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의 풍류와 수묵인 남천 ● 흔히 작가로서의 남천을 수묵화가라고 부른다. 모두 알고 있듯이 수묵은 동양 회화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보편적인 재료이다. 수묵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가 비단 남천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닐 터임에도 불구하고 남천을 수묵화가, 수묵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단지 그가 먹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거나, 혹은 이를 다루는 재주가 유별났다는 피상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 남천은 전북 전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맛과 멋, 그리고 소리의 고장이라 일컬어지는 전주는 풍류의 예향이라 일컬을만한 곳이다. 넉넉한 김제 평야의 들녘과 이를 적시며 느리게 서쪽으로 빠져 나아가는 만경강, 그리고 민간 신앙의 성소로 손꼽히는 모악산은 바로 풍류의 고장 전주를 만들어 낸 모태들이다. 풍류는 본래 앞선 성현들의 유풍이나 전통을 일컫는 것이지만, 고상한 아취(雅趣), 즉 멋스러움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신라의 화랑도에서부터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올곧고 청정한 선비 정신이라는 지성적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 풍류라 할 것이다. 속되지 아니하고 격조와 우아함이라는 고상한 정취를 추구하는 풍류는 바로 한국미의 본질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 남천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이러한 태생적 환경과 연관이 있을 것이며, 더욱이 그가 수묵으로 평생을 일관하며 일가를 이룬 점 역시 이러한 배경과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라 여겨진다. 남천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바로 전주의 풍물과 서화를 좋아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바 있다. 한벽루, 경기전, 조선 왕릉의 소나무 숲 등은 바로 그 자체가 서정이 듬뿍 묻어나는 동양화 같은 것이었으며, 할아버지의 사랑방에서 접하게 된 묵향은 어린 남천을 평생 수묵의 길로 이끌어 준 단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남천이 처음부터 수묵과 같은 전통적인 재료와 그 심미에 몰입하였던 것은 아니다. 어린 남천은 경기전, 조선 왕릉을 돌며 화판을 들러 메고 수채화를 그리며 그림을 배우고 익혔다. 비단 남천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술에 입문하게 되고 조형을 익히게 된다. 서구화와 현대화라는 사회적 대명제는 전통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보다는 새로운 것이 수입과 수용에 급급했을 따름이다. 남천이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수순일 것이며, 홍익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남천은 분방하고 자유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훗날 이경성 선생은 이 당시의 남천을 ‘나무 가운데 토막 같은 풍모에다 너털웃음을 웃는 열정 넘치던 미술학도’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서양화과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남천은 서구의 새로운 사조를 탐닉하는 전형적인 서양화학도였다. 그가 전공 자체를 바꾸어 한국화의 길로 획기적인 선회를 한 것은 바로 군에서 제대한 4학년 때라 기록되고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고향 산천과 정서를 표현하는데 서양화가 과연 적합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찾아든 것이다. ● 이때 접하게 된 한하운의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시는 마치 청년 남천의 잠들었던 본질을 일깨우는 뇌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중략... /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찔름거리며 가는 길 ● 남천은 이 시를 통해서 잃었던 고향에 대한 애정과 정서, 그리고 작가 혼까지를 동시에 일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느리고 완만하게 흐르는 고향의 산들, 그 사이로 난 붉은 황톳길,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내음을 표현하는데 서양화는 너무 현란하고 가볍게 느껴졌을 뿐 아니라, 동양화의 깊고 심오한 수묵의 세계가 바로 이러한 고향의 혼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재료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 무심한 유년의 추억에서부터 청년기의 진로 설정에 이르기까지 남천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전주라는 특정한 시공 속에서 배태되고 성숙된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어린 시절에 이미 평생 배워야 할 것을 벌써 다 배워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의 작업이란 단지 이러한 시절에 축적되어 진 추억을 회상하며 이를 통해 전해지는 정서와 감상을 다듬고 정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풍류가 선비 정신으로 이어지며, 나아가서는 한국미의 본질을 관류하고 있는 중요한 특질 중 하나로 이해되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수묵인으로서의 남천과 그 평생 추구했던 수묵의 길, 그리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어쩌면 이 시기에 예향 전주라는 특정한 공간 속에서 이미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송수남_산_한지에 수묵담채_196×130cm_1966
송수남_금강산_한지에 수묵담채_162×130cm_1968
송수남_지운영 꽃밭_한지에 수묵담채_166×130cm_1968
송수남_산_한지에 수묵_91×116cm_1978
실험과 도전 - 질풍노도의 시대 ● 동양화과로의 전과 이후 남천은 왕성하고 의욕적인 한국화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 1960년대 중, 후반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청년 남천은 수묵이라는 매제가 지니고 있는 조형성의 모색에 몰입하게 된다. 기존의 수묵이 지니고 있던 획일화된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현대적이고 조형성 짙은 작업에 천착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는 그가 평생을 두고 추구해 온 이른바 ‘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 점차 틀을 갖추게 되고, 이는 바로 작품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이 시기의 작업들은 전통적인 지필묵이라는 조형 수단 중 특히 먹과 물의 작용으로 생겨나는 물리적인 변화와 이의 조형화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시기이다. 모필에 의한 유려하고 기운 찬 필선이나 남종문인화적인 시서화 일체의 전통적인 조형 체계 대신 남천은 번지고 스며드는 종이와 먹의 만남이라는 근본적인 과정에 주의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나는 우연의 효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전치시켜 조형이라는 틀 속에 안착시키는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이게 된다. ● 이와 같은 물성자체에 대한 관심은 남천이 서양화를 전공한 전력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지는 대목이다. 즉 전통적인 필묵 조형의 본격적인 수용에 앞서 그것이 비록 정신성을 강조하는 수묵일지라도 일단 재료적인 기능과 조형적인 효과에 보다 관심을 두는 물질로서의 수묵이라는 이해가 앞서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남천은 그 내면에 침잠되어 있던 고유한 정서를 조심스럽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색동과 단청, 그리고 석탑 등 극히 한국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형상들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이른바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앞으로의 작업 행로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바로 어린 시절부터 이미 형성되어 진 것으로, 남천의 평생 작업에 일관되게 작용하는 화두로 자리 잡게 된다. ● 일찍이 1956년 전주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선 남천의 예술 역정은 예의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실험 정신으로 일관되고 있다. 특정한 형식이나 이미 획득되어진 내용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실험 정신은 바로 작가 남천의 예술 혼이자 작가적 기질을 잘 반영해 주는 것이다. 평론가 오광수는 “대개의 실험 작가들이 청년 시절의 한 때에 국한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오던 터인데, 남천의 실험성은 최근까지도
그 꾸준함을 보여주는 편이다. 그의 회화적 편린은 실험의 연속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남천의 실험 의식을 평가한 바 있으며, 대만의 관집중(管執中)선생은 남천의 도발적인 실험 정신을 ‘유구(流寇)’라 표현한 바 있다. ● 60년대의 한국화단은 남도풍의 관념 산수 일색이었으며, 채색화는 여전히 일본화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던 미망의 시대였다. 전통 회화의 지지부진한 답습 상황과 서구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사조의 파격적인 조형 의식들은 청년화가들에게 충격과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서구 조형의 수용하고 이를 소화해 내는 것이 바로 현대적인 것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인식되던 것도 이 시기의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천은 오히려 전통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라는 일견 진부한 화두로 이 시대를 거슬러 오르기 시작한다. 1969년 신문회관에서의 두 번째 개인전은 「송수남 한국화전」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남천이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동양화라는 말 대신 한국화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연 것은 일정 부분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당시 출품된 작품들은 「한국 풍경」, 「한국 가나」, 「한국 나라」, 「한국 색동」등의 명제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화면에는 단청이나 색동, 석탑과 같은 한국적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형상들이 등장하며 수직으로 강하게 내려 그은 독특한 산수를 선보이고 있다. 전시의 명칭도 그러하거니와 작품의 내용과 명제들까지 모두 한국적인 것으로 모아지고 있는 이 시기는 어쩌면 남천이 평생을 두고 천착해 온 이른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예술적 서원을 분명하게 한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수남_청산풍경_한지에 발채색_90×105cm_1978
송수남_장강_한지에 수묵담채_69.5×139cm_1988
송수남_붓의 놀림_한지에 수묵_60.5×72.5cm_1995
송수남_붓의 놀림_한지에 수묵_130×162cm_1998
발색산수와 수묵으로의 회귀 ● 70년대 초반 남천의 산수는 돌연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마치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한 독특한 준법을 반복적으로 중첩하여 몽환적인 화면을 구축하고 여기에 담채를 더함으로써 장식적인 관념적 산수를 만들어 내었다. 남천의 이와 같은 관념적 산수로의 회귀는 당시 화단의 흐름이 실경 산수 일변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다소 의외인 것일 수밖에 없다. 당시 실경 산수는 가히 열풍이라 할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한 것이었다. 모두가 명승을 찾아 스케치북을 들고 떠날 때 남천은 오히려 고적적인 가치를 발견하고자 전통적인 것에 눈길을 둔 것이다. 예의 반역적인 실험 정신과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신뢰가 바탕이 된 선택의 결과가 바로 관념적 산수의 등장 배경이었을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의 재발견, 혹은 재조명과 같은 말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어렵거나 건강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될 때마다 제기되게 마련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특정한 조건과 상황이 만들어 낸 시대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옛 것에서 새로운 것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비판만으로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비판의 극복이 이루어져야 하며, 분석만이 아닌 이해와 해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경 산수가 우리산천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국미의 한 전형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시도였다면, 남천의 관념적 산수로의 회귀는 전통적 양식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통해 한국미의 본질에 접근해 보고자 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 남천의 관념적 산수는 1975년에 이르러 대규모의 발색이 가미된 보다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산수화를 선보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먹과 색의 어울림은 주종의 관계가 분명하여 수묵화인 경우 색채는 단지 담채로 그쳐 수묵의 표정을 풍부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먹과 강한 원색의 병용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야기하여 상극의 작용을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념이었다. 남천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짙은 원색의 파랑과 빨강을 서슴없이 화면에 도입하였다. 남천의 이러한 변화는 나름대로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 유력하게 거론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서구 미술과의 직접적인 조우 기회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남천은 당시 국제전 자체가 희귀하던 시절에 스웨덴의 왕립 동양 박물관으로부터의 초대전 제의를 받게 된다. 최초의
외국 개인전을 맞게 된 남천의 고민은 여하히 ‘한국적이면서 현대적인’작품을 그들에게 선 보일까 하는 것이었다. 굳이 관념적인 산수를 형식으로 채택한 것은 산수가 동양 회화의 가장 중요한 화목일 뿐 아니라 동양 사상의 고유한 특질을 잘 반영해 낼 수 있는 효과적인 형식이라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과감하고 원색적인 색채의 도입은 서구인들이 지니고 있는 감상 습관과 체계에 부합하고자 하는 목적이 짙게 베어있는 것으로, 이를 현대적인 것으로 이해한 결과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남천은 서구 미술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하여 오히려 색채가 지니고 있는 한계성을 절감하고 한국적인 독창성과 특수성만이 우리 미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수묵은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화가로서는 흔치 않게 「水墨畵」라는 책과 「東洋畵」라는 개설서를 연이어 출판하고, 훗날 「수묵화 운동」이라 명명되어진 집단적 미술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수묵에 대한 가치 확인과 그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전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스웨덴의 전시 이후 남천은 본격적으로 수묵의 세계로 회귀하게 된다. 이는 관념 산수의 양태로 나타나게 되지만 이전의 그것과 다른 점은 점과 선의 무수한 집적을 통하여 수묵의 기운이 보다 풍부해진 점이 특징이다. 즉, 남천은 전통 산수라는 형식을 빌어 수묵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심미적 본질에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해 보고자 한 것이다. 남천의 이러한 수묵 회귀에 대해 평론가 박용숙은 “송수남의 신작들은 여전히 현대적인 미감을 기조로 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현대적인 미감이란 구미의 현장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탈 문명적인 것, 환경적인 것 등의 이른바 원시적 사고를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자연학적인 의미의 산수화 세계와 그다지 큰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님을 양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설한 바 있다. ● 남천의 수묵 회귀의 관념 산수라는 형식 속에서 점차 숙성되고 다듬어져 마침내 특유의 수묵 산수로 나타나게 된다. 수평구도를 바탕으로 검은 산들과 하얀 여백이 어우러지는 간결하고 다듬어진 산수 양태는 전에 없던 조형적 얼개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관념 산수의 경직된 전형화된 양식에서 벗어난 구성적이고 조형적인 수묵 산수는 가히 ‘남천 산수’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른바 ‘남천 산수’는 비록 산수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반드시 실경이나 관념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조형적이면서 구성적인 남천의 수묵 산수는 독립된 조형일 따름이며, 드러나는 형상들은 바로 작가의 조형의지를 담아내는 부호와도 같은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과 조형 의지가 반영되어 나타나게 된 독특한 수묵의 심미세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주관적인 공간의 경영과 형상의 운용은 남천으로 하여금 번잡스러운 현실경의 형상 재현이나 관념 산수의 경직된 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스러운 공간을 확보해 주었으며, 이는 바로 수묵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송수남_붓의 놀림_한지에 수묵_145×111cm_1999
송수남_붓의 놀림_한지에 수묵_59×81cm_한지에 수묵_1999
송수남_묵상_한지에 수묵_90×98cm_2000
송수남_붓의 놀림_한지에 수묵_181×227.5cm_2002
송수남_붓의 놀림_한지에 수묵_149×179cm_2003
송수남_붓의 놀림_한지에 수묵_112.5×146cm_2003
육화된 수묵-필은 자유롭고 먹은 깊이 있다 ● 90년대 들어 남천의 수묵은 수묵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심미에 육박하고자 하는 경향을 짙게 드러낸다. 「붓의 놀림」이라는 일련의 명제를 지닌 이 시기의 작업들은 형상에 의지하거나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붓과 먹, 그리고 종이라는 단순 명료한 재료들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원초적인 맛을 보여주고 있다. 즉, 동양 회화의 기본적인 매제와 조형 수단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성질을 십분 발휘케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순수 조형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특정한 계획이나 의도적인 경영에 앞서 본연의 성질을 십분 발휘케 함으로써 필은 보다 자유로워지고 먹은 더욱 분방해진 것이다. 일종의 무념, 혹은 무상의 정신적 경계인 셈이다. 이로써 수묵은 도구적 수단, 혹은 매제적 기능에 앞서 그 자체가 살아 숨쉬는 조형으로서 독립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둔중하고 투박한 선들과 이들이 반복되며 이루어내는 화면은 일종의 운율, 혹은 리듬을 내재하고 있다. 무질서한 선들의 연속된 집적은 상호작용을 통하여 보다 큰 질서를 구축하며, 이러한 질서 속에는 작가의 호흡이 있다. 수묵은 점차 육화(肉化)되어 남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호흡과 같은 여유로움, 숨결과 같은 자연스러움이란 바로 수묵의 또 다른 해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대만의 평론가 관집중(管執中)선생은 남천의 수묵에 대하여 “강하고 질긴 선, 화창한 먹색, 유기적으로 생동하는 공간, 이러한 것들은 남천 수묵화의 독특한 풍격을 이룰 뿐 아니라, 한국 민족의 예술풍격과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여기에 졸(拙)한 선과 무게 있는 먹의 효과를 더한다면 반드시 그 화면은 확장력과 깊고도 두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요구한 바 있다. 「붓의 놀림」연작들은 바로 이러한 요구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평론가 박정구의 “작가의 수묵에 대한 집념은 서구 조형에 오염되지 않고 박제된 전통을 뒤로한 동양화의 정신 위에 구현된 한국화의 전개를 향한 열망으로부터 출발했었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서는 오랜 세월의 모색과 검증을 통한 확신으로 질서 잡힌 연륜을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한국화의 정립을 위한 보다 진전된 또 하나의 처방이자 제시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라는 평은 바로 이러한 연작들에 대한 개괄적인 정리이자 귀납이라 할 것이다. ● 수묵인으로서 남천을 거론함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수묵화 운동이다. 지난 80년대 집단적인 미술 운동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수묵화 운동은 특정한 매제에 대한 집단적 추구라는 점에서 미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경우이다. 이러한 집단적 미술 운동의 첫번째 전시인 명칭이 「전통회화 81」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수묵에 대한 특정한 조건이나 이해의 제시에 앞서 수묵 자체를 자유롭고 분방하게 해석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형적 경험을 축적하고 이의 현대적 가능성을 모색하며, 이를 통해 전통 회화의 가치를 재고해 보고자 하였던 당시의 집단적 움직임은 일정 기간 지속되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수묵을 내용이나 정신으로 이해하기에 앞서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여지를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수묵에 대한 관심을 환기 시켰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전개 과정을 통하여 한국화의 새로운 활로 모색과 다양한 조형 경험의 축적을 이룬 것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재료에 대한 정신성을 유독 강조하는 것은 동양 회화가 지니는 특징 중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수묵에 대한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재료 자체에 이미 특정한 정신성이 배태되어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관건은 바로 그것을 운용하고 경영하는 작가의 주관적 의지가 전제 될 때 비로소 정신성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본의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元佑介)는 “먹이라는 소재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먹을 사용하려고 할 때 비로소 표현은 세계를 향해 열린다고 생각한다. 회화는 무엇이 그려져 있다라는 사실만으로 인상에 남지 않는다. 회화에 있어 중요한 것은 거기에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향해 진로를 열어주는 것이다.… 송수남의 회화는 무엇보다도 그 공간 표현에 특색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평면 위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내면을 향한 깊이를 탐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정신적인 풍경화, 그것이 송수남의 최대주제라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작업 화두를 바탕으로, 수묵의 현대적 가능성의 모색으로 일관된 작가의 작업 역정은 바로 이러한 내용에 대한 확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많은 한국화가들이 수묵을 조형의 매제로 차용하고 있지만 적어도 남천만큼 재료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심미적 특성의 발현과 이의 현대적 표출을 위해 한길을 내 달려 온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의 ‘유구’와 같은 도발적인 실험 정신과 과감한 변신과 변화를 통한 끊임없는 모색의 과정은 단순히 작가 정신으로 형용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이는 수묵에 대한 일종의 구도자적인 신앙이자 신념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남천 송수남을 ‘수묵인’이라는 말로 그간의 수묵에 대한 일관된 작업 역정과 그 성과를 아울러 평가하는 것이다. ● “그의 운필은 대담하지만 결코 날카롭지 않다. 마치 무딘 쟁기로 일구어 나가는 밭갈이 같이 덤덤하면서도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기 확인이 있다. 육중한 무게가 실리지만 차분하게 이어지는 내재율을 지니다.… 20년에 가까운 세월은 실험과 동시에 검증을 거듭해 온 연륜이라고 할 만하다. 미지에의 도전과 동시에 부단한 자기 확신이 거듭된 연륜이란 의미이다”라는 오광수의 평가는 바로 수묵인으로서의 남천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 할 것이다. 이경성은 청년 시절의 남천에 대하여 “야물지 못하고 대범한 그의 구상, 아물지 못하고 덤덤한 그의 솜씨, 그러면서도 그림이 진실에 육박한 준법이나 묵법, 수평구도에서 오는 안정감은 소담한 한국미의 본질에 접근해 간다고 볼 수 있다”라고 평한 바 있다. 소만지감(疏慢之感)이라 일컬어지는 이러한 그의 평가는 바로 남천이 평생을 두고 천착해 온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일관된 추구에 대한 예시적 평이자, 남천 수묵의 본질을 꿰뚫는 총체적인 평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상철
첫댓글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