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오늘의 공공미술 -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배세은 기자 / 사진 서지연 기자
2006년 이후 붐을 이루고 있는 공공미술의 바람이 갈수록 거세다. 올해 역시 바깥 미술의 최고 화두는 단연 공공미술의 활성화와 그 결과였다. 이러나저러나 찻잔 속의 태풍은 아님에 분명하다. 근엄하던 미술이 공공의 이름 아래 일으킨 바람은 우리네 삶의 편리를 위해 진행된 도시화를 근간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70~80년대 ‘불도저식으로 밀고 닦던’ 시대에서 벗어나 갈수록 분화되어가는 기능성과 다양성을 배경으로 한다. 내용적으로도 문화와 사회, 경제의 빠른 변화는 사회구성원인 각 개인의 장소와 공공장소에서의 특질들을 계획적으로 나눌 필요성을 수반했고 이는 더 이상 물리적인 기능으로서의 도시화에 만족하지 않게 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때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이 ‘미술이 개인의 삶에 대한 시각적인 요소의 확장 및 도모,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바로 공공미술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다발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작금의 공공미술은 집행자위주로 진행되는 측면이 강하다. 공공미술의 진원지이자 공공성의 주체인 거주민, 혹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공공미술에 대한 담론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이에 본지는 공공미술의 중심이며 동시에 미술과의 소통과 교감 대상인 거주민들이 생각하는 공공미술에 대해 들어 보기로 했다. 투박하고 어눌하지만 진솔하고 명확하며 리얼한 입장들을 말이다.
석수시장에 가면~ 예술도 있고~
the past 예술가들이 안양 석수시장의 빈 가게에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전개했던 레지던시 프로그램 <석수시장프로젝트>.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국내외 작가 10명이 참여, 점차 사라져가는 재래시장의 현 모습을 고찰하고 지역 경제 공동체를 재생시키고자 한 사업이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예술가들이 머물던 흔적과 작품이 마치 덜 치워진 쓰레기 더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now ‘과연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일어났던 곳일까’하는 의문을 품으며 지나가고 있을 때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방앗간 한편에서 예사롭지 않은 그림을 발견했다. 바로 방앗간 주인인 엄희녀 씨의 초상화. 모델의 주인공은 “당연히 작가가 그려줬지. 오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저런 걸 받았냐고 들 꼭 물어봐. 그리고 외국인들한테는 ‘떡’이란 음식이 신기했나봐. 어느 날 내가 만든 떡을 똑같이 그려 와선 같이 진열하면 안 되냐고 묻더라고. 당연히 그러라고 했지. 그러면서 정도 많이 들었어. 떠날 때는 너무 서운했지.”라며 건너편 가게에서 작업했던 ‘닉 스피랏’과 ‘로렌 윈스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겨우 이곳에도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열렸음을 증명하는 포스터 한 장을 발견할 즈음 생선가게 김판오 씨를 만났다. “언어는 달라도 손짓 발짓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들이 어디 갔는지 나한테 물을 정도로 대변인 역할도 톡톡히 했죠. 덕분에 미술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이런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에요. 그들의 미술에 대한 열정이 참 보기 좋았어요.” 석수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조은순 씨는 “프로젝트를 지켜보면서 내가 예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어요. 참여를 통해 자신감도 생기고 삶의 활력을 얻었죠. 물건이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서 일단 사람들이 시장을 많이 찾고 활기가 생기니 좋았죠.”라고 그때를 회고했다. 주민 대부분은 정체된 지역에 활력을 불어 넣었던 프로젝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허나 석수시장에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다. 작가들이 떠나고 다시 비워진 공간. 휑하기만 하다. 예술이 머문 자리, 그곳은 이제 무엇으로 채워야만 할까? 공공미술은 이제 단기적인 프로그램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tip!! 석수시장프로젝트 홈페이지 www.openthedoor.co.kr
일상의 발견!! 명륜동 프로젝트
the past 2006년 2월 공공미술모임 ‘접는 미술관’의 주도 하에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소통하며 명륜3가 동네 곳곳의 일상을 새롭게 조명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명륜동에서 찾다>. 당시 유리가게와 쌀집, 부동산, 사진관, 버스정류장, 골목 계단 등 마을 곳곳에 작품이 설치되면서 예술의 숨결이 담긴 하나의 전시장이 되었다.
now 당시 전시 안내소 역할을 담당했던 선우부동산 사장은 <명륜동에서 찾다> 프로젝트에 대해 묻자 안내지도부터 꺼내든다. “그때는 붐이 일었었지. 근데 지금은 자취만 남았어. 한 번 더 한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무산됐는지 조용하네. 우리 동네가 인사동처럼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외부인의 발길도 잦은 명물이 됐으면 하는 소망도 있었는데…”라는 그의 얼굴엔 일회성에 그친 행사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동네에 거주하는 박주홍 씨 역시 이런 행사가 자주 열렸으면 하는 바람을 슬쩍 내비치기도 했다. 전시 자원봉사를 맡았던 차상원 씨는 서민들이 실질적으로 문화 예술 분야에서 소외 받는 상황에 대해 말하며 “발전이 미비한 동네에 변화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어 즐거웠어요. 명륜동의 발전을 위해 보탬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보람을 갖고 일했죠.” 꼭 특별한 것만이 아닌, 사소한 것도 예술일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는 그. 대부분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이 프로젝트로 인해 지역 부흥의 꿈꾸는 소박한 욕심이 담겨있었다. 일부에선 그림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듯한 눈치였다. 이는 주민들의 소박한 욕심과 예술가들이 펼친 원대한 욕심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예술가들이 거주민들의 삶에 개입하며 참여와 소통을 통해 주민 스스로가 주변의 가치를 새롭게 예술적으로 발견하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면 일부 거주민들은 한편으론 흥미로, 혹은 실질적인 혜택을 바라며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공공미술에게 당면한 과제이겠지만 어쨌든 그 해 겨울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보낸 <명륜동>은 기억에 남아 있을 법하다.
+episode!! 애초 이름 없는 계단에 불과했던 계단에 <하늘 계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용이 승천하는 느낌을 받아 붙이게 된 ‘하늘’이란 이름에 한 주민이 반대한 것. 그렇지 않아도 높아 보이는 계단이 더 높게 느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더구나 고령의 노인들에게 하늘은 반가운 곳이 아니었던 탓인 듯~ 그러나 그곳은 결국 작가의 의도대로 <하늘계단>이란 표지판을 달게 됐다고.^^
실향민의 아쉬움 달랜 평택 ‘대추리 프로젝트’
the past 4년 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주한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그동안 피땀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내놔야 한다는 것. 그때부터 주민들의 항변이 시작됐고 외부에도 관련 소식이 전해지면서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그 중엔 미술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기문화재단 공모 프로젝트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억>은 고향을 등져야 할 운명에 처한 대추리 사람들의 마음을 그린 것이었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 문학 등 여러 예술 장르가 함께 하였고, 예술의 사회적 참여와 치유의 역할에 목적을 둔 공공미술의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문학인들은 사라질 벽에 시를 지어 썼고 음악인들은 노래를 불렀다. 미술인들은 주민들의 얼굴을 벽화와 모판에 그렸으며 사진가들은 작은 프레임에 생생한 현장을 담았다. 현실의 모든 것은 ‘예술’로 치환되어 ‘대추리의 기억’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민과 예술인들의 노력에도 불구, 결국 지난 4월 대추리는 ‘100년간’ 쓸 수 있는 튼튼한 미군기지 건설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now 마지막 대추리 주민이 짐을 싸 떠난 지 6개월의 세월이 흐른 후인 지난 10월 17일. 대추리 주민에게, 또는 이를 지켜보며 함께 한 이들에게 2년 반의 시간을 회고할 수 있는 도큐먼트 전시가 송원아트센터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객쩍은 농담을 던지며 맺히는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해왔던 것들이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있게 되었군요. 그러고 보니 ‘깃발’일 때하고 ‘깃발작품’일 때하고 다르네요. 작품이니 함부로 만지면 안 되겠지요?” 하면서도 못내 씁쓸한 손길로 대추리에서의 사진을, 쓰던 농기구 등을 더듬었다. “우리에게 예술가들은 대추리에 대한 다른 기억을 심어주었지요. 그곳의 항공사진을 구해 그려보고 노래도 부르며 시도 썼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연(鳶)을 만들어 미군부대를 향해 날리기도 했다니까요. 935일간의 촛불집회 때도 우리 옆에서 많은 힘을 주었어요.” 특히 저항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득 담긴 사진과 영상들은 결국 그렁한 눈물을 떨어지게 하였다. “그래… 우리가 이렇게 싸웠어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지만 수적으로 불리했고 정부의 공권력 앞에 역부족이었죠.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만들고 부르고 했는데 지금쯤 그곳엔 남아있는 게 없겠죠?”
time to come 현재 그들은 정부가 임시로 마련한 송화리 ‘for U’ 빌라에 44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내년 늦가을이면 국방부에서 보상으로 내어준 2만여 평의 새로운 대추리 마을을 갖게 된다. 때문에 주민들은 예술가들에게 마을을 설계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를 수용한 작가들은 ‘평화마을조정위원회’를 구성해 자연을 배려한 ‘생태마을’을 만들 것이라 한다. 헌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그들에겐 예술적 행위가 필요했을까? 아니면 좀 더 치밀하게 대응할 수 있는 합리적 조치가 더 필요했을까? 제2의 대추리 공공예술 역시 이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공공미술의 ‘부수기’와 ‘짓기’_아름다운 교문 만들기
the past 2006년 인천문화재단의 공공미술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아름다운 교문 만들기>는 교문의 개념을 바꾸고 새로운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이었다. 예술가와 학교 그리고 이들의 조율을 맡은 컨설턴트가 협력하여 진행한 이 프로젝트는 2006년 12월부터 준비되어 2007년 3월2일 새로운 교문이 완공되었다. 특히, 공공미술이 실제 교육에 있어 미술의 쓰임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now 아름다운 교문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하고, 작가들과 학생들 간의 소통을 위해 다리 역할을 맡았던 구월초등학교 미술 교사 김경미 씨. 그는 “아름다운 교문 만들기 프로젝트는 권위적인 학교를 대표하는 돌기둥 교문을 변화시킨 상징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교문을 꾸미기 정도의 제안이었지만 회의를 거치면서 기존의 것을 부수고, 새로 짓기로 결정이 됐죠. 아이디어는 어린이 대상의 공모를 통해 얻었고 그들이 원하는, 소통 가능한 열린 광장 개념의 교문을 만들게 되었어요. 문화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저소득층 학교에 기회가 주어진 거죠.” 프로젝트의 진행에 참가하고, 변화의 과정을 지켜본 아이들도 교문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6학년에 재학 중인 유광재 군은 “처음엔 왜 멀쩡한 교문을 없애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멋진 교문이 생겨 친구들하고 놀기도 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해요.” ‘부드러운 교문’이라 표현했을 정도. 같은 학년 강지은 양 역시 “교문은 우리에게 쉼터 같은 곳이에요”라고 답했다. 김경미 교사는 앞으로 교문을 공연장으로까지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은 학교 내 야외 교육장이나 학부모 대기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요. 하루 일과를 끝낸 주민들의 담소 장소이기도 하죠. 앞으로 작은 공연들을 준비해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주민까지 아우르는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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