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일이>
1. 전태일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한 영화 <태일이>가 2021년 12월에 개봉되었다. 1960-70년대 경제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착취당했던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특히 봉제공장이 모여 있었던 청계천 ‘평화시장’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는 포기한 채 집안 살림을 돌보아야 했던 수많은 어린 여성들의 강요된 고통이 은폐되어 있던 현장이었다. ‘시다’라고 불렸던 12-15세 정도의 어린 여성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의 극심한 노동과 적은 임금, 그리고 열악한 노동 환경 때문에 하루하루 시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폐병을 가졌고, 피를 토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특별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아이들은 해고의 걱정 때문에 병을 숨겨야 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만 했다.
2. 전태일 또한 가난한 집안 때문에 대구에서 올라와 평화시장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남다른 눈썰미와 솜씨를 발휘하여 빠른 시간에 ‘재단사’의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다. 전태일의 목표는 빠른 시간에 돈을 벌고, 기술을 습득하여 독립적인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끔찍한 노동 현장과 그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노동자들, 특히 어린 노동자들의 모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전태일은 우연하게 알게 된 ‘근로기준법’을 독학으로 학습하여 현재 강요되고 있던 노동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의 불법적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전태일은 동료 젊은 재단사들과 합심하여 노동현장 실태를 조사해 언론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전태일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 현장을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3. 하지만 세상의 반응은 차가웠다. 언론 보도는 곧바로 잊혀졌고, 노동청을 비롯한 관료들은 이들의 행동을 조롱했다. 개선을 약속한 사업주들도 노동자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노동자들의 시위는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었으며, 공장 밖으로 나가는 것도 사실상 막혀버렸다. 경제 성장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프로젝트 속에서 노동자 개인의 인권과 노동권은 무시되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거대한 벽을 느꼈다. 누구도 자신들의 절박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둘러싼 어둠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벽에 균열을 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전태일은 날을 잡아 ‘근로기준법 화형식’이라는 시위를 동료들과 기획하였다. 그날 동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이라는 책을 불태운 것이 아니라 책과 함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광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것은 불신과 거짓으로 인간을 억압하던 벽을 향한 하나의 총알이었다. 자신을 불태우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변할 수 없다는 확신에서 결단된 행동이었다. 1970년 11월이었다.
4. 영화는 전태일의 죽음과 그의 유언을 끝으로 그의 죽음을 숭고하지만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중요했던 것은 그가 죽음으로 파생시키려 했던 변화였다. 영화는 그것을 그려내지 못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방송된 SBS의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전태일 죽음에 대한 좀 더 생생한 뒷이야기가 전달되었다. 전태일은 죽은 순간에 어머니와 동료들에게 끝까지 투쟁할 것을 부탁하였고, 전태일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대학생들은 전국적인 시위에 돌입했으며,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주변 노동자와 협력하여 ‘청계노조’를 설립한 것이다. 그의 죽음이 진정한 ‘노학연대’의 시작을 가져왔으며, 노동운동의 변화를 이끌었으며, 우리 사회의 거짓된 모순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5. 전태일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동료들은 전태일의 유언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갔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모든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으며, 전태일의 동료들도 전태일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하여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의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정결과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한 인간의 불꽃이 세상을 밝힌 불빛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도 강고한 어둠을 끝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변화를 위한 불씨였다. ‘죽음’, 그 자체는 미화될 수 없는 행동이다. 어머니 이소선은 집회 현장 때마다, ‘죽지말고 투쟁하라’라는 말을 수없이 외쳤다고 한다. 누군가의 또 다른 죽음을 경계한 외침이다. 투쟁의 진정한 목표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 아니었던가? 영화가 전태일이 했던 결정의 진정성을 우리에게 설득하는 과정이었다면, 방송은 전태일 자체에 대한 초점을 넘어 전태일이 가져온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태일의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외침에 대한 수많은 반응이 그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였던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현대사를 변화시켰다. 그의 말처럼 어둠의 벽에 빛을 위한 구멍을 뚫은 것이다.
첫댓글 - 세상을 향한 죽음! 공존과 상생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나의 이익 앞에서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내가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삶의 본능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애써 눈을 감아야 한다는............ 정치란 무엇인가? 허공 속에 던지는 모호한 질문만이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