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이미지로 현대적 추상 회화으로 세계화한 화가, 김환기
김환기(1913-1974)는 한국 추상회화의 대표적 작가다. 그는 1913년 2월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상현은 거의 천 석 가까운 수확을 올리는 지주였고, 가야금 연주도 수준급이고 엽총 사냥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니 그 집안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김환기는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일본 감정기 그가 서울에 진출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으니 그만큼 있는 집안의 자식이었다. 그의 초등학교 동창은 김 진구 옹은 김환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중학교 다닐 때 방을 같이 썼지. 바이올린을 늘상 컸는데, 키가 육척이라 운동 특히 농구를 잘 했어. 그림은 일본 유학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당시 환기 그림은 뭔가 알 수 없는 그림이었지. 아이들 그림 같은 이 중섭 그림에는 친근감이 있는데 환기는 달랐어. 프랑스 유학 후 그림이 많이 좋아졌고, 그 당시에도 그이 그림은 비싸게 팔렸어. 술을 잘 마셨지. 남의 술을 잘 안 마시려고 했어.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지. 그림, 글, 인물, 음악 다 뛰어나니 어디 좋아하지 않겠어?"
경제적 여유와 재능의 뛰어남 일찍이 일본 유학의 혜택을 입은 김환기에게 있어 고향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보다 더 자유로운 예술과 국제적 도시인 파리와 뉴욕 생활을 그의 꿈의 실존 양식으로 삼았다.
그는 가정이나 국가의 책임이나 의무를 벗어난 그 자체를 순정한 자유로 추구하였다. 그는 파리의 앵포르멜이나 뉴욕의 팝아트 옵아트를 마치 자기 것인 양 수용하는 코즈모폴리턴이다. 그는 세계 미술의 새로운 흐름에 쉽게 몸과 마음을 맡겼다. 모든 억압과 구석은 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장해물이었고 자유와 찬조만이 인간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의 이미지 즉 달, 산, 매화, 항아리, 여인, 학, 사슴 등 한국적 소재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노자, 장자, 자연주의 동양 정신을 선이나 폭을 평면 속으로 끌어들여 상징 공간을 더욱 확대시켰다.
한국을 상징하는 최고의 곡선은 항아리의 곡선임을 김환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신비한 선의 아름다움을 선과 점과 상징으로 농축하고 요약하려는 시도는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독대 -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장독대 거기에는 한국인만의 정겨운 조형미가 있었다. 이것이 김환기 예술 세계를 지배했음에 틀림없다. 「그의 그림 장독대(1936년 작품)참고」 항아리 조형 예술의 백미인 이조 백자에 구가 반한 것은 당연하다. 1944년-1950년 가지 거의 매일 한 점씩 이조 백자를 구비할 정도로 광적이 열정을 보였던 그에게 백자는 미 이전의 미요, 모든 아름다움의 어머니였다. 김환기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조형미를 민족을 나는 도자기에서 배웠다. 지금도 교과서는 말로 우리 도자기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는 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새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문학 예술1954>
도자기 조형은 한국인의 정제된 미의식이 담겨져 있고, 조형 예술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빚어낸 질서와 조화의 극치다. 그는 이런 조형미 넘치는 한국의 이미지에서 구상을 추상으로 변형시키는(deformation) 뛰어난 안목을 발휘했다. 선과 면과 폭의 요약화 단순화 이것이 추상 예술의 핵심이다.
서구 회화에서는 그들의 오랜 전통인 몽드리안적인 기하학적 미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우리에겐 시각적 호소력을 주기란 어렵다. 그러나 김 환기는 한국적 추상으로 세계 회화의 장을 열었다.
김 환기에게 있어 해방 공간은 행운의 시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 유학온 덕으로 국립 서울대학 미술학부 강의,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 문화원 등을 어려운 시절에 잠시 안정된 위치를 얻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작가에 비해 현실 직시적(구상)이기보다는 더 현실 우회적(추상)의 경향을 띠게 된다. 하긴 추상이야말로 현대성을 대변하는 첨단의 기제이다. 20세기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정신이 깔려있다. 그의 경향과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연대별로 살펴보자. 「론도(1938년작)」는 바로 그런 회화성을 세계화로 뻗어 나가게 하는 분기점이다. 곡선과 곡면의 유기적인 생성을 변주시켰다.
「나무와 달(1948작)」 은 정말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 준다 나무와 달은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단순한 구성 속의 새로운 자라를 발견하고 있다. 그 이외에 더 「무제」「꽃」에서는 선과 면의 내재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피난 열차(1951)」는 화물 열차에 다닥다닥 붙어 가는 사람들을 해학적인 터치로 그린 것인데 그의 다른 그림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여기에서는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동양의 특이한 처방을 보여 준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한국적 조형과 판타지에 몰두하게 되는데, 「항아리와 시(1954)」에서는 정말 그이 예술적 기풍과 문학적 향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서 정주 시인의 「기도」라는 시가 새겨져 있는 이 그림은 매화의 화사함과 하얀 백자와 절구통의 유연함 그리고 휘날리는 색 무늬의 환상적 분위기는 그 누구도 연출할 수 없는 김환기만의 독특함이다.
현실 감각이 없는 그에게도 「판잣집(1950)」은 피난 시절 의 어두운 시대의 한 면을 대변하고 있고 십장생화를 연상시키는 「영원한 것들(1957)」속에 학, 새, 구름, 사슴, 달, 나무, 산은 그저 산수화를 그란 것이 아니라 현대적 감각의 설화 양식을 동양적 터치로 그렸다. 달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시
정과 나는 새를 달처럼 그리고 있는 그의 그림에 구름이 겹치면 그야말로 선명한 신선의 세계가 펼쳐진다.
파리 유학 시절 즈음의 그림들 「새(1960)」나 「여름날 밤(1961)」 「윤월(1963)」 둥 그의 회화는 아직도 한국적 곡선과 평면 그리고 조형에 머물러 세계적 회화로 진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뉴욕에 와서는 산, 달, 새, 항아리가 사라지고 그것마저도 선과 면, 작은 점들로 그의 회화 공간이 채워진다. 그의 회화가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간다는 증거다.
「7-XI-70#-193(1970)」이라는 그의 작품은 김광섭의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 작품은 김환기 화백의 추상 회화의 환 획을 긋는 대작이다.
그가 도달한 신비한 조형 세계는 우리에게 놀라움과 반가움을 주면서 김 환기의 충족함이 넘치는 세계-하나의 이데아-를 보여 준다. 이건 그야말로 한 작가의 이상적 꿈이 형상들과 이미지로 꽃 피어나는 순간들의 집합체들이다. 19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