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개그늘 아래서
윤 승 원
그늘막이 힘껏 날개를 펼친다. 팔각형 그림자가 횡단보도 앞에 시원하게 드리워진다. 여덟 개의 단단한 뼈대 아래, 자리를 깔아놓은 그늘이 제법 웅숭깊다. 서둘러 땡볕을 피해 안으로 들어간다. 뒤이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솔개가 드리우는 작은 그늘을 솔개그늘이라 한다. 소리개가 낮게 날다 보면 땅 위에 작은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그림자라지만 미미하여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여름이면 농부들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논이나 밭에서 일을 한다. 바람도 없고 한 점 그늘이 아쉬운 때, 솔개그림자라도 비치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갑기만 하다.
"엄마가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열흘만 아니 일주일만 더 있다 가면 좋겠어." 딸아이의 말대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수만리 떨어져 사는 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출산 때가 아니고선 또 있을까. 직장에 얽매여 있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연차를 최대한 활용했으나 산바라지 기간은 고작 3주만 가능했다.
방문 기간은 짧았지만 첫 아기를 낳은 딸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나아가야할 길을 개척하고 쑥쑥 성장해온 큰 아이다. 잘 키워서가 아니라 잘 커주었다. 늘 곁에서 응원만 했지 제대로 뒷배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내 손길이 필요하다하면 고마워서 작은 그늘이라도 되길 자처한다. 산바라지는 딸을 위한 일이면서도 엄마로서의 무한한 애정표현이기도 했다.
과습過濕한데다 뜨겁기까지 한 한국의 여름을 나는 힘겨워한다. 여름 동안 땀범벅으로 지내는 날이 많다. 그러나 올해는, 한국의 가을처럼 선선한 노르웨이에서 잠시 머무느라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해가 있는 낮 동안엔 햇살이 뜨겁지만 그늘진 곳은 바람과 함께 시원했다. 저녁이면 공기가 선선해서 산책하기 좋았다. 산바라지 차 갔으나 일면 피서를 다녀온 것 같아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새삼 솔개그늘 같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나 친정엄마는 산후조리를 해주지 않았다. 며느리 둘은 지극정성으로 해주었으면서도 내게는 미역국 한 번 끓여준 게 다였다. 소가 새끼를 낳아서, 명절 대목이라 포도를 따서 팔아야한다며 궁색한 변명을 둘러댔다. 나는 소나 포도보다 못한 딸인가 싶어 섭섭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누워서 시어머니 도움을 받기는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다. 더운 여름에 불구덩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아 차라리 혼자서 어찌해 보겠다며 돌려보냈다.
훗날 나는 딸에게 산후조리만은 꼭 해 주어야지 하고 결심했었다. 모성은 대단한 용기를 발휘했다. 혼자서 머나먼 노르웨이까지 가면서 환승하는 어려움도 겁 없이 해냈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딸아이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곁에 있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긴 여정과 시차로 인해 졸음이 몰려와 쓰러질 것 같았지만 견뎌낼 수 있었던 건 그런 다짐 때문이었으리라. 손목이 시큰거리는데도 퉁퉁 부은 산모의 발과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비빌 언덕이 되어주진 못해도 한 점 그늘이 되어주고 싶었다.
친정집 논두렁 옆엔 조그만 도랑이 있었다. 도랑가에서 자란 미루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 키가 컸다. 느티나무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들판에선 소중한 그늘이었다. 논일을 하다가 잠시 쉴 참이면 이웃한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그 아래로 모여들었다. 둘러앉아 새참도 먹고 잠시 잠깐 해진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기도 했다.
이제 제법 자란 손자와 매일 같이 영상통화를 한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할 정도다. 여린 잇몸을 뚫고 새하얀 이가 나오고 고사리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른다. 무릎으로 기어가는 동작이 어찌나 재바른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가 하면, 제 이름을 부르면 쏜살 같이 다가온다. 손자와의 짧은 통화는 하루 일과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거짓말처럼 씻어준다. 내가 딸에게 위로가 되었듯 딸은 손자를 낳아 나를 위로해 준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화초들과 눈 맞춤을 한다. 난이며 관음죽, 녹보수, 바키라, 수박페페, 다육 등 식植집사로서 하는 일과이다. 그들은 나에게 응원의 마음을 담아 각자의 언어로 인사를 한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옷을 갈아입고 또 화초들 앞에 서성인다. 그들이 전해주는 위로는 나에게 또 다른 솔개그늘이 되어준다.
솔개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점의 그늘도 만들지 않는다. 늘 타자를 위해 희생하는 철저한 이타주의를 실천한다.『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 모리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미치, 내가 왜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여야하지? 받는 것은 내가 죽어가는 느낌을 준다네. 하지만 베푸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지’라고. 라코타인디언들의 말 중에 ‘이치추피’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은 자기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진심으로 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지금껏 발등의 불을 끄는데 급급한 삶을 살아왔다. 이제 퇴직을 반년 가량 남겨두고 있다. 분주하기만 했던 일상을 내려놓고 쉬게 된다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그때는 내 안에 있는 그늘을 조심스럽게 펼쳐보리라. 비록 솔개의 그것처럼 작고 볼품없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땡볕 한 점 막아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싶다.
초록불이 켜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나는 자리를 떠나며 무슨 미련이라도 있는 듯 뒤를 돌아본다. 오지랖 넓은 그늘막은 교차로를 다 건널 때까지 염려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서둘러 다음 사람을 위해 그늘을 점검한다. 어디선가 솔개의 힘찬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경주문학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