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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시 인근 코스모호텔에서 1박을 한 후 라 스페지아로 이동하였다.
밀라노에서 라 스페지아까지는 버스로 3시간 거리여서 근방 도착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전일 12시간 동안의 비행 탓인지 비몽사몽간으로 몽롱하여 주변 경치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올 봄 스페인 일주 여행을 하는 동안에 유럽 가톨릭문화를 익혔기 때문에 이탈리아 문화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고 주변의 건물과 산세를 살펴보았는데 과거 문화를 중시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숨은 노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었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으나 사실 일반 국도로 이동했다면 훨씬 생생한 이탈리아 문화를 익힐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야박한 자본주의 실상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무엇이든지 화폐와 연결 시키려는 그들의 자본주의적 발상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불편했다.
특히 생리를 해결해야 하는 순간 만큼은 절박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그래서 무료 화장실이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들리 곤 하였다.
라 스페지아 도심에서
그러나 우리가 질주하고 있는 목적지가 세계적인 관광지고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곳인 만큼 약간 몽롱하고 피곤하기는 하였으나 유럽 대륙의 서쪽 땅끝인 스페인 까보다로까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가슴이 흥분되고 들뜨기까지 하였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지치고 피곤 하였으나 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한 곳이라도 더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순간 느끼는 감동과 환희를 포착하기 위하여 한시도 창 밖의 경치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약간 피곤하여 초점없는 눈망울은 무릎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도 아름답고 이색적인 경관이 나타나면 나도 몰래 정신을 가다듬고 사진기를 창밖으로 들이내밀곤 하였다.
라 스페지아 시내를 걸으며
어느덧 버스는 A12번 도로에서 A15번 도로로 방향을 바꿔 라 스페지아로 이동하고 있었다.
정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바위 투성이인 높은 산이 지중해 바다를 가로 막고 있었다.
그 산과 평행선으로 계속 질주하다보니 풍광이 아름답게 변해가면서 넓은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바다는 은빛 색깔을 띠면서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아마도 지중해 일 것 같았다.
해안가를 따라 줄곧 이동하니 육지쪽으로 움푹 파고들어 와 있는 만이 나왔다.
거기는 부호들의 호화스러운 요트와 유람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요트를 즐기지 않는 것은 위도 상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여름 한철만 요트문화에 접할 수 있으며 고가의 유람선과 요트를 즐기는 취향이 서양인 들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라 스페지아 중앙역
도시는 무척 청결하고 아름다워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라 스페지아였다.
이곳 도시는 계획된 도시로 원형을 절반으로 잘라 놓은 것처럼 보였다.
반 원형의 중심부는 시청사와 경찰서, 우체국, 역 등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 있었고 시청사를 중심으로 도로가 시원하게 사방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곳도 이탈리아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옛 모습의 고택 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역사적 현장의 한 단면처럼 보였다.
분수대 앞에서 사방을 돌아보며
친퀘테레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있는 중앙 역에서 승차하여야 하였다.
가이드가 식당을 알아보고 있는 동안 중앙역 근처 분수대 옆에서 잠시 자유시간을 갖게 되었다.
라 스페지아에서 제노바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길에 친퀘테레 마을이 있었는데 기차로는 몇 분의 거리에 있었으며 리오마죠레와 몬테로소 사이의 철로는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다.
라 스페지아에서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열차를 타고 친퀘테레로 이동하였다.
열차는 우리나라 정동진에서 동해안을 경유하는 관광열차와 비슷하였다.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 주 중북부에 있는 아잔타 석굴사원을 관람하기 위하여 뉴델리 역에서 인도 중부 부사왈까지 종단하는 열차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뉴델리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상인이 나타나 길다란 쇠사슬 줄을 보이며 사라고 하였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엉거주춤하고 있다가 거절하였다.
잠시 후 열차가 승강장에 도착해서 급히 승차하여 지정석에 앉아 있었다.
주위를 돌아다보니 다양한사람들이 승차하고 있어서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는데 바로 앞 좌석에 앉아있는 인도 승객이 좀 전에 상인이 사라고 하였던 쇠사슬 줄을 가지고 자신의 큰가방을 칭칭 감아 묶은 다음 의자 밑 기둥에 걸어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다.
미니롤라 마을
이것을 목격한 나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소매치기나 절도와 같은 좀도둑 질이 극심 하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법당국이나 경찰의 통제가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하여 승객 자신이 소매치기나 절도와 같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새 이동하여 새벽이면 부사왈에 도착한다고 하였는데 걱정이 태산같았다.
밤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사방은 고요하고 적막하여 고민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간이역인 것 같기도 한 작은 역은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현재 진행하는 방향의 위치와 도착지를 파악할 수 없어서 뇌가 잠시 먹통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설상가상으로 쇠사슬로 자신의 가방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니 혹시 카메라와 여권을 분실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부사왈역에 도착할 때까지 밤새 한숨도 잠들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라 스페지아에서 첸퀘테레로 가는 열차 안은 중국인 여행객들로 가득차 있어서 약간 소란 하기는 하였으나 평화롭고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를 바라보며 이동할 수 있었다.
지중해를 감상하며 친퀘테레로 이동해가는 기차길은 추억과 낭만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풍경 이어서 마치 우리나라 정동진에서 동해안 망상 역까지 이동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낭만적아다 라고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마나롤라 역에 도착하였다.
리오마죠레
마나롤라 마을은 역사 유적지가 있었던 곳은 아니었으나 전형적인 해안가 어촌 마을 이어서 중세의 고딕 건축양식이나 성당과 같은 고풍스러운 문화를 감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바다가 푸르고 깨끗하여 순수한 느낌을 주었던 것 만큼 어부들이 자연에 동화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소박한 그들의 마음씨 또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부가 바다로 출항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어머니가슴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바다를 가슴으로 안으며 바다 가운데로 사라져가는 광경은 낭만적 이어서 우리나라 어부들이 생활에 쫓겨 마지못해 바다로 나가는 것과는 대조적 이었다.
그래서인지 멀리 배를 타고 연안으로 나가서도 쉽게 자신의 집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색 하여 놓았는데 바다와 산과 집들이 어우러지는 광경이 마치 한폭의 그림 같았으며 풍광이 너무 아기자기하여 천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나롤라 마을에서 리오마죠레 마을로 이동할 수 있는 연인의 길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공사중이어서 열차를 타고 다시 후진하여 리오마죠레 마을로 이동해야 하였다.
리오마죠레 마을은 V자(字)형 골짜기에 마을이 조성되어 있어서 지중해의 세찬 해풍이 마을을 덮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을 앞에 철제 궤도가 설치되어 방풍 역할을 해서 마을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시간이 촉박 하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빠른 걸음으로 마을의 중앙에 난 도로를 통해서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경사가 너무 급하여 일행들은 힘들어하였다.
리오마죠레
대부분은 포기하고 돌아섰으나 나는 평소에 등산을 꾸준히 했던 탓으로 여유있게 마을을 돌아보고 내려올 수 있었다
이곳 리오마죠레 마을도 마나롤라 마을처럼 골짜기 양쪽 집들이 온갖 색깔로 도색 되어 있어서 그림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 좁은 공간에 광장과 성당도 있었다.
골짜기에 있는 집들을 구경하고 돌아서서 다시 바닷가로 이동하였다.
바닷가 마을도 절벽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위험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보금자리인 자신들의 집들이 불편하다 생각하지 않고 좁은 공간에 카페테라스를 설치하여 와인을 마시거나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요트를 즐기는 등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친퀘테레는 다섯개의 마을이 모두 해안가를 따라 가파른 절벽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바위에 조가비가 붙어있는 것처럼 여러가지 색깔의 집들이 바위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곳은 200년 동안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Via dell'Amore“라는 연인의 길은 1928년에 바위를 깨어 리오마죠레와 마나롤라를 이어 놓았다.
Amore는 이탈리아어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래서 이곳 마을의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주 이용하곤 하였다
이것이 소문이 나 전 세계 각지의 남여 연인들이 낭만적인 마을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기 위하여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피사 세인트 메리 대성당
연인의 길로 유명한 리오마죠례 마을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파도가 높았다
역쪽을 바라보니 절벽을 깎아 만든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보았던 절리가 이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기차역도 마을도 모두 절벽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닷가 절벽에 위치한 집들은 앞 마당이 협소하고 좁은 공간임에도 테라스도 있고 테이블과 의자도 놓여있었다.
의자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삶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추억을 남기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 온 연인들도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피사 사탑
절벽에 들어선 마을 인 만큼 마을과 마을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절벽에 철심을 박아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밑은 수십m 낭떠러지이었다.
그길은 지중해 해풍이 맞닿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하여 걷는 이로 하여금 스릴을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며 긴장하게하고 흥분되게 하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바라보는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상쾌하게 하였으나 끝없는 지중해의 파도가 햇볕에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은빛 바다 가운데서도 움직임이 있어 사람들의 삶이 그곳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바다를 동경한 페니키아가 일찍이 바다로 진출하여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일구어 가는 속에서도 페니키아의 식민지 카르타고가 태양처럼 솟아올랐다.
카르타고의 정치∙경제적인 눈부신 발전에 충격을 받은 작은 도시국가 로마가 시민병들로 구성된 중장보병으로 영토를 넓혀가더니 끝내는 카르타고의 식민지 시칠리아 섬을 점령해버렸다.
이것은 지중해의 풍부한 자원과 해상 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이 후 지중해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까지 원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카르타고와 로마간의 전쟁은 100여년 간 지속 되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인 포에니 전쟁이었다.
전쟁은 로마가 시칠리아 섬을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 시칠리아 섬과 코르시카와 사데냐 섬이 지중해 바다 가운데서 손에 잡힐 듯 하였다.
포구에 정박되어 있는 예쁜 색깔의 고깃배가 파도에 출렁이는 모습은 이곳이 시골의 어촌임을 상기시켜주고 있어서 소박한 면도 있었으나 너무 현대화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중해는 과거 페니키아의 식미지 카르타고의 독무대였으나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의 앞 마당이 되고 말았다.
라 스페지아 해변에서 지중해를 바라보았으나 과거 카르타고와 지중해를 재패 하였던 로마시대 화려한 역사의 뒤안길은 찾아볼 수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말이 없었을 뿐 사람들의 삶은 이곳 지중해도 과거처럼 지속되고 있었다.
바다는 푸르러 어부들과 어우러지는 경치가 환상 적이었다.
어부 라는 직종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곳이 언제까지 현재처럼 자연환경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아름다움을 지속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곳도 현대화 라는 급 물살에서 비껴 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부 생활을 지속 하면서도 항상 가족을 먼저 머리에 떠올리고 잊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집을 알록달록하게 도색 하였다는 말을 듣고 너무 흥분하여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들의 가정적인 생활 관습이 동양인 과는 사뭇 달라서 문화적인 차이일 것이라 생각해 왔으나 그런 생각 자체가 동양의 유교사상에 젖은 낙후된 사고같았다.
이러한 서양인의 가족 중시 사상은 이민족의 침략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것 같다.
서양의 역사는 전쟁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전쟁이 일상 생활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가족이란 최소 단위가 결속 되었던 것이다.
피사 사탑으로 이동하면서
이태리 북부 리구리아주의 알록달록한 색채를 자랑하는 친퀘테레에서 친퀘란 다섯을 의미하며 테레는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첸퀘테레는 이탈리아어로 다섯 개의 땅 즉 마을이라는 뜻으로 리오마죠래, 마나롤라, 코르닐리아, 밸브나마, 몬테로소 등 다섯 개의 마을을 말한다.
대부분의 친퀘테레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연안에서 작업하는 동안 자신들의 가족이 그리워 잊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도 집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알록달록하게 집을 도색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다섯개 마을과 주위 해변 언덕은 모두 국립공원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특히 리오마죠래 마을에 바이오스 강이 흐르며 피날래 광장과 바리스타 성당이 있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산쪽으로 올라갔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간에서 다시 내려오고 있었는데 성당이 눈에 띄었다.
피시 세례당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악티온 해전에서 격파하여 제국으로 변모해 갔던 시절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상기되어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들 문화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갔다.
이들이 바다에서 어패류를 채취하는 방법이 저인망으로 거둬들이는 동양적 어업방식 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이곳 주민들 중에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하여 조그마한 배를 대여해주는 사람도 보였고 유람선에 사람들을 실고 해안선 절경을 유람시켜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어부라 호칭 하기는 왠지 어색할 것 같았다.
거의 모든 주민이 관광산업이나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어부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의 대부분이 삶의 질이 향상되어서 풍요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 순수한 어촌의 풍경 만을 상상 하였던 것과는 괴리가 있어서 일부 생각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빼어난 자연 경관 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로 마을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온 마을이 관광객들로 가득차 있었다.
자연 환경이 원래의 상태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당국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인간들의 족적이 자연을 오염시키고 훼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동을 받았다.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 채 친퀘테레 마을을 뒤로 하고 피사로 이동하였다.
중고등학교시절부터 갈릴레이를 익히 들어왔다.
천동설을 뒤업고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사실과 피사 사탑에서 낙하 실험을 했다는 갈릴레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갈릴레이가 피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갈릴레이가 태어났던 피사를 여행해보고 싶었다.
사실 이번 여행은 피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피사에 대하여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지도하고 역사를 연구했던 교사로서 갈릴레이가 낙하를 실험 했다는 피사가 어디에 있을까 늘 궁금 하였으나 막연하게 이탈리아 어디에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일관해왔다.
갈릴레이의 행적을 탐방하기 위하여 피사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천재 과학자 갈릴레이가 눈에 어른거렸다.
피사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사현의 주도다.
아르노강의 퇴적작용으로 현재의 해안선은 피사시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옛날 해상국가로서 번성 했던 항만 도시로서의 기능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피사시는 11세기 말에 제노바∙베네치아와 대립할 정도로 강력한 해상공화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3세기에 제노바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여, 갈릴레이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렌체의 시민계급 출신으로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장남에게 성을 겹쳐 쓰게 하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었다.
1579년 피렌체 교외의 수도원 부속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5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 하였는데, 이때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였다.
1584년 피사대학을 중퇴하고 피렌체에 있던 가족과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토스카나 궁정수학자인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 습작으로 쓴 논문이 인정을 받아 1592년 피사대학의 수학강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에 베네치아에 있는 파도바대학으로 전근하였다.
파도바대학에서 유클리드기하학과,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리치에게 배운 응용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파도바대학 시절에 베네치아 출신의 여성 마리나 감바를 만나 이후 1남 2녀를 두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또 이 시기에 파오로 사르피 같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귀족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으며, 1604년 “가속도운동에 관해서”에서 발표한 근대적인 관성법칙의 개념도 이미 구체화되어 가고 있었다.
스스로 망원경을 제작해서 1610년에 목성의 위성, 토성의 띠, 달 표면의 요철,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강력한 근거를 부여하였다.
같은 해에 피렌체 대공(왕자)의 초청을 받아 그의 보호 아래 천문학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연구에 대한 교회관계자의 비난에 대답하기 위해 스스로 로마에 가 변명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이후 그는 다시 로마에 소환되어 유폐 되었다가 지동설의 포기를 언약하고 사면되었다.
그때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고 현재까지 전해 내려 오고 있었다.
드디어 상상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었던 피사 시에 도착하였다.
버스가 주차장에 멈추자 일행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는데 니그로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접근해왔다.
우산을 팔기 위해서였다.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도 니그로 아저씨 한 사람이 우산을 들고 접근해오자 그를 뒤따라 대여섯명이 우산을 펴 들고 우르르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가이드는 그것을 보고 비가 올 것이라 생각 했는지 일행 모두에게 버스 트렁크 속에 들어있는 큰 가방을 꺼내어 우산을 꺼내도록 하였다.
우산을 꺼내들고 주차장 주위를 살펴보니 주차장 주변 소나무들이 마치 이발을 한 학생들이 우리 일행의 방문을 환영이나 하려는 듯 도로가에 일 열로 늘어서 있는 것처럼 단정하게 기립하고 있었고 그 뒤로 세인트 메리 대성당의 돔 일부가 눈에 띄기도 하였다.
주차장에서 피사 사탑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일행은 도보로 이동하였다.
주변 아파트나 주택들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고급주택의 경우 소나무와 가지각색의 화초 들로 둘러싸인 채 화려하게 단장되어 있어서 중세 영주의 저택을 연상하게 하였고 아파트들은 우리나라처럼 단조롭지 않고 모양이 각각 달라서 훨씬 품위가 있어 보였다.
이탈리아의 국교가 가톨릭 이기 때문에 피사 사탑 옆에 성당하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나의 짧은 생각이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넓은 공간이 마치 대운동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위에 피사 세례당과 세인트 메리 대성당이 태양을 가릴 듯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세인트 메리 대성당 오른 쪽에 피사의 사탑이 옆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로 서있었는데 어찌나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였던 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 하였다.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누누이 들어왔던 피사의 사탑이었다.
마치 사랑하던 연인이 만난 것처럼 정겹고 반가웠다.
피사의 사탑은 세인트 메리 대성당 옆에 있는 종탑이었다.
피사의 사탑은 세인트 메리 대성당 동쪽에 있으며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최대 높이가 58.36m이고 무게는 대략 1만 4453t이라 하였다.
피사의 사탑은 1173년 착공되어 1372년까지 3차례에 걸쳐 약 200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1173년에서 1178년 사이에 진행된 1차 공사 이후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기울어 짐이 발견되었다.
그뒤 2차 공사에서 이를 수정하여 다시 건설 하였으나 기울어지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1990년 이탈리아 정부는 경사각을 수정하기 위한 보수공사에 착수하여 10년에 걸쳐 보수작업을 진행한 결과 기울어짐 현상을 5.5˚로 고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만약 기울기 축이 5.5도에서 15.4도가 넘어가면 피사의 사탑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기만을 기원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