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3:3-12 길들일 수 없는 혀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서 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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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을 보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하면서 혀가 작은 지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라는 것이 이토록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모두 말조심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조심은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혀를 인간이 길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은 통제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즉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혀이고, 따라서 말 역시 인간의 의지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7,8절에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혀를 길들여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혀를 길들일 수 없는 것입니까? 말은 내 의지와 생각으로 하는 것인데 조심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말에 실수도 없고 덕을 세우는 말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생각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본성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이말은 완벽을 추구하는자들이 쉽게 빠지는 걸림돌과 가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혀로 저주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혀가 악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마음에 욕심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라면 할 수 있으면 자기 마음에서 욕심을 밀어내고 싶을 것입니다. 욕심이 없이 말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천국만 소망하면서 자유롭고 가벼운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 이유는 내 속의 욕망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님의 은혜가 좋아서 찬송이 나오고 때로는 욕심이 담긴 말이 나오면서 이웃을 시기하고 비방하는 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혀를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신 것처럼 사람들이란 자기 마음과 기질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오시면 마음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한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악한 생각과 간음과 살인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악한 본성이 성령이 오셨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이 능력이 없어서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목적 자체가 우리의 본성을 개조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개조해서 악한 본성을 없애는 일을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의 악함과 더러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죄인 됨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죄인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믿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혀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사실 혀의 문제점과 말의 폐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한 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혀를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혀에 무슨 악이 있고 독이 있겠습니까? 악하고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까?
이것을 보면 야고보는 혀의 얘기를 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대표적인 행동이 곧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여서 하는 말들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이라면 그들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면 보이지 않는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보이는 세상을 살고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말들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십시오.
신앙의 세계보다는 불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혀를 길들일 수 없고, 마음도 내 마음으로 할 수 없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조심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도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에서 자신의 악함과 불의함을 보면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자신을 자랑할 존재도 되지 못하고, 아무리 돈이 많고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불의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한 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가의 여부는 나의 말이 증거하고 있으니 자신의 말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지만 무턱대고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본성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악함이 드러나고 있는 실체를 바라보면서 내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마음 깊이 실감하고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인총이 보이고 인자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시로 자신의 악함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악함을 혀에 달고 다니면서도, 입만 열면 내 속의 더러움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악함과 더러움을 잊은 채 마치 깨끗한 사람인척 행세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차별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돈이나 세상 지위를 가지고 타인과 비교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자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이야 말로 불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지 않은 결과입니다.
즉 도덕과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웃을 차별하는 것이 도덕과 인격의 문제라면 인격을 쌓고 훈련만 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해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국 사람이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실감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믿음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이웃을 시기하고 다투는 말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이웃과 자신을 세상의 것으로 비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신자가 왜 세상의 것으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과 동일하게 땅의 것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더러운 자에게 무엇이 귀한 보배인가를 까맣게 잊고 사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그 역시 자신을 보지 못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내가 흠을 잡고 욕하고 판단하는 이웃보다 내가 결코 잘한 것도 잘난 것도 없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 생각과 기준을 앞세우면서 내 마음에 들면 칭찬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흠을 잡는 것만 드러내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사는 불의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어떤 세계를 살아갑니까? 여러분에게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에서 여러분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십니까? 그리고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악의 덩어리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실감하십니까?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은혜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마음으로만 모인다면 서로 은혜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이 있을 뿐, 시기하고 다투면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를 지향하며 모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만으로 기뻐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엉뚱한데 마음 두지 말고 그리스도 한분으로 만족하는 그러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원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귀함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말에서 악함과 더러움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깨달으십시오. 이런 사람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