義)와 악(惡)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세속에 대한 거룩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고 한번 살아보려는 것이다. 그분이 전지전능하니까 어떻게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한번 잘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고, 잘난 우리들의 모습이란 것이다.
◈ 신앙생활에는 환경이 바로 가장 큰 유혹거리이다 !!
*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환경이 바로 가장 큰 유혹거리인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환경이 항상 장대한 아낙 자손과 같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땅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네피림의 후손으로서, 그렇게 유혹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창 6: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 이 땅을 포기하면 되는데, 그것은 산 속에 들어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날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죽이는 과정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주는 것이다. 칼로서 자기 자신을 깊이 푹 찔러 죽이는 그 과정을 말이다.
◈ 설교란 자신을 죽이는 과정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주는 것이다 !!
* 그래서 목사의 설교는, '성도 여러분, 저는 교인을 한 500명으로 끌어올려서, 그랜즈를 타고 다니고, 50평 짜리 아파트에 살고, 100만원 짜리 양복만을 입으려고 하는 그러한 나쁜 놈입니다!' 라고 하는 자기 고백이 항상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 날카로움으로 먼저 목사 자신의 심장을 푹 찔러야 하는 것이다. 목사 자기 자신을 먼저 말이다.
* 이렇게 설교를 하면서 자기의 고백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성도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좋은 집과 최고급 승용차를 가지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같이 십자가의 날카로운 칼에 자신을 찌르고 다 같이 함께 찔려야 한다는 것이다.
* 상번제 - 이렇게 집단자살(?)을 하는 것인데, 이것을 구약의 제사에서는 '상번제' 라고 하데, 아침에 양을 한 마리, 그리고 저녁에 양 한 마리, 그렇게 매일같이 죽인다는 것이다. 나와 같이 따라 죽을 사람들은 여기 여기에 다 모이라는 것이다.
◈ 죄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이다 !!
* 죄라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은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이러한 것을 낱낱이 꼬챙이를 가지고 다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악역을 도맡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다스리는 참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면 언제든지 생기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즉, 교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발생한다는 것이다.
* 교회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주특기로 모인 것이 아니고, 반대로 자기 이름을 죽이는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발생될 수도 있고, 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 교회는 없지만, 교회가 있음은 우리들이 바로 주의 이름을 전할 때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판하시는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최초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회장이 야단을 치면 그에게 나가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나가든지 말이다.
* 어제 설교를 하면서, 사람이 죽을 때에는 용감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때만을 치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건물이 무너져서 죽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취직을 시켜달라는 소리가 나오겠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그 꿈틀거림을 가지고 밖에 나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일이 되는가? 라고 반문할지 몰라도,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일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 사람에게 있어서 환경이란 하나의 유혹거리라고 했는데,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갖고 싶어하고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을 고이고이 자기의 것으로 간직하고 사유화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이렇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자기 이름의 자식들로 보고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열매들이 문명이고 문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후손들이 하는 짓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내가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그냥 가면서 말이다.
◈ 레위기의 초점 - 왜 흠 없는 희생물이 등장해야 하는가?
*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제사가 중심이 되는데, 그래서 '제사장 나라' 라고 하는데, 제사에 종사하는 제사장, 그리고 대신 죽어야 하는 제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영역(공간),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제사의 3대 요소인데, 즉 제물과 제사장을 하나로 보고, 장소와 그리고 하나를 더 추가하면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간은 안식이고 말이다. - 멀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 종교의 본질] 참고
◈ 제사의 3대 요소 - ① 제물 ② 장소 ③ 시간
* 제사 드리는 그 중심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늘 떠오르게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이름이 구체화 될 때는 제사 드리는 제물, 혹은 제사장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등장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래서 이 제사를 보다 확대를 해보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매일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로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매일같이 마음속에 제사가 드려져야 되고, 십자가의 피가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의 촉촉함이 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처럼 말이다.
* 제사는 항상 법궤가 있는 곳에서 드려지는데, 이 법궤가 있는 장소에는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소의 문이 어디로 나 있는고 하니 동쪽으로 나 있다는 것이다.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제단의 터는 생명나무와 이 세상의 관계를 판박이로 박은 것처럼 그대로 박아놓았다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보았던 생명나무가 차단 된 상태를 지상에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대로 복사를 한 것인데,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모형' 이라고 하는 것이다.
* 모형이라는 것은 진품이 따로 있다는 것이데, 기능적으로 생명나무는 차단이 되어있고 심판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 역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다 파내어서 불로서 태워버리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심판을 늘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또한 무슨 일을 하시는가? 전쟁을 하시는데, 이 전쟁을 하면 노획물이 생기는데, 내가 친히 얻어서 아버지께서 새로 창조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 그러면 왜 이렇게 반복을 하시는가? 그것은 시간의 세계 속에서 묵시를 이야기하려다가 보니까 이러한 반복이라는 표현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묵시의 세계에게서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데 말이다. 이것을 시간의 세계에서 그렇게 말해버리면, '야, 구원받았다. 이제는 내 마음 대로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복음의 이러한 비밀을 시간 속에 집어넣으니까 반복상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의 세계에서는 단회성과 반복성이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시간 속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완성이면 완성된 것이고 미완성이면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차영배 교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카이퍼의 저수지 이론을 말하기도 하지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이다.
* 왜 이러한 주장을 하는고 하니, 인간은 언제나 적그리스도에게 매여있다는 것이다. 악마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환경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패션이 유혹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야말로 유혹거리라는 것이다.
(레 14:14) 제사장은 그 속건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를 것이요 (레 14:15)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좌편 손바닥에 따르고 (레 14:16) 우편 손가락으로 좌편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요 (레 14:17)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는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 제사장(=문둥병자) - 다시 정리하면, 레위기는 제사의 반복인데 제사장은 거룩한 모습을 뛴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오른쪽에다 피를 바르는데, 이것은 제사장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도 그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자비로 문둥병에서 회복된 자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거룩의 의미는 바로 문둥병자의 의미라는 것이다. 저주를 받아야 할 문둥병자인 우리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 여기서 열왕기하 7장을 한번 보자.
(왕하 7:9)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왕하 7:10)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 이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인데, 그래서 문둥이들은 공짜로 먹었는데, 그러나 성안에 있는 멀쩡한 사람들은 굶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더 병신인가?
* 베냐민이란 오른손의 아들이란 의미인데, 그런데 어머니 라헬은 이를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라헬이 죽었다는 것은 야곱의 시절이 끝났다는 것인데, 야곱과 에서가 싸웠던 그 싸움은 야곱의 두 아내들 사이에서 끝임 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 그래서 야곱의 12 아들은 그놈의 자식의 그놈의 아들들이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세속적인 바로의 어둠의 더러운 자식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헬이 자기 팔자가 서럽다고 아들의 이름을 슬픔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자기는 마땅히 이 땅에서 성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생명나무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놓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인간의 나라에서 영웅이 되려고 하는데, 그래서 생겨난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가 예수님의 행색을 보고 따라가겠는가? 목사 사모가 정신병에 걸릴 만 하지 않는가? 여자는 남자를 믿는데, 그런데 제대로 된 목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연결다리가 있는가? 다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서로 대치된다는 것이다. 욥의 아내가 욥을 보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소리가 너무나 당연하지 아니한가?
*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인간은 이 땅의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것이기에, 그 죄 가운데서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 믿어질 수도 없고 믿어질 리도 없다는 것이다. 장님이고 귀머거리고 절름발이라는 것이다. 장애인의 날은 우리 모두의 날이라는 것이다.
* 송명희라는 뇌성마비 장애시인이 하나님은 공평하다고 했는데, 그들이 모르는 소리를 듣게 하고 진리를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녀는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이다.
* 홍정길이 새로이 장애자 교회를 목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이전의 남서울 교회는 장애자 교회가 아니었던가? 아직까지도 여전히 윤리 도덕의 수준을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손봉호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모든 본질을 모두 까 발긴다는 것이다.
* 엘리엘리라마사막다니 -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모습이 촉촉하게 우리들의 가슴을 적시고 때로는 꼭꼭 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되었으면 남편을 믿지 말고 예수님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치원생도 다 아는 이러한 이야기를 시집간 여자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오직 남편의 팔만 끼려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뭐가 되는가?
* 레위기는 이렇게 제사에 중심이 있고, 피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피에서 생명이 폭발하고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죽으면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다. - 명저 [성경과 한국교회]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