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묘명현 신잠 전(申潛傳)
진사 신잠은 신해생(辛亥生)이고 자(字)는 원량(元亮)이며 계유년 진사에 장원하였다. 한림으로 있었는데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서 귀양갔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서울에 살았고 삼괴(三魁) 신종호(申從濩)의 아들이다.
보유 : 천목에는, 헤아려 아는데 명민(明敏)하고 학행과 재예가 있으며 지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천과가 파한 뒤에 집에 있었다. 본디 명망이 있었으므로 재상들이 꺼려하는 바가 되었다. 신사년 추관(推官)이었던 영상 김전(金銓)ㆍ좌상 남곤(南袞)이 계하기를, “전일에 승지 최세절(崔世節)로 인해 최수성(崔壽城)과 신잠이 대신을 모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들었으나 적실(的實)하게 알지 못했는데, 지금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서기(書記)에 신잠의 이름이 또한 끼어 있으니 아울러 추문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더한 뒤에 장흥(長興)으로 유배시켰다. 양주(楊州)로 양이(量移)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기해년에 임관되어 계자를 뛰어넘어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제수된 후 여러 번 전임되어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는데, 백성 다스림이 첫째라 하여 통정(通政)으로 승진한 다음 죽었다. 호는 영천자(靈泉子)이다. 시율(詩律)을 잘 짓고 행서(行書)를 잘 쓰며 대[竹] 그림을 잘 그렸으므로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사문(斯文) 윤강원(尹剛元)이 일찍이 신사년 일을 물었더니, 공이 대답하기를, “강개스러운 일에 분격하여 한 말을 반측자(反側子 뒤집어 모해하는 자)가 재앙을 꾸며 얽어서 옥사를 만들게 되었다. 음애(陰崖)가 일찍이, ‘안처겸은 의협한 무리라.’ 일컬었는데, 이 일을 들어서 알 수 있다.” 하였다.
상주목사 신잠은 누구인가?
1491(성종 22)∼1554(명종 9). 조선 전기의 화가.
내용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가 양주(楊州)로 이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났다. 기봉 백광홍이 그에게 수업하였다.(장흥 예양서원 입향)
그 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 중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尋梅圖)」와 「화조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1. 신잠(申潛)의 삶
신잠(申潛)은 1491년(성종 22년)에 태어나 1554년(명종 9년)에 상주목사로 재직 중 순직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뛰어난 화가이며 교육자였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으로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다시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 즉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도 장흥에 유배되어 17년 만에 양주(楊州: 지금의 아천동)에서 주거의 편리만 인정받았다. 그 뒤 20여 년간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였다.
1543년(중종 38)에 다시 등용되어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의 주부가 되고 태인(정읍)현감, 간성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태인현감으로 부임해서는 7년 동안 재직하며 동서남북의 사학당(四學堂)을 세워 유학(儒學)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고을 사람들이 신잠(申潛)의 그런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정비를 세우고, 성황당을 지어 신잠(申潛)과 부인 등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모셨다. 이 조각상은 모두 나무로 만든 입상이며 원색을 사용하였다.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삭망(朔望)에 신잠(申潛) 선생께 제사를 올려 태인 고을의 태평과 국세를 상납할 때에 불상사가 없기를 기원하였다.
1551년(명종 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18개소(1개소 불명)에 서당을 짓고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 청백리로 녹선(錄選)되고, 명종 9년(1554년) 9월에 순직하였다. 상주에서도 학문을 장려하여 근암서당 등을 지어 교육하였으며, 상주 백성은 그를 부모처럼 우러러 받들었다. 옥성서원(玉城書院)과 무성서원(武城書院),장흥예양서원에 입향되었으며, 수선서당(修善書堂) 앞에 유애비가 있다.
신잠(申潛)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3절(三絶)로 일컬어졌다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묵죽에 뛰어났다고 하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묵죽과 포도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할 만한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와 화조도(花鳥圖)가 그의 작품으로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영천집(靈川集)이 있다.
2.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신잠(申潛)
가. 국역 국조인물고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에 천거(薦擧)에 의하여 군직(軍職)에 보임(補任)되었으나 받지 않았고, 그해 겨울에 대신(大臣)들이 ‘공이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데다 재주가 나라를 빛낼 일을 감당할 만하므로 그가 오기를 기다려 상례(常例)에 따라 조용(調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자, 마침내 육품(六品)으로 초수(超授)하면서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로 임명하였다. 주부라는 관직이 비록 공에게 마땅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은명(恩命)이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대궐에 나아가 사례(謝禮)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신잠(申潛)은 주부가 됨은 무익(無益)하니, 고쳐 수재(守宰) 즉 수령(守令)에 임명하여 치적(治績)을 살펴보려 한다.” 하고, 이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보임하였다. 어떤 이는 공이 하찮은 벼슬로 굽혀 임명됨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서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오래도록 다스려 본 경험은 없지만, 본디 산야(山野)의 처사(處士)와는 동류(同類)가 아니고, 은명(恩命)이 이러함에 이르러 의리상 피할 수 없다. 하물며 옛날의 대현(大賢)은 모두 주현(州縣)을 맡는데 편안해 하면서 충분히 그 뜻을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을 뿐이니, 내가 어찌 꺼리겠는가?” 하고, 마침내 나아갔다.
공이 현(縣)을 맡음에 있어 본래부터 일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수양한 바가 이미 많은데다가 또 세상일을 두루 겪은 것이 많았으므로, 이를 한 고을에 베풂에 있어서는 성대하여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백성들을 어루만짐에는 있어서는 그 자서(慈恕)를 다하고, 정사(政事)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신명(神明)을 다 바쳤으므로, 다스린 지 일 년 사이에 온 경내가 한결같이 교화되고 복종하였다. 또 이 고을은 인순(因循)해 오던 폐단을 계승함이 지극하여, 명목(名目)이 없는 부(賦)와 바르지 않은 세(稅)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많이 섞여 나왔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조목조목 계획을 세워 구분하여 처리하여 거의 모두 다를 개혁(改革)함으로써 그것이 구원(久遠)하게 행해지기를 구하였지, 한 때의 이해(利害)에 따라 급히 변칙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백성 중에 일을 가지고 현(縣)의 뜰에 이르는 자가 있으면, 말을 온화하게 하고 자신의 뜻을 낮추어 위엄과 꾸짖음을 가하지 않았고, 부결(剖決)은 합당하여 남의 의표(意表)의 밖에서 나왔다. 골육(骨肉)끼리의 소송(訴訟)이 있게 되면, 역시 반드시 은의(恩義)의 중함을 깨우쳐주고, 거듭 그것을 간절하고 상세하게 하므로 백성이 모두 부끄럽게 여기고 탄복하며, 뉘우치고 깨달아서 그 다툴 바를 잃어버리고 물러갔다. 그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예(禮)를 흥기시키고 풍속을 선량하게 하며, 재목이 될 만한 이를 육성(育成)하고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방촌리사(坊村里社)에 널리 국당(局堂)을 설립하여 스승과 학생을 위한 장소로 삼았는데, 전포(錢布)를 많이 출자(出資)하여 그 비용을 넉넉하게 하는 한편, 종종 직접 방문하여 종용히 소속된 이들을 가르쳤다. 그 가르친 바는 사조(辭藻)를 기송(記誦)하여 익힘에 있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을 존양(尊養)하고 효절(孝節)을 기리고 선양함에 있었으므로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반드시 경이(敬異)를 더하고, 그 성명(姓名)을 기록하였다. 절기(節期)가 이르면 혹 늠미(廩米)와 술 및 음식을 보내어 장려(獎勵)하였고, 미미한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에 이르러서도 역시 반드시 직접 점검하였다. 그리고 아전들이 살피지 못한 것을 살펴 밝혔으므로, 아전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때마침 연이어 흉년을 당하여 유리(流移)하는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먹을 것을 바라자, 이에 부정공(富鄭公, 송나라 때 사람 부필(富弼)로 청주의 난민을 구제하는 데 대한 구체적 내용을 진달한 적이 있음)의 고사(故事)를 끌어와 방실(房室) 백 칸쯤을 벌여 설치하여 거처하게 하면서 매양 음식을 먹게 하였고, 대악(大惡)을 저지른 자가 아니면 반드시 몸소 임하여 살폈으며, 무릇 의약(醫藥)으로 조호(調護)할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조치(措置)가 섬세하고 구비되는 등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원근(遠近)에서 소문을 듣고서 다투어 태인(泰仁)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아 이에 의지해서 목숨을 온전히 한 자가 무려 수천인이었다. 이에 관찰사(觀察使) 김광철(金光轍)공이 조정에다 그 일을 올렸는데,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고서 일급(一級)을 가하도록 명하였다.
1551년에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이때에 공의 병이 치유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임금의 은혜로 중임(重任)에 조용(調用)됨에 감읍하여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이전에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알려진 자에게 모두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는데, 공 역시 그 명을 받았다. 상주는 경상도(慶尙道) 전체를 통틀어 요충지(要衝地)에 해당하여 수레가 폭주(輻輳)하고 기무(機務)가 호번(浩繁)한데, 연이어 흉년이 드는 바람에 유민(流民)이 전부(顚仆)하여 죽어나가는 자가 서로 베고 누울 정도로 많았다. 공이 이에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근면하게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여 살려 주었는데, 규모(規模)와 절목(節目)에 있어서는 한 결 같이 태인에 있을 때에 의거하였다. 이 때문에 굶어죽는 백성이 없었고, 또 농사짓는 것을 감독하여 그들로 하여금 때에 맞게 힘을 쓰게 하였으므로 가을에 이르러 여러 고을이 모두 재앙을 입었으나 오직 상주만은 곡식이 잘 여물 수 있었다. 관찰사 정응두(丁應斗)공이 조정에 황정(荒政)의 전최(殿最)를 올리자, 임금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한 단계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다.
상주는 속현(屬縣)이 넷이었는데, 모두 궁벽한 오지였으므로 선비들이 강학(講學)할 장소가 없는 것을 매우 병통으로 여겼다. 이에 당원(堂院)을 크게 열매 땅을 골라 건물을 지었는데, 비록 극심한 기근(饑饉)을 당하더라도 능히 늠용(廩用)을 절약하여 그 비용을 제공하였고, 또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州)의 인사들이 다투어 서로 흠모하여 본받아 궁벽한 촌(村)과 사(社)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적(私的)으로 영건(營建)하고, 또 이를 위해 힘든 일을 도와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학업(學業)에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그 중 서원(書院)으로 이름난 곳이 무려 열 곳쯤이었다. 또 주문공(朱文公, 남송(南宋) 때 주희(朱熹))의 남원(南原)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고을의 수양된 인사들을 골라 원장(院長)으로 삼아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준행할 교육의 조목(條目)을 가지고 학식(學式)을 간행하매 소학(小學)과 성리학(性理學) 등의 서적을 많이 구입해 여러 서원에 나누어주어 수장케 함으로써 배우는 이들에게 영구한 이익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설치하고 베푸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 그 방법을 실천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 12월 초2일에 급환(急患)을 얻었는데 이틀을 넘기고서는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춘추 64세였다. 관찰사가 조정에 부음(訃音)을 알려오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잠(申潛)은 청렴하고 근면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참으로 이 때문에 슬프도다.” 하고, 마침내 부의(賻儀)를 더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날 마치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처럼, 선비들은 가정에서 곡을 하고, 백성들은 들에서 울부짖었다. 그 상여가 나아감에 미쳐서는 고을의 부로(父老)와 유사(儒士)들이 상여를 만류(挽留)하면서 슬프게 전송하였는데, 인파(人波)가 도로를 가득 매울 정도였다. 향촉(香燭)을 치전(致奠)할 때엔 끊이지 않고 다른 지역에까지 미쳐, 군민(軍民) 중에 뒤늦게 함창읍(咸昌邑)의 치소(治所)에까지 이르러 치전을 닦는 이가 있었으니, 이 어찌 권세와 이익을 가지고 권유(勸諭)하여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겠는가? 이듬해 3월 모일(某日)에 선영(先塋)이 있는 아차산의 임좌병향(壬坐丙向)의 묘원(墓原)에 예법(禮法)에 따라 장사지냈다.
나. 태백산사고본 10책 13권 32장 A면
명종 13권,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5일(정축) 2번째기사
【이명규를 형조 판서로 이준경을 지중추부사로 신잠을 상주 목사로 삼다.】
신잠(申潛)을 상주 목사로 삼았다. 신잠(申潛)은 고(故) 참판 신종호(申從濩)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데다가 문헌(文獻)의 가세(家世)를 힘입어 명공인 선배들과 교유하였고 또 스스로 노력을 기울여 학식을 넓혔는데 이것이 문장에 드러났으므로 당세의 위인(偉人)으로 성대한 각광을 받았다. 중종 때 현량과(賢良科)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바로 귀양가서 해우(海隅)에 유락(流落)된 지가 거의 20년이나 되었다. 정유년에 김안로(金安老)가 처형되자 기묘제현(己卯諸賢)으로 요행히 생존된 자는 모두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신잠(申潛) 역시 소명의 은택을 입어 방환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미 그 과제(科制)를 혁파했기 때문에 문반(文班)에 복직시킬 수 없었지만 그 재능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직질(職秩)을 올려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그 치적이 제도(諸道) 중 으뜸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환조(還朝)하여서는 곧 산수나 즐기려는 뜻으로 간성군(杆城郡)을 얻어 부임하였데 얼마 안 되어 전조(銓曹)가 정의(廷議)에 의해 주의(注擬)하였으므로 상주 목사에 제수한 것이다. 상도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임지로 떠날 때 인견(引見)하였다. 신잠은 초년에 축출당해 반평생을 궁하게 떠돌았고, 만년의 벼슬길 또한 초라하여 빛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진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는 정성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늙어갈수록 더욱 돈독하였으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수 있다.
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7권 74장 A면
明宗 17卷, 9年(1554 甲寅 / 명 가정(嘉靖) 33年) 12月 13日(己卯) 1번째기사
【상주 목사 신잠의 졸기. 미두 8석을 치부하다】
상주목사(尙州牧使) 신잠(申潛)이 졸하였다. 신잠(申潛)은 자질이 영민하고 서화(書畫)에도 솜씨가 있었으며 글을 잘 지었다. 처음에 현량과(賢良科)로 진출(進出)하였다. 기묘년의 화로 폐치된 지 20년 동안에 아차산(峨嵯山) 밑에다 거처를 정하고 혼자서 서화를 즐기며 장차 일생을 마칠 듯이 했었는데 인묘조(仁廟朝)에 특별히 6품직을 제수하였다. 벼슬살이를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하여 일찍이 일 그르치는 때가 없었고 상주 목사가 되어서는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부모처럼 친애하였다. 염근(廉謹)으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애석하다. 재능을 크게 펴보지도 못했는데 하늘이 너무 빨리 빼앗아갔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경상도 관찰사【권철(權轍)이다.】의 서장을 보니 상주 목사 신잠(申潛)이 죽었다고 했다. 이 사람은 염근했기에 위에서도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미두(米豆)를 8석씩 치부(致賻)하도록 하라.”
라.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9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청렴하고 근신(謹愼)하는 관리로 뽑힌 사람으로 호조 판서 안현(安玹) 등 18명, 병으로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 대사헌 이준경(李浚慶) 등 10인이며 외임(外任)으로 뽑힌 사람은 상주(尙州) 신잠(申潛) 등 14인이었는데, 각기 향표리(鄕表裏) 1습(襲)씩을 하사하였다.
마. 신잠비
비는 높은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세웠는데, 비몸돌의 윗변 양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비문은 비바람에 글씨가 많이 닳아 있어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우나, 신잠(申潛)의 공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신잠비는 이곳 주민들이 당시 태인현감(泰仁縣監) 신잠(申潛)의 선정(善政)과 그의 치적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중종(中宗) 39년(1545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석의 글은 소세양(蘇世讓)이 지었으며, 태인 지역에는 이 비석 외에도 신잠(申潛)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무성서원, 신잠(申潛)의 모습을 새겨두고 제사를 받드는 조각상 등이 있다.
【신잠 비문 번역】
새 그물을 치고 대밭 집에 한가히 있음에 베옷에 띠 두르고 기뿐 얼굴로 자기를 소개 하면 서 보기를 원하는 두 선비가 있으니, 김태학 생원과 백태학생 삼귀였다.
우리는 태인 고을에 여러 대를 살았다면서 신잠 군수의 행적을 말하였다. 이 고을은 교통이 혼잡한 곳으로 인가는 드물되 일은 많아서 부역이 자주 있고, 조세 부담 이 무겁다. 늦추면 예산이 부족하고 서두르면 원망이 심하니, 둘 다 병이되는 사리를 깨닫고, 신군수가 갑진년 상반기에 먼저 읍민의 폐해를 개혁할 법을 세우고, 읍민을 무마하며, 송사에 삼가고 자기는 엄하게 다스리며 사람을 대하는 것을 너그러이 하니, 읍민이 기꺼이 따르다.
‘자유가 무성군수로 읍민을 예로서 가르치니, 공자가 기뻐하시다’의 명언을 본받아 이러함이 백성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형법으로 엄하게 백성을 억누르니, 순후하고 아름다운 풍습이 드물게 되었다. 어찌 법으로만 하리오.
학문을 일으키고 풍습을 변화시킴에 뜻을 하고 마을에 서당을 세우고, 서책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녹미를 남기여 스승을 맞아 고을의 준수한 자제를 가르치고,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며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여 염치를 갖게 하며, 순후하고 독실한 행동으로 과오를 범치 않게 하니, 호협하고 교활하던 벼슬 하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마음을 고쳐 착한 행동을 하게 되어 차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거처하는 방 벽에 청렴, 신중, 근면을 대서하여 부쳐 놓고 벼슬하는 법도로 삼으면서 동 편에 집 수 칸을 얽고 틈이 나면 군민과 더불어 거문고 치고, 시를 읊어 속세의 진애를 물리 쳤다. 옛날 신라 말에 최문창 고운이 힘써 이 고을에 있었던 유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우리 신 군수의 시문의 재주와 흉금의 지혜가 천 년 전의 최고운과 같으며, 읍민이 사랑하고 부러워함이 최고운에 뒤짐이 없다. 신 군수의 이름은 잠이요. 자는 원양이며, 고령인으로 조선조 정승을 지낸 숙주의 증손이며, 삼괴선생 호종의 아들로 가훈을 받들고 가업을 이었으며, 문장과 서화를 세상에서는 삼절이라고 칭송하였으니, 찾아와 배우고자 한 선비가 문 앞에 가득하였다. 이제 관직이 만료되어 떠났으나, 군민을 다스리는 것은 교묘한 포용으로 공적이 많았다. 군민의 노소가 망설이지 말고 돌을 갈고 선정의 치적을 새겨 거리에 세우기로 회의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원양의 치적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르쳐 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이 지방군수로서 정사를 잘 함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내가 늙고 졸렬하여 어찌 기문을 지어 여러 사람을 만족하게 하리오만은 원양은 계유년 진사 시험에 합격한 동문생이며, 시산과 나의 집 거리가 머나 잘하는 정사를 고을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며, 또 역사들이 대서특필한 서책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어찌 나의 글이 필요하리요만은 두 선비와 마을 노인들의 요청을 사양치 못하고, 또 뒤에 부임할 군수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정기원 28년 창룡기사중춘개망승전대부전의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이양 진산 소세양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