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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신경호 교수가 운주사까지 필자를 안내해줬다. 구름 낀 하늘에서 이따금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잇따른 강연으로 지친 데다 약간 감기 기운도 있었지만 힐트만 교수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운주사에 도착해 보니 과연…. 그곳은 묘한 매력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조용한 산에 둘러싸인 계곡은 마치 몸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오래된 석불들이 산재해 있다. 석불 하나하나의 표정이 아주 유머러스하고 자유롭다. 석불들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의 토테미즘에 외래의 불교문화가 더해져 이런 독특한 공간이 형성됐을 것이다. 마치 지금 눈앞의 나무 그늘에서 갑자기 고대인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운주사를 방문하기 며칠 전 나는 전남대 미술과 학생을 대상으로 유럽 미술의 철저한 리얼리즘의 전통에 대해 강의했다. 그런 유럽의 전통과 지금 눈앞에 있는 석불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유사한 것을 유럽에서 찾자면 중부 프랑스나 피레네 산맥에 남아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과 조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불교문화라고는 하지만 일본의 불상과는 매우 다르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40년 전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은 40년 전 필자는 경주 박물관에서 덩그러니 목만 남은 석불과 대면했다. 당시 이 나라는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경주 거리에서는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 관광객들이 가는 곳마다 구걸하는 어린아이들이 따라다녔다.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일반 민가 같았고, 정원 입구에 목이나 동체만 남은 석불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었다. 그때 받은 인상을 나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시로 썼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시는 전북대 서은혜 교수 번역] 얼마나 긴 세월을 그대는 그렇게 웃어왔는가. 제대로 된 논밭도 없는 산악 경상북도 가난하고 시커먼 백성들에게 그대는 그렇게 미소를 건네 왔다. 하지만 세월의 태풍은 그대의 강건하고도 부드러웠던 몸을 앗아가고 코조차 떨어져 나가 여기저기 이끼가 돋기도 하였건만… 시커먼 세월의 흔적, 돌로 된 그대 그대를 금이나 동 같은 것이 아닌 돌로 만든 조상의 그 지혜가 얼마나 애틋한지 나는 그대 앞에서 무심결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대의 풍요로운 입가 어째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뒤틀리지 않을까 그대의 부드러운 눈의 윤곽 어째서 피눈물이 흘러넘치지 않을까… 물론 운주사의 석불과 경주의 그것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에 일고 있는 감정은 15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석불의 표정이 온화하다고 하여 민중이 평화롭게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현세의 고통을 보듬으려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라는 것을 끝없이 상대화(相對化)하려고 하는 이러한 감상법은 역시 조국에서 떨어져 나간 디아스포라 특유의 시각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문화를 계승함과 동시에 끝없이 이와 싸우고, 또 이를 극복해 나아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문 일본어]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현대법학[중앙일보 2006. 12. 23.자] |
운주사(雲住寺)
운주사(雲住寺)
운주사
운주사와 함께 떠나는 불교미술
운주사 그 신비의 도량!
우리 나라에는 수많은 사찰(寺刹)이 있다. 그 수많은 사찰들은 하나같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에 위치해 있고, 그래서 사찰을 찾는 사람 중에는 불교 신자도 있지만 관광객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 사찰들 중에 상당수 특히 신라와 고려 시대에 세워진 절들이 세워진 곳이 실은 풍수지리적으로 봤을 때 좋지 않은 자리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모두들 명당을 찾아서 난리법석인데 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서 부처님의 법을 전해야할 절들이 그런 곳을 마다하고 일부러 모두들 피하는 곳으로 들어갔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대답을 운주사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찰(寺刹)※1-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당시의 중국 관청(寺)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찰은 절(寺)에 당(불교 의식용 깃발)을 다는 찰(刹 당간 : 당을 다는 대)이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임
사찰 주변의 경관
한가한 일요일 오전 혼자서 배낭하나 둘러메고 운주사를 찾아갔다. 답사라기보다는 복잡한 머리 속을 식히고자 갔기에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늘 그렇지만 대자연에게는 항상 미안한 것이 내 기분 좋을 때는 가서 신나게 놀다 오고, 우울할 때는 괜히 화풀이만하고 온다는 거다.
어쨌든 버스에서 내려서 좋아하는 해금 산조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우울한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디 가고 없고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자연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닐까?
답사지 특히 절에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절 입구까지 펼쳐진 아스팔트는 답사 기분을 망치는 첫 번째 요소이다. 그 다음으로 답사지의 음식점과 상점들도 분위기 방해하는데 일조하지. 왜 우리는 가는 곳마다 똑같은 음식과 상품만을 볼 수 있을까?
하긴, 절도 자본주의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운주사 앞의 아스팔트도 기분 망치는데 일조하지만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그나마 이곳에는 음식점이 한 곳만 있다는 사실이 아직은 운주사만의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삼보사찰과 운주사
그럼, 이제 운주사로 들어가 볼까나?
운주사, 한자로는 運柱寺, 運舟寺, 運柱寺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雲住寺이다. `구름이 머무는 절' 괜찮은 이름이지 않습니까?
운주사는 화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2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태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개천사가 있고, 서쪽에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주사는 여러 면에서 특이한 절이다. 기존의 사찰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 흔히 알려진 삼보사찰※2이나 그밖에 알려진 절-선암사, 동화사-과 비교하면 더욱 운주사의 독특한 개성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운주사는 조계종-불교의 한 종파인데 이 외에도 천태종, 진각종, 태고종이 있다- 소속의 사찰로 송광사의 말사(지점이라고 생각하면 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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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와 불교 미술 두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운주사을 대표하는 두 가지 중 하나인 탑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탑이 이곳 운주사에는 무수히 다양하다. 여전히 그 제작 시대가 불분명한 운주사의 탑. 과연 그들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의 손님맞이 9층 석탑
운주사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9층 석탑이 운주사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일부라도 남아 있는 탑을 포함해 총 21기이다. 골짜기의 평지에 거의 일렬로 배열된 탑이 13기, 좌측 산록에 4기, 우측 산록에 4기 등이다.
여기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 탑에 대해서 알아보자.
※ 탑 : 탑파, 솔도파라고 하는데 모두 고대 인도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탑은 본래 묘지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석가모니(석가족의 성자라는 말로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임)의 사리를 전국에 나누는 것으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 되었다. 탑에는 주로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나 때론 중요한 물건을 넣어 두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도 탑을 보수하다보면 불교 유물이 나오는데 우리가 잘 아는 最古의 인쇄물인 `무구정광 대다리니경'도 석가탑 보수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탑은 크게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래 부분으로 탑을 지탱하는 기단부, 중심이 되는 탑신부, 그리고 대부분 유실되어 있지만 화려하게 장식된 상륜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탑의 종류(재질)는 목탑, 석탑, 전탑(벽돌로 만듬,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모전석탑(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만듬, 분황사 모전석탑), 청석탑(푸른빛을 가진 석재로 만듬. 동화사 염불암 다층 석탑)으로 나누어진다.
더 자세한 것은 다음에 기회에...
이제 다시 9층 석탑으로 돌아와서 석탑을 자세히 보면 각 층(옥신석이라고 한다)마다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층 구분이 되는 일종의 처마(옥개석) 밑 부분에 대각선 문양은 국내 석탑 중에서 유일하다. 또한, 운주사는 풍수지리상 배형국이라 하고 9층석탑은 돛대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 그 만큼 이 탑은 운주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운주사 탑의 상징어 '날씬함과 다양함'
운주사 석탑의 특징으로 날씬하다는 것과 다른 절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들 날씬한 것에 목숨을 걸 정도로 살빼기에 열심인데 운주사의 탑은 그러한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입구의 9층 석탑부터 이어지는 4개의 석탑은 하나 같이 그 날씬함을 자랑한다. 다이어트 하시는 분들 부럽지 않으세요?
또한, 각 탑에는 각각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입구의 9층 석탑 외에도 7층 석탑의 X자 문양, 기타 마름모·교차선·수직선 문양 등이 있는데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문양이다.
운주사 탑이나 불상의 특징은 다른 절의 탑과 불상과 비교해 보면 훨씬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절을 전혀 가본 적이 없다면 국사, 미술 책에 나오는 석굴암(원래 명칭은 석굴사로 그 자체가 하나의 절이었다고 함) 본존불과 불국사(부처님의 나라. 극락세계)의 석가탑(무영탑. 신라 最高의 탑으로 백제 장인이 만들었음. 실상사의 삼층석탑과 상당히 유사한데 이는 석가탑 보수 시 실상사 탑을 근거로 했기 때문)을 생각하시길...
이러한 탑은 운주사에 있기에 그 가치가 살아나지 만약 불국사의 석가탑 옆에 있다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런 문양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기존의 탑에는 보통 연화·사천왕상·구름 문양을 새기는데 왜 운주사의 탑만은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을까?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의 운주사 창건의 주체와 탑을 세운 이들이 누군인가가 밝혀져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본인 생각에는 불교 미술인 탑을 세웠지만 기존의 불교관과는 다른 어떤 이상향을 바라는 의미에서 새겼지 않나 싶다. 그 이상향이 미륵세계일 수도 있고 아님 천지 개벽해서 사농공상의 신분 체계가 완전히 없어진 평등한 세계일수도...
운주사 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갈 것이 어쩌면 운주사라는 절의 창건 시기와 탑·불상의 제작 시기가 동시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운주사라는 절과는 전혀 무관하게 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각 탑·불상이 특정시기에 제작된 것이 아니고 그 시대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배치가 너무 무작위라는 점도 운주사의 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혹자는 별자리 위치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이다. 물론, 이 얘기로 많은 사람들이 찾긴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특별한 기준 없이 각 탑이 자기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서 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히려 그 무질서가 더욱 운주사를 신비스럽게 만들고 찾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독특성을 가지게 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또 하나 짓고 넘어가야 할 점이 그 독특함이 일반 관람객에게는 호기심을 주겠지만 불교신자들에게 어떤 감흥을 주느냐이다.
과연 이러한 탑이 불심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면 과연 이 탑을 만든 이는 어떤 목적을 가졌냐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과연???
더욱 더 특이한 모양을 한 탑
안으로 들어가면 운주사의 탑은 그 독창성을 더욱 강하게 표출한다. 일명 호떡탑, 실패탑, 항아리탑 등으로 불리는 탑들은 진정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고 운주사에 있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감탄스럽지 않은가? 기존의 탑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리는...
석탑 만든 이가 지금 있다면 그는 분명히 정부의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어서 누구처럼 광고에 나올 것이다.
"우리 시대의 파격 000! 그의 고정 관념 탈피는 우리에게 진정한 지식이 무엇인지는 알려줍니다. 국정홍보처..."
이 탑들과 앞에서 이야기한 날씬한 탑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과연 어느 탑이 먼저 제작되었을까? 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운주사의 탑들은 方형탑, 원형탑, 난형탑(석주형 탑신만 있음) 순으로 건립되었고 그 시기는 12∼13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들에 대한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다. 이에 대한 미적 설명은 오히려 이를 감상하는데 방해할 것 같기 때문이다. 운주사에 직접 가거나 사진을 통해서 이들을 본다면 기단부가 어디까지이며 구도와 재질은 어떠하다는 등의 이성적 판단을 배제하고 오로지 떠오르는 느낌만을 즐기는 것이 진정 운주사 탑들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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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와 함께 떠나는 불교 미술' 세 번째 시간으로 이번에는 운주사의 불상들을 살펴보자. 불상을 살펴보면서 우리 마음의 때를 씻고 자비의 마음을 갖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운주사에는 특이한 탑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탑보다 훨씬 많은 약 100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 또한 탑만큼이나 운주사의 특성에 맞게 그 다양성과 특이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다. 불상은 석조불감, 와불, 무리 지어 있는 6개의 불상군 그리고 여기저기에 따로 있는 불상과 마애불로 나누어진다. 이중에서 가장 세인의 관심을 끄는 와불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알아 보고 오늘은 나머지 불상들의 모습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운주사의 중심 '석조불감'
먼저 석조불감을 보도록 하자. 경주 남산에 가면 석조불감과 비슷한 칠불암 사면불이 있는데 이는 사면에다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사면불은 부조형식으로 표현한 반면, 석조불감은 광배(光背.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신령스럽고 밝은 빛을 상징하는 불상의 한 구성요소로 불신의 뒤쪽에 표현한 것. 후광(後光). 신광(身光). 광염(光焰), 두광(頭光)이라고도 함)와 독립된 불상으로 제작되어 있다.
또한 돌로 일종의 전각을 지어서 그 속에 모시고 있기에 그 독특함이 더하다. 석조불감은 '동국여지승람'이나 여타 문헌의 운주사를 언급한 내용에서 늘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석조 불감이 운주사의 여러 불상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신앙처로 주목받았다는 증거이다. 한마디로 노천 법당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불감 속을 들여다보자. 불감 내에는 1개의 판석을 세워 공간을 양분하였고 상단은 터져 있다. 양 측면은 1개의 판석을 세워 놓았고 전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줘 있는데 좌우는 벽이고 중앙은 열려 있다. 여기서 주목할 곳이 있는데 중앙 밑 부분을 자세히 보면 여닫이 문 시설로 보이는 구멍이 상단 좌·우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래 문이 달려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지붕에는 굵은 용마루(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평마루)가 놓여져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석조불감은 운주사의 중심 법당이라고 볼 수 있고 여전히 운주사에서도 부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석조불감을 더 깊이 감상하려면 두 불상의 모습을 대비해서 보는 것이 좋다.
앞뒤로 몇 번 왔다갔다하면서 두 불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불상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미술학도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관심이 있으면 아무런 지식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각 부분의 명칭이나 조각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와 왜 이렇게 조각했는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알아보는데서 진정한 답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유물과의 교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끼리끼리 모여 있는 불상군
다음으로 각 무리를 이루고 있는 불상군은 총 6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6개 불상군의 형태는 대체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대체로 좌상(앉아있는 모습)을 주존(중심 부처)으로 하고 좌우에 입상(서있는 모습)을 협시불(보조 부처라고 생각하면 됨)로 안치하고 있다. 그리고 주존은 좌상이라도 옆의 입상보다 훨씬 크고 협시불이 최소한 5분 이상으로 전통적인 협시불 수(2분)보다 많이 조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입구에서 2번째로 조성되어 있는 불상군은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 특별출연하기도 했다는데 영화를 좋아하는 분은 눈치 채셨는지도... 2번째 군의 주존은 입상으로 높이가 4.75m인데 운주사 불상 중에서 가장 키가 크다.
불상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탑보다는 파격미가 조금 덜하다. 그것은 불상이 부처님 모습을 표현했기 것이다. 그럼에도 운주사의 불상은 그 다양성을 자랑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입상이 약 80% 차지하고 있다. 얼굴 모습은 대부분 약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부처님의 특징인 백호(양미간의 중간에 위치. 석굴암 본존불을 생각하기 바람)는 석불 좌상에만 표현 되어있고 눈과 입도 대부분 가늘게 조각되었다.
운주사 불상에서는 코를 주목해야 하는데 그나마 가장 장대하게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파손되어 있는데 이는 운반 도중 넘어져서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훼손된 것도 있다. 아마도 불상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얻는다는 미신의 영향이리라...
부처님의 특징 중의 하나인 삼도(목에 표현된 3개의 줄)도 전체 불상 중에 약 20%정도만 표현되어있다.
다음으로 불상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인 손 모양(수인)을 살펴보자.
운주사의 불상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수인은 가슴 앞에 '∧'모양으로 손을 모으고 있는 것임을 아마도 다녀온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이 모양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또는 합장한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추측만을 할뿐인데 정확한 해석이 나온다면 운주사의 성격 규명도 훨씬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수인은 그 불상이 어떤 부처님인가를 알려 주며 이로 미루어 그 절이 어떤 사상을 가진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수인은 항마촉지인, 시무외인 등이다.
다음에 운주사 갈 때 수인 모양을 생각하면서 본다면 재미가 더 하지 않을까? (수인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한 조각 이야기는 오히려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불상이 싫어지게 될 지도 모르니 이쯤에서 그만 하자. 다만, 왜 이렇게 표현이 조약(?)한지에 대해서 각자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듯 한데...
운주사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홀로 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전문가의 말로는 아마도 불상군에서 이동된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불상들을 옮겼을까?
또한 불상들을 보면 조성하다가만 것도 몇몇 보이는데 무슨 연유로 그들은 그 생명을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미완의 부처로 남게 되었을까... 이들의 모습에서 사회적 모순 속에서 비참한 생을 마감한 옛날 사람들의 한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운주사에는 돌부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운주사에는 돌부처만 있는 것이 아니다. 80년대 발굴시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유물들의 제작시기가 9세기경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는 운주사의 창건 시기보다 상당히 앞서기 때문에 아직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또한 예전 건물지에서 소조로 만든 불두(佛頭)가 발견되었다는데 이걸로 봐서는 이 곳 운주사도 천불전이나 오백 나한전(법당 안에 천 개의 불상이나 오백 나한상을 만들어 모신 곳)이 있었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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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전설의 주인공 ‘와불’
운주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이 와불을 꼽을 것이다. 과연 와불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근데 우리가 와불이라고 부르는 이 불상이 실은 와불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와불은 부처님의 열반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로 누워있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런데 운주사 와불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워있는 것도 아니고 반가부좌인 본존불과 서 있는 협시불이다. 따라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와불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운주사 와불 전설을 만들었던 것이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 미륵세계가 시작되고 모든 불평등과 부조화가 사라진다.’
그럼 이제 와불의 주변을 살펴보자.
돌부처가 새겨져 있는 바위는 비스듬히 경사져 있다. 특이하게 머리가 다리보다 더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바위 아래쪽이 더 좁기 때문에,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했던 것으로 바로 바위를 최대한 활용하려했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와불에 관해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바로 와불을 과연 일으켜 세우려고 했느냐 이다. 과연?
여기에 대한 대답은 뒤에 제작 경위에서 자세히 보기로 하자.
다시 와불을 들여다보자. 바로 위에서 볼 수는 없지만 얼핏 보기에 입상의 부처가 좌상의 부처에게 기대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혹자는 부부 부처라고 한다는데...
좌상 옆에 보면 조그마한 바위가 떨어져 있다. ‘쓸데없이 웬 돌이야’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좌상의 윗머리(육계)부분이다. 아마도 표현하다보니까 부족해서 다른 돌로 대신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두 불상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와불로 가다보면 혼자 외로이 서있는 불상을 볼 수 있는데 일명 ‘머슴부처’라고 부르는 시위불(侍衛佛)로 와불을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하늘의 북두칠성을 땅으로...
와불과 더불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 바로 칠성바위이다. 왼쪽 산등성이 허리쯤에 위치해 있는데 처음 보면 무슨 호떡 7개가 아무렇게 널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호떡(?)들을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 떠있는 북두칠성과 비슷해 보인다. 위에서 보지 않더라도 약간의 상상력만 동원하면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칠성바위의 배치가 우리가 올려다 볼 때의 북두칠성 배치가 아니고 하늘에서 북두칠성을 내려다보는 배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데 아마도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칠성바위는 단지 북두칠성과 비슷하게만 배열한 것이 아니고 원반지름의 크기와 배치 각도가 실제 북두칠성의 밝기와 방위각과 거의 일치하게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과학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실제로 북두칠성 중에서 5번 별이 가장 밝은데 칠성바위에서도 5번 바위가 제일 지름이 크다. 우리 조상들의 과학성과 이를 표현한 예술적 감성이 이토록 뛰어나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칠성바위의 과학성은 와불과의 관계에서 또 한 번 그 빛을 발한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 북두칠성의 6, 7번 별을 이은 선을 따라가다 보면 북극성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칠성바위에서도 이것이 적용된다. 칠성 바위의 6, 7번 돌을 이은 가상의 선을 따라 가면 바로 북극성에 해당하는 와불이 나타난다. 그 방향도 정북방향에서 약 3도 정도 어긋날 만큼 비교적 정확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하늘에서는 두 별의 간격을 다섯 배하면 북극성에 이르는데, 운주사의 와불은 정확히 이 거리에 있지는 않다.
세계 最古의 별 등급 자료 '칠성바위‘
운주사에 왜 칠성바위가 있을까? 아직 정확한 규명은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칠성신앙이 도교의 중요한 신앙 형태이고 고려시대에 도교가 융성했다는 기록 등을 미루어 보아 불교가 칠성신앙을 받아들인 것을 나타낸 최초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 시대 천문관측 수준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국보급 유물이다.
참고로 별의 밝기에 관한 우리 나라 최초의 자료는 ‘동국문헌비고’(영조 46년 1770년 홍봉한 외 지음)의 '상위고(象緯考)’인데 운주사의 칠성바위의 제작 시기를 고려 중기(12세기 경)로 본다면 이보다 적어도 6백년 정도 앞선 유물인 셈이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별의 등급에 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저 평평한 바위로 생각하고 그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한다. 실제로 본인이 갔을 때 한 여성이 칠성 바위 위에서 신을 벗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이 바위는 보통 바위가 아니기에 앉으면 안 된다고 말했더니 그 여성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돌한테 허락 맡았는데요...”
칠성 바위 주변에 이에 대한 설명과 별자리를 표시해 둔다면 사람들의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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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바로 운주사 탑과 불상은 어떻게 제작되었는가와 과연 탑과 불상이 별자리를 나타내는 가이다. 특히 별자리와의 연관성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기에 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운주사 탑과 불상의 제작 방법을 밝혀라
운주사에 관한 궁금증 하나! 과연 어디에서 이 커다란 돌을 많이 가지고 왔을까?
이에 대한 답은 운주사 주변 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석탑과 석불 제작 당시 돌을 운반했던 흔적들이 발견된다. 와불에서 칠성바위로 가는 서쪽 산허리 주변의 암반에는 불상을 떨어낸 채석장이이 있고 그 채석장과 칠성바위 사이에서는 암반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깊이 패인 마멸 흔적도 확인된다.
채석장과 암반 마멸 흔적은 운주사 천불천탑을 어떻게 제작했으며 10t 정도의 칠성바위 같은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운반하였는 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암반 마멸 흔적은 거중기(擧重機)같은 운반기구로 칠성바위나 탑의 재료들을 들어 옮기다가 밧줄이 암반에 마찰하여 생긴 흔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게가 1백t 정도는 족히 나가는 암반에 조각한 초대형 석불좌상·입상은 어떻게 일으켜 세우려 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와불! 과연 세우려고 했을까?
지금의 기술로도 1백t을 들어올리려면 3백t 정도의 크레인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는데 설사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비탈진 야산 정상에 자리한 이 거대한 돌부처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일으켜 세울 수 없는 돌부처를 암반에 조각했을 리는 없다. 여전히 이에 대한 답은 '?' 이다.
다만 와불의 옆을 자세히 보면 바위를 떼어낸 흔적이 있다. 조사에 의하면 그 떼어낸 돌이 바로 와불 앞에 있는 일명 '머슴부처'라고 하고 와불의 다리 부분에 떼어 내려다 만 흔적이 있는데 한 번 확인해 보기를..
이런 점에서 와불도 떼어내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머슴부처의 돌 부분과 달리 와불의 어깨 부분은 커다란 암석덩이로 이뤄져 있어서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만약 떼어 낸다면 상당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와불은 그 자리에 그렇게 누워있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물론, 부근에 와불을 안치 자리인 대좌(연꽃 모양의 불상을 모시는 자리. 연화좌, 연화대좌라고도 함)가 보이지 않고, 세운다고 해도 어디에다 어떻게 모실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으므로 애당초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도 몰라. 오로지 와불만이 알고 있지.'
경사진 곳에 세워진 석탑도 그 곳에 굳이 세운 이유와 더불어 세운 방법도 의문을 갖게 한다. 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알아보도록. 본인도 알아 보고 있는 중임.
운주사에 관한 논란 '과연 별자리 구현장인가?
운주사는 최근 몇 년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는데 이는 아마도 'KBS 역사 스페셜' 덕분일 것이다.
지난 99년 4월 '역사...'에서 운주사에 관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난 뒤 운주사는 갑자기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학교 소풍이나 답사의 중요지로 부상했고, 개인적으로 구경오는 사람들도 훨씬 늘어났다. 단지 방송이 되어서가 아니고 방송 내용 중에 운주사의 탑과 불상의 위치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표현했다는 부분이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본인도 한 때 그 사실을 믿고 맑은 날 밤에 운주사에 가서 별자리와 비교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오랫동안 운주사의 칠성바위를 연구한 한 천문학자가 제기했는데 그의 말을 빌자면 운주사의 탑·불상의 배치가 밤하늘의 별자리(1등성)의 배치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역사...'는 그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불교탱화를 끌어들였다. 탱화란 불교경전을 그린 의식용 불화로서 족자형태로 자유롭게 걸 수 있는데 주로 법당의 불상 뒤에 걸린다. 그런데 탱화 중에 칠성 탱화라는 것이 있는데 그 탱화 속의 부처님 배치가 북두칠성과 일치하고 동양의 별자리인 28수와 일치하는 탱화도 있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사람들은 더욱 '역사...'의 주장에 수긍하게 되었다.
이런 설명은 운주사의 탑과 불상의 배치에 관한 의문을 아주 쉽게 해결해준다. 왜 그렇게 험난한 곳에 세웠는가에 대한 대답을...
※ 28수 : 2500년 전 주나라 때부터 사용. 달의 공전주기인 27.3일을 주기로 하여 백도를 1주한다. 달이 하루에 한 수씩 동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보고 28수를 정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토성의 태양에 대한 공전주기에 관련시킨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별자리 주장에 대한 반박
하지만, 그러한 주장에 문제점은 없을까?
이제부터 '역사...'의 주장에 관한 문제점을 알아보자. 이러한 문제 제기는 지난 99년 7월 과학 동아 전용훈 기자가 쓴 기사에 나와있다. 이에 <과학 동아>의 동의를 받아 여기에 그 내용을 조금 수정해서 싣는다.
'역사...'의 주장에 대한 첫 번째 의문점으로 발굴 보고서의 운주사 탑 배치도는 '현재'의 배치도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표시된 위치는 12∼13세기 탑이 세워질 당시의 위치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탑이 있었던 자리로 확인되는 곳이 이곳 말고도 세 곳이 더 있다. 만일 탑 배치가 일등성 배치를 닮았다면 이들 탑 자리들도 밝은 일등성 별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별자리의 밝은 별을 탑으로 동정할 때 기준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방송에서는 일등성 정도의 밝은 별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비교 대상으로 든 별 중에는 2.6등성의 뱀자리 알파별, 2.5등성의 안드로메다자리 알파별, 심지어 3.0등성의 황소자리 베타별도 있다.
문제는 또 있다. 방송에서 제시한 성도의 시작점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이 쓰는 현대적인 성도는 시작점을 거의 대부분 3월 22일 춘분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방송에 나온 성도는 시작점이 1월 19일에 위치해 있다. 왜 이 지점에서 성도가 시작돼야 하는지에 대해 그 천문학도는 '탑 배치와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동양의 관념에서는 동지가 더 중요시 됐다. 만일 운주사를 세웠던 사람들이 천상의 질서를 지상에 구현하려 했다면 이들은 사찰에 들어섰을 때 동지로부터 펼쳐지는 하늘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양력 1월19일은 '대한(大寒)'에 해당하는 날인데 이 날이 하늘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지금과는 다른 고려 시대의 천문관념
끝으로 '역사...'의 주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하늘의 모습을 본뜬 탑을 세우려 했다면 그들은 고려시대의 천문관념에 따라 하늘을 그리려 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 천문관념에서는 밝은 별이라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밝은 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천문지식에 바탕한 생각일 뿐 전통천문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요시된 별과 별자리들이 따로 있다.
고려 시대 사람들이 하늘의 모습을 지상에 구현하고자 했다면 북극성과 북두칠성, 3원(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으로 천자가 살고 있는 곳) 28수의 별자리이야기를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28수의 별자리는 황도대 주변에 펼쳐져 있지만 각 별자리의 기준별인 거성은 자기 별자리에서조차 가장 밝은 별이 아니다. 가장 밝고 화려한 서양 별자리로 알려진 오리온자리에서 13세기의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리온의 허리에 해당하는 일렬로 늘어선 삼태성일 뿐이고, 밝고 거대한 베텔규스나 리겔은 의미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동양의 별자리와는 관련이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적도대를 중심으로 한 격자형 성도는 물론 천상열차분야지도식의 전통 성도에서도 28수의 배치를 표시해 보았다. 그러나 공통점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만일 별자리가 아니라면 중요한 별을 위주로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28수의 기준별의 위치를 표시해보았다. 결과는 역시 허사였다.
이상이 과학 동아에 실린 내용이다.
'역사...'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본인의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그 주장이 맞기를 바란다. 하지만 문제는 그 근거가 너무 짜 맞추기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라는 자체 검증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 '역사...'의 주장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위에 든 반박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운주사의 건립자가 동양적 별자리에 문외한이고 단지 밤에 보이는 별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시작을 한 겨울에 했고 그 때의 별자리를 표시해서 제작한 것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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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주사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운주사 창건 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내에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는 석불과 석탑.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불사를 시작했는지 그리고 과연 도선국사와 운주사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부도가 없는 절 운주사
운주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부도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 완전한 발굴이 되지 않아서 추후 발굴될지는 모르지만 현재로는 보이질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의 묘하고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부도가 모든 절에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 높은 스님들이 많이 입적하신 절은 수많은 부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절은 소수의 부도만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곳은 부도가 전혀 없다. 한 번 생각해 볼 사안이다.
물론, 운주사가 송광사나 대둔사처럼 큰 사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본인이 부도 얘기를 하는 것은 뒤에 언급할 운주사의 창건 주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므로 본 글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금 부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 부도 : 고승의 사리나 유물을 안치하는 기능을 한다. 그 기원은 당나라에서 선종(좌선을 통한 해탈을 중시하고 설교나 문자 대신 마음을 전달하는 것을 중시여기는 종파로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파했음)이 들어온 9세기이다. 현재 가장 오래된 부도는 844년 제작된 '염거화상부도'이고 그 이외에 연곡사 동부도, 쌍봉사 철감선사부도가 있는데 매우 아름답다. 부도도 탑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지만 각 부분의 표현은 다르다. 모양별로 나누면 크게 팔각원당형, 방형, 오륜형, 복발형(종형)으로 나누어진다.
운주사 창건의 배경 '도선 국사의 풍수와 무관하다?'
운주사에 전하는 전설에는 우리 나라 풍수에서 절대적인 인물이 여지없이 등장한다.
바로 '도선 국사'인데 전설에 의하면, 국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말은 운주사의 다른 한문표기로 운주(運舟)사의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전설을 소개하면 도선 국사가 하루밤낮동안 도력으로 하늘의 석공을 불러서 1천 개의 석탑과 1천 개의 석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와불이 천불천탑의 마지막 천불인데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와불을 막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첫닭이 우는 바람에 하늘의 석공들이 올라가는 바람에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는 전설이 깃들여 있다.
한편에서는 그 닭울음소리가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흉낸 것이라고도 하던데...
이는 아마도 조선 후기라는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한 행주론(行舟論·한반도를 배형국으로 보고 운세가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풍수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전해진 사료에는 아직까지 이 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相異座)-운주사에는 천불, 천탑이 절과 주변 산에 있고 모습이 다른 2분의 부처를 모신 석실이 있다-이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성종 때(1481년) 만든 동국여지승람을 이후 계속 수정해서 중종 때(1530년) 완성된 인문지리서. 역대 지리지 중 가장 종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정치사·제도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
그렇다면 탑과 불상의 조성 시기를 통해서 알아 볼 수밖에 없는데 현재까지 전하는 석불과 석탑의 양식이나 가람터의 발굴 결과로 미루어 봤을 때 도선이 활동한 9세기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성연대는 고려중기인 12세기 정도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운주사와 도선 국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보여지고 후대 사람들이 운주사의 지리적 위치에 도선 국사의 풍수 사상을 연결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운주사를 세웠나
이제 창건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을 살펴보자.
먼저 운주사의 탑에서 그 비밀을 유추할 수 있다. 탑은 불교에서 신성시되는 조형물이기에 크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다른 곳으로부터 다른 불교문화가 들어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운주사의 독특한 탑 양식은 중국 남쪽지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운주사의 지리적 위치에서도 살펴 볼 수가 있는데 현재 운주사 앞은 호수가 있지만, 댐으로 막히기 전에는 이곳까지 물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목포 앞바다에서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가장 먼저 나주를 지나게 된다.
나주는 고대로부터 남중국과의 교통로로 각광받던 곳이다. 이곳에서 상류를 향해 오르다보면 물길은 둘로 갈라지는데 바로 그 사이에 운주사가 있다. 중국을 통한 문화유입이 될 수 있는 중간지점에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남중국 쪽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건너온 시기가 운주사 탑과 불상이 세워진 때와 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11, 12세기에 150회에 걸쳐 인원이 왔다고 하는데 이들은 대개 절강, 복건성을 출발해서 주산열도를 지나서 우리나라 서남해 안을 향해서 북상했을 것이다. 그럼, 이시기 주로 우리 나라에 건너온 사람들은 누구일까?
절강, 복건성은 중국에서 주로 해상활동에 종사했던 백제유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아마도 고려의 건국을 계기로, 그 동안 신라에 의해 봉쇄돼 왔던 해상로가 개방되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백제유민들이 대거 고향으로 되돌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능주읍지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실제 외부로부터 들어온 사람들이 다수 정착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운주사는 나주 지역의 호족, 이 지역 민중 세력 그리고 백제 유이민들의 문화가 어우러져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다음으로 고려 승려 혜명이 창건했다는 주장도 있다.
전남대 김동수 교수는 '동국여지지'에서 이 절이 고려 승려 혜명(惠明)에 의해 조성된 것이란 기록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慧'자와 '惠'자는 서로 통하게 쓰이는 용례가 많기 때문에 일찍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慧明)과 운주사에서 발굴된 혜명(惠明)이라는 글자의 주인은 동일인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 근거로 '일봉암기'의 기사 중 은진 관촉사 미륵불상(대인석상)과 운주지곡에 천 개의 불상과 탑을 세운 것을 가리켜 비보처에 불적을 세운 사례로 든다.
김교수는 두 지역을 병립시켜 서술한 이 기록은 운주사 창건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로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운주사의 불적 편년에 가장 근접한 시기이고, 또 고려 초기 괴력을 갖춘 신이적(神異的)인 불상 조성이나 불사가 많았음도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오직 운주사 석불만이 알고 있을 뿐...
이 외에도 창건 주체와 목적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있다.
당시 불교계와는 교리 자체가 다른 새로운 종파가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성의 불교계로부터 소외 받는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개척 포교당이라는 주장도 있고 나주 남평이나 화순 능주의 넓은 평야에 경제적인 기반을 가진 세력들과 승려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찰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는 신도들을 위해 대량으로 조성하기 위해 수많은 석공들이 토속적인 심성을 반영한 유적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답은 오직 운주사의 부처님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누가 세운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해. 지금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자기 마음자리 보는 것이야.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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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호남정맥의 산줄기는 무등산을 만난다. 그곳을 지나 국사봉과 화학산으로 뻗어 내려는 산줄기는 마침내 운주산 다탑봉에 다다른다. 양쪽으로 벌어진 구릉의 산등성이 사이에는 불상과 탑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서 있다.
공사바위와 마애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주사에 와서 노천에 놓여진 탑과 불상만을 보고 사진 찍기에 여염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만 들리고 가는 것은 운주사를 절반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진정 운주사의 가치와 그 탑, 불상들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공사바위까지 올라가기를 권한다. 좁은 산길을 헤치고 공사바위에 올라서면 운주사의 모든 전경에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러하기에 공사바위라 불렸을 것이리라.
공사 바위를 오르다 보면 바위 아래쪽에 마애여래좌상(마애란 바위에 조각한 것을 말함)이 눈에 띈다. 불상과 탑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마애불은 운주사의 좌불들과 유사한 자태를 띄고 있는데 이목구비와 광배 등 다른 석불에 비하여 제법 부처로서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나무가 우거져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이곳에서 운주사의 모든 돌부처와 석탑, 칠성바위, 그리고 절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 아마도 천불천탑의 불사를 조망하기 위해 새겼지 않았을까?
어떤 이는 이 마애불이 좌우 계곡의 돌부처들을 협시로 두르고 경내를 굽어보는 위치상의 중심부처로서, 운주사의 신비를 푸는 데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운주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이제 공사바위에 올라서서 잠시 전경을 돌아보고 난 다음 명상에 잠겨보자. 공사바위까지 오면서 보았던 여러 불상과 탑들을 다시금 되새겨 보고 왜 이곳에 운주사가 세워졌고 천불천탑이 만들어졌는지를...
예전에 이곳에서 살다가 간 사람들은 과연 운주사에서 무엇을 바랬을까 라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그리고 이곳에서 온 나는 어떤 연유로 왔으면 떠나면서 과연 무엇을 가슴에 품고 가고 싶은지를...
운주사는 그냥 신기한 탑과 불상만이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많이 이곳을 찾지만 진정으로 운주사와 내가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운주사의 여러 부처님들은 당신에게 참다운 길이 무엇인지 알려 줄지도 모른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운주사의 여러 부처님 특히 와불님에게 갔을 때 겸허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소리내 보기를.... 특정 종교의 말이라고 배척하지 말고 단지 절에서 하는 인사말로 여기길 바란다. 여러분이 어떤 경계하는 마음이 없이 솔직하게 불상과 탑을 대하면 그만큼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 감흥이 올 것이다.
이제 운주사와 불교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쓸데없는 내용을 너무 길게 늘어놓은 것 같아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이는 운주사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본인의 글솜씨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글을 통해 운주사를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불교 미술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기를 바랄뿐이다.
우리 문화, 자연은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닌 이 땅을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이들이 누려야 할 곳이다.
하얀 눈에서 그 빛을 더욱 발하는 운주사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운주사는 언제나 가도 좋지만 첫 기사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특히 눈 내리는 날 찾아가면 더욱 그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탑도 이쁘고 조그마한 불상은 더욱 깜찍하게 느껴진다. 와불은 하얀 이불을 덮고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고,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칠성바위는 호빵 일곱 개가 놓여져 있는 것 같다. 조금은 올라가기 힘들지만 공사바위에서 하얀 운주사를 바라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것이다.
올해 운주사를 찾지 못했던 분들은 다음 겨울에 눈이 오면 꼭 시간을 내서 운주사를 가보길 바란다.
<운雲 주住 사寺>
운주사!
구름도 쉬었다가는 곳이라네.
내 마음도 함께 쉬면 안 될까?
이곳에다 내 모든 근심, 걱정 다 맡겨 놓고,
운주사 부처님들의 그 맑고 순수한 웃음을
가져가면 안 될까?
어떤이는
'이 세상이 싫어! ×같은 세상'이라고 외치며
와불님에게 달려가겠지...
하지만 "예끼 이놈아!"라고 당장이라도 호통치실 와불님...
이곳에 계신 모든 부처님들의 한결같은 말씀
'미륵시대가 오면 세상이 바뀔 것 같아?
모두 다 내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야.
마음...'
그래도 난 와불님이 일어나는 날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불평등이
사라질거라 믿고 싶다.
"그날이 오면..."
▲ 운주사 가는 길 |
[위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기사이고 사진은 어디선가 떠와 붙여넣은 것임]
첫댓글 중간쯤 읽다가 포기....역쉬 공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게벼^^*
읽기라도 시작했으니 공부에 소질이 있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