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3장 31- 35절
제목 : 예수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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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족
2008년 6월 1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3:31-35
(막 3: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막 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 3: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지 않더라도 생겨버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족의 출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직접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다는 이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생져나지 않았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기대를 겁니다. 예를 들면 가족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람들은 일하고 먹고 잠을 잡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러다가 죽습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만든 가족만이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가정은 인간의 힘으로 성사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그 일과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나란히 견주어놓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직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벌리려 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도 이와같습니다. 인간들의 자기 가정 꾸미는 그 능력을 아무리 발휘해봤자 그것이 예수님의 가족으로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족을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9-10에 보면,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의 사람들의 관심사와 교회 분위기가 잘 나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자신이 참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된 것을 너무나도 감사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참 하나님을 알았다는 사실을 참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리에서 되살아나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늘에서 다시 오신다는 소식에 대해서 무척 황홀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들의 힘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이 해내는 결과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평소에 소망하는 것은 현재 자신에게 미흡하고 모자라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 보다 낫게 수정되기를 원하는 것을 소망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미흡함을 채워주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난데없는 복음 소식으로 들떠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의 위력입니다. 약속이 없던 자들이 약속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변화를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특이한 경우입니다.
어느 남자만 셋이 사는 집에 어느 날 부터 자꾸만 짐이 배달됩니다. 뜯어보니 순전히 여성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물건은 그들이 원하지도 않고 주무하지도 않는 물건인 것입니다. 주소를 잘못 기재한 물건이나 하고 한 켠에 방치해 둡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자꾸만 물건이 배달됩니다.
그래서 그 여자 옷가지나 화장품을 발라봅니다. 나중에서 그 남자 세 명은 완전히 여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 집안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이 희망하는 것 외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필요치 않는 것에 왜 관심갖겠습니까.
그런데 자꾸만 하나님의 약속이 전달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식구가 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현재 우리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말씀들을 하나님께서 집중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식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여기에 비해서 인간들의 가정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가정을 꾸미고 그 가정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다가 결국 죽는 일입니다. 그래놓고서 사람들은 그 가정은 오직 사랑으로만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을 모든 것을 용납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가정에서 법을 따지지 않습니다. 법대로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서 유일한 법으로 맺지 않고 사랑으로 맺은 단체가 가정입니다. 가정 안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허물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 어떤 허물도 사랑으로 다 덮어줍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 넘치는 가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랑이 넘치는 가족’과 예수님이 제시한 ‘하나님의 가족’을 상호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가족에서 통용되는 사랑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자를 위한 사랑입니다. 즉 원수나 타인을 사랑해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이란 내가 내놓은 사랑으로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그래서 가정 내에서는 사랑은 부부간에 서로 독점적입니다. 이것을 위반하면 간음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 들어와서는 이 가정의 순결성이 뭐로 전환되느냐 하며는 오직 하나의 신앙을 위한 순결성으로 바뀝니다. 즉 다른 신을 믿으면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바알이라는 종교를 섬기고 그곳 종교 여자 사제와 간음했던 자가 비느하스라는 제사장에 의해서 창에 찔려 죽게 됩니다. 그러자 나라 안에 퍼졌던 전염성이 거두어졌습니다. 이 때는 무려 25,000명이 죽고 난 그 이후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방 종교는 인간 쪽으로 신과 접촉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시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족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가 현재를 찾아오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제단 위해서 이루어집니다. 제단 위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올라갑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실은 죽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시킵니다. 자기 가족이라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인간들의 가정이라면 예수님의 가정은, 도저히 가망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의지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원수 같은 자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는 그 십자가 제단으로 인하여 형성됩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천국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가 우리의 종착점이 아닙니다. 중간 기착점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이 내놓는 사랑을 쳐다보지 마시고 예수님이 내놓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인 된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믿지 말게 하시고 사람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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