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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16장. 고구려계 웅략천황의 몰락과 백제 개로대왕의 일본통일
高句麗係 雄略天皇의 沒落과 百濟 蓋鹵大王 日本統一
456년, 신라왕자 안강천황이 암살되어 고구려 웅략왕자가 대화의 천황으로 즉위했다. 438년, 국진성에서 반정천황이 죽자 백제에서 건너온 개로왕자는 왜제왕이 되는데 동북 지방을 정벌하고 큐슈를 정벌하는 등의 맹활약을 하다가 453년 백제로 돌아와 개로대왕이 되었다. 458년, 웅략천황이 개로대왕의 딸을 불태워 죽이니 개로대왕이 다시 일본에 친정을 나와서 웅략천황을 사로잡고 일본을 다시 통일하여 왜국의 국호를 아기쯔시마로 바꾼다. 그리고 중국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세 장군이 송나라에서 태수를 받았다. 중국 강좌에 백제 거점을 만든 것이다. |
윤공천황의
아들이자 광개토호태왕의 손자인 목리경태자로부터 신라 내물왕의 왕자 안강천황安康天皇
(416~456)이 일본 대화(오사카)의 천황을 빼앗았으나,
인덕천황의 아들 오호쿠사카황자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서
오호쿠사카의 아들 미륜왕眉輪王에게 3년만에 암살당했다.
그러자 윤공천황의 아들이자 광개토호태왕의 손자인 웅략천황雄略天皇(418~479)이 456년에 즉위하였다.
웅략천황은 잔인하여 다른 형들을 다 죽이고 즉위하였다.
그림 7) 개로대왕과 웅략천황 시대
이때 454년 왜제왕 개로대왕은 백제로 돌아가고, 비유대왕이 교토京都에 들어와 있을 때,
인덕천황의 손자로서 이중천황의 아들인 이치베노오시와왕市邊忍鹵王이 근강近江의 시베궁市邊宮에
있었는데 북쪽 백제계와 남쪽 고구려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웅략천황은 즉위 직후 458년 3월에, 시가현滋賀縣의 근강近江으로 이치베노오시와왕市邊忍鹵王을
찾아갔다. 목적은 사냥이라고 하였다.
아침 운동 삼아 사냥을 권하여 함께 말을 타고 나가서 웅략천황은 이치베노오시와왕을 쏘아 죽였다.
그때 생긴 임시 고분이 시가현滋賀県 팔일시 八日市 시시베정市市辺町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치베노오시와왕의 동생인 어마왕御馬王도 8월에 잡아 죽였다.
교토의 동부를 웅략천황이 계략으로 탈취한 것이다.
이치베노오시와왕의 아들들, 인현천황과 현종천황은 놀라서 도망하였다.
그러나 백제계 영역인 교토로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했으니,
이중천황과 그 아들 시변압반왕은 백제계와도 소원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백제 개로대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청하여 시집온 백제 공주를 457년에 나무에 달아서 불태웠다.
458년, 개로대왕은 딸이 웅략천황에게 극형으로 죽었으니 분노하였다.
개로대왕은 즉시 친정親征에 나서서 백제에서 달려왔다.
미야쯔宮津 해안에서 교토京都를 거쳐 순식간에 대화大和로 진격하였다.
나라현奈良縣 갈성산葛城山으로 도망치던 웅략천황을 협곡에서 포위하여 끝내 마주하였다.
웅략이 화살로 반격하였으나 15살의 어린 곤지왕자가 나서서 토벌하였다.
이 사실을 “등에虻가 개로천황의 팔을 물고, 잠자리蜻蛉가 날아와 등에를 잡았다”고 시가詩歌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등에虻는 웅략천황이고 잠자리蜻蛉는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왕昆支王으로서 뒤에 왜흥왕倭興王이
되었고, 청령천황淸寧天皇(=蜻蛉)(444~484)이라고 하였다.
시가는 매우 어렵다. 끝의 일부만 해석한다.
“고구려 웅략의 깃발을 쫓아와서, 마침내 만났는데 곤지왕자가 빨랐구나
은국隱國 일본 위에 나의 어검이 거침없이 아름답다.
왜국이라는 말이 오래되었으니 아기쯔시마로 국호를 바꾸노라.“
(원문)
다고모량이多古牟郞爾(=다카무라高牟良=雄川=許母理=koma) ; 고구려
아모가기도기阿牟加岐都岐(阿牟=幼武=雄略) ; 유무(웅략)의 깃발(牙旗)을 쫓아와서
회노아모원 會能阿牟袁 ; 유무를 마침내 만나니
아기두파야구비 阿岐豆(=昆支=蜻蛉)波夜具(=速)比 ; 곤지가 빨랐구나.
가구노기도加具能碁登 ; 숨은(隱) 나라터(碁=은국隱國=일본) 위에
나이오가모도那爾淤波牟登 ; 나의 어검御矛도
소라미도蘇良美都 ; 거침없이 아름답다.
야마도노구이표夜麻登能久爾表 ; 왜라는 이름이 오래되었으니
아기두지마도포阿岐豆志麻登布 ; 아기쯔시마(청령도)로 국호를 바꾸노라.
웅략천황은 개로대왕 앞에 무릎꿇고 빌었다. “누구이신지?”
“현인신現人神이다. 네 이름을 먼저 말하라.”
여기서 현인신은 현신現神을 의미하고 현신은 아기쓰카미로 발음한다.
이 아기쓰는 잠자리의 한자인 청령蜻蛉과 같은 발음이니 고대로부터 일본 열도 모습을 형상한 말이다.
일본 열도가 잠자리처럼 생겼기에 왜국을 아기쓰시마蜻蛉島라고 불렀었다.
즉, 청령도의 신이라고 한 것이니 개로대왕은 스스로 일본 열도의 왕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에 웅략천황은 “저는 와카무幼武라고 합니다.”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웅략천황의 이름은 고무高武인데 반대말인 유무幼武로 낮춘 것이다.
“나는 히토코노누시一言主神다.” 개로대왕 일언주신一言主神은 일사주신一事主神이라고도 하였는데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히토코노누시는 계체천황의 부왕인 히코누시彦主人과 동일인이다.
[일본석기日本釋記/ 상궁기上宮記]에서는 한사왕汗斯王 이라고도 하였다.
한왕漢王, 또는 한성왕漢城王이라는 뜻이다. 개로대왕의 도읍은 대동강의 한성이었다.
[고사기]에서
웅략천황과 그의 백관은 이때 천황 복식과 관복을 벗기우고 무기를 받쳤다고 하였다.
확실하게 항복한 것이다. 즉, 왜국이 개로대왕을 섬긴다는 뜻이고 웅략천황이 왜국을 받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을 완전히 발 아래에 둔 개로대왕은 그 존호를 높여서 근개루대왕近蓋婁大王이라고도 한 것이다.
한편
고구려계 마지막 왕이었던 웅략雄略이라는
시호의 의미는 웅조雄朝,
고구려 왕계가 이제 끝略이 났다는 뜻이다.
웅략 4년 이후에 [웅략천황기]의 천황은 더이상 웅략천황이 아니니 백제계 천황이다.
[웅략천황기]의 일부인 7년, 8년, 9년 기사는 개로대왕의 기록이고,
그후로는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왕자 청령천황(444~484)의 기록이다.
개로대왕의
[인릉忍陵
비문]에
의하면 458년에 일본을 떠난 것이 된다.
이때 개로대왕은 곤지왕자를 데리고 귀국하였고, 이중천황의 딸인 반풍황녀飯豊皇女(~483)도 평양으로
데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461년에
곤지왕자를 일본 왜흥왕으로 내보냈는데,
이때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령대왕을 임신한 부인이 일본으로 따라왔다. 바로 반풍황녀다.
그녀는 딱 한 번 남자와 교합하여 여자의 도를 알았고, 그 한번에 임신하여 이상했지만,
이후로 평생 남자와 교합을 원치 않았다.
17장. 백제 근개루대왕의 중국 경영 百濟 近蓋婁大王의 中國 經營
그림 6) 백제의 중국 15군 44현 진출도 / 단 460년대 요동반도는 고구려 소유였다.
백제 침류대왕이 진나라 말에 중국에 진출하여 송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 이후에도 중국에 백제의 땅이 있었다. 양자강 북쪽에 백제땅을 다시 한번 건설한 근개루대왕의 중국 영토는 무령대왕까지 이어졌다. |
왜제왕倭濟王(443~458), 개로대왕蓋盧大王(456~475)은 근개루대왕近蓋婁大王이라고도 했는데
중국에도 백제 영역을 넓혀나갔다.
458년 일본에 친정해서 웅략천황을 치기 전에, 개로대왕은 이미 중국에도 열한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중국 땅을 경영하였다.
458년에 개로대왕이 중국에 보낸 백제 장군은 관군장군우현왕 여기餘紀,
정로장군좌현왕 여곤餘昆(일본 청령천황이 되었다)
정로장군 여훈餘暈
보국장군 여도餘都(백제 모도대왕이 되었다.)
보국장군 여예餘乂
용양장군 목금沐衿
용양장군 여작餘爵
영삭장군 여류餘流
영삭장군 미귀麋貴
건무장군 우서于西
건무장군 여루餘婁 등 11명이다.
이들 11명의 장군이 중국 땅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싶지만 기록이 없다.
다만 464년 경부터 송나라가 말기적 증세를 보였고, 각 지방에서 송나라 장수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회수淮水 북쪽 땅을 잃고서 찾지 못했으며,
그 땅은 북위北魏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산동반도의 뿌리 부분인 청주靑州와 산동반도 남쪽 경계 동양성東陽城에서 주로 전투가 이루어
지며 그로부터 동쪽인 청도시靑島市 동쪽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문등군, 동래군, 성양군 등 해안과 도서島嶼지역에서 위에 적힌 11명의 백제 장수들이 나와서 경영
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또한 490년 모대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 내용에는 465년에서 471년 사이에 백제의 3장군을 추가로
중국에 내보냈다. 송나라가 위나라에 잃은 회북淮北을 공격하러 간 것이다.
건위장군、광양태수、겸 장사신 고달高達,
건위장군、조선태수、겸 사마신 양무楊茂
선위장군、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이미 송나라에 있었다.
개로대왕은
471년에 관군장군 불사후 여례餘禮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장무張茂를
북위국에 사자로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였다.
황해도 봉산鳳山에 묻힌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고분은 468년에 만들어졌는데,
위에 나온 대방태수 장무의 부형父兄일 것이다.
이들이 중국에서 차지했던 지명은 488년과 495년에 중국 제나라南齊國에 보낸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의
국서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백제 모대대왕牟大大王
때인 488년 겨울에 북위국北魏國이
산동반도의 백제를 쳤다.
산동반도의 백제군은 북위국의 수십만 대병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겨서 산동반도를 수호하였다.
모대대왕은 북위군北魏軍을 격파하고 나서 승전한 백제 장수들을 승진시켰다.
[삼국사기]에는 동성대왕 10년 488년에 위魏나라가 백제를 치러오다가 패하였다고 짧게 기록하였다.
[제서齊書]에도 이 부분의 백제 기록이 파훼되었는데 남아있는 부분은 모대왕이 남제국南齊國에 올린
국서 내용이다.
“노고에 보상하여 이름을 길이남긴다. 영삭장군신 저근姐瑾 등 4인이 충효를 다하여 국난을 막았다....
이 4인의 장수에 대하여 임시책명을 정식으로 황명을 내려 책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영삭장군、면중왕 저근姐瑾을 관군장군、도장군、도한왕으로.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를,,,영삭장군, 아착왕으로.
건위장군 여력餘歷을,,,용양장군, 매로왕으로.
광무장군 여고餘固를...건위장군, 불사후로 책명을 바랍니다.
이들 4명은 488년에,,,산동반도에 있다가 서북에서 쳐들어오는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백제 장수들이었다.
490년에 모대대왕은 여기에 더하여 3장군을 산동반도에 보냈다.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신 고달高達,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신 양무楊茂
행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會邁 등이 태시(465~471년) 중에
송나라에서 봉사하였고 지금은 나의 신하로 봉사중이다.
比使宋朝,今任臣使
그러한 선례에 따라서 이 장군들에게 새로 제나라의 책명을 바란다.
광양태수 고달高達은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조선태수 양무楊茂는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참군 회매會邁는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남제
무황제武皇帝는
모대왕이 열거하고 원하는대로 백제의 세 장군들에게 군호를 내리고 중국의 태수로
임명하고, 모대대왕을 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봉하였다.
詔可,竝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
그리고 사자를 백제에 파견하여 모대대왕에게 조부 모도대왕을 세습하여 백제왕이라는 책명을 주고
인장과 인수, 옥부, 동부, 호부, 죽부 등 여러가지 선물을 하였다.
(여기서 모도대왕은 죽지 않고 일본에 가서 인현천황이 되었다.)
한편
[남제서]에는 이때 490년에 다시 북위 수십만이 2차로 백제를 공략했으나 모대왕이 보낸 사법명
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우나木干那 등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북위군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고 기록했다.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 率衆 襲擊虜軍,
大破之.
495년에 모대대왕이 다시 보낸 국서에서는
“490년, 경오년에 북위 선비 오랑캐가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사법명沙法名
등에게 반격하게 하였다.
해일처럼 쓸어버리고 달려 추격하여 베어버리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만들었다.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한다.
사법명沙法名은 정로장군, 매라왕
찬수류贊首流는 안국장군, 벽중왕
해례곤解禮昆은 무위장군, 불중후
목우나木干那는 광위장군, 면중후
그리고
다시 파견한 장군은
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신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신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겸 참군신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陳明
등 4명인데 이들을 정식으로 책명해 달라는 모대대왕의 주청을 남제 명황제明皇帝는 다 들어주었다.
선비족
척발씨拓跋氏의
위나라北魏는
386년부터 534년까지 존재하였고,
439년 북조北朝를 통일하였는데 당시 척발씨 북위北魏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남제국南齊國의
[남제서南濟書]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위와 같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을 때 최초로 중국에 생겨나고 최후에 사라진 백제 진평군晉平郡은
하북성
형수지구衡水地區와 보정지구保定地區의 경계인 안평현安平縣이다. 서남쪽에 진현晉縣도 남아 있다.
백제 요서군은遼西郡은 하북성 진황도시 무령현撫寧縣 영지성令支城에 있었다.
백제 구이대왕(234~238)의 직함이 위영지령魏令支領으로서 오래전부터 백제와 관련이 있었는데
385년에 백제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취하였으나 그해 말에 후연後燕의 모용농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개로대왕 때에 다시 찾은 것이다.
광릉태수廣陵太守의 광릉군은 산동성 아래 회하淮河 남쪽 회계산淮稽山 유역이다.
청하태수淸河太守의 청하군은 제나라가 있던 곳으로 하북성 형수시 남쪽 황하 주변의 청하성이다.
광양태수廣陽太守는 북경시였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385년에 북경을 취하여 13군 태수를 두었었으나 389년에 후연에 빼앗겼었다. (유주자사 진묘)
성양태수城陽太守의 성양은 산동성 산동반도 남동해안 청도시靑島市에 있었다.
동청주東靑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위덕대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고 했으니 백제가 오래도록 보전
하였던 것이다.
조선태수朝鮮太守는 하북성 진황도시 비여현肥如縣에 있었다. 하북성 노룡현의 30리 북쪽이다.
수나라 때 대방태수帶方太守는 하북성 청룡현靑龍縣에 있었다.
위에
적힌 9군, 진평군晉平郡,
요서군遼西郡,
광릉군廣陵郡,
광양군廣陽郡,
청하군淸河郡,
낙랑군樂浪郡,
성양군城陽郡, 조선군朝鮮郡,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의미를 타당하게 고려하건대 시간적인 부침이 있었을
것이다.
이 8명의 백제 태수가 가장 최전선이라고 보면 북청주北靑州 7현, 제남군齊南郡 5현, 낙안군樂安郡 3현,
고밀군高密郡 6현, 평창군平昌郡 5현, 북해군北海郡 6현, 동래군東萊郡 7현, 동모군東牟郡 1현,
장광군長廣郡 4현 등 산동의 44현이 역시 백제 소유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대대왕 때의 중국내 백제 자치군은 최소 15개군 이상이다.
대체로 회하淮河에서 제하齊河까지 태산泰山 이동의 산동반도를 소유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 많은 백제자치군이 중국 사서에 올바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북연왕 풍홍처럼 중국에 황제로서 자립하여
존재하지 않고, 백제로부터 통치를 받는 자치군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체적으로 25개군 정도의 규모인데 이는 송나라가 망하고 남제가 서는 변혁기에, 개로대왕이 11명의
장수를 서쪽으로 보낸 458년 이후로부터 백제 장수들이 활발한 대륙 경영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정말
위대한 개로대왕이다. 근개루대왕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백제가 488년과 490년에 산동반도에서 북위군을 연파한 것은 고구려의 살수 대첩 이상의 대첩이다.
특히 이는 내지에서가 아니라 점령지에서 싸움이기 때문이다.
454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이후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하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 눌지왕訥祗王은 응원군을 보내어 백제를 구원하였다.
468년, 백제 개로대왕은 거꾸로 고구려 남변을 침범하였는데 상당한 전과를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예성강의 평산 한성에서 나라를 정비한 백제가 대동강 동북부까지 일부 수복한 것이다.
이후 백제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책을 설치하여 북한산성의 병력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북한산성은 두번째 위례성이었던 평성시 청룡산성일 것이다.
쌍현성은 두노성豆奴城으로 보면 비성인 숙천군의 전방이며 문덕군文德郡 마두산馬頭山이다.
구천성仇天城으로 추정되는 순천군順川郡 은산殷山은 숭산崇山에 있는데 숭산의 북쪽까지 개로대왕이
방죽을 쌓았다. 개로대왕의 청목책은 이제까지의 희천군 읍성 아래 대추령大楸嶺으로 추정된다.
쌍현성은 무령대왕武寧大王 때에도 한북漢北 사람을 동원하여 다시 쌓았다.
이무렵
개로대왕은 부왕인 비유왕의 묘를 호사하게 꾸미기 위해 욱리하郁里河(=비류강,
대동강 중류)에서
대석을 날라오고, 강을 따라 나무를 심어 방죽緣河樹堰을 쌓았는데 사성蛇城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까지로 되어 있다.
사성蛇城은 사천蛇川의 성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의 평양성으로 고려된다.
숭산崇山으로는 평안남도 은산군 숭화산崇化山이며 그 북쪽은 수덕현樹德縣이 있었다고 전하는
수덕修德이다. 방죽을 쌓은 것이 수덕樹德을 쌓는 일이었다.
즉, 대동강변을 따라서 개로대왕은 비유왕릉을 성역화하여 강둑에 대규모로 나무를 심는 사업을 펼친
것으로서 국민들을 혹사하였던 것이다. 사성蛇城은 책계왕 때에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수리한 기록이
있었다.
현재 비류강으로 알려진 대동강 중지中支가 본래 비유강으로 의심되며,
성천군 홀골산성 부근에 비유왕의 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68년,
고구려가 신라의 실직성悉直城을
공격하였다.
이후에 신라는 하슬라주 사람으로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실직은 강원도 삼척 땅이고, 하슬라는 강릉 땅 명주군이며 니하는 오대산의 진고개에서 흘러 내리는
연곡천連谷川이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신라는 연곡천 유역에 산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고구려의 공격은 실패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는 동해안에서도 고구려가 패퇴하여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