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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리마 공항을 떠나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비행기가 웅장한 안데스산맥을 넘자 드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지리 시간에 배웠던 온대초원 팜파스(Pampas)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평원에 정열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탱고로 대변되는 열정의 도시였다. 또 부에노스아이레스 북쪽에 있는 이과수폭포는 세상의 모든 물을 쏟아내듯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얀 수건 쓴 어머니들 집회장 5월광장과 레콜레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자 세계에서 제일 넓다는 7월9일대로(Av.9de Julio)와 오벨리스크(Obelisco)가 한눈에 들어온다. 7월9일대로는 폭이 144m나 된다. 1911년 알베아르 대통령의 제안으로 만든 이 길과 코리엔테스가(街)가 만나는 지점에 오벨리스크가 있다. 도로 양쪽으로는 붉은 색 꽃을 활짝 피운 가로수가 서 있다. 술 취한 사람의 붉은 얼굴 같아 ‘드렁큰 플라워(Drunken Flower)’라 불리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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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트를 타고 폭포 속으로 들어가는 스피드보트 투어. 짜릿한 스릴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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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마다 서는 골동품 시장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물이다. 일요일이면 골동품 시장이 서는 산 텔모 지역의 도레고 광장(La Plaza Dorrego)은 온갖 진귀한 물건들로 넘쳐난다. 마테(Mate) 차를 마시는 데 사용하는 은제 마테통을 비롯, 화려한 장신구와 가죽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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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도시답게 거리 곳곳에 커다란 나무로 둘러싸인 공원이 많이 있다. 공원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마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조그마한 통에 마테 잎을 넣고 물을 부어서 봄빌야라고 부르는 빨대로 빨아 마시는 차의 일종으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다. 마테통과 빨대 하나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 사람이 돌려 마시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함께 나누면서 마시는 차로 ‘친구로 생각하고 반긴다’는 의미라지만 같이 마시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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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에서 본 부에노스아이레스, 430년 전에 구상된 계획도시로 질서정연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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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5월 광장에 가보고 싶었다. 1976년 3월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사정권은 극우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렸고,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이렇게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하얀 수건을 쓰고 ‘실종된 자식과 손자를 찾아달라’며 집회를 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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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미의 파리라 불리는 도시 곳곳에 서 있는 조각상이 도시의 품격을 말해주는 듯하다.
- 매주 목요일 오후 3시면 이 5월 광장에서 하얀 수건을 쓴 어머니들이 모여서 데모를 벌이는 것이다. 마치 교회에서 미사를 하듯 어머니들이 모여서 손에 손을 잡고 “아들들이 살해되었다”고 암송을 하며 광장 주위를 돈다. 1981년부터는 ‘산 채로 나타나라’는 구호를 내걸게 되었고 국제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 5월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와 대성당, 옛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위한 총독부·입법부·경제부로 사용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 중 대성당은 약 450년 전에 건설되었는데, 내부에는 남미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 일부가 있고, 그를 기리기 위한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또 외국회사와 은행들이 광장 주변에 몰려 있어 아르헨티나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가 기울 무렵 에바 페론이 묻혀 있는 레콜레타를 둘러보기 위해 서둘렀다. 레콜레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품격 높은 주거지와 호화 묘지가 함께 있는 곳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중 하나이면서 최신 패션과 문화가 있는 레콜레타는 ‘정신적인 묵상을 하러 가는 장소’라는 뜻이다. 에바 페론이 잠들어 있어 더욱 유명한 이 묘지에 묻히려면 최소한 5억 원 이상은 주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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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이 144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넓다는 7월9일가와 오벨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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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있던 보카항이 탱고 발상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날이 마침 금요일이었다. 고급 쇼핑몰, 극장, 레스토랑, 카페, 서점, 갤러리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플로리다 거리로 나선다. 차가 다니지 않아 마음 놓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특히 주말 저녁이면 거리 곳곳에서 탱고를 비롯한 공연이 펼쳐진다. 플로리다 거리에도 즉석에서 탱고 쇼가 펼쳐지고 있다. 길거리에 앰프와 스피커를 설치해놓고 젊은 남녀 무용수가 즉석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시범을 보인 다음 관객을 불러내어 같이 즐기는 축제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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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색의 대통령궁. 에바 페론이 발코니에서 시민들과 만났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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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그 무엇보다도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탱고다.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춤추는 슬픔의 감정’이라 불리는 탱고의 열기. 유서 깊은 상설극장에서는 매일 밤 탱고 쇼가 펼쳐지고,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엔 거리 곳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거리공연이 펼쳐진다.
저녁에는 미켈란젤로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탱고 쇼에 빠져들었다. 이 극장은 100년 동안 수도원으로 사용된 건물로 지금은 탱고 전용극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난다. 구슬프고 애절한 곡조를 뿜어내는 반도네온과 악기에 맞춰 정열적인 탱고 쇼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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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궁 앞 오월 광장. 매주 목요일이면 하얀 수건을 쓴 어머니들의 집회가 열린다.
- 서로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거나 상대방의 다리 사이로 날렵하게 다리를 넣었다 빼는 동작들, 긴 다리로 상대방의 허리를 휘감아 도는 동작. 남녀 무용수들은 아주 격렬한 동작으로 열정의 감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이 정열적으로 상대를 탐하듯 붉은 조명등 아래 펼쳐지는 탱고 쇼는 열정 그 자체였다.
옛날 조선소가 있었던 보카항 입구는 온통 탱고의 열기로 넘쳐난다. 과거 조선소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선박에 칠하고 남은 페인트로 조금씩 자신의 집을 칠했단다. 보카항으로 들어서자 강렬한 원색으로 칠한 집들이 인상적이다. 마치 거리 전체가 거대한 설치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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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요일마다 진귀한 물건들로 넘쳐나는 도레고 광장의 골동품 시장.
- 탱고는 1860년경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두 군데서 생겨났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인구가 넘쳐났지만, 이곳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여 상대적으로 노동력이 많이 부족하였다고 한다. 이때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대거 이주해왔던 것이다. 이 이민자들이 북적거렸던 곳 중 하나가 바로 보카항이다. 탱고는 많은 이민자들이 향수를 달래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사창가와 술집에서 춤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 과거 항구였던 보카 지역은 탱고와 축구의 명소를 둘러보러 온 여행자들로 북적거린다. 이제 세계인의 춤과 음악이 된 탱고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거리 곳곳에서 탱고 음악이 울려 퍼지고, 탱고를 소재로 한 기념품점과 카페가 늘어서 있다. 잘 생긴 탱고 무용수들이 즉석에서 멋진 포즈를 취해주며 사진찍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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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택시기사가 인상적이다. (오른쪽)마치 술 취한 사람의 얼굴같이 붉은 색으로 핀 드렁큰 플라워.
- 대자연의 신비 이과수폭포
이과수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걸쳐 있다. 30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모여 장대한 폭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측에 있는 ‘악마의 목구멍’이란 별칭이 붙은 폭포를 보기 위해 미니 열차를 타고 30여 분 달리니 ‘악마의 목구멍’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갑자기 우르릉대는 굉음이 들리고 엄청난 물보라가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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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테 차를 마시기 위한 ‘작은 호박’이라는 뜻의 은제 마테통을 만들고 있는 장인.
- 물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우비를 입었건만 비에 젖었는지 폭포수에 젖었는지 옷은 흠뻑 젖어 버렸다.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물안개 속으로 하강하는 새들을 보고 있으니 어질어질 폭포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그래서 ‘악마의 숨통’이란 별칭이 붙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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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켈란젤로 극장에서 펼쳐진 탱고. 이주 노동자들의 애환을 춤과 노래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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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엔 브라질편의 이과수폭포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이과수 국립공원 입구에서 버스로 폭포 위 레스트하우스까지 이동한다. 산책로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아래로 내려가자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는 폭포의 장관이 펼쳐진다. 영화 ‘미션’에서 예수회 신부들과 원주민들이 에스파냐 군대에 전멸하다시피 하고 살아남은 과라니족 아이들이 폭포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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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카 항구의 원색 건물. 과거 조선소가 있어 선박에 칠하고 남은 페인트로 건물을 칠했다.
- 이어 마쿠코 사파리 투어다. 20분 정도 전기자동차를 타고 밀림을 통과, 다시 알콜 냄새 푹푹 나는 지프로 갈아탄다. 환경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다. 일행을 태운 보트는 스릴 있게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저 멀리 무지개가 걸린 폭포와 악마의 목구멍이 보인다. 폭포에 배가 접근하자 세찬 물보라가 쏟아진다. 우비에 구명조끼까지 단단히 걸쳤지만 순식간에 온 몸이 물에 젖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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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과수폭포로 접근하는 산책로 끝까지 가면 코 앞에서 폭포의 장관을 접할 수 있다.
- 여행 TIP
항 공 아직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이과수폭포로 가는 직항편은 없다. 인천에서 LA로, 다시 LA에서 리마를 경유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과수 공항까지 매일 7~9편의 국내선이 운항된다. 1시간40분 소요. 남미 곳곳으로 연결되는 란(Ran)항공(02-775-1500, www.lanair.co.kr)이 편리하다.
기 후 팜파스(온대초원)가 둘러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사계절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와 시차와 계절이 반대다. 봄, 가을 평균기온은 18~20℃로 여행하기에 좋다.
기 타 플로리다 거리와 팔레르모 공원 등 시내 곳곳에서 즉석 탱고 쇼와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사진 찍는 대가로 1달러 정도 지불하면 된다. 보카 지구에서는 잘 생긴 무용수와 멋진 탱고춤도 출 수 있다. 매일 탱고 쇼를 공연하는 미켈란젤로극장(www.michelangelotango.com)도 가볼 만하다.
/ 글·사진 김원섭 여행사진작가
- 5월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와 대성당, 옛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위한 총독부·입법부·경제부로 사용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 중 대성당은 약 450년 전에 건설되었는데, 내부에는 남미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 일부가 있고, 그를 기리기 위한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또 외국회사와 은행들이 광장 주변에 몰려 있어 아르헨티나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