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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1:1-4 믿음이 더욱 자라고 2001. 11. 7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데살로니가 전서는 주후 52년경에 기록된 것이고, 후서는 53년 중반에 기록된 것으로 성경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약 일년 반 후에 후서가 기록된 것입니다. 일년 반만에 다시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바울 사도가 편지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첫째로, 성도들의 믿음이 자랐다는 것. 둘째로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여 졌다는 것. 그리고 핍박가운데서도 인내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교회에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우선 인사말은 전서와 동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라고 인사합니다. 은혜와 평강 이것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로부터 받아 누리는 가장 큰 선물이요 복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사말에 그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배고플때는 식사여부를 묻는 것이고, 요즈음은 다이어트가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인사말이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사말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그 첫째가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것입니다. 일년반만에 믿음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살전 3:10절에서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란 선물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하는 의문이 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셔 모퉁이돌 선교회 이삭 목사님의 서신을 일부 인용합니다.
"영어에서 사용하는 '믿는다(believe)'와 '의지한다(trust)'를 우리는 자주 혼동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면, 우리는 예수를 의지하는 삶의 시작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은 말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믿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지하고 전적으로 믿어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쉽게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분이 주인 노릇을 하시도록 모두 맡긴다는 말입니다. 나라 정치나 경제도, 사회의 타락과 이웃의 죄악도. 교회의 허물도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운영자이신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냥 버려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고, 이루어 주신줄로 믿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그 분의 존재를 믿으며, 그 분의 임재를 확신하고, 그 분이 주인이심을 양도해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나아갈 만큼 회개하고 의롭고 거룩한 자리에 있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짜증 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예'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짜증스럽다는 말은 제가 아직도 하나님의 뜻보다 옳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예'와 '아멘'으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연습은 우리 앞에 계신 영적 권위자들 즉 어머니 아버지 혹은 형님 누나 등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론 그 대상이 저보다 어린 사람일 수도 있고, 지식이 없는 할머니 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분이 성경적으로 옳은 말을 하게되면 '예'로 답하여야 합니다. 그 분이 영적 권위자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분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하는 훈련을 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먼저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예'할줄 모르면서 하나님께 '예'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믿는 다는 것, 즉 의지한다는 것은 그 분의 하는 일을 모두 믿어 드리는 것입니다. 때로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아니 대부분이 제 생각과는 달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제 생각처럼 되도록 하려면 제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그릇으로 바뀌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꼭 같은 수준에 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은 제 뜻대로 맞추지 않습니다. 제 뜻대로 하면 '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제 성질대로 화내는 것으로, 주먹질이나 화염병으로 붉은 머리띠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불끈 쥔 주먹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나라나 회사가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는 듯 보이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 중략(북한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과 소망의 사람들 이야기..........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앞에 엎드리십니까? 얼마나 자주 입을 열어 하나님께 아뢰고 계십니까? 친구들과 남편과 자녀들과 떠드는 시간만큼이라도 하나님과 대화하고 계십니까? 이제부터라고 시작하십시오. 거룩한 부담을 가지십시오. 예수쟁이는 예수쟁이다운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삶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아무른 부담감이 없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바가 무엇입니까? 버려라! 벼려야 합니다. 끊어라! 끊어야 합니다. 떠나라! 떠나야 합니다. 죽여라! 멸절시켜라! 멸절 시켜야합니다."
믿어서 구원얻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자라나는지를 보고자 길게 인용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우리의 범사에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믿음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 자신의 현재와 장래를 주님께 의지하고 있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앞에 세우심을 입은 것은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온 열방가운데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려야 할것들을 넘어뜨리고 새롭게 건설하며 심게하는 일을 위하여 예레미야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복음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종교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이 빠져 나갔습니까? 어느 정도는 종교적인 두려움이나 부담감이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도 하시고 행동도 하는 것을 보아서 종교성은 어느정도 무너 졌다고 봅니다. 물론 계속하여 또 다시 일어나지만 그러나 종교적인 부담감에서 자유하게 된 부분을 여러분 자신도 아실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종교성이 무너진 곳에 무엇이 들어 섰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믿음의 역사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들어서 있습니까? 무너뜨림은 다시 세우기 위함인데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음 가득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교성이 무너진 자리에 이기적인 자기 욕심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종이 가득하게 들어 있습니까? 전에는 종교적인 두려움과 부담감으로라도 함부로 못하던 일들을 이제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는데 그 귀신이 쉴곳을 얻지 못하여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와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기에 나가서 저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종교적인 내용들이 빠져 나간 자리에 복음으로 가득채워지고 복음으로 기뻐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소망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할텐데 오히려 자기 이기적인 욕심이 더 들어차게 되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일 있으면 추수감사절입니다. 성경적인 절기지킴은 아니고 우리나라가 미국의 선교를 받아서 미국적 추수 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구제헌금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전에 추수감사헌금을 하는것과 복음을 듣고 나서 하는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감사함으로 형제를 위하여 내어 놓는 것이 전에 하는 것보다 더 많습니까? 자기를 위하여여는 부요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오히려 인색하여지지 않았습니까? 너희 형제가운데 지극히 적은자 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살을 뺀다고 돈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살빼는 방법 간단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새벽기도 나오십시오. 잠을 덜자고 일찍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그렇게 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일부러 멀리서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옮니다. 그러면 살빼는 비용만으로도 얼마든지 구제헌금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담이 되십니까? 부담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 방종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가 복음을 듣고서 약 일년반만에 믿음이 더욱 자랐다고 하는 그 감사와 자랑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3절을 봅니다.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것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까?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더욱 자라난 증거가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여 지는 것입니다. 김춘자 집사님의 두 딸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습니다. 병원비에 보태라고 어떤 분이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금액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관심이 아닙니까? 형제 사랑이 더욱 풍성하여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나의 식구, 나의 친한 사람만 챙기고 있습니까? 몇사람 되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제각각입니까? 정말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가야할 길과 행할 일에 대하여 서로 나누며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제대로 잡아 가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3:11-13절을 봅니다.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사도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서신에서 보냈습니다. 전서에서도 이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서에는 더욱 그러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의 역사가 풍성하여 지고, 소망의 인내가 굳건하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소망의 인내를 말하고 있습니다. 소망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인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 전세에서도 말한바 소망의 인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음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믿음에 세계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 손에 잡힌 것, 눈에 보인는 것 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을 결국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 화요 성경공부하면서 이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지 못할까? 하나님께서 일하실 기회를 우리가 드리지 않는 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맛볼수 있겠는가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용할 양식만 있더라도 감사하면서 기다려 보면 하나님의 손길를 알수가 있을텐데 양식을 주시든지 굶게 하셔셔라고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실텐데, 일용할 양식으로는 불안해서 한달치 일년치 백년치 자기 자식대에 이르기까지 준비하여 두고 있으면서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공중의 새와 들에피는 들풀하나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이 모든 것이 불타버릴 것을 믿겠습니까?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것들로 나의 안전지대를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야 핍박가운데서도 인내하게 됩니다. 핍박과 환난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있었지만 그러나 믿음의 역사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희미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분명하여 지고 선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자람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다면 더욱 믿음을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를 위하여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하기를 기도하였더니 더욱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풍성하여 졌습니다. 이러한 열매들이 더욱 풍성하여 지도록 더욱 믿음이 자라가기를 소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5-12 환난과 안식 2001. 11. 14
5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9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앞으로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을 과연 우리가 믿고 있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과연 내 자신이 이러한 내용을 믿고 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머리로는 믿고 있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 믿는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데 삶의 상황에서 믿고 있는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성경과 교회역사속에서 어떻게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올수가 있었겠습니까? 성경의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눈에 보듯이 믿고 살아 갔으니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는 그 시대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직접적인 환난과 핍박이 있다면 흑백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분명하여 질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을 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예수 믿으면 사형이다. 믿을래? 말래? 이런 상황이라면 믿습니다. 탕, 억 하고 죽으면 되겠지요! 물론 그것도 자기 힘으로야 되겠습니까만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생활속에서 순교적인 각오가 아니면 재림의 예수님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이 정말 동화속의 이야기나 전설속의 이야기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그리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부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우리가 예배시마다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고백이 아니라 단순히 의식상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새기면서 고백하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기에서부터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려고 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오시고 믿지 아니한다고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는 없어지더라고 주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귀를 귀울여 봅시다. 4절을 보시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을때에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그러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시라면 환난을 없애주시고 핍박하는 자들을 다 물리쳐 버리시면 되실텐데 왜 자기 백성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대로 보고 계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능력이 없으시든가 아니면 아예 계시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말들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가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손해보고, 거짓말하고 사기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을 그대로 두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미 구약 시편에서 하박국서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5절을 봅니다. '이는' 즉 4절의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렇게 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핍박과 환난이 오히려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 표라는 것입니다. 공의의 심판의 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를 성도의 핍박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빛이 세상에 비추이자 세상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을 미워하고 추방하여 버리는 것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성도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20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이 말씀처럼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에 핍박이 오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소속이 다르기에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다같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에서 택함을 입어 주님께 속하였기에 세상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사랑을 받으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우리의 세상사랑을 책망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회개가 나옵니까? 아니면 변명이 나오고 기분이 나빠집니까? 각자가 점검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역시 5절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환난과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환난과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이 환난과 피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잘못하여 받는 고난이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야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기에 복된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8절을 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때에 성도들에게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현재 환난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갚으시는 것입니까?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중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이때 어떤 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성도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8절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며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두가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란 곧 주 예수의 복음을 모르고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어떤 형벌을 받게 됩니까?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과, 그의 보내신자를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임할 형벌이 어떠함을 안다면 우리가 복음의 받았다는 사실이 천하에 그 어떠한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복음을 순전히 자기의 편리를 따라 사는 기쁜소식으로 바꿀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에 어떠한 심판과 영원한 형벌이 있을것인가를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66:15-16절입니다. 15○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16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
이사야 66:22-24절입니다. 2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23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24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결국 주님 재림하시면 이렇게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벌레도 죽지 아니하는 영원한 불속에 들어갈자가 있는가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자가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형별과 심판이란 결국 하나님을 모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아니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복음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구원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의와 자랑으로 세워가는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의를 믿지 않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20절을 봅니다.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17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환난과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얼마나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이러한 모습의 주님이 곧 오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7절입니다. "봉독" 요한계시록 19:11-16절입니다. "봉독"
요한계시록 20:11-15절입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살후1:10절입니다.주님 재림하실 날에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도에게 영광을 얻으시고, 믿는 자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날꼬!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이것을 믿게 된 것은 결국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어 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을 들었다면 당연하게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후1:1112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를 그 부루심에 합당한 자로 여시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살후 1:8-12 형벌과 영광 2001. 11. 21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길거리에 굴러 다니는 낙엽을 보셨습니까? 말라서 떨어져 딩구는 낙엽을 보면서 그 잎사귀 하나에 인생에 비유하여 보기도 하는 것이 깊어지는 가을의 특징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인생을 자연과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돌고 도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잎이 나고 자라고 단풍들고 낙엽져서 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잎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만물이 주에게서 시작되고 주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우리 조상들의 사고방식과는 다르지만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진리로 받는 자들입니다. 성경에서 인생을 무어라고 합니까? 돌고 도는 자연의 일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죄인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 대하여 형벌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입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전도서 11:9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2:13-14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한번 죽은 것이 사람에게 정하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에 따라 어떠한 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것이요, 어떤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우리가 믿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을 돌아보면 꼭 심판받을 사람들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말로서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과 행위로는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1:16절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10:26-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이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렵지 않습니까? 이러한 말씀에 우리가 전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자유하고 계시든지, 아니면 이러하 말씀에는 관심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주님의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헤가 있는 사람은 종말을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형벌의 날이 될지 영광의 날디 될지 우리의 모습을 말씀을 통하여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노래로 만들어 외우게 합니다. 그 내용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32:28-29절입니다.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행할 것을 내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심판을 받기전에 그들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재림이 있기전에 이러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우리가 회개한다면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어리석게 멸망의 길로 달려간다면 그야말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볼때에는 반대로 보일 것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면 사는 자가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리석어 보였듯이 말입니다.
저의 고향에 바로 뒷집에 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어느날 강가에 있는 논을 사서 집을 지었습니다. 건너는 다리도 없는 곳에 집을 짓자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집을 짓고 얼마 있지 않아서 바로 그 옆에 다리가 생긴것입니다. 이 친구가 방위를 받아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는데 앞으로 다리가 놓아질 것을 미리 안 것이지요. 이러한 것은 세상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지혜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결국 불타버릴 것을 아는 것이 성도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참으로 종말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어떠한 자들이 형벌을 받습니까? 8절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형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주에 살펴 보았습니다. 그 주님의 거룩하시고 두려운 모습을 말씀을 통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형벌의 내용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형벌의 내용은 9절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이 주의 얼굴와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결국 형벌이란 주님의 영광의 얼국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 형벌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한 형벌의 결과입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 죄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두렵고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던 것입니다. 관계가 꺠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가죽옷을 해 입히시고, 다시 생명에 대한 약속을 주심으로 관계를 회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복이란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이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주심이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축복기도를 할 때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봅니다.
민수기 6:22-27절입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3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27○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것이 구약의 축도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벌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얼굴을 돌리시는 것입니다. 물론 얼굴을 마주보고 살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얼굴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벌이란 하나님의 외면입니다. 복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복으로 알지 못하면 주님의 형벌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벌이란 주의 얼굴과 그이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참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복음에 복종하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증거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읽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임재하는 것입니까? 말씀을 통하여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으로 임재하신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가운데고 인도하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받고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사는 것입닌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사도행전 20: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말씀을 같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예 말씀을 인격처럼 말씀께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능히 성도를 세우며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분명하게 알수 있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복인 것입니다. 성도의 복이란 주님의 임재,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형벌이란 주님의 임재가 없는 곳입니다. 결단코 형벌과 영광을 세상의 것들, 사라질 것들을 가지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벌이란 주님의 얼굴에서 멀어지는 것이요 영광이란 그 주님의 영광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광이란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거하는 것입니다.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영원히 살기 위하여 우리는 이미 주님과 약혼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른 자격이 없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을 현재의 남편과 아내에게서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안에서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복종하시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을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처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단 적용을 할 때에 상대방을 탓하지 마시고 자기의 할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어떻게 죽든지, 남겨 두든지 상관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어야만 나도 해 주겠다는 것은 거래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기에 이제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우시고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이르기까지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그 영광의 날에 성도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영광중에 나타날 날을 소망하여 사는 것이 참으로 복있는 성도입니다. 미련한 처녀가 아니라 신랑이 오도록 기름준비하면서 기다린 지혜로운 다섯처녀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영광의 날에
이것을 위하여 바울사도가 다시 기도합니다.
첫째,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기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 그 거룩한 신부로 부름심을 입은 그 부르심에 함당한자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날에 영광중에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선을 기뻐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따라 살면 그것을 영원한 형벌의 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못하여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나누어 주기를 즐기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인위적으로 되겠습니까? 주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주의 은헤를 간구하여 주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도록 참으로 간절히 기도하여야 할 내용들입니다.
셋째, 믿음의 역사가 능력으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보이지 않는 약속의 세계를 눈에 보듯이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생을 바라보면서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세상에 보이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며 사는 것이 믿음의 역사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하여 주의 이름이 그 은혜대로 영광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참으로 주의 은혜로 되어지는 일이기에 주님께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에 우리가 함께 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영원한 형벌을 받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자임을 아시고 날마다 이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더욱 구체화 현실화 되도록 바울 사도의 기도가 오늘 이밤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8 불법자 2001. 11. 28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3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4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5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7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8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성도의 최대의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살전 4:16-18절을 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성도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아서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의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위로는 주님의 재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약속이 위로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믿음으로 인한 시련과 환난과 핍박이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여 흔들리고 있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주님의 재림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하면서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하는 것입니다.
1절을 봅니다.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구하는 것이 주 예수의 강림과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알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면 모든 믿는 자들에 그 앞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서 그 앞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대로 형벌이란 주님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도들은 그 앞에 모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9-31절을입니다.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의 재림시에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며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형벌이지만 주의 택하신 자들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강림과 그 앞에 모임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성도들은 주님앞에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임이라는 단어를 주님의 재림시에 주님앞에 모일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말에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5절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드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모임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라고 교제하는 것을 더욱 힘쓰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앞으로 영원히 그분 앞에서 모일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날이 가까이 올수록 사람들은 모이기를 폐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한마디로 바쁘다는 것입니다. 불을 켜서 일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바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서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바쁨입니다. 결코 자족함이 없는 삶의 경쟁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이기를 힘쓸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모임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영원한 모임을 생각하면서 모이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이러한 주님의 재림과 모임에 대하여 혼동을 주는 자들이 어떻게 나오는 것입니까? 영으로나 말로나 사도의 편지를가지고 이미 재림이 지나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성령을 받아서 말한고, 사도들에게서 들었다고 말하고, 사도들의 편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혼동이 왔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자신이 재림예수라는 사람이 한두사람이 아닙니다. 박태선, 문선명, 안상홍, 이러한 자들이 재림예수라는 것을 성경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너희가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누가 아무렇게 말하여도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저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주의 날이 임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재림전에 커다란 배교적인 일이 나타나고 그 일을 주동하는 멸망의 아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많은 종말론자들이 로마의 네로다. 교황이다. 유럽공동체다. 그러한 말들을 합니다. 안식교에서는 교황청이나 미국을 적그리스도로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부분적으로 배도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직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배도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불법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특징이 4절에 나타납니다.
4절을 봅니다. 대적하는 자입니다.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합니다. 불법자요 대적자요 멸망의 아들이요 적 그리소도의 모습이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 나타난 재림예수니 자신이 하나님이니 하는 자들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도관에 박태선씨가 살아 있을 때 그 곳의 신도들이 박태선씨가 지나가면 하나님이 가신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죽어서 땅에 묻혀 있습니다. 또한 로마황제 갈리귤라가 예루살렘의 성전에 자신의 형상을 세우려고 한 것을 가지고 이러한 적그리스도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다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집단적으로 드러나서 대적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그러한 세력들을 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5-7절입니다. 지금 불법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 활동을 막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기 직전에 불법한 자가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요한 계시록 13장에 짐승이 권세를 받아서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13:1-10절을 봅니다. "봉독" 그러나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불법한자, 멸망받을 자가 어떻게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두가지만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살후2:4절입니다. 교만입니다. 불법자의 특징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특징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따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맞먹겠다는 것이 죄의 근본뿌리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자신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전안에서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고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모두가 자기말 들어주면 기분좋아하고 비판하거나 책망하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는 자신의 말 잘들어주는 성도가 좋은 것이고, 성도는 목사가 자기들의 마음에 들게 해주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둘다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깨어지고 겸손하여 지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범사에 자신이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대접받고자, 섬김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죄된 모습이 아닙니까? 누가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앞에 무릎을 꿇습니까? 사극을 보면 임금이 내린 어사주를 받고서도 큰 절을 하고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어명도 절을 하고서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약이 내려도 임금님께 절을 하고 사약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받고 있습니까? 이미 우리가 불법자의 속성을 그래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혹을 하면 얼마나 잘 넘어 가겠습니까?
두 번째로는, 요한일서 4:1-6절입니다. "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5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1)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이미 적 그리스도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서에도 말씀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적그리스도가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별하는 것입니까? 영을 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이란 복음을 전한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자들을 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분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결국 십자가를 지시기 위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온전하고 완전한 구속의 능력이 됨을 믿고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를 부정하는 자들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자들은 그들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 만으로 부족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고서 어떻게 완전하게 구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모르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만이 아니라 어떻게 예수만 믿고 세상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도 어느 정도로 사랑하고 살아야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어느 정도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보다 언제나 더 사랑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요한1서 2:15-17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좇아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세상의 말에 귀를 잘 귀울이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세상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속한 자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종말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 불법자, 대적하는자, 멸망받을자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재림직전에 더욱 불법이 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사실 종말인 것입니다. 드러난 이단들이야 경계가 됩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이단이 더 문제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우리 자신들이 아닙니까? 그러한 자들이 모인 교회가 아닙니까? 이것이 다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불법과 대적함과 교만의 모습인줄 알고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살후 2:9-12 사단의 역사(役事) 2001. 12. 5
9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1)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주에 불법자가 나타날 것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멸망의 아들, 대적자입니다. 이러한 이름이 오늘 9절말씀에서는 악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자에 대한 이름입니다. 이러한 악한자, 불법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나타날 것이지만, 그러나 이미 그러한 자들이 지금 활동하고 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최종적인 대적자의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그러나 지금 이미 그러한 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법자의 모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교만의 모습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의 활동이 우리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유혹에 넘어가면 전부 남의 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비행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우리 자식은 저러지 않을거라고 하고 있다가 막상 사고가 나면 우리아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잘못만나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이가 이미 나쁜 친구들을 좋아하는 그러한 나쁜 생각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불법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불법자와 동류가 되는 것은 우리안에 그러한 것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법자 악한자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9절입니다. 악한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른 것입니다. 그 머리가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역사한다는 것은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어떠한 활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역사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사단의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구별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성령의 역사인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단의 역사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단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표적과 능력과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표적과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이것이 어떻게 사단의 역사이겠는가 할만큼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고, 사업이 번창하여 지고, 교회가 부흥이 일어나고, 세상사람들도 놀랄만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표적과 능력과 기적이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기군들이 사기치는 것이 들키지 않게 하려고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거짓 표적이고, 거짓 능력이고, 거짓 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표적과 능력과 이적이 나타나지 않아서 거짓이 아니라 실제 표적과 능력이 나타나지만 결국 사단의 역사를 따라서 나타나기에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10절에 보시면, 결국 불의의 속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고 있는 자들은 모릅니다. 가장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1:13-15절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거짓 사도, 궤휼의 역군, 이들은 복음을 전하다는 자들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여 나타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따라 나타나는 거짓 사도와 궤휼의 역군들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표적과 능력과 이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3-4절을 보시면, 뱀이 이와를 미혹하게 한 것처럼 바울이 전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나 다른 영을 받게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에게서도 능력과 표적과 이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순금보다 가짜금이 더 순금같아 보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보다 훨씬 더 능력있어 보이고 실력있어 보이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오히려 초라해보이고 말도 어눌하고 사도도 아니라고 배척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울의 전한 복음보다 그들의 전하는 것을 더 잘 용납하고 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보암직 한 것을 원합니다. 볼거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최초의 유혹이었습니다.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보았을 때 보암직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먹음직 하였습니다. 그래서 따 먹은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유혹거리는 보암직한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암직하면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예 24시간을 광고하는 방송국이 있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운영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보암직한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기한 능력과 표적과 이적같은 것들이 교회안에서 끊임없이 나타나야 사람들의 호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보고 믿을수 있도록 하시면 되실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일부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능력과 표적과 이적을 사랑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새번역으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또한 모든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단의 역사를 따라 유혹에 빠지는 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고 거짓 것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된 상태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상실한 대로 내어버려 두신 것입니다. 참으로 자신을 구원할 진리에 대하여서는 냉담한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애정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지신 예수님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병고쳐주고 먹을 것 주는 예수님은 좋지만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예수를 원하는 것입니까?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 나를 통하여 능력과 표적과 이적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병은 들지도 않아야 하고, 만약 불치병이 들었다고 하여도 기적적으로 나아야하고, 시험을 쳤다하면 일등으로 함격하여야 하고, 정말 세상사람들이 보아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만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러한 능력과 표적과 이적들을 보고서 따라가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결국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오늘도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외면하고 불의의 것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된 상태대로 그대로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가운데 사단이 역사하여 거짓 것을 믿도록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역사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한자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거짓것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심판받게 하시는 장치가 거짓 능력과 표적과 이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능력과 표적과 이적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참으로 무능력하여 보입니다. 저주 받아 죽은 모습입니다. 약한 모습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서 버림 받은 모습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꺼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서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때 남쪽 유다왕 여호사밧이 아함왕과 함께 아람을 치기로 하고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아합왕이 불러모은 400명의 선지자가 무두가 한 목소리로 왕이 이길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응답을 받았다면서 철 뿔을 만들어 와서는 이러한 무기를 사용하여 이길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보암직합니까? 능력있어 보입니까? 그런데 여호사밧왕이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하나님께 물어볼 다른 사람이 없는가 하니 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늘 나에게 나쁜 말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선지자를 불러라고 하여 물어봅니다. 그러자 올라가면 왕이 죽는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이시고자 하시는데 어떻게 하여 죽일꼬 하니 한 영이 자기가 나가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서 선지자 400명의 입에 동이라한 대답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거짓것을 믿는 아합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미가야는 혼자 였습니다. 거짓 것을 믿게하는 선지자는 400명입니다. 이들은 궁중 선지자로 능력도 있고, 표적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초라합니다. 그래서 400명의 선지자로 뺨까지 맏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말대로 되었습니까? 미가야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혹이 하나님께서 직접 유혹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차원에서 사용하시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말년에 자기의 힘과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사단의 충동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돌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역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무엘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결국 다윗의 교만에 대한 죄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다윗의 인구조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력과 힘이 얼마만한 것인가 하면서 다른 교회들과 비교하여 보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다른 집과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주신 사랑은 간곳없어지고 또다시 세상이 원하는 능력과 표적과 이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진리의 말씀을 좋아합니까? 거짓것을 좋아합니까? 거짓 것이라고 해서 사기치고 도적질 하고 강도질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것, 영원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거짓 것입니다. 우상이란 곧 헛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을 영원한 것인양 사모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 모두 거짓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는 것을 꿈으로 제시하고, 삶의 묙표롤 제시하면서 계속하여 보암직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거짓 것을 믿고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점검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진리의 사랑을 받아 들이고 있습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고 있습니까? 세상에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진리의 말씀에는 냉담하고, 무관심 하면서 오히려 심판 받을 것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진리의 사랑을 받아 들이고 있다면 세상이 좋아하는 능력과 표적과 이적을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믿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13절에서 14절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성도가 사단의 역사를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살후 2:13-15 감사할 것 2001. 12. 12
13○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오늘 말씀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가 바로 앞의 내용과 비교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내용이란 지난주에 보았듯이 악한자의 임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의 특징은 보암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감사는 그러한 보암직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얼마든지 사단의 일들로 위장되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듯이 오늘도 사단의 일군들이 복음의 일군으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능력과 거짓 기적을 좇아가는 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 마음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러한 유혹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바울사도는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복음으로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내용인가하는 것을 점검하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란 늘 보암직한 것들이 나타나야 감사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무언가 남들보다 두드러진 업적이 나타나야 감사하고, 남들보다 특별한 능력들이 나타나야 감사하고, 남들보다 뛰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은 자화자찬의 자기 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였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을 이루어 내었는가하는 쪽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 세상의 보암직한 것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러한 내용은 아무도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감사를 한다고 하여도 아주 형식적으로 기도 서론에서나 말하는 입에 발린 말뿐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감사를 다시 살펴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무엇이 참된 감사인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을 보고서 이렇게 된 것은 바울이 전도를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복음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반응을 보이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가 얼마나 그 사람에게 잘해 주었는가를 따집니다. 얼마나 정성을 드렸는가? 선물을 했는가? 관심을 가졌는가? 이러한 것으로 전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나큰 오산입니다. 그런데도 전도의 방법론에서는 늘 이러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2절을 보시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복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듣고서 그것 참 좋은 소식이네 나도 믿어야지 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당 꼭대기마다 십자가는 무엇하려고 걸어 놓았습니까?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죽으려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하는 표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한번 뜰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복음을 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믿는자가 나온다는 것을 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택하여 놓으신 것구나하고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마에 표시가 나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알수 있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여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서 믿음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택하여 놓으셨구나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택이 왜 감사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우리가 스스로 생명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여 믿음에 길에 들어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서 내가 하나를 선택하여 왔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선과 악을 선택할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죄의 권세아래 있기에 스스로 빠져 나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외부에서 끄집어 내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진리에 대하여 무지한가 하면 구스인이 그 피부색을 바꾸지 못하고 표범이 그 반점을 바꾸지 못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악에 익숙한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갈수가 없다는 것을 선지자들이 이미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택하심이 아니면 결코 그 어느 누구라고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떤 누가 전도를 했다고 하더라고 그 전도를 받고서 믿음의 반응을 보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증거하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도왕이란 사람이 나올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만명을 전도하였다고 하여도 내가 아니요가 나오는 것입니다. 택하셨기에 믿음의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65세 할머니 이야기)
둘째로,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택하셨기에 택한 자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여서 점점더 거룩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를 닦아서 점점 거룩하여 지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영이 임함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구원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얻는다는 것은 나에게서 능력이 없을 때 얻는 것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다면 얻는 것을 부끄러운 일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무능하였으면 거저 주시는 것을 감사하겠습니까? 자신이 무언가 할수 있는데도 거저 준다면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습니다. 나를 우찌보고 이렇게 대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무능력한 자임을 인정하는 자라면 그저 주시는 것을 감사할 뿐입니다. 이러한 자가 믿음이 큰 자입니다. 믿음이란 표적과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자가 믿음이 좋은 자가 아닙니다. 표적과 능력을 행하고서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자신은 얻어야만 하는 가난하고 불쌍한 자임을 알고서 얻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믿음이 큰 자입니다.
마태복음 15:21-28절입니다.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헬라인으로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서 개같이 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에 주님께서 주인의 상에서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에 옳다고 합니다. 자신이 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28절에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큰 믿음입니까?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함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나는 이 정도이니 구원을 받았겠지! 이만큼 내가 한 일이 있는데 설마 주님께서 날 모르신다고 하시겠는가 이런 생각이 믿음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로 얻어 먹어야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얻어 먹을수밖에 없는 자입니다라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자요 성령으로 거룩함을 얻은자요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14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즉 우리를 처음부터 택하시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누구로부터 받은 복음인가를 드러내는 것이지 바울 자신을 자랑하거나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께로부터 받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하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얻는 것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얻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때에 나타날 영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미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의 영광이 무슨 영광이었습니까? 자신이 드러내시고자 하신 영광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이었습니다. 세상이 볼때에 가장 저주받아 죽는 죽음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길이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는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꾸만 세상의 썩어질 영광으로 바꾸려고 합니다만 그러나 베드로전서 4:14절 말씀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영광의 영이 그 위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도의 고난은 장찬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나타날 영광을 미리 당겨서 맛보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쉬운길이 아니기에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5절입니다. 굳게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단의 역사를 따라 악한자가 온갖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 가득하여도 바울의 말로나 편지로나 가르침을 받은 그 복음을 굳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굳게할 것은 내가 만들어 낸 그 무엇을 굳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로부터 주어진 것들을 굳게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들이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택하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지키는 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날에 그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0-11절을 봅니다.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1)주시리라" 무엇을 행하라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것을 굳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한즉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합니다. 자기의 행위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행함의 세계란 자신의 행합을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고 하고 능력도 행하였다고 하여도 주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결국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받아서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받고 얻고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불쌍한 자들인가를 알면 알수록 거저 주시는 은혜를 귀하게 감사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끝으로 에베소서 1:3-14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복이 무엇입니까? 창세전에 택하신 것입니다. 택하신 이유는 주님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6절입니다.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더욱 충만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살후 2:16-17 영원한 위로 2001. 12. 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기도입니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기도가 많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성경적인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란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것이 기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참으로 열심히 지성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도 자식을 위하고 남편을 위하고 자기 집안을 위하는 길이라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몸을 단장하고 가장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떠옵니다. 다른 사람이 첫 우물을 떠가기 전에 떠와서는 천지신명에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기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이든 교회된 기도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에 불에 기름을 붙듯이 교회에서건 절에서건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정성을 바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천번제를 하고 있는 곳이 한두곳이 아닙니다. 어느 절에서는 일천일 기도한다고 프랭카드를 붙여 놓았습니다. 바로 곁의 어떤 교회는 특별새벽기도회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니 아예 어떤 절에서는 일만일연속기도도량 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우리에게 오면 더욱 기도의 효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바치는 모습이 수능일 교문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사도가 기도하는 것과 비교를 한번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도도 교정되기를 바랍니다.
16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순서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13절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부분에서는 더 많이 하나님 아버지가 먼저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서가 바뀌어 나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을 함께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사도의 기독론인데 이방세계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이러한 생각을 참람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부터 라고 하거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라고 하거나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며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먼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심과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별반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별반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힘이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람 그러한 가치는 믿지 않는 사람도 어느 정도알고 있지만 그러한 것이야 내가 일단 힘이 있고나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든 절에서든 비는 내용의 대부분이 사실 힘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자는 이러한 내용에 감사를 하게 되어 있고, 기뻐하고,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는,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상 진노의 자녀 였음을 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유대인들도 시시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말라기1: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니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애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한 것이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 병이 들어있고, 집안에 어려움이 있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하시면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사랑하는데 이러시는 겁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누가 더 고생을 합니까? 야곱이 훨씬 더 고생을 합니다. 왜 그렇게 고생을 하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하여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업을 버리고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게 하기 위하여 고생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범사에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도록 하는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의지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무너지고 부수어져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단지 내가 이 세상의 욕망을 채우는 일로 적용을 한다면 감사할일이 하나도 없이 오히려 고생한다고 원망만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눈뜨게 되면 세상은 정말 시시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만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사랑을 받았고 알게 되면 세상에서 어떠한 환난과 근심과 염려가 있다고 하여도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는 잠시 술에 취허거나 약물에 의존하여 잊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참된 위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 위로입니다. 그 약속하신바를 바라보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경 두곳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51:12-16 "12○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4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양식이 핍절하지도 아니하리라 15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2)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 위로하는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고 풀같이 될 인자를 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7절입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누가 위로자 입니까?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위로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환난중에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환난을 없애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곤난이 넘치는 것 만큼 위로도 넘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를 통하여 무엇을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난을 통하여 계속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영원한 위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 좋은 소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땅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이것이 좋은 소망인 것입니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믿음의 시련들이 닥치는 것입니다. 7절에 보시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소망이 아닌 것은 한낮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칼의 노래라는 책에서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유언시를 보았습니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일본의 막부세력들을 통합하고 오사카에 거대하고 영화로운 저자거리를 만들어도 그 모든 것이 죽을 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썩어질 기업이 아니라 영원한 기업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는 것이기에 이 땅의 가치로는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위로부터 난 사람이라면 그 무엇보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여 주시기를 바울사도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여러 가지 어려운 믿음의 시련중에 있음을 알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것입니다. 그러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방금 앞에서 말씀드린 그러한 내용들이 성도들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도 어떤 기도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과 영원한 위로와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럽지아니한 영원한 기업을 있게 하시는 그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기도하는 내용은 모든 선한일과 말에 굳게 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일과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말이 선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얼마나 악한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알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잘난맛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행위를 하거나 말을 할 때에 선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무슨 일을 하거나 무슨 말을 할 때에 어떻게 하여야 선한 것이 됩니까? 단지 세상사람들이 착하다거나 선하다는 것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일과 말에 선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4:7-12절입니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이것이 모든 선한일과 말인 것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헤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과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따라써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렇게 되면 모든 말과 행실에서 결단코 자기 자랑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은사를 따라 행한것이기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마시고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도록 근신하여 기도하며 이러한 은혜가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기도하도록 합시다.
데살로니가후서 3:1-5 바울의 기도요청 2001. 12. 26
1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지난주 수요일 저녁에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제목이기도한데 영원한 위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위로가 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성탄절에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시므온 위에 계셨습니다. 메시야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나아가서 아기 예수를 만나 가슴에 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러한 위로를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주시도록 기도하고서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기도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어떤 사람입니다. 얼마나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까?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까지 허락되어야 될 정도로 대단한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9:12절에 보시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사도가 얼마나 겸손하였으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자신이 전도하여 성도가 된자들, 새신자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면서도 무엇이나 된 것처럼 교만하여 질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씀이니 복음이니 하면서 말로는 하고 있지만 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세가 바울사도처럼 되는가를 심각하게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런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니 복음이니 하고 있지만 자기 주변에 어떤 집사가 자기 집을 팔아서 헌금하고 자기들은 전셋집에 살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드릴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하다면서 살아가는 사람앞에서 아무런 할말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비록 나보다 말씀을 모른다고 하여도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새 교만하여 졌습니다. 말씀을 안다고 교만하여 졌습니다. 종교과 복음을 말하면서 교만하여 졌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부탁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교만하여 져 있는지 자신의 약함과 부족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면서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면 정말 넘어진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면서 된 줄로 착각하고서 남을 가리키려고만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나중된자가 먼저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기도 요청을 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1절에서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동격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요청을 몇곳 찾아 봅시다. 살전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 15:30-33을 새번역으로 읽어 봅니다. "10)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31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입지 않도록, 그리고 또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쁜 선물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2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33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 자신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과 함께 기도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화를 입지 않도록 그리고 각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구제헌금이 그 성도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그리고 로마 성도들에게 가서 함께 쉴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18-19절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기도요청은 성도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고나서 무시로 성령안에서 깨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사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이 기도를 요청합니다.
골로새서 4:2-3절입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위하여 메임을 당하였노라"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할 때 형제라고 부르며 또한 자신의 기도에 동역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습니까? 정말 진지하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요청할 것이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구하고 있던 것이 거의 나의 정욕을 위하여 구하고 있었던 것들입니다. 비록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결국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듣게되면 제일 먼저 부닥치는 문제가 기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가 전부 자기 욕심을 따라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고 있었기에 기도할 것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기도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마땅히 기도하여야 할 일을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몇곳에서 기도요청에 대하여 찾아 보니 어떻게 기도하라고 합니까? 무시로, 항상, 깨어, 힘써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를 이렇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싸움이란 기도없이는 하나도 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여야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힘과 능력과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너무나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여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위에서 찾아 본 바로는 복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기쁜소식이라면 담대히 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있습니까? 오히려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 내어야 하기에 그리고 그들이 평소에 기뻐하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부수어야 하기에 복음을 전할 때 담대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면 여러분이 저에게 인상 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속에 감추어져있는 마음의 생각들을 말씀으로 들추어 내면 기분좋아할 사람 한명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러한 중에 참으로 말씀에 찔림을 받아서 회개하게 되면 그것은 참으로 성령의 감동하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록 아프고 쓰라리더라고 목사가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히 증거하도록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좋게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사도가 무슨 기도요청을 하고 있습니까?
3:1절입니다. "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요청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러곳에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증거되는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여러곳에 복음을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쓸때가 고린도 교회에서라고 성경학자들이 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사도가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에 나타난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어떤 복음의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까?
살전1:1-10절을 봅니다. "봉독" 이미 우리가 살펴본 내용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말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증거 되었고, 주님과 사도들을 본 받고, 믿는자의 본이 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주 예수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잘합니다. 믿음을 말로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란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믿음은 귀신도 알고 떠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 참된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에 행위를 더하여야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있는 것은 내가 속고 있지 않는가하고 자신을 말씀으로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아직도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의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말로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수고가 반드시 나오게되어 있습니다. 억지로나 마지못해서 눈치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수군거리던 말던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이 너무 크기에 향유옥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에 대한 인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만 바란다면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강림하심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달음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도록 기도요청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나타난 이러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저희 교회에도 나타나기를 기도합시다.
두 번째로,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라고 기도요청을 합니다. 여기서 무리하고 악한자란 넓게 보면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자들이되겠습니다만 무리하고 악한자들이라는 말씀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인을 말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사도의 마음에 그러한 자들에게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요청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그러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따라다니면서 바울사도를 괴롭힌 자들입니다. 그리고 교회안에도 그러한 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리하다는 것은 합당한 이유없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트집을 다 잡아가면서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unreasonable입니다. 비 합리적이고, 터무니 없고, 과도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린도교회에서는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고후10:10). 바울사도가 외모나 말은 볼품이 없었던가 봅니다. 그러니 외모를 가지고서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한때 고신교단에서는 장애인은 목사 안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율법적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사도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갈라디아서 4:12-16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16그런즉 1)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의 육체의 약함이 시험에들만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과 같이 대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할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 줄려고 하였습니다. 동일한 바울사도에 대하여 이렇게 대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온 몇사람들에 의하여 복음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가려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으로 바울을 대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복음을 막고자 하는 세력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교회안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복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있다고 해서 목사라고 장로라고 해서 다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힘과 세력의 과시를 위하여 살면서 주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란 그 관심사가 하나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증거되는 것처럼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이러한 기도가 되어야 하겠고, 서로 이러한 기도를 요청하시면서 무시로 성령안에서 깨어 기도하시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6-18 마지막 당부와 인사 2002. 1. 9
6○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16○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17○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1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데살로니가 후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3:1절에서 '종말로'라는 말이 편지의 끝을 말하는 것입니다. 1-5절까지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기도요청을 하면서 동시에 데살로니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주의 말씀이 힘있게 달음질하도록 기도요청하고, 무리하고 악한자들에게서 건짐을 받도록 기도요청합니다. 그리고 데사로니가 성도들도 주님께서 지키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단락으로 상당히 긴단락이 됩니다. 6절에서 1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편지의 끝부분에 마지막 당부와 권면이 무엇인지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6절을 봅니다.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부드럽게 부르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권위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고 말씀합니다. 아주 강한 명령입니다. 군대식의 명인 것입니다. 최고 사령관의 명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엄청난 내용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의 긴급명령이다 그러면 아주 중요하고 긴박한 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일들을 감당하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면서 나오는 내용이 규묘없이 행하는 자들에게서 떠나고 일하기 싫거든 먹지고 말고 부지런히 일해서 조용하게 먹고 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시시한 내용들 같습니다. 적어도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주님의 명령이라면 세상을 뒤집어 엎고 혁명이 일어나고 엄청난 사건과 업적들이 드러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보고서는 놀랍다고 찬사를 돌려야 하나님의 일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나 많이 우리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들마다 업적주의 물량주의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너무나 사소한 것들처럼 보입니다. 결국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큰 능력행함을 원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업적이 아니라 성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무엇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봅시다. 규모없이 행하고 바울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규묘없이 행한다는 것은 어떤 자들입니까? 게을러서 일하기를 싫어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무어라고 합니까?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모없이 행하는 자들은 자기 손으로 부지런히 조용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친히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우선 바울사도의 본을 보인것에 대하여 잠시 보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개척을 할 때에 자신이 헌신하고 수고합니다. 스스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7-9절을 봅니다. 이렇게 행한 것은 자신이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본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다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9:1-15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자신의 권리가 있음을 아주 길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다른 사도들 처럼 할 권리가 없겠느냐하면서 군사로 부름받은 자가 누가 자비량하면서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었으면 그 실과를 따먹지 않겠으며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일하는 소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이 소를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육신의 것을 거둔다한들 과하다 하겠느냐 성전에서 일한 자들은 성전의 것으로 먹었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살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고 하여서 이렇게 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하면서 ............ 표시가 있습니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자기가 자랑하는 것이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자랑하는데 그 복음이 혹시 가리움을 받을까 해서 그러한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바울사도가 이렇게 본을 보임으로서 성도들이 바울사도를 본 받게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게으름을 피우며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떠나라고 하고 또 그런 사람들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는 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데살로니가후서의 마지막 당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권면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첫째는, 잘못된 종말관으로 인하여 일할필요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는 전서 4:1-12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어느 날자와 시간을 맞추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밤에 주님오시면 무엇을 하시다가 주님을 맞이 하시겠습니까? 몇일후라는 날자가 정하여 졌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자세이겠습니까? 회개하고, 헌금하고, 성경보고, 그러겠습니까? 집단으로 모여서 흰옷입고 금식기도하면서 기다리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평소에 주님을 얼마나 기다리지 않고 살았는가 하는 반증일 뿐입니다. 평소에 늘 주님과 동행하면서 산다면 비록 오늘 밤에 주님오신다고 하여도 날자를 안다고 하여도 평소에 하는 일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학교가고 직장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주님과의 사귐이 없었으니 갑자가 준비하느라고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평소에 늘 시험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시험치른다고 밤샘을 하느니 하면서 요란을 떠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에 있어서도 주님과 바른 관계가 되어 있다면 주님이 곧 오실텐데 일하지 말자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종말관으로 인하여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는 자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평소에 준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지런히 일하면서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돕는 수준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선한사업에 부요하기 까지 일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요하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부하여지도록 부지런 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정말 일하기 싫어해서 게으른자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짐이나 지우면서 빈둥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걸인들이 찾아 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멀쩡합니다. 얼마든지 일하면서 먹고 살만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핑계과 변명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얼마를 주면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당장 술사먹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이런모습이 교회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일할수 있는데 게을러서 일하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기 손으로 부지런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에게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12절).
세 번째로는, 쓸데없이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우리가 들은즉 규모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보았습니다만 규모없이 행한다는 것은 군인이 자신의 계급에 맞지 않게 행동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분수에 맞게 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병의 일이 있고 장교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각자가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지나가다가 나폴레옹에 대하여 욕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그놈은 게으르고 말썽만 부리고 하는 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그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자기와 이름이 꼭 같은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병을 불러다가 너가 이름을 바꾸든지 행동을 바꾸라고 한 것입니다. 규모없이 행한다는 것이 이러한 모습입니다. 오늘 성도가 규모없이 행한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과 구별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란말 자체가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름에 맞지 않는 것이 규모없이 사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별되는 것입니까? 삶의 방향성과 목표 가치관에 있어서 구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대체 어떤 구별됨이 있습니까? 규모없이 행할뿐만 아니라 일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두가지로 볼수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13절입니다.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참된 과부를 구별하여 과부의 명단에 올리라고 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과부의 명단에 올라간 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말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과부가 있다면 먼저 친척이 그들을 감당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과부란 5절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하는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과보에 대하여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을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부에게만 주는 권면이 아닙니다. 남녀 노소 할것없이 다 적용해야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임을 가지든 간에 얼마든지 일만 만들고 망령된 폄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역예배를 마치고 나서도 주의 은혜의 나눔이 아니라 일만 만들고 누가 어떻더라는 수다만 떨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자들이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게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지목하여 부끄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안에서는 이러한 사람이 없지요 몇사람 되지도 않는데 다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이러한 일들이 있다면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그러한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나서 공개적을 지목을 하여 사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죄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그를 부끄럽게 하여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는 엄청난 내용이 집집에 돌아다니면서 게으름피우면서 수다떨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일할 것이 없으면 더욱 주께 소망을 두고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가 어디에서 어떤 모임이 있더라도 주 예수의 은혜 외에는 할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열심을 낸다는 것은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현장에서 쓸데없는 폄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분에 대한 자랑인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마지막 인사말을 합니다. 이 인사말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 찌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